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5:6-13)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세상을 질투하라.

구약성경강해 (51) / 민수기강해 (4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25:6-13)

 

야누스 같은 하나님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우상 제사에 참여한 것은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두령들부터 나무에 매달리는 심판을 받았고 수많은 백성들은 염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늘날의 신자가 보기에는 끔찍하면서도 조금 이상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회중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회막에 모여 슬퍼하는 중에 어떤 사람이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아론의 손자 즉, 대제사장이 될 비느하스가 그 남녀 둘을 장막에까지 쫓아가서 창으로 배를 꿰뚫어서 죽여 버렸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목사, 아니 교단총회장이 교인 중의 한 사람을 살인한 셈입니다. 그들이 물론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만 꼭 그렇게 잔인한 방식의 심판이어야만 했는지 의아해집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이 비참하게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염병의 심판을 그치고 살인자 비느하스에겐 평화의 언약을 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워줍니다. 백성들을 이만사천명이나 죽였던 그 냉혹한 심판이 언제 있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모든 상황이 순간적으로 극과 극으로 오갔습니다. 슬픔에 빠진 연약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 혼자서 엄청난 분노를 퍼부었다가 금방 다시 방끗 웃는 것 같습니다. 마치 두 얼굴을 지닌 로마의 신 야누스 같은 하나님이라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비느하스의 단호한 사형 집행과 그런 심판에 대해 하나님이 평화의 언약으로 반응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사건의 전후 사정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먼저 미디안 여인들도 이스라엘의 음행 사건에 적극 연루되었습니다. 나중에 여호와가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명했습니다,(민31:1) 모세도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31:16)라고 확인했습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의 친척 국가이긴 해도 하나님이 모압보다 미디안을 심판하신 까닭은 분명히 이스라엘 음행에 더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디안 장로들이 발람을 발락에게 추천했는데.(민22:4) 결과적으로 그 저주의 신탁은 실패했습니다.

 

미디안으로선 모압에게 큰 빚을 진 셈이고 당시 중근동의 최고 정보통이자 중재자라고 자부했던 자기들 체면이 완전히 꾸겨졌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거기다 미디안은 약대 타고 여러 족속들에게 장사하러 다녔기에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자기들의 장래 영업에 큰 지장이 있겠다는 판단도 했을 것입니다.

 

흔히 직접 피해를 당한 장본인보다 주위의 공범자들이 더 적극 나서서 반발하는 법입니다 미디안도 발람과 모압 족속과 별도로 나름대로 이스라엘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심판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가족들을 애도하고 자기들 잘못에 대해 회개하는 중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회개 집회이자 추모 예배를 드리는 중입니다. 그런 심각하고 진지한 시간과 장소에 한 이스라엘 남자가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가 그 추모의 현장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남자는 시므온 족속의 한 족장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14절)

 

성경의 세밀한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창으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8절)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을 창 하나로 단번에 죽였다는 뜻입니다. 죄송하지만 그 두 사람은 장막으로 들어가서 배를 맞대고 음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 남자는 비유를 하자면 부모의 장례식장에 상주가 부모의 원수의 딸을 불러다가 다른 방에서 음행을 한 꼴입니다. 실제로 상대 여자는 미디안의 한 족장의 딸이었습니다.(15절) 어떻게 여호와를 아는 백성이 이런 추악한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끔찍하고도 냉혹한 심판에 대해 의아해하기 이전에 도무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사악한 큰 죄입니다. 불신자라도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늘에서 벼락 맞아 죽어야 될 놈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염병으로 죽은 이스라엘도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기쁨과 소망과 열정에 가득 찬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역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디안 여자들과의 음행은 비유하자면 결혼식 직전에 신부가 신랑 대신에 다른 남자와 음행을 한 꼴입니다.

 

나무에 매달린 두령들이나, 염병으로 죽은 이만사천 명이나, 본문의 한 남자나 죄의 질에서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발람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이방 신에게 굴복시키고 심지어 절하게 만든 자들입니다. 모두가 당장 죽어 마땅했고 하나님의 심판에 변명도 핑계도 댈 수 없고 대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 또한 하나님의 이런 엄위하신 심판 앞에 겸손히 고개 숙여야 하고 그분의 공의에 한 치도 불만 의심을 가져선 안 됩니다. 어떤 신자가 저에게 가장 이해가 안 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은 아무 이유 없이 어린이들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살인자들은 정말로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은 실은 신자들의 잘못을 포함해 사람들의 죄악의 결과로서 우리 모두가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어린이 즉,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고 당장 지금이라도 지구를 폭파 멸망시켜도 인간 쪽에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전혀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출발이자 핵심입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것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이런 대전제가 확고히 서있지 않으면 어린이의 요절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고난은 불합리해지고 하나님의 공의에도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는 이해되어도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는 영원불변의 진리이자 엄연한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충성된 종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비느하스가 그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이자 성경은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8절)고 선언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 순간만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분은 이 땅의 추악한 죄악을 제거하려는 헌신된 종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길 목매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그 전까지는 인간 세상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는 더더욱 온갖 고난과 재앙들이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율법을 주시면서 당신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이 끝나자 바로 염병도 끝났다는 것은 그만큼 거룩하신 그분께서 더 열렬한 소망과 넘치는 긍휼을 품고서 자기 백성이 거룩해지길 간절히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본심이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어폐가 있는 설명이지만 하나님으로서도 당신의 본심대로 재앙을 그치고 구원을 주시려면 그럴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의 백성들이 심판 받았던 그 죄를 실제로 백성들 스스로 진멸해야만 심판을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면서 마음으로 반성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그 역시 종교적 도덕적 정서적 자기 위로요 자기 의일 뿐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 근본요인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범죄한 행동을 깨끗이 씻고 다시는 재범하지 않도록 뼈를 깎는 노력과 수고와 희생을 해야 합니다. 이전의 추악한 행동, 말, 생각과는 완전한 단절을 이뤄내야 합니다. 신자의 회개가 충만하게 완성되어야만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도 임합니다.

 

하나님이 일일이 우리가 범죄 하는 대로 벌을 주시진 않지만 절대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미지근한 분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는 넘치는 긍휼로 인내해주시지만 무조건 끝까지 그러지 않습니다. 회개가 찰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회개할 기미가 전혀 없으면 그 인내는 곧바로 거두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특정 죄악을 거룩하게 고쳐보려는 충성된 종이 단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즉각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에선 모세로 인해 계획하고 있던 심판을 취소했고, 본문사건에선 비느하스로 인해 이미 시행하고 있던 심판을 곧바로 중지하셨습니다.

 

한두 번의 경건한 순종은 인간적 윤리와 신앙 양심에 따라 비교적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참 순종이란 하나님이 어디로 이끌지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의심 불평은 물론 인간적 계산이 일절 개입하지 않고 주저함 없이 곧바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원래 식당의 waiter처럼 누가 부르면 곧바로 뛰어가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충성된 종이란 항상 깨어서 자신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이 그분의 마음과 말에 맞춰져 있기에 행동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필연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결코 부득이함으로 행하지 않고 넘치는 기쁨으로 저절로 주님을 닮아가는 일상의 삶이 충성입니다.

 

비느하스는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종교적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요, 자기 공을 세워서 나중에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요,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응답을 받은 것도 아니요, 그 두 사람을 인간적 개인적으로 증오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두 사람의 음란한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며 다른 백성들의 회개를 훼방하며 순전한 애도의 감정마저 쓰레기 통으로 던져 넣는 일이라고 절감한 것입니다. 결코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는 확신이 순간적으로 들면서 자연스레 심판의 행동이 이어진 것입니다.

 

만약 그 남자가 미디안 여자 혼자만 먼저 장막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남아서 동족들을 위로하거나 그 슬픔의 현장에 동참만 했어도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이 함께 장막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비느하스는 곧바로 창을 들고 쫓아간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 동안에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준행함으로써 모두가 그분의 백성으로 회복되어야만 한다는 생각 외에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비느하스

 

기억할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그러하듯이 비느하스의 그런 생각과 행동의 배경에도 성령님의 의로운 인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비느하스더러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11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언뜻 질투가 부정적인 감정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적용할 때는 도리어 아주 긍정적인 의미가 됩니다. 비느하스가 당신의 마음을 갖고 당신이 행할 바를 행하였기에 이스라엘을 향한 극렬한 진노가 해소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비느하스를 극찬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가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질투란 반드시 세 당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본인과 사랑하는 연인과 그 연인을 두고 사랑을 다투는 연적입니다. 설령 질투가 나중에 분노 저주 복수로 이어진다 해도 처음 발단은 아주 선한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연인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결코 연적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감정이 질투입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더욱 뜨겁게 사랑하면서 독점하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는 것이 질투입니다. 필연적으로 연적에 대해선 불같은 분노와 저주가 따릅니다.

 

발람의 세 번의 신탁 사건과 이어지는 이방 여인과의 음행 사건에서 질투를 하는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연인은 이스라엘입니다. 당신과 함께 이스라엘의 사랑을 다투는 연적은 이방 신, 바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 여인들과 행음하고 바알의 제사에 참여해 절까지 했으니 사랑 다툼에서 결과적으로 또 논리적으로는 여호와가 바알에게 패배한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적에 해당되는 바알 신과 그 하수인들에게 당장 앙갚음을 하지 않고 당신의 연인인 이스라엘부터 먼저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선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두고 바알을 상대로 질투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오직 연인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칩니다. 이전에 발람이 저주의 신탁을 세 번 시도한 일이나, 이방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꾀어 음행하고 바알 제사에 참여케 한 것은 바알 신으로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뜻이었습니다. 사탄은 절대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고 철저하게 미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발람의 세 번의 신탁처럼 사탄이 대놓고 당신의 백성을 멸망시키려 덤빌 때는 아무래도 인간이 사탄보다 능력이 약하므로 하나님이 대신 막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방 여인들과 음행사건처럼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접근할 때는 즉, 사탄이 당장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지 않고 죄로 타락시켜 서서히 영적 죽음으로 몰아가려고 할 때는 신자들더러 스스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물리치라고 버려둡니다.

 

아담의 타락 때에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의 판단에 맡겨 두었듯이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모든 거짓된 수단을 동원해 시험 유혹할 때는 신자는 성경에 이미 계시된 절대적 진리로 얼마든지 구별하고 상종 교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발람이 결과적으로는 세 번이나 이스라엘에게 공을 세웠지만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탐욕스런 사탄의 종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영적인 분별력을 미처 갖지 못했다 쳐도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 때에 하나님이 우상숭배에 대해 얼마나 극렬히 진노하셨는지 이미 체험했습니다.

 

하나님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절대로 두지 말라는 첫 계명이 바로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모든 경우에 영적으로 분별하는 절대적인 진리이자 첫째 기준입니다. 이번에 만약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제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일회성 음행으로만 그쳤어도 염병의 형벌까지는 내리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지 말라.

 

하나님은 신자를 두고 사탄과 경쟁할 위치에 설만큼 시시하고 연약한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사탄 스스로도 감히 그분과 맞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들은 전부 무저갱에 멸망시키지만 말아달라고 사정사정했습니다. 사탄은 그 때까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로 예수님의 십자가구원 은혜를 등지게 만듦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대신 해소하려듭니다. 사탄다운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분풀이입니다.

 

영계에서 최고 위치의 천사장이었던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다 그분의 진노를 사고 지상으로 쫓겨 내려왔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또 마지막 날 심판 때까지 사탄은 그분의 철천지원수이고 또 그분의 백성과도 철천지원수일 뿐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었던 적은 한 순간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사탄은 오직 그분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골고다 언덕에서 이미 철저한 패배를 당해습니다. 신자가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 유혹과 시험에 져서도 안 됩니다.

 

본문에서 질투심으로 질투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이해하기 쉽게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실감나게 말한 것입니다. 당신께로만 향해야 할 신자들의 경배와 감사와 찬양이 다른 존재에게 돌려지는 것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음란죄를 범하고 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본 사건을 들어 음행은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엄격히 정죄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5-18)

 

본문의 이스라엘 남자는 여호와의 지체인 자기 몸을 창기의 지체로 만들었습니다. 이방 여인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이방 신과 완전히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여호와를 바알 신과 한 몸이 되게 한 꼴입니다.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엄청난 힘이 아니고는 창 하나로 두 사람의 배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가 비느하스의 창에 함께 실렸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온전했고 거룩하기까지 했습니다. 비느하스야말로 당신께서 거룩한 소망을 갖고 기다리셨던 정말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한 사람의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의 평소 품고 있던 믿음은 물론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소명 의식을 그 심판 행위로 증명했습니다.

 

충성된 종이 나타나길 기다린다고 해서 그 동안에 하나님이 완전히 손을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발람 사건 전반에 당신만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전한 섭리가 작용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은 사탄의 최고 영험한 종 발람이 시작해서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마무리를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대제사장 비느하스입니다. 백성들의 철저한 타락을 당신만의 철저한 은혜로 덮으려고 당신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신 종이었습니다. 언뜻 대제사장보다 일반 백성이 그를 심판하는 것이 이방 족속들 보기에 그분의 영광이 더 높아질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압과 미디안은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권능은 일차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로만 집중됩니다. 대제사장이 반드시 나서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하나님은 다시 받아드리려고 이미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염병을 그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백성의 대표자 대제사장이 그 죄를 반드시 피로서 씻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당신께서 이미 예비해 놓은 대제사장인 비느하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평화의 언약을 수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의 대속 심판의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다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염병으로 심판하기 이전의 관계로 되돌려진 것입니다. 죄악을 완전히 제거하여 완전한 회개가 달성되었을 때에, 그것도 대제사장이 솔선해서 먼저 행했을 때에만 가능한 구원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십자가 대속제사를 상징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비느하스에게 주신 평화의 언약을 두고 하나님은 그와 그 후손의 영원한 제사장의 언약이라고 선언했습니다.(13절) 아론 가문의 대제사장직분을 보장하는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서 믿음의 후손인 오늘날의 신자들도 영원한 제사장으로 서야 한다는 언약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 질투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분의 백성을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백성을 거짓으로 훼방하는 흑암의 세력은 철두철미 증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바로 그 소명에 충성 헌신해야만 신자와 신자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어서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들을 비판 정죄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미디안 여자가 유혹했던 성적 음행은 영적 음행으로 이끄는 미끼였을 뿐입니다. 본문 표현대로 하자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아까지 않고 내어주신 그 사랑을 언제 어디서나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와 그 공동체는 오직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남아야만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순수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그 진리의 절대성 유일성 영원성 완전성에 다른 어떤 것들과도 섞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의 참 생명이 거짓 생명에 의해 타협 조종 변개 포기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고 그분의 사랑 앞에 모든 심령이 무릎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주변 성도와 이웃 사회에까지 흘러나가게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세상 모든 이를 외모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 중에 있는 자라도 그 죄는 어떻게든 성령의 씻음을 받게 하면서 그 죄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겨주어야 합니다. 교인 각자는 물론 그들이 모이는 공동체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그들의 행하는 모든 삶과 사역은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인도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철저하게 순전히 그대로 증거 되고 그 받은 말씀을 기도하며 삶에 실천해야 합니다. 특별히 지도자가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죽는 대제사장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근에 예수 십자가 순전한 복음은 너무나 인기가 없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물론 목사들마저 영적 분별력이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죽음이 강조되지 않고 있으니 사탄은 구태여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들을 전혀 시험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교회 밖 세상은 항상 그러하듯이 사탄의 조종 농간에 맞추어 춤추며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세속의 관습 문화 윤리 종교 등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도 막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적극 도입하고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편리하고 쾌적한 예배당에서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감정적 설교만 성행합니다. 죄책감을 심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제거해주는 값싼 복음만 세련된 말솜씨에 담겨서 많은 교회의 강단마다 홍수처럼 넘칩니다. 주일 예배가 기독교적 겉옷만 입은 세속 문화와 윤리와 종교를 공연하는 쇼가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죽을죄에서 구원 받아 절대적 하나님에게 전부를 바쳐 헌신하고 사탄을 절대적으로 저주하라는 메시지에는 귀를 닫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완전히 비인기 종목이 되었고 그런 메시지를 아직도 고지식하게 전하는 교회들은 비주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교회와 교인들이 아무리 그 세상에 오염 동화되어도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영원한 진리로 남습니다. 십자가 복음 자체는 결코 변화 축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영원한 평화의 언약은 동시에 영원한 저주의 언약이기도 합니다. 심판은 구원의 완성이며, 구원도 심판의 완성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질투심으로 이 땅을 특별히 교회와 교인들을 질투하고 계심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순전한 신부가 되지 않고는 아무리 예배가 장엄하고 화하고 경건해도 하늘에 열납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교인이고 교회이지 실제로는 거짓 복음, 번영 복음 등과 손을 잡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극렬한 분노의 질투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 밖에선 영원한 멸망이요, 하나님 안에선 영원한 생명인데 그 둘을 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사람들에겐 하나님이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지닌 것같이 보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 얼굴의 한 쪽만 바라보면 이단으로 빠져서 멸망으로 치닫게 될 뿐입니다.

 

12/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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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7 지옥에 간 불신자의 심리는? master 2024-02-22 5
106 마르다가 믿고 있었던 부활 사상은? master 2024-02-09 4
105 이태원 참사에 희생된 친구가 너무 안타깝습니다. master 2022-12-22 16
104 사탄을 왜 아직 지옥에서 멸하지 않는가요? master 2022-08-23 14
10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과 출산이 가능한가? master 2022-08-20 11
102 휴거가 성경적으로 옳은가요? master 2022-03-11 39
101 (시76:7-9) 펜데믹은 하나님의 분노인가? master 2022-01-03 3
100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master 2021-09-04 36
99 형벌의 본질, 목적, 종류는? master 2021-06-28 35
98 백신과 계시록의 666 (2) master 2021-06-28 36
97 (눅17:1,2) 지옥에 떨어질 사람의 조건은? master 2021-06-28 37
96 (눅16:19-25) 죽기 전에 인생 역전을 이루라. master 2021-04-26 27
95 (롬13:11-14)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master 2021-01-11 41
94 (왕하17:7,8)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교인들. master 2020-10-10 20
93 (왕상11:11-13) 자기 속의 우상을 당장 돌로 쳐서 죽여라. master 2020-10-10 33
92 (고전15:42-44) 부활에 대해 꼭 알아야 할 사항은? master 2020-10-10 13
91 고전3:10-15에서 공적을 쌓는다는 의미는? master 2020-09-04 50
90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닥쳐도 master 2020-04-21 17
» (민25:6-13)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세상을 질투하라. master 2019-12-25 39
88 마16:28의 너희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뜻은? master 2019-10-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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