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57 33:1-6 십자가 목걸이를 걸지 말라.

조회 수 138 추천 수 0 2018.06.07 08:40:24

십자가 목걸이를 걸지 말라.

출애굽기 강해 (5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출33:1-6)

 

동행하지 않는 여호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사건은 당신의 백성을 전부 진멸하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의 격분을 샀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과 이름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여 적극 가담한 자들 3천 명만 심판을 받고 진멸은 면했다.

 

그러나 모세가 보기에는 살아남은 백성들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하나님을 거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동족의 죄를 사해달라고 호소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범죄 하는 자를 생명책에서 제거한다고 답했다.(출32:33)

 

타인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는 대가로 그 사람을 구원해주는 법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모세 같이 위대한 믿음의 종이라도 인간에 불과하므로 다른 인간의 죄를 중보(仲保)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구원할 중보자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모세의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간절한 기도가 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을 허락하면서 당신의 사자가 앞서 가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줄 것이라고 약속을 했다.(1,2절)

 

그런데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 다시 거역할 수 있고 그럼 중도에 그들을 진멸해야 하므로 당신께선 동행하지 않겠다고 한다.(3절)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덜 풀려 짜증을 낸 것인가? 당신의 사자는 앞서 가는데 당신께선 동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앞뒤 논리가 안 맞는 말씀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정도는 당신의 사자로만 충분하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의 관심은 목이 굳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듯이 이스라엘의 목을 부드럽게 만드는데 있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이 당신께 진심으로 순종하고 경배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로선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겠다는 준엄한, 원어는 슬프고 나쁘다는 뜻임, 말씀을 듣고 뒤늦게나마 각성하여 단장을 하지 않았다.(4절) 몸에서 장신구를 떼어냈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실은 지금도 그렇지만 큰 비극적 사건이나 장례를 치를 때에 슬픔을 표시하는 의미로 장신구를 부착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것만큼 큰 불행이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사건을 진심으로 회개한 것은 분명하다.

 

진멸의 원인이 장신구?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미 자발적으로 단장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또 다시 장신구를 떼라고 명령했고 그래야만 다음 일을 진행하겠다고 말한 것이다.(5절) 그 명령대로 이스라엘도 호렙 산부터 즉, 이날 이후로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6절)

 

그럼 장신구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나 목이 곧은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물론 다시는 금송아지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 일차적 의미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몸에 부착만 안했지 갖고 있으면 언제든 또 그럴 수 있지 않는가? 그럼 신자는 세상 사람과 달리 검소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하므로 귀걸이 목걸이는 아예 해선 안 된다는 뜻인가?

 

당시의 상황을 아셔야 한다. 고대의 장신구에는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 신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이방 땅의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중에 도망가는 첫날밤에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반드시 이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베델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처자식들과 종들에게서 혹시 갖고 나왔을 이방 신상과 귀고리를 전부 수거해서 땅에 묻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창35:1-4)

 

또 바울이 에베소에서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자 아데미 여신상을 만들어 판매하는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영업을 방해 한다고 고소해 큰 곤욕을 치뤘다.(행19:23-41) 은장색은 신상뿐 아니라 그 여신을 새긴 장신구들도 판매했다.

 

혹시 당시 신자들이 에베소를 방문한 기념품으로 산다고 해서 장신구로 그치지 않는다. 영적으로 알게 모르게 오염되거나 최소한 우상숭배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바울은 당시에 신상을 새긴 장신구의 판매가 번성했음을 잘 알기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즉, 어떤 형상의 우상이라도 버리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야곱이 그 아까운 귀고리까지 즉, 모든 모양의 악을 땅에 묻자 이어지는 창세기 35:5절은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만들어 야곱을 쫓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상의 신상과 장신구들을 야곱이 땅에 묻자 하나님은 야곱이 가는 곳마다 부딪힐 사면 고을들의 흑암의 세력들도 앞서 가서 땅에 묻은 것이다. 야곱의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백성들이 가져온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고 초등학생이 들어도 황당하고 유치한 변명을 아론이 모세에게 했다.(출 32:24) 간혹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오면 즉,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나중에 대제사장이 된 아론이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했을 리가 만무하니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라고 비난한다.

 

실은 그 정반대다. 오히려 이런 구절이 성경이 얼마나 정미한지를 또 그렇게 정미한 까닭은 실제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임을 증명해준다. 모든 금 고리에 송아지 형상이 이미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을 다 모아 불에 녹여서 더 큰 송아지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기왕에 있던 신상이었지 자기가 새로이 추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궤변이다.

 

결국 하나님이 장신구를 제거하라고 명한 이유는 장신구들 모두가 작은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 사건은 차라리 하루 저녁 술 마시고 춤을 춘 일탈일 수 있다. 그러나 장신구를 몸에 부착하는 것은 매일 어디서나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선 어떻게 제가하지 않고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그 동안에는 묵인하고 있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배역하자 지금 당장 다 떼고 앞으로도 절대 달지 말라고 명한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지 말았어야지?

 

그런데 은금패물 모두가 출애굽 당일에 하나님이 취득하게 해준 것이었고 어쨌든 그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 제거하라고 하면 처음부터 주시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이 사태의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이 제공한 것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이 처음에 계획을 잘못 세웠다가 뒤늦게 수정한 것인가?

성경을 묵상할 때는 항상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들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그대로 따라 즐기는 것이 자신의 신분과 특권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애굽 노예 살이 중에도 애굽 당국에 협조하여 호사를 누린 자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자고 먼저 제안한 이들도 그런 자들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들은 금 고리도 이미 많이 소지했을 것이다. 그들이 이백만 중에 삼천 명이었다.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충분히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출애굽 당일에 취득했다 쳐도 여호와를 따르는 백성이 우상으로 치장할 수는 없다.

 

겨우 36년 지배당한 한국의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상당 기간 득세했다. 그 열 배인 사백 년이나 노예 살이 한 이스라엘은 더욱 그 타성에 젖어서 그런 자들이 여전히 지도자 행세를 했던 것 같다. 또 그런 지도자들이 요구하니까 아론도 무시하지 못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기 이전에 당신의 택한 백성 중에 칼로 무려 삼천 명이나 도륙했다. 가장 먼저 회개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본을 보여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우상을 몸에 부착하고 백성들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하나님은 참고 참다가 그 지은 죄대로 공명정대하게 심판한 것이다.

 

그럼 이 단계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배역할 것을 미리 알았을까?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라 그렇다고 단순하게만 생각해선 한다. 항상 강조하지만 성경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하고 그 답을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비추어봐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면 그가 사탄을 택할 것도 미리 아셨다. 그럼에도 인간을 기계나 짐승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으셨다. 대신에 자유의지로 스스로 분별 결정 순종하는 인격적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의지를 무조건 제 멋대로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선하신 당신만을 따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악한 사탄을 따르기로 택한 것은 인간의 죄이자 책임이었다.

 

하나님의 그 계획도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예수 십자가가 인간 구원의 경륜으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을 진정한 기쁨과 감사를 갖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정확하게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풍성히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스스로는 결코 구원할 수 없으니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토록 선하신 당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애굽의 은금을 취득하게 해주신 것도 언약궤 제작은 물론 가나안 땅을 정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소용되는 자금으로 쓰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에서도 장신구를 떼라고만 했지 야곱처럼 땅에 묻으라고는 명하지 않은 것이다. 은금을 갖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이처럼 아주 선한데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그것을 악용한 것은 이스라엘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 하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시험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 줄 알고도 그냥 방치했다면 직무유기이다. 선악과 금령을 주시면서 예수님 십자가를 예비하셨다. 애굽의 은금을 취득하게 하실 때도 그것을 악용할 죄에서 구원할 조치도 미리 마련해놓으셨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최단 거리이자 편하게 가는 길은 지중해 해안 길로 며칠이면 도착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보고” 두려워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해 홍해 광야길로 우회시켰다.(출13:17) 우선 애굽 국경수비대와 마주쳐야 한다. 그러나 홍해에서 애굽의 정예 전차군단도 모세의 호령 한마디로 수장시킨 하나님에게 국경수비대쯤은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정작 문제는 야곱이 귀향할 때처럼 사면의 고을들이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금은보화를 갖고 나왔다는 소문은 이미 인근에 퍼졌다. 이스라엘은 무장도 하지 않았고 전쟁경험은 전무하며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와 함께 도보로 천천히 행진하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니까 이미 그런 소문이 퍼진 후다. 또 정말 거지 떼와 다름없으니 이방 족속으로선 너무나 쉽게 탈취할 수 있다.

 

거기다 해변 길에는 당시 철기문명을 개발해 철제 첨단 무기를 갖추 블레셋이 버티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설령 그 모두와 상대할 수 있다 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탈진할 것이다. 하나님도 일일이 그들을 기적적 권능을 사용해 다 죽일 수는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당신께 복종하거나 믿음을 갖게 하는 일을 강요하는 법이 절대로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방족속들까지 사랑하신다는 뜻이지 않는가?

 

이스라엘은 이 땅의 형통만 추구하는 이방 족속과는 달리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린 자들답게 모세처럼 자기를 희생하며 서로를 살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꿔나가야 한다. 그런 모습을 본 이방들로 여호와 앞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힘이 아닌 사랑으로 정복하는 분이다. 가나안 정복 때에 모든 아이까지 다 진멸하라는 것도 그분의 본심이 아니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앞서 간 당신의 사자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낸다고 했지 진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했는가? 해변 길로 행군시켜 이방을 죽이는 대신에 이스라엘을 광야로 우회시켰다.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을 건너게 한 후에 정말로 물 한 방울, 먹을 것 하나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문자 그대로 Death Valley로 들어가면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4백년 간 애굽에서 노예 살이만 해서 광야가 어디에 있는지 또 광야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니까 조금만 불편해도 하나님께 곧바로 불평 원망하기 바빴다. 하나님도 일일이 벌하거나 야단치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

 

반면에 다른 족속들은 아무리 보물이 탐이 나도 그곳에 따라가면 다 죽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보물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 생명을 잃기에 추격을 포기했다. 그 중에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광야로 들어가기 직전에 보물을 탈취하려 덤볐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이미 배운 대로 모세와 아론과 훌이 하루 종일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여호와께 기도함으로써 여호와의 권능이 그들을 무참하게 패배시켰다.

 

결국 하나님이 금송아지로 배역할 줄 알고도 은금을 주신 것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 대한 믿음을 테스트하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정답도 사실은 다 보여주었다.

 

우선 먹고 마실 것 하나 없는 광야에선 금은보화가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음을 깨닫게 했다. 오히려 무거운 짐만 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시켰다. 그렇게 원망해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린 것은 너희 생명을 주관하는 것이 과연 돈인지 애굽 같은 인간인지, 아니면 하나님인지 정확히 판단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당신만이 정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실제 체험을 통해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죽음의 땅으로 이끈 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필요한 금은보화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둘 다 승리하기 위한 완벽한 계획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원죄에 묶여 어리석고도 탐욕스런 이방 족속들마저 죽이지 않고 살리려는 하나님만의 놀라운 섭리이자 큰 사랑이었다. 또 그럼으로써 이스라엘더러 제사장 나라의 소명이 얼마나 고귀한지 깨닫고 또 어떻게 그 소명을 실천할 수 있는지도 가르친 것이다.

 

믿음의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은금을 주신 믿음의 시험에서 실패했다. 피 뿌림의 의식을 통해 죽기까지 순종하겠다고 맹세한지 겨우 사십일 만에 너무나 쉽게 넘어졌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한다.

 

당장 큰 벌을 받거나 취득한 금은보화를 다 돌려주어도 다시 노예 살이 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인간이 시키는 대로만 따르며 편안하게 놀고먹는 것이 본성이긴 해도 히브리 민족으로써의 자존심은 있다.

 

그들이 믿음의 시험에 실패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다. 자기들을 인도해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도자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예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우리 뜻대로 들어주는 신을 우리가 만들자고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근사하고 화려하면서 풍요와 다산을 보장하는 힘을 가진 형상으로 만들어서 우리 곁에 항상 모셔놓고 불안할 때마다 보고 위로를 얻자고 했다. 또 신상을 보려면 그곳까지 일부러 가야하니까 아예 신상을 새긴 장신구를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다니려 한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지 않는가? 불신자들이 부적을 몸에 지녀 액땜만 하자고 한다.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치고 인생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가시적인 신의 형상을 지녀서 스스로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이왕이면 부적은 가능한 복잡하고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나 형상이라야 더욱 신령하고 능력이 있어 보인다. 또 그럴수록 고액의 돈을 주어야만 살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이든 그 형상물은 능력이 전혀 생길 수 없다. 인간 자체가 무능력하고 죄로 타락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그런 인간이 만든 신들이 그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 하나님이 금을 주어 이스라엘을 시험한 것이 단순히 그것으로 우상 신상을 만들 것인지 아닌지 여부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보이는 여건과 상황으로 불안해지기에 세상의 가시적인 풍요를 따름으로써 그 불안을 없애려는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시험이었다.

 

그 시험을 이길 방안을 하나님은 이미 주셨다. 말씀드린 대로 출애굽 이후에 지금까지 당신께서 어떤 분인지,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이끄는지 다 보여주고 체험하게 했다. 또 배교하지 직전에는 십계명을 주었다.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을 절대 두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신들은 아예 실존하지도 않으니 섬길 수도 없다.

 

특별히 보이는 것으로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 당신은 안 보이신다. 당신의 역사도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분의 뜻과 계획이라고 절대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의 시험을 이기려면 ...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조금만 불편하면 하나님을 원망했고 급기야 광야에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다. 반면에 하나님이 광야로 이끈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은 물론 은금패물을 보호하려는 당신만의 완벽한 계획이었다.

 

우리의 삶에 때로 괴롭고 억울하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감당하기 버거운 고난이 따른다. 그러나 그럴 때에 오히려 더 하나님의 엄청나고 오묘하며 풍성한 은혜와 사랑이 숨겨져 있다. 들어가면 죽기 마련인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전혀 갈하지도 허기지지도 않았으며 나아가 그것이 그들에게 최상의 길이었다.

 

인간이 자기 눈에 보이는 외적환경으로 판단한 인간의 정답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의 그분의 정답은 생명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여 완전하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이방 족속은 물론 하나님을 따르는 이스라엘마저 신상을 새긴 장신구를 부착한 것 자체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인지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또 참 평안과 기쁨을 어떻게든 찾아보려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목이 곧고 또 어리석은 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밖에선 절대로 선해지지 않고 평강도 얻을 수 없음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십계명의 첫 계명 하나만이라도 철저히 지키면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선하신 하나님 한 분만 붙들어야 한다. 그 한 분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에게 소망이 될 수 없다.

 

신자들도 간혹 금으로 만든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럼으로써 드라큐라 같은 악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선 안 된다. 그 순진한 뜻은 이해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불신자가 부적을 몸에 지니는 의미와 같다. 본문에서 장신구를 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하고 바울이 악은 어떤 명령이라도 버려야 한다는 선언에 해당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인가? 은금이 절대로 너희에게 기쁨 만족은 물론 평안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불안만 늘지 참 평안은 없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인간이 져야할 죄의 형벌을 모두 대신 감당했으니 앞으로는 부적이나 신상을 새긴 장신구는 더 이상 부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할례를 몸에 새겨 평생 지니듯이 또 쉐마를 이마에 표로 달듯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겠다는 의미라면 괜찮다. 나는 너무나 연약하고 죄에 찌든 존재인지라 십자가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또 내가 이제껏 사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은혜에 힘입은 것이며 그 안에 끝까지 남아 있겠다는 헌신의 표식이어야 한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 더 남았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목적이 부적을 지녀야만 겨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한 불안을 떨어버리고 평강을 얻을 수 있는 불신자들에게 예수 십자가를 전파하겠다는 충성의 상징이어야 한다.

 

신자의 십자가 목걸이는 쉽게 말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뻔 했는지 너무나 아찔하다는 체험적 고백이어야 한다. 또 그 반대로 예수를 믿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었고 또 그분만이 처음과 끝이기에 세상의 보이는 것들로 평강을 잃지 않을 것이고 또 그것들을 찾지도 않을 것이라는 헌신이어야 한다.

 

5/2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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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출#54 32:7-10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하나님 master 2018-06-07 34
101 출#53 32:1-8 사팔뜨기가 된 신자들 master 2018-06-07 82
100 출#52 24:1-11 신자가 평생토록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 master 2018-04-21 104
99 출#51 20:17 십계명의 결론은? master 2018-04-21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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