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0:14-21) 선(善)을 너무나 무서워하는 인간들 

구약성경강해 (41) / 민수기강해 (31)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우리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우리가 애굽에 오래 거주하였더니 애굽인이 우리 조상들과 우리를 학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 가데스에 있사오니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고 하라 하였더니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우리가 큰길로만 지나가겠고 우리나 우리 짐승이 당신의 물을 마시면 그 값을 낼 것이라 우리가 도보로 지나갈 뿐인즉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 하나 그는 이르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민20:14-21)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제안

 

미국 사람들은 운동경기나 축제에 참여하거나 구경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큰 행사가 있으면 차가 한꺼번에 많이 몰려서 주차 장소가 모자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럼 근처 가정집들이 앞마당을 대당 얼마씩 받고 주차하도록 제공합니다. 집 주인은 돈을 벌고 손님은 행사장과 가까운 곳에 주차해서 서로 좋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꼴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가나안 입경을 앞둔 이스라엘이 에돔의 지경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거절되는 내용입니다. 왕의 대로를 통과하게만 해주면 에돔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며 마시는 물 값을 내겠다는 제안까지 했습니다.(19절)

 

에돔으로선 손해 볼 것 하나 없고 이스라엘에 물이나 음식을 팔아서 한 몫 잡을 수도 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나아가 에돔 왕은 무력으로라도 막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스라엘로선 큰 굴욕을 당한 셈인데 맞대응은커녕 일절 비난 항변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섰습니다.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비상식적인 결말입니다.

 

모세가“당신의 형제 이스라엘”(14절)이라고 했듯이 에돔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에 먼저 나온 장남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의 별칭이자 그 후손들을 뜻합니다. 모세는 아주 손 쉽고도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도움을 청했으나 형제 에돔은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모세는 형제의 나라이므로 전쟁을 치를 수 없어서 그 지경을 우회해서 돌아갔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장막을 치고 있는 곳은 16절 말씀대로 가데스입니다. 그곳에서 곧바로 가나안 땅을 향해 북진하려면 험한 산들이 막고 있습니다. 사십여 년 전에 열두 정탐꾼들도 “산지로 올라가”(민13:17) 탐지했다고 말합니다. 모세로선 광야 행군에 지친 백성들로 이왕이면 평지를 여행하게 하고 또 가데스에서 바로 북진하면 처참히 실패했던 이전의 기억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도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돔을 통과하면 모압과 암몬 족속을 만나는데 당시 에돔과 서로 경쟁하며 다투는 관계였습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을 순순히 통과시켜주면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을 에돔의 동맹으로 보고 대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에돔은 자기들은 가만히 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들 대적들을 제압하거나 힘을 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모세의 제안은 형제 나라끼리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를 낳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에돔 왕은 너무나 확고하게 거절했습니다. 에돔은 왜 이런 좋은 제안을 거절했을까요?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는 또 왜 순순히 그대로 따라주었을까요?

 

돈보다 더 좋은 것

 

에돔의 선조 에서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려는 동생 야곱에게서 재물을 받고서 지난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사실은 재물을 받기도 전에 야곱이 일곱 번 허리 굽혀 절하며 형에게 나아오자 에서가 먼저 달려와서 피차 안고 울면서 용서해주었습니다.(창33:4)

 

야곱이 준비한 재물도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고 사양했으나 야곱이 강권하자(창33:11) 받고는 자기들이 살던 땅 세일로 돌아갔습니다. 말하자면 부친 이삭과 자기를 속여서 차지한 야곱의 장자권 즉,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권리를 인정하고 더 이상 미련을 가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야곱의 후손과 에서의 후손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모세도 선조 야곱처럼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고 전혀 손해 보지 않게끔 모든 비용은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정중히 제안했습니다. 어쨌든 형제 나라이고 세월이 많이 흘렀기에 선조대의 사건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대 동양에선 부계사회로 아버지의 말은 바로 법이었습니다. 이삭이 눈도 어두워지고 판단력도 흐려져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갔지만 일단 그가 내뱉은 말대로 장자권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조 에서가 야곱과 화해했으면 그 후손들도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실제로 에돔이 당장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는 뿌리 깊은 원한과 저주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모세가 돈을 주겠다는데도 에돔 왕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전혀 기대 밖이었습니다.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18절) 통과조차 하지 말라고 했으니 우리는 이대로 여기 살 테니 귀찮게 하지 말고 가만히 그냥 두라고만 말한 셈입니다. 너희와 우리는 아예 상종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정치적으로 당장에 이득도 생기고 또 이백만 이스라엘을 형제 국가로 친교를 맺어두면 언젠가 자기들 위험할 때에 동맹이나 도움을 청할 수 있는데도 상대하기도 싫다고 했습니다. 단지 통과만 하는 것이 돈을 억만금을 갖다 주는 것보다 싫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경제적인 실리도 포기할만한 더 큰 이유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답이 있다.

 

지난주에 성경상의 의문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기 15:15를 보십시오.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애굽 후에 홍해가 갈라지며 마른 땅을 건넌 이스라엘이 찬양 감사 축제를 하면서 여호와께 올린 찬양입니다. 에돔 방백이 크게 놀라 떨며 낙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까닭을 앞 11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애굽에서 행한 열 가지 기적과 바다를 가른 여호와와 비교될 신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 애굽을 상대로 그들에게 사백 년간 노예로 있던 히브리 민족이 군대와 무기 하나 없이 열 번 싸워 열 번을 무참하게 패배시켰습니다. 그것도 지팡이에 의지하는 80살 노인이 그들 신의 말씀을 대변만 했는데도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애굽이 자랑하던 우상 신들은 물론 최정예 전차군단도 찍소리 한 번 못해보고 완벽하게 당했습니다. 인류 역사를 따져도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고대의 열방들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고 그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몇 번 말씀드린 대로 고대 전쟁은 각 민족 신들의 힘겨루기로 여겨졌기에 주변 열국들로선 이젠 이스라엘의 신에게 맞설 신은 없겠다고 크게 낙담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에돔 방백들도 포함된다고 이스라엘은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많은 이방 족속들도 함께 따라 나서서 광야 행군에도 계속 동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사십 년간 방황했어도 모래 밭같은 사막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로 만나와 반석의 생수만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산지와 들판을 통과하고 주변 이방 족속과 사소한 교류나 다툼이 있었고 광야를 오가는 상인들과도 자주 만났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과 먹을 것이 크게 부족한 광야에서 계속 방황하는 히브리 족속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소식이 인근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광야를 잘 아는 이방 족속들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 기간 중에도 히브리신의 초자연적이고 엄청난 권능으로 보호 인도 간섭하셨다는 스토리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원래 소문은 전해질 때마다 과장되는 법이므로 주변 국가들로선 히브리 민족과 그 신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공통적인 인식과 두려움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소문으로 듣던 민족과 그 팔십 노인이 120살이 되었어도 정정한 모습으로 그 유명한 지팡이를 잡고서 지금 에돔 왕 앞에 서있습니다. 여러분이 에돔 왕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이 위대한 여호아 신을 우리 신으로 모시고 그분 앞에 항복해서 이스라엘이 맛보고 누렸던 그 엄청나 기적에 동참해볼까라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만약 그 대답이 예스라면 참으로 순진하고 아직도 성경과 하나님과 특별히 인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자존심이 너무 상한 에돔 왕

 

에돔 왕이 이스라엘을 통과조차 시키지 않겠다는 이유는 사실은 간단합니다. 에돔 백성들로 이스라엘 사람과 절대로 만나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사람과 대화라도 하게 되면 에돔 사람들이 뭔가 심적 혼란이나 동요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에 극력 막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가장 먼저 물과 음식을 돈으로 사먹겠다는 것이 오히려 에돔 왕의 기분을, 정확히 말해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에돔 사람들 개인적으로는 히브리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구태여 없지만 민족적으로는 장자권을 야곱에게 사기당해 빼앗겼다는 과거 아픔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기꾼의 후손들이 애굽의 노예로 고생한다고 들었을 때는 죄지은 것에 대해 천벌을 받는 것이라고 당연하고 고소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기적으로 애굽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당당하게 탈출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애굽의 금은보화를 다 챙겨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것으로 물을 사먹겠다고 합니다. 비용 걱정은 하지 말라 돈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고 있어야 마땅한 족속들이 자기들보다 우위에 서서 돈 자랑하는 것 같이 여겨졌을 것입니다. 저라도 꼴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자연스레 시기 질투 분노가 치솟아 올랐을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이 인간관계에서 저지른 최초의 죄도 친형제끼리의 살인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자기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분풀이로 자기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지금도 육신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이 하나님의 영적인 장자가 된 야곱의 후손에게서 동일한 질투와 시기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선조 에서가 바보 같이 장자권만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도리어 큰 기적들을 누리고 또 지금 저 많은 보화도 우리가 차지하고 있을 텐데 너무 원통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백 년간 노예로 고생했던 과거는 까마득 잊고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만 생각이 몰렸습니다. 거기다 이성적 판단은 뒷전이고 감정에 휘둘려버리는 너무나 어리석고도 탐욕적인 에돔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만큼, 사실은 크게 오해하고 착각한 것이지만, 절대로 선하거나 의롭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애굽은 당시 모든 군소 국가들을 식민지 삼아 착취 학대하고 있는 대적이자 원수 나라였습니다. 그럼 형제 족속 이스라엘이 애굽을 이기고 보물을 빼앗아서 나왔다면 박수치며 축하해주고 함께 잔치를 벌려야 정상인데 전혀 반대의 행태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골리앗을 소년 다윗이 물리치자 사울 왕이 처음에는 축하해주었습니다. 곧바로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듣자마자 분노와 저주에 휩싸였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해 아주 큰 공을 세웠고 다윗이 사울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도 죽이려 들었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도 그랬습니다. 아니 두 번이나 살려 주었는데도 그 살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울이었습니다. 원죄로 타락한 우리 모두도 그 본성상 사실상 가인과 사울의 후예일 뿐입니다.

 

신들이 인간 세상을 신경질적으로 훼방한다고 믿는 것이 고대인들의 종교관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 에돔 왕으로선 혹시라도 여호와도 신경질적으로 자기 땅에서 큰 재앙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에돔 백성들이 오래 동안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의 행색은 보잘 것 없는데 사람마다 보물을 지니고 있어서 크게 부러워하여 시기 탐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큰 다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에돔 왕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현명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사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차라리 거지같은 행색으로 아무 가진 것 없고 정말로 구사일생으로 애굽을 탈출해왔더라면 에돔이 나서서 물과 음식을 제공하며 쉬었다 가라고 먼저 제안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청개구리처럼 남도 아닌 형제가 잘 되는 꼴은 축하는커녕 그냥 두고 보지도 못합니다.

 

에서가 사냥 갔다가 허기져서 순간적으로 팥죽에 눈이 어두워진 바람에 이스라엘과 모든 처한 상황이 역전되었으니 에돔으로선 더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돈보다 더 큰 다른 원인을 추적하다보니 결국은 돈 문제로 돌아왔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탐욕이 모든 죄악의 원인인 것입니다.

 

선한 것을 죽어도 싫어하는 인간들

 

반면에 모세의 제안은 당시로선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라와 나라끼리 또 민족과 민족끼리의 관계는 동맹 아니면 대적 둘 중 하나입니다. 에돔은 모세가 정말로 형제나라로 여긴다면 너희와 동맹을 맺고 모압과 암몬을 무찌르게끔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만약 동맹 맺기 싫으면 애굽을 패배시킨 우리의 신 여호와가 너희도 무참히 심판할 것이라고 전쟁을 선포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면서 고대 왕들이 처음으로 묻는 질문이 “전쟁이냐 평화냐?”이지 않습니까?

 

에돔 왕은 정말로 두려운 신과 그 백성이라고 크게 겁을 먹고서 두 가지 제안에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노심초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모세는 전혀 엉뚱한 제안을 해온 것입니다. 단순히 통과하게만 해주면 그 비용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합니다. 당시 어느 민족도 하지 않은 전례가 없는 아주 특이한 제안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미칠 파급력이 상상 외로 강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신은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사가 의롭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마지막 열 번 째 재앙을 빼고 아홉 번의 큰 기적을 일으켰으나 인명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고 순전히 애굽의 우상 신들만 패배시켰다는 점을 에돔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이스라엘이 화평을 유지하고 비용도 넉넉히 지불하면서 자기 지경을 통과만 하면 에돔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출애굽 때에 많은 이방 족속들이 따라 나왔듯이 말입니다. 에돔 왕이 영적으로 분별력이 뛰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한 나라의 왕이 될 정도면 이런 정도의 정치적인 계산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선과 사랑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미처 돌보지 않은, 사실은 종교적 굴레를 씌워서 그 사회에서 멸시 천대 축출시켰던 불쌍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주님은 치유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주님께 열광하며 따르자 곧바로 주님을 죽일 모의를 시작했고 결국에는 이방인, 그것도 자기들을 식민지배하는 원수 로마의 손을 빌려서 죽였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한 줄 알고도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으로 그치기만 해도 아주 의로운 것입니다. 이상야릇하게도 선한 것을 아주 미워합니다. 훈계하는 가르침이 분명히 옳고 자기가 잘못한 것도 인정하면서도 그 훈계하는 자가 저절로 미워집니다. 선한 자를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는 자기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아주 잘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했던 민족인 유대인들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32)

 

당시의 어느 나라 왕과도 비교가 안 되는 모세의 너무나 의로운 모습과 제안이 에돔 왕으로선 너무나 못마땅하고 마음에 안 들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지금 장자권이 뒤바뀐 것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데 불난데 기름 부은 격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예수님을 처음 대면한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갈리리 바다의 전문어부인 그도 밤새도록 고기 하나 잡지 못했는데 주님이 깊은 곳에, 그로선 고기가 그 시간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장소에, 그물을 내리게 하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해주었는데도 오히려 주님더러 떠나길 간청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잘 사귀어 친해지면 벼락부자가 될 판인데도 떠나라고 했고, 나아가 죄인이라는 전혀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고백까지 했습니다. 주님에게서 세상에 없는 엄청난 영적인 권능이 그대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 완전한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앞에 서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자신의 영적인 초라함 비참함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모든 인간은 완전한 선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게 여겨지고 그대로 따라서 실천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안 듭니다. 오히려 심한 죄책감과 공포심을 느낍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한 후에 그랬던 상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원죄의 굴레 아래 태어난 자연인의 본성입니다.

 

고대의 모든 나라 모든 족속들은 성경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편적 차원에서 아주 종교적이고 영적입니다. 범사를 신들이 간섭 조종한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여호와라는 엄청난 권능을 가졌고 세상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한 신이 함께 통과할 것을 에돔 왕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비참한 존재라는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인간이 기본적인 선조차 모르고 행할 줄 몰라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는 거룩한 일도 행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촌이 논을 사면 처음에는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이 분명히 생기지만 곧바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완전히 뒤덮어서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그런 생각과 반응이 잘못인 줄 빤히 알면서도 살인까지 저지르기에 비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천지를 주관하는 살아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등진 상태의 영혼은 자신도 모르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 공 같은 상태가 되어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 그래서 막상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적이 거의 없기에 비참한 것입니다. 자기 모든 것을 걸고 따라고 싶은 절대적인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 영혼이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살인한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고 그래서 그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사탄의 신경질에 따라서 농간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에돔 왕은 베드로와 동일한 반응을 모세에게 보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고백은 하지 않았어도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느꼈던 것처럼 모세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영적인 카리스마를 발견했고 그 제안이 너무 선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모세가 드러낸 여호와의 권능 앞에 오히려 시기 분노 저주의 감정에 휩싸인 것입니다. 공포심과 죄책감도 함께 말입니다.

 

모세 같은 신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껏 사실은 우리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에돔 왕처럼 절망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비참하고 가난하고 비겁한 상태에서 구원 받은 자가 신자입니다. 물론 그 본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최소한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구원해주었는지, 성령이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본문의 모세처럼 되어 있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투기 전에 화친하고 남에게 어떤 손해도 끼치지 않는 모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신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에돔 왕은 모세를 보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에게서 여호와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며 떠나라고 하며 그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 적대감을 보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그 앞 2장에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를 보는 불신자들이 에돔 왕 같은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 실력, 경건함, 믿음, 도덕적 종교적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서 그분의 가신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구태여 복음을 말로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반대로 거룩하게 살아보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돈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비참하고 가난 치사했던 본성은 점차 죽어 없어지고 우리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의 냄새가 번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를 따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거나 우리를 아주 미워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모세에게도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음을 아셔야 합니다. 출애굽기 강해 때에 강조했지만 하나님은 애굽의 보화를 갖고 나오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언약궤와 성막기구를 만들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 바로 본문의 경우를 대비시킨 것입니다.

 

그 돈으로 에돔의 물을 사먹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모세는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애굽을 패배시켜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낸 권능과 사랑에 형제 나라 에돔도 뒤늦게나마 동참시키려는 은혜의 초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백성뿐만 아니라 그 형제 이방족속에게도 선을 베푸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 선한 제안을 접한 에돔 왕은 오히려 그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조상들의 오랜 원한에 다시 사무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살인한 마귀에게 그 영이 조종 농락당하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배척하고 더 완악하게 사망의 길에 자신을 방치 내지 재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모세에겐 거룩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게 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신명기 23:7에서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도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단순히 에돔이 형제 나라라서 화친을 청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이때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백성들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형제나라 에돔을 완전한 이방족속인 애굽보다 더 사랑한 것도, 동족의 원수였던 애굽을 형제 나라 애돔 사람보다 더 미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모든 이를 사랑하기에 그들을 살리려고 죄 값을 대신 감당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역할 동안에도 사람을 외모로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이방인, 헤롯당, 심지어 당신의 원수인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사랑했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말로 모든 이를 외모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기가 힘이 든다면 외모로 차별은, 특별히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에겐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게 못합니다.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신자가 매일 아침 십자가를 지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속에 영원한 그분의 생명이 정말로 영원토록 살아 역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는 자로 하여금 공포감은 몰라도 근본적인 영적인 찔림은 느끼도록 살 수 있습니다.

 

9/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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