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를 불쌍히 여기는 과부 신자.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은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1-44)
최근의 격심한 세계적인 불경기로 인해 교인들은 늘어나는데 비해 헌금은 오히려 준다고 합니다. 취업 기회가 줄고 직장을 잃으며 사업이 망하는 등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주머니는 말랐기에 헌금은 오히려 더 준 것입니다. 사회적 큰 위기나 불경기가 닥치면 매번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칭찬했습니다. 모든 세대의 신자들이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조금 심한 것 아닙니까? 최근에는 입에 풀 칠 하기도 정말 벅찬데 이 과부처럼 모든 소유를 다 헌금해야만 합니까? 자칫 집 팔고 논 팔아 교회에 바치는 광신자만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요?
과부가 헌금한 액수는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하는 가액이 렙돈(고드란트는 두 렙돈에 해당하는 로마 동전)입니다. 오늘날 미국 노동자 하루 품삯을 약 50불 잡으면(6불/8시간) 그 1/64은 1불도 채 안 됩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99센트짜리 작은 햄버거를 겨우 사먹을 돈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최하층 노동자나 과부에겐 한 끼로 하루 때우는 일이 빈번하므로 그날의 생활비 전부인 셈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뜻이 액수보다는 본인의 경제 형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한껏 높이라는 것입니까? 주님이 부자들의 풍족한 헌금과 과부의 보잘 것 없는 헌금을 비교했으므로 그 비교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앞뒤 문맥에서 좀 더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자라고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형식적으로 믿었든지, 혹은 하나님이 되갚아 주실 보상만 바라고 많이 헌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순전한 믿음과 열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서기관들의 외식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서기관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직후에 연보궤 앞에 앉으시고선 부자들과 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과부는 당시에 법적으로 재산권을 임의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이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들에게 재산을 대신 관리해주도록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제도를 악용해 과다한 수수료를 요구하거나 사기로 부당이득을 취했습니다.
헌금한 부자들 중에는 그들도 분명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부정부패로 축재한 풍족한 돈에서 헌금한 것은 아무리 많이, 설령 전부를 바쳐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과부와 부자의 헌금을 비교한 초점이 돈의 액수가 아니라 돈의 성격에 있었습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예수님은 재산관리인들이 가산을 “삼킨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예 재산 전부를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본문의 과부가 그런 피해를 당한 자인지는 불명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당시 사회에선 과부는 온갖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 재산이 있더라도 다 털리고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은 상존했습니다. 본문의 ‘가난한’의 헬라 원어 ‘프토코스’도 액수는 적지만 고정수입이 있어서 최저 생활은 할 수 있는 저소득 계층을 뜻하지 않습니다. 과부, 고아, 걸인 같이 남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는(helpless) 아예 생계조차 꾸릴 수 없고 또 평생을 두고 형편이 나아질 소망이 없는(hopeless) 계층의 구조적 가난입니다.
따라서 이 과부는, 갖고 있던 재산을 사기꾼 관리인에게 오래 전에 다 날렸는지 처음부터 가난했는지는 몰라도, 현재 고정수입이 전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전무(全無) 했습니다. 지금껏 사람들에게 멸시 천대 조롱을 받아 왔으며 당장 내일도 굶게 될지 모르는 판국에 하루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을 전부 헌금한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비교는 헌금 액수 혹은 비율만 따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각 자의 믿음과 열성의 세기를 단순히 비교한 것도 아닙니다. 부자들도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고 또 아주 후하게 헌금했을 것입니다. 헌금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둘 사이에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자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고, 그런 자에게 경제적으로 농락만 당했던 과부의 생각이 도리어 옳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포함해 부자들은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 축재한 것이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또 그분의 일을 직접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킬 때에 아주 기본적인 양심의 가책마저 안 생겼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교만으로 그 양심의 소리를 무시해버렸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지도자로서 행한 행동이기에 자기들은 무조건 선이고 자기들을 거역하는 자는 다 악이라고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겐 어떤 선한 행위를 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고 의인인 자기들이 행했기에 다 선행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런 뻔뻔함을 하나님 앞에까지 들고 나왔습니다. 종교적으로 거룩해 보이는 행위만 하고 있으면 어떤 잘못도 용서 받을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더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미 범한 잘못을 전혀 회개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과부는 수입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현실적 소망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사기를 하도 당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습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종교지도자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마저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세상에선 계속해서 멸시와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소망을 둘 곳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믿어보려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기록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과부는 “두 렙돈”을 바쳤고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은 “가진 것 전부”를 바쳤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그래도 믿을 데라고는 하나님뿐이라는 인간적 생각이었다면 동전 두 개를 꼭 다 바칠 필요는 없었습니다. 둘 중 하나만 바쳐도 가진 것의 반(50%)이나 드린 셈이 되지 않습니까?
과부는 하나님을 정말로 온전히 신뢰한 것입니다. 아무 소망이 없는데도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이 어떤 형태로든 채워지더라는 고백을 헌금이라는 의식을 통해 바친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이,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이 더, 무시하더라도 하나님만은 절대 자기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돌보고 계심을 실제로 매순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종교적 믿음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나아가 그 과부는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뼈저리게 당했던 현실적 손해와 인격적 모독 등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도, 처음에는 몰라도, 지금 와선 구태여 괴로워 할 필요가 없음도 깨달았습니다. 그런 고난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기에 오히려 더 불쌍하고 대신에 자신은 온전한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 가운데 들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두 렙돈에는 감사와 경배 외에 기쁨과 충만함도 함께 수반되었습니다. 과부의 헌금은 그녀의 삶, 아니 존재와 인생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로선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기에 순전한 마음으로 그분께 다시 돌려드렸든 것입니다. 생활비 전부 즉, 그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온전한 권능으로 붙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고 계시고 그 심중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교리를 다시 상기시키자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최상류층에, 가난한 과부는 최하위층에 해당됩니다. 그들 모두 한 성전에 나와서 한 하나님께 경배하고 한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 같지만, 그 내면에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모든 차이를 예수님은 다 헤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아주 경건하고도 일상적인 종교행위 가운데 내재된 어떤 더러움도 예수님의 눈길을 비켜갈 수 없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너무나 초라한 한 이름 없는 과부의 눈물 한 방울, 한 숨 한 마디에 담겨 있는 깊은 뜻도 절대 놓치지 않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는 예수님 밖에서는 인간적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심지어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 종교지도자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너무나도 세밀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 안과 밖의 차이는 그들이 바친 헌금의 액수만큼이나, 주님의 은혜는 역으로 베풀어졌지만, 너무나 컸습니다.
믿음의 가장 근본이 무엇입니까? 자신은 Helpless 하고 Hopeless 하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 권력, 명예, 지성, 육신 등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채워주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엇보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돈을 밝히지 않아도 그분이 매일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시는 실증(實證)을 신자 앞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히려 과부의 가산을 삼켰고, 가난한 과부는 그들의 가르침이 없이도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 참 믿음의 본을 보이며 가르친 셈입니다.
바꿔 말해 작금 아무리 세상이 극심한 불경기로 흘러가고 당장의 끼니를 이을 현실적 대책마저 없어보여도 신자는 절대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신자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시고 계시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신자의 모든 행위와 말과 마음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심중을 꿰뚫어 아십니다.
너무나 힘들기에 새벽기도에 개근하며 빨리 돈을 채워달라고 울부짖으며 간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기도자가 비록 세상에서의 소망과 도움이 다 끊겼어도 자신을 향한 당신의 은총과 권능의 샘이 마를 리 없다는 확신을 가졌는지 여부를 가장 먼저 점검하십니다. 그분이 채워주시는 매일의 끼니만으로도, 심지어 때로 굶는 날이 있어도, 진정으로 감사하는지를 살펴보십니다. 또 자기가 주님 안에 주님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자로서의 참 만족과 행복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지 자로 재고 계십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지금 같은 불경기일수록 그저 현실적 권력과 재물과 명예만 쫓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잘 믿고 교회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 밖에 있음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때로는 헌금을 바치는 우리의 손이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또 아까워서 망설일 때가 있어도 그런 마음조차 예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바로 그런 주님이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함께 하기에 절대로 소망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한편으론 너무나 거룩하신 그분 앞에 서있다는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어떤 높은 파도도 나를 삼킬 수 없다는 승리와 기쁨의 마음과 함께 말입니다.
3/16/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