목사가 먼저 당해라.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겔24:15-18)
본문은 성공과 행복의 신학, 긍정의 힘을 믿는 신학, 심리 치료의 신학에 물든 오늘 날의 신자나 교회가 보면 기절초풍할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백성의 죄악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갑자기 그가 가장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겠다고 아침에 선언한 후에 곧바로 저녁에 그의 아내를 죽여 버렸습니다.
나아가 죽은 아내를 위해 절대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재를 뿌리고 머리를 동이는 수건(turban)을 풀고 맨발로 다니고 수염을 가리며 상제를 위해 이웃에서 보낸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장례 절차를 하나도 밟지 말라고 합니다. 아예 사람이 죽은 표시도 내지 말고 평소 때와 똑 같이 행동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자가 죽으면 하나님의 품으로 가니까 크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 쳐도 당장에 육신이 헤어지므로 비통해지며 또 그 슬픔을 표시하는 정상 장례 절차는 거쳐야 합니다. 선지자에게 보상은 따로 하지 않아도 재앙만은 막아 주어야 할 텐데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더 큰 불행을 당하라고 합니다. 또 그 불행에 대해 불평은커녕 아예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표현마저 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만 하라고 합니다.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로선 도저히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잔인하고 불공평한 하나님이 기록되어 있다니 아예 성경마저 믿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하기야 성경을 제대로 본다면 성공 신학이 이렇게 왕성해질 리도 없지만 말입니다.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면 세상에서 목사가 현실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해야 합니다.(최근 그런 경향이 있지만...)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목사가 먼저 큰 불행을 당하라고 한 셈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24절) 말하자면 하나님이 유다에 곧 내릴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오직 100% 희생만 요구했습니다. 죽은 아내의 경우는 단지 선지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도 선지자가 하는 말을 입증하는 샘플로 죽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한 번 나면 누구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그 시기의 차이만 다를 뿐인데 그 시기를 인간이 정하거나 소원대로 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일찍 죽으려 하겠습니까?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죽느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누가 특별히 더 선하고 덜 악한 차이가 없습니다. 믿은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있어도 지은 죄에서 우월이 판명될 만큼 결정적 선인과 치명적 악인이 따로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구실로 수명을 연장해 달라거나 인간끼리의 판단으로 악한 자를 일찍 죽이라고 요구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이 죽이시면 죽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구원과 보상을 요구할 조건과 자격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경우의 죽음도 하나님 쪽에 의로움과 공평함이 결여된 것은 절대 없습니다.
바꿔 말해 선지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인간 이해력으로는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만으로 하나님은 언제든 단지 표징으로 삼기 위해 죽일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선택 되었듯이 믿는 자 모두가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해 표징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드러냅니다. 백성 전부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지만 죄에 빠진 유다에선 선지자가 당연히 그 표징으로 서야 했습니다.
표징이란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겪을 일을 먼저 본을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더 큰 상벌을 자기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그 마음의 간절히 생각하는 자녀를 제하는 날”(25절)이 곧 닥친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녀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불행을 당하기는 선지자나 일반 백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백성들은 에스겔이 왜 통상적 장례 절차를 치르지 않고 종용히 탄식만 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 인간은 할 말을 거두고 종용히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개인적 슬픔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심판을 내린 하나님의 더 근본적인 뜻을 헤아려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서라는 것입니다.
유다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음란하게 이방의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둔 자녀가 칼에 엎드러지게 할찌라.”(21절) 하나님이 당신의 성소를 당신께서 더럽히겠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표징으로서 역할을 먼저 감당한 셈입니다.
성전도 원래 세워진 뜻대로 사용되지 않으니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다 백성들도 이방의 표징으로 서야했는데 그러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방 신과 그 규례를 따랐으니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가장 소중이 여기는 자녀들이 죽는 심판을 말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왜 이런 재앙을 막아주시지 않지 혹은 아무 죄 없는 자녀를 죽게 하다니 불공평하고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이방신을 따른 죄를 철저하게 깨달아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자녀들로 잘 살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의 버려둔 자녀”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공과 행복의 신학을 쫓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오히려 그것이 영원한 실패와 불행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표징으로 서야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떤 표징으로 불렀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표징을 보인 것을 따르는 표징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십자가에 죽은 표징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없었던 대신에 세상의 죄악과 사단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향해 종용히 탄식했습니다. 당시에도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여호와가 택한 백성들마저 성공과 행복의 신학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오직 표징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 않습니까?
오늘날 신자더러 영원한 거룩과 의로 이끄는 십자가 표징으로 세상 앞에 서게 하지 않는 신학은 잘못입니다. 최소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신학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배제한 신학이자 예수를 믿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술로 “주여! 주여!”하면서 성공과 행복을 추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적으로 치유되어 안정된 심리 상태에서 긍정적인 의지에 힘입어 기도한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습니까?
7/9/2007
아멘..! 세상에 표징으로 오늘하루도 살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