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은 타락한 본성이다.

조회 수 69 추천 수 0 2018.11.10 14:34:11

(렘37:17-19) 게으름은 타락한 본성이다. 

새벽기도설교 (31)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렘37:17-19)

 

너무 우유부단한 시드기야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아주 우유부단했던 것 같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세워진 왕인데도 친 애굽 정책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주변국들이 결성한 반 바벨론 동맹에도 편승했습니다. 거기다 바벨론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기 직전에 애굽 군대가 출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가 퇴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11절)

 

바벨론으로선 유다의 응징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작전상 후퇴였을 것입니다. 유다 같은 소국을 정벌하러 왔던 군대가 애굽 같은 대국과 상대하려고 잠시 숨고르기를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이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 동안의 친 애굽 정책이 옳았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오판했을 것입니다. 더더욱 예레미야 선지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레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베냐민 지파의 아나돗 제사장 중의 힐기야의 아들로(렘1:1) 그 유업을 받으려 아나돗 땅으로 갔습니다.(37:12) 그곳 주민들이 그가 바벨론으로 항복하러 가는 줄 오해하고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국가를 반역한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이 밤중에 예레미야를 몰래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왕은 예레미야의 평소 사역과 인품을 봐선 바벨론에 항복하러 도망갈 비겁한 소인배가 아닌 줄 잘 알았습니다. 그럼 직권으로 석방해 줄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신하들 눈치 보느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왕이 이런 질문을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친 애굽 정책을 수행하지만 온전한 확신이 없이 계속 불안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우리가 봐도 대단할 정도로 동일한 메시지만 끈질기게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비방 박해를 하든 말든 특별히 목숨의 위협을 받아도 그랬습니다.

 

우유부단한 시드기야로선 예레미야 같은 강직함의 근거가 궁금하다 못해 부러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바로 이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볼 때에 “저 사람은 뭔가 확실히 믿는 바가 있어. 우리와 다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아”라는 인식을 주어야 합니다.

 

왕의 마음 한 구석에는 혹시 예레미야의 말이 정말로 여호와의 계시이면 어떻게 하지라는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드기야야말로 소인배요 왕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이 꼭두각시 같은 왕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꼭 이런 지도자가 나옵니다. 그런 일도 사실은 하나님의 완벽한 전체적 주권적 통치의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몇 나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재판 때에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이 혹시 메시아인가 궁금해 주님과 개인 면담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를 드렸는데도 유대 관습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로마 총독 벨릭스가 아내인 유다 사람 드루실라와 함께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는 도(道)에 대해 바울에게 묻고 들었으나 그 진리가 두려워서 믿지 않았습니다. 또 혹시 돈을 받을까 기대하고 나아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2년간 붙잡아 두었습니다. 결국은 자기들이 누리는 현실적 권력과 많은 소유를 놓치기 싫어서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치사하고 가난한 신자들

 

시드기야왕도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주변의 강국인 애굽과 바벨론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중인데도 자신의 왕이라는 위치를 놓치기 싫었기에 하나님의 참 메시지를 거부합니다. 지금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어리석음과 완악함을 탓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세상에 없습니다.

 

성경은 항상 그것을 읽는 그 세대의 독자에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매일 아침에 성경을 읽고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마다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를 분별해서 듣고는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조금 주저 지체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으로 거꾸로 내 뜻과 세상을 따라는 일이 종종 있으니 큰일입니다.

 

예레미야처럼 직통 계시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변명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매번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에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기에 깨달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레미야도 우리와 성정이 동일합니다. 찾아온 왕에게 죽을까 두려우니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달라고 탄원했지 않습니까?(20절) 그는 영적인 천재 영웅이나 성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줄곧 순종했고 우리는 제대로 그렇게 못하는 대표적인 이유들 몇 가지만 들어봅시다.

 

첫째는 게을러서입니다. 자꾸 미룹니다. 지금 다른 일이 더 급하다는 핑계를 댑니다. 현실 여건도 아직 적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넉넉히 여유가 생기면 혹은 은퇴 한 후에 하나님 일에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에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면 나중에 어떤 일도 못합니다. 막상 하나님이 큰일을 맡기면 제대로 순종해 본 적이 없어서 생소하고 두렵기만 해서 꼼작도 못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렇게 평생을 흘러 보냅니다.

 

둘째로 게을러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현재 편하기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일상적으로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문제와 고난이 닥치면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여유가 생기면 순종하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게으름이란 편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겠다는 뜻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반드시 혹은 최소한 기도는 합니다. 기도 중에 혹시 하나님의 일에 나태해서 그분이 벌을 내린 것은 아닌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라도 더 봉사하고 더 전도라도 합니다. 이처럼 신자가 된 후에도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치사하고 가난한지 모릅니다.

 

셋째로 지나간 축복만 기억하고 회상합니다. 본문의 시드기야처럼 바로의 군대로 느부갓네살 군대가 퇴각한(11절) 사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런 화끈한 현실적 복만 계속 주시리라 기대 내지 오해합니다.

 

넷째로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먼저 축복을 해주시면 나도 그에 맞추어서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여유가 생기면 혹은 은퇴 후에나 순종할 것을 고려해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아무리 불순종에 대한 이런저런 그럴싸한 구실을 갖다 대어도 결국은 자신이 편해지는 길만 걸어가겠다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을 이기려면

 

그런 게으름은 기질이나 성격 탓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 본성인지라 게으름은 실은 아주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자신의 의지력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처럼 평소에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가 다른 선지자들이나 왕과 백성들과 달랐던 유일한 차이입니다.

 

시드기야왕은 자기 직분에도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라면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왕처럼 역대 왕들의 일지라도 살펴봐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이 이 국가적 위기의 정답임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항상 기도에 전념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옳음을 인정하고 그대로 따랐을 것입니다. 그는 왕으로써 최소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매일 꾸준히 말씀 읽고 기도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지식과 습관으로 자기를 치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면 간절한 마음으로 당장 실천하고 싶어집니다. 혹시라도 주저 지체하면 성령이 역사하여 순종할 여건을 마련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대상까지 붙여 주십니다.

 

신자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신자가 정말로 순전한 열정으로 전적으로 헌신하는데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실은 그런 열정도 성령이 심어준 것이기에 당연히 그 결과도 그분이 책임지고 마련해 놓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현실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정은 분명히 있습니다. 건강이 뒷받침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자꾸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평소에 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만 높아지길 진정으로 소원하면 됩니다. 마음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께로 향해 있으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앞서 가서 행하십니다.

 

자꾸만 종교적 거창한 업적 일을 생각하면 주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가장 적은 이웃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단순히 저 불쌍한 이웃을 도와달라고 간구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그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신자가 모르는 사이에라도 그 이웃에게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십자가 영광의 빛을 비춰주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성숙한 신자는 누구이겠습니까? 평생토록 헌신할 소명을 찾아서 자기가 하는 일 즉, 직업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거나 자신의 편안함에 안주하여 게을러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불쌍한 신자는 누구입니까? 이와 정반대입니다. 평생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헌신할 소명을 발견하지 못한 자입니다. 자기 직업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과 세상의 눈치를 봅니다. 현재의 삶에 불편함이 없으면 자기 편안함에 취해서 게을러지는 자입니다.

 

11/10/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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