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민13:17-24)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붙잡으라.

 

가데스바네야의 불순종 (1)

구약성경강해(21) / 민수기강해(11) - 2019 부활절 설교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남방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 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 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탐지하되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송이를 벤 고로 그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칭하였더라.”(민13:17-24)

 

진수성찬을 차버린 이스라엘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의 시조요 오늘날 모든 믿는 사람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열방을 향한 복의 근원으로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그의 후손 이스라엘로 가나안 땅에 당신만 섬기는 제사장 나라를 세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당신의 백성을 탈출시킨 후에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이제 그 약속의 땅에 진입할 단계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세가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 가데스바네야에서 열두 지파의 두령을 파송해 그 땅을 정탐토록 하는 내용입니다. 그 후에 전개된 결과는 알다시피 가나안 족속은 장대하고 성읍은 견고하여서 이스라엘은 지레 잔뜩 겁을 먹고서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 불순종한 세대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 전부 죽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사건과 관계가 없는 새로 태어난 세대들만,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려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포함하여, 가나안 땅에 발을 디디도록 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가장 크게 거역한 사건입니다. 비유컨대 아주 잘 차려준 잔치 상에 숟가락을 들고 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 숟가락 드는 일이 힘들고 귀찮다고 진수성찬을 차버린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어리석었고 그 믿음이 미약하다 못해 불경했습니다.

 

본문은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교본입니다. 이 사건은 눈에 보이는 환경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배경에 있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영적원리를 가장 잘 드러내어 보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열매를 차지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 사건의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의 실상을 되짚어보기를 원합니다. 정말로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한 적이 없습니까? 당장 저부터도 새벽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왜 이 문제와 고난을 빨리 해결해주지 않는지 불만스런 생각이 수시로 듭니다.

 

우리 모두 여전히 연약하여서 그런 심정은 고달픈 환경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습니다. 또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 내 모든 내면을 하나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아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성경의 표현이 온건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하나님과 얼마나 처절하게 씨름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매번 그러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은 아닙니다. 매일 아침마다 기도했으면 뭔가 나아지는 모습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근본적인 문제

 

그런데 우리 믿음에는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내지 약속을 붙들고 순종해야 하는데 그 붙잡아야할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순종으로 얻게 될 열매가 무엇인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단순히 주일 예배에 성실히 참석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다른 이에게 조금 더 선하게 대하고, 여유가 있으면 이웃을 도와주는 등의 일에만 순종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순종으로 얻을 첫째가는 열매는 기도해서 고난을 해결 받는 것이며 그 외에 종교적 행위를 통해 얻는 심리적 안정 정도일 것입니다. 둘 다 자신의 안락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순종과 그 열매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평생을 걸고 신앙생활을 통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 또 그럼으로써 정말로 꼭 얻기를 열망하는 열매가 무엇인지 명확히 해놓아야 합니다. 신자가 정말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내게 유익하게 얻어내야 할 것은 기도의 응답을 빨리 받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이어야 하지 않는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은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했고 가데스바네야에서 가장 크게 불순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차지하라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이슬람 국가에 선교사로 가라는 명령보다 더 큰 위험이 따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너무나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순종으로 끝났을지라도 그들에겐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은 있었습니다.

 

반면에 주일 성수하라, 기도하라, 착하게 살라, 전도하라는 것들이 우리가 순종해야 할 전부일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넷만으로도 신앙생활을 함에, 그분의 뜻을 실현함에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주일 예배와 기도는 둘은 아주 열심히 행하지만 착하게 살며 전도하는 둘은 하는 둥 마는 둥 건성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이 내 뜻과 내 때와 내 방식대로 기도 응답해주지 않는다는 불평과 원망만 쌓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고도 우리가 가데스의 이스라엘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불평 원망하지 않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셔서 그분이 예비하신 복을 차지하라는 설교에 열정적으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올바른 영적진리이자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실상은 많은 신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심지어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죄송하지만 그렇게 오도하는 목사들의 책임도 큽니다.

 

믿음이란 매순간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주님의 길을 온전히 따라가는 실제적 삶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향해,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으며, 어디까지 와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 교회 밖 현실에서 일상의 문제들과 부딪히며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합니다. 단순히 목사가 시키는 대로 어떤 검증 분별 판단도 없이 맹목적으로 그것도 교회 안에서만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습관적 형식적 종교 활동일 뿐입니다.

 

출애굽의 확실한 증거

 

가데스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모습을 다시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불순종이라면 그 잘못한 원인도 더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불순종의 원인을 정확히 알지 않고는 진정한 순종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모세는 알다시피 바로의 왕자로 인생의 첫 40년을 보냈습니다. 전쟁 전문가로 양성 받았다는 뜻입니다. 고대 왕의 첫째가는 의무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던지 최소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혼란이 끝날 즈음에 이스라엘도 우리에게도 전쟁을 잘 치르는 왕이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떼를 쓰다시피 했고 그래서 세운 왕이 바로 사울인데 아주 전쟁을 잘 치렀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군사교육을 받은 면모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정탐꾼들에게 가나안 거민의 강약과 다소 즉, 군대 조직 체계와 군인 숫자를 조사하라고 명합니다. 또 땅의 호불호와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즉, 전쟁을 치러야 할 지형지세와 방어태세를 살펴보라고 명했습니다.(18,19절)

 

그런데 실제 전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조사를 하나 행하라고 했습니다.(20절) 토지의 비옥한 상태와 나무가 많고 적음을 알아보고 그 땅의 과실도 따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왕에 갔으니 그 땅을 샅샅이 조사해오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모세는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것은 기정사실화 하고 앞으로 그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즐겁게 살아가야 할지를 계획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의 최신예 전략전술에 능통해서 가나안을 얕잡아 본 자신감이 아닙니다. 모세에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 내 백성을 구출해 오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살인자로 요즘으로 치면 기소 중지자가 되어서 해외에 도피 중이었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체포되어 사형될 것이 뻔했습니다. 바로의 궁정에서 사십 년을 지냈기에 애굽의 법규와 제도에 대해서 또 얼마나 강력한 나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팔십 노인이 되어서 기력이 쇠진했고 지난 40년간도 양치는 일만 했습니다. 애굽의 이백만 동족을 구출해내라는 명령은 자기로선 도무지 감당할 수 없고 현실적인 가능성도 제로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모세는 시쳇말로 “저더러 호랑이 아가리에 제 머리를 집어넣으라는 말이지 않습니까?”라는 의심과 불평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뭔가 확실한 보장을 해주지 않으면 이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가시적 증거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키고 손을 품에 넣으면 문둥병이 발하는 이적을 보여주긴 했지만 모세가 마지못해 하나님 명령에 복종한 후였습니다. 애굽에 돌아가더라도 동족들이 자기를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비로소 보여주었습니다.

 

출애굽의 성공가능성에 대해 모세에게 주신 증거는 오직 당신의 약속의 말씀뿐이었습니다. 네가 내 백성을 인도해 낸 후에 이 산에서 나에게 경배드릴 것이라고 했습니다.(출3:12) 출애굽과 관련된 대답이 전혀 아닙니다. 당신께선 출애굽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굽이 최신 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군대라도 당신께서 눈만 한 번 깜박해도 바로 패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당신께 경배한다는 것은 출애굽에 성공하고 한참 후의 일입니다. 출애굽에 대해 감사하는 예배를 드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시쳇말로 바꾸면 “내 말대로 성취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내가 누구냐? 내가 여호와가 아니냐? 네가 감히 누구에게 가능성을 논하느냐. 내가 누구인지 알면 출애굽은 전혀 신경 쓸 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모세도 반신반의했으나....

 

그러나 아무리 모세라도 그 약속의 말씀만 듣고 여호와를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닙니다. 팔십 년간이나 부재 내지 침묵하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드디어 그분은 모세를 만나주러 먼저 직접 찾아왔고 그분과 대면한 모세가 죽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자 초자연적 기적도 보여주었습니다. 가시적 증거를 보고선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소명을 실현하려고 애굽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자기 가족들을 고향 미디안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것도 모세가 애굽으로 출발하자 하나님이 비로소 애굽에서 네 생명을 위협하던 자들이 다 죽었다고 가르쳐준 후에 그랬습니다. 이 막중한 임무에 실패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염려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기에 가족들의 안위를 염려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가능성은 물론 어쩌면 방금 하신 그 말씀마저도 반신반의 했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세는 하나님에게 코가 뀌어서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분을 완전히 믿지 못하면서도 어쨌든 동족 구원이 자신의 필생의 소원이기도 했기에 시쳇말로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복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애굽에 도착해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단 하나도 차질 없이 이뤄지는 것을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자신이 체포되지도 않았습니다. 동족의 불신도 하나님이 가르쳐준 이적을 행함으로 극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전히 따랐더니 엄청난 재앙이 열 번이나 애굽에 임했고 심지어 바다가 갈라지는 일마저 벌어졌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증거대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피의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 동안 80년이나 침묵 내지 부재했기에 떨기나무 불꽃으로 처음 대면했을 때는 하나님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본문의 단계에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분의 말씀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단 하나도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확신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과 씨름했던 영적갈등의 과정과 결과를 거울로 삼아 백성들의 염려와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이 전쟁의 승리 가능성에 대해 불안해하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그분의 약속의 말씀만 꼭 붙잡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땅을 반드시 차지하게 된다는 확정적인 증표로 그 땅의 실과를 먹어봄으로써 그 열매를 차지하기 전에 치러야 할 전쟁에 대해선 아무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백성들도 자기처럼 과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이 보장하는 결과만 믿음으로 붙잡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이 주실 열매를 차지하려면 단순히 또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고달프고 때로 힘에 부치고 많은 희생도 따르겠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열매는 절대 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침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습니다.(20절) 정탐꾼들이 갖고 온 그 땅의 실과를 보십시오. 성경은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23절)라고 기술합니다. 한 송이 달린 가지를 어른 둘이 어깨로 매어야만 할 정도였습니다. 설령 조금 과장된 표현이라고 해도 대단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포도 한 송이의 무게는 4-5 킬로그램 나간다고 합니다. 여러 송이가 달린 가지라 해도 엄청납니다. 세계적으로 포도주 생산을 제일 많이 하는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포도나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만약 이 해에 유달리 극상품 포도가 열렸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모세의 뜻에 맞추어 예비해 준 셈입니다.

 

모세 믿음과 우리 믿음의 차이

 

이제 모세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이미 보장된 하나님의 미래의 구체적인 약속만 한 치의 의심 없이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실제 행동으로 순종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쉬웠습니다. 서두에 비유한 그대로 단순히 숟가락을 들고 진수성찬을 먹는 셈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증거로 출애굽 자체는 아예 입에도 올리지 않는 여호와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시내 산에서 경배할 것이라고 보장했고 그대로 이루어주었습니다. 그 전 출애굽부터 약 오백 년 전에 선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모세마저 처음에는 그 실현 가능성이 제로라고 여겼던 그 엄청난 일을 말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 가나안 전투의 승리도 너무나 확실하니까 아예 염려는커녕 신경 쓸 문제도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 땅에서 즐기며 나눌 실과를 미리 맛보려 했습니다. 혹시라도 전쟁에 지면 그 유명한 팔레스타인 포도의 맛이라도 보고 죽자는 뜻은 추호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모세는 하나님에게 패배는 없다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명백한 영적원리를 믿었을, 더 정확히 말해 자기 내면의 일부로 소유했을 뿐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봅시다. 모세와 같은 믿음을 가졌는지를 말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모세는 믿었고 우리는 믿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나 초보적인 영적 원리라 우리 모두 잘 알고 또 열심히 뜨겁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끔 잊기는 해도 모르거나 믿지 못하면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모세나 이스라엘처럼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최종적 결과도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종교적 습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그 약속하신 실과를 일부 미리 맛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정말로 너무나 큰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구체적인 모습이 전혀 없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럼 또 신자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거의 모든 신자가 기껏 자신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일 예배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며 고난이 닥치면 기도하고 간혹 불신자에게 전도하고 있다는 정도이지 않습니까?

 

비유컨대 이는 학생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차원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예 학생이 아닙니다.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자기만의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이룰 목표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이백만 백성 모두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소지했습니다.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리라는 것이 그분의 약속이자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서 차지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명령이란 약속을 실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약속은 자연히 공수표가 됩니다.

 

우리도 교회생활 성실히 수행하는 일 외에 각자가 스스로 믿음으로 이뤄야 할 구체적이고 최종적인 그분의 약속을 가졌는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이미 약속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잊고 있거나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약속입니다. 천국으로의 영광스런 입성과 마지막 날의 부활 승리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실현될 확정되고도 보장된 결과이자 궁극적으로 차지할 열매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싱겁게 여겨집니까? 그럼 반대로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이 땅의 삶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때로는 풍부하게 또 때로는 궁핍하게 이끌지라도, 바로 그 목적지를 향해가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확신합니까? 그런 일을 거치지 않으면 그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통과 절차이므로 기꺼이 감사하며 따라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그 믿음, 아니 구원부터 의심해봐야 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죽은 후에 천국 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여기면 큰 잘못입니다. 신자 스스로 그런 목적의식이 없으면 사실은 그 열매를 차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열매를 맛보지 못하는 신자라면 천국 입성도 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분의 은혜의 열매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무슨 일에서나 그 과정은 전혀 염려하지 않고 주님이 주실 결과만 붙들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모세가 단숨에 그런 믿음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재 내지 침묵하신 팔십 년이라는 길고도 먼 영적 갈등과 고뇌의 터널을 거쳤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그분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후로는, 비록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억지로라도 순종했더니 그분이 보장하신 그분의 열매를 그분이 맛보도록 해주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순종하지 않고는 그분의 열매는 절대 맛보지 못합니다. 요컨대 삶에서 행동으로 그분 말씀에 순종 실천해야만 믿음이지, 단순히 영적인 원리에 동의하고 마음으로 믿는다고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걸 소명을 받았는가?

 

불행하게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기 소명이 뭔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할 자기에게만 명하신 그분의 구체적인 과업이 없으니까 자기 평생을 걸고 성취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그 필연적 결과로 일생토록 걸어가야 할 길은 물론 그 길의 방향과 걸어가는 자세와 방식 등이 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주 간단합니다.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열매도 천국의 영생입니다. 그곳을 향하여 가되 천국을 이미 소지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런 모습을 주위에 드러내면서 그 방향으로만 걸어가야 합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삶도 아주 간단합니다. 천국이 목적지이므로 이 땅에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전혀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그 모든 것들이 잠시 스쳐지나갈 뿐인 나그네로서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자들의 삶이 전부 그러했습니다. 잘 믿었더니 이 땅에서 출세 형통했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당장 모세만 해도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애굽의 모든 보화는 그에게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출애굽 전후로 겪은 모든 고생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받은 능욕이라고 합니다.

 

당시 모세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대해선 전혀 무지했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황금이나 아무리 높은 지위를 차지해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전자를 전혀 주저하지 않고 아무 미련 없이 버리고 후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따라서 그 후자의 삶은 당연히 나그네처럼 하나님이 가라는 곳에 가야하고 하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 선택이 안락과 평온과는 정반대임을 알고도 감당했습니다.

 

바꿔 말해 애굽의 보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상급이 아니며 아무 관계가 없음도 알았던 것입니다. 대신에 자신이 택한 나그네 같은 삶 위에 천국 보화는 보장된다는 사실도 확신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에서 여호와를 개인적으로 대면한 이후로는 그는 오로지 천국의 부활 영생의 상을 주시는 그분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능욕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믿음의 실상이 모세와 같아야 합니다. 최종 목적지인 천국과 믿음의 궁극적인 보상인 영생만 붙잡아야 합니다. 천국 영생 부활이라고 하니까 조금 애매하게만 여겨집니까? 이 땅에서 아무 보상이 없다니까 괜히 믿음에 힘이 빠집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어서 받는 가장 큰, 엄밀히 말하자면 유일한 축복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외에는 그것을 받아 누릴 길은 전무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꾼 선물인데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마침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활은 신자가 최종적으로 도착할 곳이며 그 결과도 이미 벌써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삶은 그곳으로 가는 통과 절차이자 과정일 뿐입니다. 모세처럼 결과만 붙들고 과정에 대해선 염려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야만 참 된 부활 신앙입니다.

 

바울은 당장에라도 자신의 육신을 벗고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지만(빌1:23),이방인의 사도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고백합니다. 천국을 모르는 미혹된 영혼으로 예수십자가 복음에로 초대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천국의 부활 승리라는 푯대가 자기 앞에 분명히 놓여 있지만 자신에게 맡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세처럼 이 땅의 능욕과 핍박을 감당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만 전진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빌:3:10-16)

 

모든 신자가 목사나 선교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사회에서 현재 감당하고 있는 정상적인 직업이 바로 하나님이 신자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입니다. 바울처럼 그 일을 해나가면서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 복음을 전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신자의 최종 목적지와 믿음의 최후 열매는 오직 천국이기에 그 천국을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보이면 됩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종교적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은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실히 드러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금은보화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면서 받는 능욕과 핍박을 훨씬 더 귀하다고 확신하면서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와 같은 믿음을 소지하는가?

 

불행하게도 작금 교회와 신자들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기도하여 내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는 것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합니다. 이 땅의 금은보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신자에게서 배울 것 하나도 없고 오히려 자기들과 같거나 더하다고 비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신자들이 자기들과 인생의 목표가 동일하다면 세상에는 비슷한 종교들이 많으니 구태여 기독교를 택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비물질적 형이상학적이며 정서와 감정을 충만 위로함에 좋은 차분한 종교를 믿겠다고 말합니다. 뒤로는 호박씨나 까는 위선적인 예수쟁이들이 너무 싫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광야를 통과해 가데스바네야까지 오면서 겪은 모든 어려움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통과 절차였을 뿐입니다. 이제 앞으로 겪을 가나안 정복전쟁도 마차가지입니다. 극상품 포도를 따려고 가위질 하는 정도입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공수표가 될 확률은 그야말로 제로입니다. 결과는 확고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복은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맛도 보지 못합니다.

 

지금 모세는 그 맛을 미리 보라고 포도송이를 따오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는 과정에는 염려는커녕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 백성들더러도 오직 결과만 붙잡고 미리 체험해보라고 권했습니다.

 

모든 신자가 믿음으로 보장된 열매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천국의 영생입니다. 그 목적지로 걸어가는 여정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구체적으로 실현할 소명입니다. 이 땅은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하는 일을 통해 영원하고 거룩한 하늘의 참 생명을 이 땅에 옮겨와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자기 믿음의 결과와 열매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니까 땅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과정의 좋고 나쁨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을 자기가 편하고 좋은 쪽으로만 이끄는 것이 믿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또 그래서 고난이 생겨야만 기도하고 혹시라도 벌을 받지 않으려고 형식적으로 종교 생활만 겨우 합니다. 고난을 없애는 것만이 믿음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전 일생을 걸고 달성해야 할 소명이 있다면 쉬지 않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 일에만 순종해야 하므로 다른 일에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또 그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어려움 능욕 핍박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더 중요하고 좋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소명을 이뤄나가는 것은 최후에 얻을 열매를 향한 유일한 길이며,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열매를 얻지 못함을 알기에 그 과정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생전에 당신께서 당하신 능욕 멸시 고통이 천국의 영생과 비교해서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님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려는 뜻 아닙니까? 쉽게 말해서 신자들더러 믿음의 최종 결과를 알기에 과정을 전혀 문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모든 신자가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은 하나입니다. 설령 현실적으로 엄청 고달프고 많은 상처와 모멸을 받고 있지만 천국 영생과 예수님이 더 좋음을 믿습니까? 그럼 그곳으로 가는 과정인 현실의 고난에는 염려하지 말고 그 최종 결과만 소망하며 기뻐하십시오.

 

4/21/2019

 

 


옷자락

2019.04.22 02:49:02
*.170.222.121

천국 영생 부활이라고 하니까 조금 애매하게만 여겨집니까? 이 땅에서 아무 보상이 없다니까 괜히 믿음에 힘이 빠집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어서 받는 가장 큰, 엄밀히 말하자면 유일한 축복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외에는 그것을 받아 누릴 길은 전무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꾼 선물인데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멘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46 (요11:33-44) 신자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진짜 감사 [7] master 2019-11-28 1102
245 메뚜기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민수기강해#13-민13:28-33) [1] master 2019-05-05 563
244 역사상 최대 불순종의 진짜 이유(민수기강해#12-민13:25-33) [1] master 2019-04-28 590
243 (마19:3-6)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 [3] master 2019-04-25 708
»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붙잡으라.(민수기강해#11-민13:17-24) [1] master 2019-04-21 2232
241 당신은 정말로 정직한가? (시편 33:1-6) [1] master 2017-04-24 1222
240 욥이 고난을 이긴 첫째 비결 (욥42:1-6) [3] master 2016-10-24 1447
239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이다.(눅10:25-37) 운영자 2013-10-23 4181
238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 (창1:1) [3] 운영자 2013-07-08 1571
237 재림은 예비보다 망각하라. (마24:42-44) [3] 운영자 2013-02-08 1469
236 Disturbed or Overjoyed? (마2:1-10) [4] 운영자 2013-01-15 1200
235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14:28-33) [3] 운영자 2013-01-14 1880
23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4:4-7) 운영자 2013-01-08 1804
233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14:28-33) [2] 운영자 2013-01-02 2176
232 예수님의 진짜 이름(마14:22-27) [2] 운영자 2013-01-01 2373
231 바울에게 절하며 감사하는 하나님(행16:24-26) [5] 운영자 2012-12-18 1127
230 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14:1-12) [1] 운영자 2012-11-26 1033
229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눅22:31-34) [1] 운영자 2012-11-09 2066
228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13:53-58) [1] 운영자 2012-11-04 1811
227 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13:51,52) [3] 운영자 2012-10-26 1365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