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4:11,12 너무 좋아 믿기 힘든 횡재

조회 수 366 추천 수 19 2011.04.26 19: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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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 믿기 힘든 횡재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細麻布)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24:11,12)


실제로 일어난 사실은 믿어야 할 근거를 찾을 필요 없이 저절로 믿어집니다. 아니 구태여 믿으려들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유일하게 믿음을 요구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오랜 과거라 믿음이 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에 대한 증거가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네 복음서의 기록(4명 이상의 증언)이 있지 않습니까? 이천 년 전 사건을 두고, 아니 어떤 고대의 역사적 사건도 그렇게 상세하게 전후사정을 기록한 경우는 사실상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더 오래 된 삼사 천년 전 일도 비석에 새겨진 조각 그림 하나만으로도 사실로 인정하는데 비하면 부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너무나 인색하고도 불공평합니다.    

예수님과 삼 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해 듣고는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다녀온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10절) 즉, 법적요구증인 2명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이 와서 돌이 옮겨지고 무덤은 비었고 천사들이 부활을 확인했다고 전했는데도 말입니다. 그 모든 여자들이 입을 맞추어 거짓말을 지어냈거나, 모두가 잠시 환상을 본 것으로 치부한 셈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당신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예언 내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스승이 물위를 걷고 광풍도 말씀 한마디로 잠재우고 온갖 불치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을 바로 곁에서 목도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지 못했는데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없었거나 순수하지 않은 믿음이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에선 어느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스승이 완전히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이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이런 식으로 약점이 노출 될 수 있는  자기들 스스로 의심했다는 기록을 남길 이유는 없습니다.

거짓말은 그 고유의 특성상 어떤 작은 틈에서건 허점이 노정되거나, 거짓을 거짓으로 보충하려다 꼬리가 길어져 결국은 탄로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네 복음서의 부활 기록은 성경의 다른 어떤 기록보다도 세간의 모든 비평과 반발을 잠재울 만큼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도 오히려 가장 완벽한 변증이 가능한 기록입니다.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Who moved the Stone?”(누가 돌을 옮겼는가?)이라는 책의 저자 프랭크 모리슨도 처음에는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그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관련 자료를 추적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정반대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을 부인코자 시도했던 그간의 모든 가설들이 오히려 궤변, 날조, 가공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본문에도 주님 부활의 객관적 타당성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도들은 의심했습니다. 곧바로 믿었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직접 무덤에까지 현장실사를 나갔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를 보나, 군병들이 수직하며 지키고 있는 가운데 장정 여럿이 지렛대를 사용해야 움직여지는 무덤 막은 돌을 어느 누구도 감히 옮길 엄두를 못 내었을 것입니다. 최초 증인 여자들이 옮겼을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시체를 감싸고 있는 세마포는 쉽게 벗길 수 없었습니다. 이미 피와 땀과 죽은 후에 나오는 진물들로 몸에 짝 들어붙어 있었을 것입니다. 완전히 신령한 형체로 부활하지 않고는 세마포를 스스로 벗는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세마포를 입은 채로 돌아다닐 수도 없습니다. 나사로가 중인환시(衆人環視) 리에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요11:44) 무덤에서 나왔던 경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을 조작해서 퍼뜨렸다 쳐도 무덤을 수직하고 있는 사이에는 둘을 굴리기도 힘들지만 세마포를 벗길 여유라곤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베드로는 그런 증거를 보고도 여전히 긴가민가했습니다. 만약 그가 이 단계에서 스승의 부활을 확고히 믿었다면 더 이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던, 없어진 시체든 반드시 명확한 물증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분의 수제자라고 해도 여자들 말만 믿거나, 빈 무덤에 세마포만 남았다고 부활을 전파하고 다닐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타당한 기록입니까?  

물론 부활의 확실성이 성경 기록의 논리적 합리성만으로는 결코 입증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 복음서가 주님이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서 활동했던 기록은 없고 빈 무덤에 대한 기록만으로 끝이 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활이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역사적 진실이지만 그 증거 자료가 부족할 뿐입니다. 증거 부족이 사실을 부인하거나 말소시키지는 못합니다.

영원히 미궁으로 빠질 것 같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기록은 남겨질 것입니다. 현대인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과학문명이 발달할 2천년 후의 독자에게 그 기록이 읽힌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지금도 수십 년 전 혈흔(血痕) 하나를 분석해 억울하게 갇힌 죄수의 무죄를 입증해내는 판인데, 물증 하나 없는 그 기록을 이천년 후에 사실이라고 믿기는커녕 이해조차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화성연쇄살인은 분명 일어난 사실이지 않습니까?  

복음서의 부활 기록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아무리 물증이 없어도, 사실은 물증이 있는 것이 더 이상함, 네 명이(고전15:6 - 부활하신 주님이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적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음) 세밀하게 증거하는 그 기록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 후대인이 온전히 믿든 못 믿든 지금 성경 그대로 기록되어져야만 했습니다. 아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니까 어떤 반발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서의 부활기록은 당대의 사실성 여부를 밝히려는 목적 이상의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로 인해 그 다음에 일어난 또 다른 사실을 후대 독자로 알게(‘믿게’가 아님) 하려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부활 증거가 허탄한 듯 여겨져 믿지 않았던 제자들과 기이히 여기고 집으로 돌아갔던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활을 믿은 정도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을 기록할 사명을 받은 요한사도 한 명만 빼고는 그 부활 사실을 증거하느라 전부 순교했습니다.
  
어떤 사건이 진실이라고 증거하느라 죽는 바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거의 모든 사람이 아주 믿기 힘든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의 누명을 벗거나,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건, 나라의 독립 운동하는 것과도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일들은 자신의 명운과 직접 연관되는 본인의 일입니다.

사도들의 죽음은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실은 부활 승천해서 이 땅을 벗어났지만, 한 젊은 랍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동시대인들에겐 정말 무모할 정도로 쓸 데 없는 짓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제자들 수십 명과 신자들 수천, 수만 명이 순전히 타인을 위해서 참혹하고도 고통스런 죽음을 기쁨과 감사로 택한 것이야말로 부활보다 더 믿기 힘든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는 오늘날 엄연한 역사적 진실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불신자들도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진짜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도무지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 원인을 제공한 부활은 믿지 못합니다. 아니 끝까지 믿지 않으려고 고집부리고 있습니다.  

무위도식하던 무일푼의 거지가 어느 날 갑자기 대형 아파트를 사고 최고급 외제차를 사서 화려하고도 풍요롭게 살았다 칩시다. 그렇다면 복권에 당첨되었거나 누가 그만큼 공짜로 돈을 준 것입니다. 그 외의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순교는 믿으면서 부활 사건을 믿지 않는 것은 거지가 실제로 화려하게 살고 있는 것을 눈에 보고도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지가 풍요롭게 사는데 질투 내지 화가 난 까닭이거나, 그렇게 말하는 이가 정신이상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부활 사건에서 정작 중요한 요소는 따로 있습니다. 초대신자들이 과감하고도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부활이 사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였기에 주님을 위해선 어떤 고난도 감내하고 심지어 죽음의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도 단순한 소망을 넘어서 반드시 실현될, 아니 이미 실현된 사실로 확고히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6)

말하자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물려죽거나, 산 채로 불에 타서 순교할 때에 단지 인간적 의지력과 인내심으로 이겨낸 것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임하여서 신자들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하늘 문이 열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희락 가운데 천국으로 들리워져 올라갔습니다.

우리로선 그 고통의 세기나 또 함께 하는 성령이 위로하는 감격의 정도를 도무지 측정하거나 짐작할 방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모든 신자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순교의 고통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빈 무덤에선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던 베드로도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은 주님께 누가 된다고 스스로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는 전승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이후에 일어나는 순간적이며 급격했던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는 우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보고 만지고 함께 먹고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당혹되고도 믿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제는 너무 좋아서 믿기 힘든 사건이 되었습니다. 마치 거지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 거지가 일등 복권을 자기 손에 쥐고 있듯이, 부활하신 주님도 제자들이 모인 방 한복판에 서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그저 주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구름 위에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다 성령을 받고선 주님의 부활 권세를 누리며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주님의 의를 행하는 능력 있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핍박에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죽기까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거지의 비유를 다시 들자면 일등 복권에 당첨된 사실에 흥분되어서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정신을 차린 셈입니다. 돈으로 바꾸어서 집과 자동차와 사업체를 사서 풍요로운 삶을 활기차게 영위하고 있는 중입니다. 헐벗고 굶주렸던 지난 신세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럽다 못해 시기하기까지 신나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 부활하신 날에 신자가 취해야 할 참된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도 미심쩍다면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았는지부터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주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만 감사해선 너무나 부족합니다. 엄밀히 말해 예상 밖의 큰 횡재를 하는 바람에 너무 좋아서 믿기 힘들어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이미 부활 생명과 권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다 못해 시기할 정도로 주님과 함께 범사에 넉넉히 승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권 당첨 된 거지가 그 기념으로 복권을 돈으로 바꾸지 않고 액자에 넣어 갖고 다니는 바보는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절대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됩니다. 나 자신의 부활을 기념해야만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선 부활된 신령한 존재로 거룩하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부활절만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이미 부활된 존재로 살고 있기에 일 년 365일이 부활절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오늘 하루 부활절을 기념하고 마는 정도라면 베드로처럼 기이히 여기며 집에 돌아간 것 밖에 안 됩니다. .  

여러분은 예수를 믿은 것이 너무 좋아서 믿기 힘든 인생의 최고 큰 횡재를 했다고 확신합니까? 나아가 그 횡재를 기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을 주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횡재로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이 거창하고 부담스럽다면 최소한 주위 사람으로부터라도 그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4/2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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