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뒷모습이라도 보는가? 

출애굽기 강해 (60)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18-23)

 

이스라엘에 대한 기초신앙교육

 

모세는 하나님의 실체를 보면 죽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따라서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실체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의 증표를 보여 달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그 뜻을 다 아시고도 당시로선 상식이나 다름없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살 자는 없다(20절)는 점을 새삼 강조했다.

 

그렇다면 모세를 향한 대답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에게 엄숙히 경고하려는 뜻이다. 이스라엘도 그 원리는 모를 리 없었으나 모세만큼 피부로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애굽 할 때에 열 재앙 중에 아홉 번째 까지는 그들이 거주한 고센 땅에 아예 피해가 미치지 않았고 그 소문만 들었다.

 

열 번째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벌을 받을 때도 그들은 문을 닫고 집안에만 있었지 밖에 나가보지 못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후에 결과만 알았다. 아마 애굽의 시신도 못 봤을 것이다. 그날 밤은 떡을 굽지도 못하고 반죽 채로 들고 나올 정도로 경황이 없었고 애굽의 금은보화를 챙기느라 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지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긴 했다. 그러나 각자가 모세처럼 오랜 기간의 영적 고뇌와 갈등을 거쳐 하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대면한 것이 아니었다. 단체로 긴급 상황에서 구출된 경험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의 신앙에 도리어 부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 하나님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요 잘못한 것도 아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영적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먹고 마실 것에 조금만 불편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즉시로 대박 같은 기적으로 채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다 이번 금송아지 사건에선 무려 삼천 명이나 칼로 도륙당하는 심판을 받았다. 또 앞으로 장신구는 일절 부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젠 하나님이 죄를 범하는 즉시 엄청난 형벌을 가하는 무서운 분으로 오해했다. 하나님은 대박의 복이 아니면 엄청난 재앙의 양극단을 오가는 분으로만 이해하는 초보적인 믿음에 머물렀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의 생각도 그와 비슷하다. 모세로부터 3,50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가 베풀어졌고 그 진리를 계시한 성경도 완성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과 종교성은 여전히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 또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는지에 관해 가장 기초적인 신앙교육을 하시고 있는 중이다.

 

당신의 실체를 보면 죽는다고 새삼 강조하신 직접적인 이유도 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배역한 계기가 무엇이었는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디었기 때문이다.(출32:1) 자기들의 인도자가 사라졌다. 거기다 여호와는 전혀 볼 수 없는 신이라 불만이 많았다. 애굽에 사백 년간 있으면서 화려하고 장엄한 우상의 신상들에 오염된 탓이다. 그들의 만신전(萬神殿)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체를 인간이 전혀 볼 수 없고, 보여줄 의사도 없고, 보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는 당신의 얼굴이다. 그러나 당신의 등은 볼 수 있고, 보여줄 것이며,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하나님의 얼굴과 등이 어떻게 다른지 또 그렇게 선포하신 뜻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셋만 살펴보자.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간극(間隙)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주 전체에 비하면 지구는 먼지이고, 지구 전체에 비하면 인간은 먼지다. 지금 백세 시대라 좋아들 하지만 하나님에겐 눈 깜박할 찰나밖에 안 되며 그것도 모세의 고백처럼 수고와 희생 가운데 날아갈 뿐이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그것을 조성하여 통치하시는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완전자이다. 인간의 거주할 시대와 장소를 구분하여 한계를 정해 살게 하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여 주도하신다. 개인적으로 따지면 어느 누구도 자기가 속할 민족 장소 시대를 자신이 결정하여 출생하지 못한다. 부모, 외모, 신체, 기질, 성경, 아이큐 등도 선택하지 못한다. 죽을 때는 인간의 주도권은 더더욱 완전히 제로가 된다.

 

우리가 하루하루 숨을 쉬며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정미하며 장엄하고 신비한 기적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고 그분의 영을 부여 받아 그분과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은 평생을 두고 감사 찬양해도 부족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이 지은 피조물인 인간일 뿐이라는 절대적 진리 위에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일생을 영위하는 것이 믿음의 첫 걸음이자 본질이다. 그래서 구원이란 그 메울 수 없는 간극을 하나님께서 매워주셔서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여주는 일생에 한 번 있는 사건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이 주관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은혜와 긍휼을 받을 자를 당신이 택하여 베푸신다.(21절)

 

모든 사람들이 종교에 구분 없이 믿음이 있든 없든 나이 들어 죽을 때가 되면 내가 죄인이지,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회한의 실토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증거이자, 그분의 영원한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귀소본능이 무의식중에 표출된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것은 도덕적 측면에서 자기의 죽음으로도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한 번의 죽음이 아니라 수십 번 죽어도 메꿀 수 없다. 목사로서 종교적 계명을 강조하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대로 인용한 것뿐이다. 말로 살인하지 말고 마음으로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살인이나 간음은 사형으로 다스리는 죄다. 그럼 우리가 말로 살인, 마음으로 간음을 평생에 겨우 수십 번밖에 하지 않았을까? 결코 그렇지 않지 않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의 합격점수에 들만큼 얼마든지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 자체로 심판 받기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된다. 인간이 자력으로 하늘에 올라가 구원을 쟁취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모세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모습으로 만나주셨듯이 인간의 죄를 죽기까지 저주하되 죄인은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십자가에서만 그분을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 대속의 죽음 외에는 인간에게 어떤 소망도 없다.

 

인간의 임계점에 서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간격으로 벌어진 상태로 인간을 두면 인생은 이 땅에 아무 목적과 의미 없이 내버려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단순히 물질에 불과하다. 하나님도 만물을 창조하여 운행법칙만 부여해놓고 손을 놓은 조물주이거나 빅뱅 같은 천체물리학적 현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분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과 멀리 떨어져서 우주의 중심에서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분으로만 계신다는 뜻이다. 신학적 용어로 초월성(超越性)이다. 그런데 인간 쪽에서 당신께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분은 절대로 인간을 방치해 놓지 않으신다.

 

당신께서 인간을 만나 교제 동행하고자 하는 소망이 인간이 하나님과 그러고 싶어 하는 것과는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뒤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신학적 용어로 그분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다는 내재성(內在性)이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와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주시는가? 인간이 자기에게 부여된 여건과 상황에서 자기 재질 능력 총동원하여 최대한 노력해도 도무지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여건을 조금만 변화시키거나 외부에서 조금만 자극을 더 보태면 폭발해서 없어져 버리는 지점을, 쉽게 말해 물이 100도에서 끓기 직전의 상태를 과학적으로 임계(臨界)상황, 임계점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다.

 

인생을 살다보면 죽음과 방불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때가 간혹 있다. 현실적 고난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 배신, 시기, 분노, 저주가 넘쳐서 정신적으로 파산할 때도 많다. 우리가 사회에서 교육받고 훈련해온, 윤리, 관습, 법률, 종교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휴지조각으로 변한다. 사람들의 위로 권면 충고는 물론 기도마저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 심지어 친구들의 사랑, 아내 남편 같은 배우자의 사랑, 부모의 사랑마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때가 있다.

 

바로 그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단 1mm도 안 떨어진 거리에 서계신다. 주여 도와주세요,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뿐이오니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으면 그 소리가 0.1초도 안 되어 도달할 거리에 그분은 계신다.

 

자의식이 생성되어 성인이 된 후에 교회에 출석하게 된 계기의 십중팔구가 고난 때문이라는 것이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죄송하지만 스님도 물에 빠지면 하나님부터 찾는다. 저도 먹고 사는 문제로 사방이 절벽으로 막혔을 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왔다. 그런데 제가 잡은 것은 지푸라기가 아니라 영원히 썩지도 끊어지지도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동아줄이었다.

 

육신적인 생명의 살고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하나님 그분과 일대일의 만남이 저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그분 앞에 제가 너무나 미약하고 한시적인 피조물임을 철두철미 깨달은 것이다. 이 땅의 형통만 추구했던 저를 영원에까지 이어지는 존재로 바꾸셨고 지금 이처럼 설교를 하는 당신의 동역자가 되는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끄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나 교제를 나눈 사람들 전부가 인생의 임계점에 이른 자들이었다. 인간사회에선 절망의 낭떠러지로 이미 밀려 떨어져서 다시 올라올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도 형통과 출세를 위해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 전통 윤리 종교 권세 심지어 인종 피부색 가문 외모 등으로 따져 격리 추방을 당했다.

 

인간 사회 안에서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인간 끼리에도 벌어졌다. 인간의 것으로는 그 간격을 도무지 메울 수 없음을 절감하고 메시야여 어서 오소서라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다. 바로 그런 자들을 예수님은 먼저 찾아가서 만나주셨다. 인간에겐 다 끝났다 싶은 절망에서부터 하나님의 소망이 시작되는 법이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한다는 것도 그래서 이제 다시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완전히 엎질러진 물병 같은 인생에게 다시 소망을 주신 분이다. 그 비워진 병에 물을 채워주는 일은 그분에게 아무 문제가 안 된다. 하나님이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신자는 주일예배 때마다 온갖 상을 찌푸리고 나오는 자다. 물론 현실이 힘들어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예배 마치고 나갈 때는 웃고 나가야 한다. 최소한 소망은 품고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향하는 곳은?

 

하나님의 앞은 보지 못하지만 뒤는 볼 수 있다는 세 번째 뜻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이미 절감했다. 또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상에서 일대일로 대면했다. 문제는 그렇게 신자가 된 후다.

 

하나님과 벌어진 간극을 인간이 메울 수 없기에 본문처럼 하나님이 보여주는 것만큼만 인간이 볼 수 있다. 또 보여주는 것 이상은 볼 수 없다. 그럼 보여주는 것 안에 하나님의 내 인생에 대한 뜻과 계획을 실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그분의 진리가 다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분이 보여주시는 것만은 반드시 제대로 정확하게 봐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 즉, 실체를 보는 자는 죽기에 모세가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자 뒷면만 보여주었다. 당신께서 보여준 당신의 뒷면이 당신께서 인간에게 보여주길 원하고 인간이 꼭 봐야만 하는 당신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그 뒷면의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당신께서 지나간 흔적이다. 단순히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고난과 문제 안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막상 당신이 역사하는 모습 즉, 얼굴을 보고는 인간은 그분 뜻을 잘 모른다. 그 일이 완전히 끝나봐야만 겨우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즉 뒷면을 봐야 겨우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먹고 마실 것에 긴급 상황이 생기자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아주 잘하는 일이다. 홍해와 광야는 인간의 어떤 능력도 무용지물이 되는 곳이다. 바로 그 임계점에 하나님은 서계셨다. 그들을 야단도 치지 않고 곧바로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었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었다. 이스라엘은 어느 민족도 알지도 못하는 대박 같은 하나님의 권능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지금 먼저 가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전적으로 당신만 신뢰하고 의지하며 뒤를 따라오라는 것이 그 첫째 뜻이다.

 

또 하나님의 얼굴이 먼저 가니까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 당신께서 하실 일이고 너희들 할 일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켜서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만으로 통치되는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에 미혹되어 화려하고 장엄한 우상들을 섬기며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방 족속들에게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서 알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죽지 않는 자가 없는데 어찌 당신의 백성인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겠는가? 그럴 수는 절대 없다. 그들에게는 당신이 등을 지는 대신에 당신의 얼굴은 다른 이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먼저 들어가신다. 그럼 그 얼굴을 보는 자는 바로 가나안 족속들이다. 그래서 먼저 가서 그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볼 때에 아주 장대하여 강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겉모습일 뿐이고 아직 이스라엘이 전쟁경험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앞서 먼저 가시면 그 얼굴을 보는 이는 이스라엘의 대적이고 그들은 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맞설 자는 없다. 또 그래서 이스라엘은 당신의 뒤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첫째 전투 가데스 바네야에서부터 그러지 않고 무참하게 실패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분의 얼굴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향해 서있기에 그와 동일한 방향에 서서 그분의 뒤를 따랐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뒤에서 그분과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리고 뺑소니치기에 바빴다. 자기들이 떠나왔던 애굽 쪽으로 다시 쳐다봤다. 하나님은 그래서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 너희가 바라보는 곳 광야에서 마음껏 살게 해주겠다고 그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사십 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매번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달라고 하나님께 떼쓰기 바빴다. 그러다 문제와 고난에서 구출되면 게을러져서 하나님을 멀리 하다가 다시 고난에 빠지고 그럼 또 구해달라고 떼를 쓰기만 했다. 광야 방황 40년, 사사기 사백 년, 아니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일의 전부였다.

 

기도 응답도 안 된다면....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신앙행태 또한 그렇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그렇게 급할 때만 기도하는 것도 불신자들은 전혀 하지 못하는 신자만의 특권이다. 또 그런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 신자로서의 일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만 반복하면 모세가 말한 대로 너무나 짧은 인생의 결산서로는 너무 빈약하다. 신앙으로 이룬 일이 그것뿐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믿은 지 2-3년 지나면 기도하는 대로 응답도 거의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신자로써 산 인생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의 얼굴은 보지 못해도 당신의 등은 보라는 것이다. 문제와 고난과 인간의 사이에 하나님이 고난과 문제 쪽을 향하여 서있다는 뜻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고난에서 구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당신의 뒤를 보라는 첫째 의미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런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삼두박근이 얼마나 큰지, 어깨 넓이는 얼마나 되는지 등을 세밀히 측정해 봐야 한다. 각각의 문제와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각 사건 하나하나마다 그분의 고유의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바로 나에게만 해당되기에 나에게 반드시 적용해야만 하는 그분의 뜻이 있다.

 

그 뜻으로 인격이나 성품이 신령하고 거룩하게 성장해야 한다. 현실적 실력이라도 늘어야 한다. 다른 고난을 겪는 자를 찾아가 위로하고 함께 기도해주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날이 갈수록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실력이라도 늘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일에도 요동치 않는 평강이라도 찾아서 누려야 한다.

 

말하자면 나에게 아직도 이렇게 추하고 초라한 면이 남아 있었는지 자기도 놀라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만 보완 수정하여서 거룩하게 자라나가야 할 측면들이 있다. 그런 점들을 분별하여 고쳐 나가면서 영적으로 성장되어야 한다.

 

그런 뜻들을 고난 중에도 깨달을 수 있다. 아니면 고난이 끝난 후에라도 깨달아야 한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경과된 후에서야 겨우 혹은 무심결에 깨닫는 경우도 있다. “아하! 하나님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나를 이렇게 저렇게 인도하셨구나!”라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며 감사 찬양이 절로 나오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스스로 기꺼이 그대로 자시 삶에 실현하려 힘쓰며 자연스레 그분께 헌신 충성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자꾸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 깨달음들과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변화들이 어떤 일관된 방향과 목적을 향하고 있음도 알게 된다. 하나님이 한 곳을 향해 나를 이끈다고 여겨진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다. 하나님의 등을 비로소 정확하게 본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더러 “네 필생의 소망이자 내가 너에게 준 소명인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을 이제 함께 시작하자. 내가 앞장 설 테니 너는 내 뒤를 따라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불신자와 신자는 출생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 결정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선 똑같다. 그렇다면 신자와 불신자가 차이가 나야할 곳은 그 중간인 이 땅에서의 삶일 수밖에 없다. 불신자는 자기 앞에 앞장서서 가는 분, 자기가 그 뒤를 보고 따라가야 할 존재가 없다. 그러니 바울이 고백한 대로 평생토록 향방 없는 달음질만 한다. 럭비공처럼 제 멋대로 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보다 욕심이 많아서 그들 삶이 갈급하고 허망한 것이 결코 아니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평생을 두고 우리와 동행하신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등을 본 적이 있는가? 얼마까지 어떻게 그분의 등을 보고 있는가? 혹시 이스라엘처럼 평소에는 다른 곳만 보다가 긴급한 상황이 생겨야만 그분의 등을 보는가? 그분이 얼굴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관해서 아무 관심도 없이 말이다.

 

모두가 모세 같은 소명자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고난을 그저 인내하고 그것에서 빠져나오게만 해달라고 기도를 반복하는 신앙패턴은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한다. 어떤 고난과 문제에도 나에게만 해당되는 그분의 뜻과 계획을 반드시 찾아내고 그에 따라 나를 연단 변화 성장시켜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등, 즉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6/2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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