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4:33-35, 고후3:12-18) 수건을 덮고 성경을 읽는 신자들

출애굽기 강해 (64)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34:33-35)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2-18)

 

빛보다 말씀에 집중하라.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내려오자 백성들이 두려워 가까이 오지 못할 정도로 얼굴에 찬란한 광채가 났습니다. 금식 기도로 자기를 완전히 비운 대신에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백퍼센트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 때문에 광채가 났다고 설명합니다.(29절) 모세의 지도력은 물론 당신의 말씀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백성들더러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수건으로 모세의 얼굴을 가리지 않아야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산한 직후 한번만 그랬고 그 후로는 계속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 이유는 33절의 설명대로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빛에만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목사님의 알록달록 화려한 넥타이가 계속 눈에 거슬려서 설교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만 경청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그 의미를 신약시대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색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도록” 수건을 가렸다고 합니다.(고후3:13) 어렵게 설명했지만 광채가 점점 약해져서 결국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문자적으로 모세 얼굴의 빛 자체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 백성들이 모세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도 별 것 아니라고 여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빛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언제 없어졌는지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모세가 대변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약해질 리는 만무합니다.

 

복음이 오면 율법은 사라진다.

 

바울은 예수 십자가 복음이 옴으로써 모세의 율법이 사라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컨대 십일조도 당연히 드리되 그 보다 더 중요한 의와 신도 반드시 함께 행하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 그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율법에 부여하신 어떤 특별하고도 한시적인 기능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역할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앞뒤 문맥을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앞 6-11절에서 모세 율법은 돌비에 문자로 기록된 의문으로 사람을 죽이고 정죄하는 직분을 맡았다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고 율법이 없으면 범함이 없다고 했습니다.(롬4:15) 율법으로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도리어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금송아지 사건에서 보듯이 십계명의 첫 계명인 여호와 외의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것조차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판결내리는 정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정죄함을 받은 한 죄인이 도무지 그 죄를 스스로 씻을 길이 없음을 절감한다면 예수 십자가에 보이신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고자 겸손히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의롭다 칭해주시고 성령이 역사하여 사탄에 묶여 있던 죄인의 영을 풀어 자유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17절) 율법은 결국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가정교사)의 역할을 맡았는데(갈3:24) 그 역할은 십자가로 끝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율법을 정확히 알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바울의 때까지 여전히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으로 마음을 가리는 바람에 예수를 배척하고 구원 밖에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래서 언제든 주께 돌아오라고 16절에서 간절히 호소한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의 실체 즉, 그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우리가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 참조하여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성경 읽을 때에 비슷한 잘못을 범하지 않는지 점검해 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는?

 

그 수건은 익히 배워서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은 현실의 풍요와 안락을 보장해주고 특별히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는 메시아를 소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망을 채워주지 못해서 배척당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마음을 덮은 수건임에 틀림없으나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려볼 테니 솔직하게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현실의 고난을 해결해주고 로마의 지배에서 구출해주는 메시아를 소망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신명기 18:18에서 하나님은 모세 같은 선지자를 메시아로 보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이 모세입니다. 지금 유대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으니 그와 비슷한 메시아를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일치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로마에게 반항은커녕 대꾸 한마디 안 했습니다. 오죽하면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세 번이나 부인했겠습니까? 누가 봐도 당시로선 로마는 절대 악으로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을 번창하도록 하나님이 방임해두면 이 땅의 공평과 정의는 언제 누가 어떻게 세워야만 합니까?

 

전도를 해보면 흔히 듣는 반발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모순과 고난이 가득하고 특별히 힘이 없는 사람만 손해 보게 방치하는 하나님은 믿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의 반발이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한 절대적 구원의 길이라고 전도합니다. 그럼 신자들이 신앙으로 이런 문제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이왕에 솔직히 답해보라고 했으니 솔직히 한 번 따져보기로 합시다. 불신자들의 그런 항의에 제대로 변증도 못하면서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고난과 질병에서 해방되고 사업이 번창한다고 가르칩니다. 입시철에는 40일 특별 금식기도 새벽성회로 모이면 자녀가 소망하는 일류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독교를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觀)이 틀렸다고 가르치면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서 써먹고 있습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신자들은 뜨겁고도 간절하게 아멘으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그렇게 하면 실제로 그렇게 되는가 여부입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했다고 자녀가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럼 현재 교회의 그런 가르침은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소망대로 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에 틀린 것은 없어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뭔지 정확히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자만 무조건 손해 핍박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또 어차피 세상은 죄악으로 멸망할 것이니 신자들만 함께 모여 열심히 예수 믿어서 천국 입성하면 그만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내용이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지 현실의 형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만이 복음의 역할이자 교회의 소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까? 불공평한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불신자들에게 온전한 해명을 못하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세상의 불의와 모순을 외면하는 것 같은 의심을 지울 수 없다면 모순이지 않습니까?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신자가 책임 질 일이 있지 않는가, 우리 스스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그것이 더 문제이지 않습니까? 이러다 젊은이들이 더더욱 교회를 멀리할 텐데 과연 대책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마음을 덮은 수건이 무엇인지,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유대인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인 기적을 보이자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엄밀히 따져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각 개인에게 돌아간 혜택은 식사 한 끼 해결한 것뿐이었습니다.

 

그 전에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불치병은 물론 나면서 불구자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도 말씀 한 마디로 살렸습니다. 권능으로 치면 이런 기적들이 훨씬 더 엄청나 보입니다. 그러나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새벽부터 병을 고치려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신유의 은사를 행하는 기도원에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로 식사 한 끼 대접받고는 왕으로 삼으려 들었습니다. 주님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베푸신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세계 최강 애굽을 열 번이나 무참하게 패배시켰습니다. 로마 제국을 물리쳐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키려면 그런 기적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베푼 기적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자기 지도력에 반기를 든 누이 미리암을 잠시 문둥병에 걸리게 한 것 한 번 빼고는 전부 다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에 베푼 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 국민의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대적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부터 비로소 예수님을 기도원 원장이나 신령한 랍비가 아니라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 같은 유대인들의 구원자요 왕의 자격을 갖춘 자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에게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피신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그런 기대에 찬 물을 끼얹었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도 로마에 대항할 군사들을 모집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가지 않고 도리어 성전에 가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야단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공공의 적인 로마에겐 전혀 죄를 묻지 않고 경건한 자기들을 향해 죄인이라고 하니까 극렬히 배척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결정적 영적 오류

 

그런데 유대인들이 범한 결정적 영적 오류가 하나 있었습니다. 모세가 베푼 최초의 최대의 기적도 개인적인 것이었지 공동체에 베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애굽에서의 아홉 번까지의 재앙은 유대인들은 체험은커녕 목격도 하지 못했고 소문만 들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의 장자들이 죽는 재앙을 처음 직접 겪었는데 분명 이스라엘 모두가 공동체적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인방과 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것을 보고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애굽만 천하의 악당이자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금송아지 배역사건은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우상숭배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노예로 혹사당하면서도 그 알량한 배알도 없었는지 지배자들의 잔치에 동참해 쾌락과 죄악을 즐겼습니다.

 

주목할 것은 양의 피로 대속하기 위해 그 제물을 죽일 때에 사람들의 숫자에 맞추어서 잡아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이가 그 고기를 먹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날 밤에 만약 문 밖으로 나간 유대인이 있었다면 어김없이 죽었을 것이며, 집안에 남아 있으면서 어린 양을 먹지 않은 자도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찢긴 살과 흘리신 피의 공로에 참여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구원을 얻음에 잘한 것이라곤 단 하나 없었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 즉, 하나님의 전적인 대속의 은혜를 순전히 받아들이는 자만 구원하십니다. 출애굽은 처음부터 개인적 구원이었고 그 첫 번째 기적도 그랬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로마를 직접 정죄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반역은 아예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악을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관원의 귀를 칼로 잘랐을 때 칼을 거두라고 명하면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불러올 수 있으나 그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유대의 완악하고 부패한 종교권력과 로마의 타락하고 사악한 정치권력을 방치하시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혁이 필요하지만 무력적인 방안은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디의 단순 비폭력주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 주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차후에 그 차이를 설명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로마를 물리치려면 현실적으로 로마보다 훨씬 더 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로마를 물리친 후에 그 자리에 서면 곧바로 로마보다 더 한 로마제국이 또 생기는 셈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구태여 출애굽 시킬 것 없이 애굽에서 애굽 대신에 이스라엘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하면 됩니다.

 

구태여 가나안 땅으로 고생시켜가며 인도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는 것입니다. 나일 강을 낀 비옥한 애굽 땅과는 전혀 다릅니다. 말 그대로 젖과 꿀밖에 나지 않아 정상 농업은 못하고 목축과 양봉 밖에 할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 척박한 곳에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바꿔 세상의 공평과 정의를 그들로 하여금 실행케 하는 거룩한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 한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어라.

 

하나님이 공동체적으로 출애굽을 시켰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상에서 으뜸가는 나라로 삼아주겠다는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어린 양의 피로 개인적인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제사장 나라의 언약을 맺은 후에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끔 하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것이 구약종교인 유대교를 국교로 삼아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율법에 순종하는 나라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 해도 이만 명이 식사를 했지만 결국은 한 사람씩 먹은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제자들로 너희가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자발적 참여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 기적이었습니다.

 

모세가 얼굴에 광채를 보지 못하게 수건으로 가린 것은 말씀에 집중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빛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말씀은 각자 각자가 깊이 새겨들어서 하나님과 반드시 개인적으로 교제 동행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 같은 선지자를 메시아로 보내겠다는 신명기18:18에는 큰 기적을 베풀 것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내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했습니다.(요7:16)

 

유대인들의 잘못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않은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경을 읽을 때 얼굴을 가린 수건이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하고 그 앞에 개인적으로 심령이 깨어지고 또 깨어져서 그 말씀에 자기 목숨까지 걸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민이 되어 있기에 남은 것은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공동체적인 번영을 이루고자 추구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선한 일로 하나님도 그렇게 되길 소원합니다. 문제는 그런다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방식으로 당신의 공의를 세우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어차피 개인들의 집합체입니다. 포도원을 흔드는 여우는 어느 공동체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사탄의 종이 된 히틀러 한 명으로 인해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일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각 개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 살고 죽지 않으면 공동체적 선을 이루겠다는 것은 헛된 소망으로 그칩니다.

 

공동체의 공의를 먼저 앞세우면 반드시 전체적으로 질서를 세워야만 합니다. 일반적인 사회공동체에는 도덕 사상 법률 종교가 그 질서를 잡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가 질서를 잡는 기준이 됩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어떤 공동체든 그 기준에 충성하는 여부로 우열이 나눠지고 그럼 시기와 분쟁이 끊어질 수 없습니다.

 

거기다 공동체의 선을 먼저 세우려 들면 전체적인 공평과 정의를 세우려던 원래 계획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필연적으로 우리 교회만, 내 가정만, 기독교만, 우리나라만, 다윗 왕국만을 앞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오히려 축소 제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진 개인부터...

 

반면에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고 산상수훈의 첫 말씀을 시작합니다. 개인의 영혼 구원이 최우선이고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으로 시작하여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그것만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소금과 빛이므로 세상 속에 들어가 부패를 막고 영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하여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에게 영생의 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세상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왜곡 실종되었다고 의심 불평인 자들에게 신자들 각자가 공의를 실현하여 그분의 의를 증명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로 신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명하십니다.(마5:16) 신자 개인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몇 십 배의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죽이는 정죄의 직분인 모세 율법에 대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의의 직분을 맡은 신약 성도가 맡았다고 합니다. 신자가 행할 바를 고린도후서 4:12에서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데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개인 개인이 철저히 깨어지고 또 깨어져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는 너무나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시도 살 수 없음을 철두철미 체험적 확신으로 고백하는 자는 세상의 60억 명 모두가 똑 같이 불쌍해집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불쌍한 죄인임을 깨닫기에 이웃을 결코 외모로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세상에 고난과 모순을 방치함으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는 실종되었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이와 비교도 하지 말고 바로 네 자신과 당신과의 개인적 관계가 어떠해야 할지를 엄숙히 심각하게 예수 십자가에서 묻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당신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지 곰곰이 따져보라고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서 세상의 모순 왜곡에 대해 하나님과 다른 사람 탓을 하지 말고 왜 네 스스로 나서서 고치려하지 않는지 따지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인 말씀을 자기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써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오늘날 신자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자기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써 신자를 보는 불신자들이 그 얼굴에서 예수님을 발견케 해야 합니다. 언제든 주께로 돌아가면 마음을 덮은 수건이 벗겨진다고 합니다.(16절)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완전히 깨어지고 그 사랑으로 공동체를 섬길 때에 사회의 공의도 세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악을 제거할 능력이 모자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언제든 당장 그러실 수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당신의 사랑을 베풀 대상이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으로가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불의 고통이 해결되면 거룩해질 수 있다고 그 때 가서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첫째 계명인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탓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완전히 깨어지고 각 개인이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모세와 바울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절대적 진리 됨에 개인적으로 깨어져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계명과 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분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며,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계시며, 나의 일생에 대한 당신만의 온전한 계획이 있으며, 반드시 나를 통해 이루실 일과 받으실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그분을 정말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사랑과 권능에 실제로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생명력이 나를 통해 실현되어져야 합니다. 당장 나부터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또 그래서 내 남편이나 내 아내가 아니라 바로 내가 내 가정에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이 머리가 되는 그분의 가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부터 가장 먼저 내 직장을, 내 교회를, 내 사회를, 내 민족과 나라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채워서 그분의 공의를 내가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가정, 다른 모임, 다른 직장의 사람들이 신자가 이룬 그 공동체를 볼 때에 시기가 생기도록, 또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자기들도 받고 싶다고 고백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트럼프나 김정은을 제거한다고 당장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울 수 있고 신자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자기부터 예수님 사랑으로 자기 주변을 바꾸려는 열망과 실현이 없다면 바로 그것이 아직도 수건을 덮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7/22/2018 

 

상기 글에 대해 추가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시는 분이 있어서 아래와 같이 답변드렸습니다. 함께 참조하십시오. 

 

(고후3:13-14) 모세와 유대인들이 쓴 수건의 의미?

 

13절 [우리는 -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같이 아니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사도들은 모세처럼 하지 않는다고 즉, 모세 수건 사건과 다르게 혹은 반대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럼 모세가 수건을 써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으나 신약에선 그 이유가 제거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본문 안에서 그 이유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설명합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렸던 대상은 장차 없어지므로 백성들로 그것을 보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 때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수여 받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으나 모세가 부르자 곁으로 왔고 모세는 율법을 전했습니다.(출34:29-32) 그리고 말하기를 마치고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고 그 후로도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전할 때마다 백성들이 그 광채를 보게 되므로 다시 수건을 가리는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33-35절) 

 

그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은 일차적으로는 모세 얼굴의 광채인데 백성들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백성들에겐 모세 얼굴의 광채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식되니까 그분을 직접 만나면 죽는다는 인식 때문에 계속 두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모세가 수건을 가리지 않는 상태인데도 그에게 가까이 와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자기 얼굴의 광채를 가려서 백성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주려는 뜻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는 백성들이 자기가 전한 율법에는 주목하지 않고 자꾸 그 광채에만 주목할 것을 염려해서 수건을 가린 것입니다. 모세로선 백성들이 율법을 정확히 배워서 삶에서 온전히 실천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을 바울이 인용하면서 “장차 없어질 결국”을 보지 못하게 수건을 가렸다고 해석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만 광채가 생겼으니 바울이 말하는 장차 없어질 것은 율법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정결법과 제사법을 상징합니다.(히9:9-10) 

 

그럼 모세는 율법에 주목하게 하려고 수건을 가렸는데도 바울은 모세의 뜻과는 반대로 그것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세의 당시 의도를 틀렸다고 해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구약 시대 전체를 아우르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율법으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에 율법은 결국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모세로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경한 후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를 세워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로 율법에 주목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광채를 가렸습니다. 

 

바울이 모세의 수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한 이유는 지금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율법은 때가 되면, 모세 얼굴의 광채도 사라졌듯이, 그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 복음으로 대체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절대로 약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니까 즉, “장차 없어질 결국”이 아니니까 사도들이 굳이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로 선포되어야 하며 그것을 순전히 믿는 자는 마찬가지로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세처럼 굳이 수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상징적의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14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후손 즉, 신약 시대의 유대인들입니다. 모세의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지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구원을 얻겠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조건 없는 긍휼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율법은 죄의 저주 아래로 이끕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3:6)고 전제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출애굽 때도 신약 시대에도 실제로 수건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고(14절) 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다고 했습니다.(15절) 결국 유대인들의 마음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 이유와 고집들을 수건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건은 주께로 돌아가면 또 주의 영을 받아서 자유롭게 되면 수건을 벗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참고로 14절에서 수건이 모세의 것처럼 표현된 것은 백성들이 모세가 수건으로 가린 이유를 몰랐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어서 15절이 그런 의미라고 보충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아 소지하고 있고, 율법대로 동물 희생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서신을 저작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도 그런 완고한 고집(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으니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선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유대주의자들에게 단호하고도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갈1:6-10)

 

유대인들은(십자가 이전의 제자들도 포함하여서)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서 예수님에게 로마를 물리치고 현실적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기만 바랐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주님을 향한 열렬한 환호가 극렬한 저주로 바뀌어서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또 그런 기대를 아직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여전히 신약은 인정하지 않고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열방들 위에 최고로 높여 줄 자기들만의 메시아가 시온 성전에 나타날 것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린 이유와 그것을 바울이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한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12/20/2022)  

 

상기 설명에 대한 보충

 

상기 수건의 비유는 반드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비추어봐야 하는데 그 주제는 반드시 앞뒤 문맥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 앞에선 율법(돌판에 새긴 구 언약)이 은혜(심비에 새겨진 새 언약)로 대체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3:1-12)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며 구약성경을 읽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3:15-18) 

 

그리고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갖는 그 완악한 마음을 바울은 모세의 수건 사건에 비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가린 것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의 해석이지 모세가 그 당시에 품은 의도가 아님) 모세 당시로서는 장차이지만 바울 때는 그 장차가 이미 이르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이미 없어졌는데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서 구약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없어진 것은 율법으로 대변되는 구 언약입니다. 

 

모세로선 율법이 복음으로 대체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에 가르칠 때만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율법의 가르침은 듣지 않고 얼굴의 광채 즉,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게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백성들이 광채만 주목하는 이유도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의 택한 족속에 율법까지 받았으니 구원은 염려할 것 없고 하나님이 큰 복을 부어주리라는 기대만 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미 없어졌다고 말하는 구 언약은 이스라엘이 모든 족속들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여호와를 알게 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출19:1-6) 또 하나님은 그런 언약 백성으로 즉, 다른 이들 앞에 여호와를 아는 백성으로 그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출20장 이하) 그런데도 구약 백성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다른 민족들은 무시 배척 저주하면서 율법도 형식적으로만 지켰습니다. 모세의 돌비에 새긴 구 언약은 실패했으며 하나님은 그래서 예레미야와 마음에 새기는 새 언약을 맺었습니다.(렘31:31-34) 

 

그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4)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뜻합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을 두고 바울은 수건(모세의)으로 가려졌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세가 수건을 덮었을 때는 모세도 백성들도 앞으로 율법의 정신은 살아있어도 제사법 정결법 같은 죄 사함의 계명들이 종결되고 또 얼마 전에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이 무효화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때는 모세와 그 후계자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저작했으니 구약성경도 저작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완비된 구약성경과 또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에 대해 능통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여서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이끌어가는지 깨달았습니다. 아담의 타락 때에 약속하신 원시복음을 실현해 나가는 구원이 역사의 초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뀐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경륜과 의미를 로마서를 필두로 13개의 서신서를 통해서 자세히 설파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유대인들이 율법이 복음으로 대체된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이 마치 모세가 수건으로 광채를 가려야만 했던 이유와 같더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주목하게끔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렇게 한 원인은 백성들이 자기들은 선민이라서 죄에서 구원받을 필요는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어 주시는 현실적 축복만 기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시대에 그리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세 당시의 백성들의 마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인류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구속사적 차원에선 모세 수건의 의미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된다고 비유(설명)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이 특유의 선민의식으로 헛된 교만에 젖어 있고 현실적 축복만 바라는 완악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애굽에서 탈출시키듯이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기만 바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가리고 있는 (모세의) 수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런 수건에 가려진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2/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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