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초라한 인생, 동물의 영혼, 환생에 관하여?

 

질문 1: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사람을 좀 더 뛰어나게 해주시지 못하셨나요? 현재 저는 삶이 너무 단조롭고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여겨지기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을 전혀 갖지 못합니다.

 

질문 2: 임사체험자들의 수기를 엮은 책을 봤는데 영혼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동물에도 있더라고 합니다.

 

질문 3: 전생의 기억을 갖고 환생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건 성경적으로는 어떤 일인가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상기 질문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연결되는 아주 중요한 주제로 간단히 다루어선 안 됩니다. 답변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으로 성경에서 시작하여 성경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여 인간만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그분은 인간을 로봇이나 동물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주어서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이 땅을 다스리시길 원하시고 바로 그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계시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창조 목적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도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신을 맹목적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분명한 계시가 성경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며 인간만사를 어떻게 주관하시며 그 결말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서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이 직접 계시해 놓은 말씀입니다. 특별히 인간만사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드러난 당신의 권능과 사랑으로만 다스리신다는 내용입니다.

 

바꿔 말해 다른 종교처럼 단순히 인간 선각자가 고안한 도덕적 종교적 계명을 편집해놓은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는 어떻게 생성되었고 어떻게 유지되며 그 종말은 어떠한지, 무엇보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 땅에서 참 인간다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 정확한 정체성이 무엇이며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관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본을 두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생각이 의롭고 경건하고 심오해보여도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인간이 고안해낸 도덕 철학 종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생 만사를 당신만의 뜻을 갖고 주관한다면 삶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와 의문 등을 성경을 통해서 답을 얻어야만 하고 또 얻을 수 있습니다. 상기 세 질문의 답도 당연히 그러합니다.

 

질문 1에 대한 답변 - 너무 초라한 인생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바울 사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순서에 관해 변증한 상기 말씀이 첫째 질문의 답이 될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만이 구원의 절대적 주권을 가졌다고 선언합니다. 만들어진 그릇의 입장에선 토기장이에게 아무 불평도 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직 선하실 뿐 어떤 악함도 그분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구분했다고 해서 그 둘 사이에 신분과 위치의 우열이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비유로서 그릇의 용도와 목적이 각기 다를 뿐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당신만의 특별한 뜻에 따라 단 한명도 서로 같지 않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고 권면합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대일 개인적으로 대면하여 구원 받았고 그 때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때까지의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니 자기에게 맡길 그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지금껏 자기를 예비 훈련 준비시켰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는데 그 은혜에 비추어서 너희들에게도 권하는데. 자기처럼 각자에게 서로 다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지혜롭게 믿음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가 사람마다 각기 다른데 각자에게 맡길 소명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받은 재능과 은사를 잘 활용하여 맡은바 소명에 충성 헌신하라고 권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7-12) 에베소서에서도 동일한 권면을 합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사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섯 달란트 비유(마25:14-30)와 열 므나 비유(눅19:11-27)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각기 다른 재능대로 충성하라고 이미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공장에서 찍혀 나온 제품처럼 모두가 동일한 능력과 조건을 갖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명씩 따로 만든 그분의 걸작(Handmade Masterpiece)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걸작인 신자 한 명을 세상에 그 한 명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신자가 하나님을 아는 실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분의 나에 대한 앎에 참여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당신의 영원하고도 완벽하며 거룩한 계획에 따라 나를 만드시고 일생 동안 함께 하며 나에게 일어나는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실제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믿음입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2-6)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안수했으며 전후를 두르시고 계시며 생각을 멀리서도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나를 속속들이 아시고 이미 안수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바로 그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능히 감당치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며 모든 신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속에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작가가 최고 정성으로 각기 다르게 만든 자신의 작품들을 차별하고 홀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불신세상에서 인간끼리는 객관적인 조건인 외모 가문 학벌 건강 재물 권력 지성 등으로 서로를 차별하나 하나님은 결코 그러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의 만드신 바일 뿐 아니라, 그럴 것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실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인생에 대한 소망을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과 예수 십자가 구원의 사랑 안에서 확립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분은 신자를 오직 세상에 단 한 명만 있는 것처럼 가장 합당한 사랑과 권능을 베푸시므로 신자의 일생 또한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만 주시는 바로 그 은혜를 찾아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각자에게 각기 다른 재능과 은사를 주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

 

아주 쉽게 따져봅시다. 자신을 스스로도 사랑하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것도 오직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외적 조건만으로 다른 이와 비교하고서 자신에 대한 열등감. 부정적 인식. 자괴감 등에 파묻혀 있다면 그 남은 인생을 온전히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에 베푸신 사랑을 알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신자는 그래선 안 됩니다.

 

신자가 열등감 자괴감에 파묻혀 있다면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나아가 그분조차 부인하는 셈이고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메어다는 너무나 큰 어리석음입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런 신자의 인생에게 관여해주지 않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릴 수도 찾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퇴보하거나 정체해 있는 신자를 가장 안타까워하지만 스스로의 믿음으로 일어서길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한 번 뿐이며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짧습니다. 제 2의 기회도 전혀 없습니다. 현재의 외적 조건과 상황이 또 자신의 능력이 다른 이에 비해서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 누구라도 자격지심이 들고 서글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재능과 은사가 반드시 따로 있습니다. 남이 못하는 나만이 행할 수 있는 일도 반드시 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것 같고 초라했던 인생들도 나중에 반드시 그분의 일에 쓰임 받는 자질과 능력으로 그분께서 승화시켜 주십니다. 바울이 가장 극렬한 예수 핍박자였지만 하나님은 가장 열렬한 예수 옹호자로 바꾸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한 완벽한 인생 계획을 마련해 놓고 나를 세상에 유일한 한 명으로 만드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세대, 현재의 모든 세대,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나와 같은 자는 절대로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따라 지금 이 자리 이 모습으로 이렇게 서있도록 된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나만의 재능과 은사를 발견하고 나만이 행할 수 있는 그분의 일을 찾아서 평생을 그분의 인도에 따라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려야만 합니다.

 

질문 2에 대한 답변 – 동물의 영혼

 

임사체험한 자들이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음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저로선 금시초문입니다. 어쨌든 그런 체험 중에 동물을 보았으니까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천국으로 온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런 생각이 옳을까요? 아니 믿을 만할까요? 혹시라도 그가 본 것이 본인이 사랑하고 아꼈으나 먼저 죽은 자신의 애완동물이 아닐까요? 아니면 정말로 천국에 개, 고양이, 소 등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을 보았는지 정확히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임사체험이라고, 특별히 천국 갔다 왔다는 간증을 무조건 그대로 다 믿으면 안 됩니다. 질문의 경우는 본인의 간절한 소망이 무의식중에 환상으로 투영되었을 수 있습니다. 임사체험 자체가 단순히 의학적으로 따져 혼수상태였는지 정말로 임사 체험이었는지 정확히 분별하지 못합니다. 또 임사체험이라 해도 정말로 천국을 갔다 왔는지는 제삼자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고후12:3-6)

 

바울 사도는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체험을 이야기 하면서 몸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영혼이 천국까지 실제로 올라간 것인지는 본인으로선 확인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받은 계시가 너무 크고 기이하지만 사람이 함부로 말할 성격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간증을 들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즉,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 오해하여 이단으로 흐를 수 있다고 염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간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영혼이 천국에까지 가서 본 것과 계시 받은 것은 아무리 잘 설명 묘사해도 인간의 언어로는 정확히 담아낼 수도 없습니다. 바울조차 이럴진대 믿음이 성숙치 못하거나 의심스런 일반인의 임사체험만 듣고 신앙에 반영해선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천국의 모습을 묘사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 묵시적 표현이므로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계시록에 동물들이 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네 생물이 있다고는 했지만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얼굴이 사람 같고, 독수리 같다”(계4:7)고만 했습니다. 사자 송아지 독수리가 아니라 비슷한 형상일 뿐입니다. 나아가 네 생물이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계4:8)했으므로 지상의 동물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권능과 그 속성을 상징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식물을 말씀 한마디로 종류별로 만드시고 번성하라는 축복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특별하게 창조하시고 또 특별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 그들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청지기로 다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분과 교통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나님이 직접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원어로는 단순히 생명이지만 이때에 인간만이,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하는 그분과 교통이 되는 영혼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다는 말씀의 중요한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동물에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쉽게 말해 그분의 존재를 알고 그분께 간구할 수 있는 정신적 내면이 없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하나님과 교통도 할 수 없는 내면이(영혼이라고 부른다 해도) 천국에까지 가서 하나님과 세세토록 함께 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임사체험을 함부로 믿지 말고 분별해서 참조만 해야 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는지 정확히 깨달아 그에 걸맞게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질문 3에 대한 답변 - 환생

 

“전생의 기억을 갖고 환생한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단정지어선 곤란합니다. 어느 누구도 증명할 수도 없고 또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어떤 지역에 갔더니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데도 이전에 왔었고 심지어 그곳에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선조들 중에 누군가 그곳에 와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기억 인자로써 후손에게 유전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선조가 전혀 없었다면 자신의 다른 곳에서의 경험을 비슷한 환경에 오니까 혼동한 착각이거나 사탄이 일부러 환생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미혹시킨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사람이 일단 육신적으로 죽으면 그 다음에는 그 영혼에 대한 심판만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둘 중 하나로만 나뉩니다. 그 중간 지대는 없으며 연옥처럼 일시 대기하는 제 2의 기회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인간으로든 어떤 짐승으로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또는 죽은 후에도 구원을 받는 제 2의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이 땅에선 구태여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만 할 필요성을 절감할까요?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39-43)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한 강도는 주님을 믿고 영접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회개치 않은 다른 강도는 낙원의 반대편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구원과 심판은 낙원과 지옥으로 나뉠 뿐이며 그곳에서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못합니다. 또 그 곳에서 서로 교차해서 건너갈 수도 없습니다.(눅16:19-31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참조)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만은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구원과 심판도 당연히 그분과 영원히 함께 있느냐, 그분과 완전히 떨어져서 그분의 은혜를 전혀 받지 못하느냐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세 답변은 전부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인간적 생각이 아니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 진리입니다. 만약 성경에 대한 이런 확신과 그에 걸맞은 믿음의 삶을 살지 않으면 제가 드리는 답변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3/1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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