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36:1-4,12,13) 인간에게 지워진 첫째가는 숙명 

구약성경강해 (56) / 민수기강해 (46, 完)

 

“요셉 자손의 종족 중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이 나아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지휘관들 앞에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 주에게 명령하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제비 뽑아 그 기업의 땅을 주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우리 주에게 명령하사 우리 형제 슬로브핫의 기업을 그의 딸들에게 주게 하셨은즉 그들이 만일 이스라엘 자손의 다른 지파들의 남자들의 아내가 되면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의 기업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들이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 그러면 우리가 제비 뽑은 기업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의 희년을 당하여 그 기업이 그가 속한 지파에 첨가될 것이라 그런즉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삭감되리이다 ....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규례니라.”(민36:1-4,12,13)

 

삭감될 지파의 기업

 

아들 형제가 없는 슬로보핫의 딸들이 자기 아비의 이름이 삭제될 수 있으니 자기들에게도 기업을 달라고 요구했고 하나님은 그럴 경우 여자에게도 상속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이 속한 므낫세 지파의 두령들이 그럴 경우에 발생할 문제점을 제기했습니다. 그 딸들이 다른 지파 사람과 결혼하면 분배 받았던 기업이 자기 지파에서 삭감되고 그럼 원래 취지와 달리 슬로보핫의 아비 이름도 지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을 4절에서 희년제도라고 말하므로 레위기 25장과 27장이 규정하고 있는 희년제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은 매 칠년 째를 안식년으로 규정하여 땅도 쉴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칠년이 일곱 번 지난 매 50년째 해가 희년(禧年)으로 그 땅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공표했습니다.(레25:10) 그 동안 가난해서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지파에 팔아넘겼거나 저당으로 압류된 모든 재산과 땅을 원주인에게 무조건 돌려주어야 합니다. 율법은 또 동족끼리는 노예로 삼지 못하게 금지했으나 채무를 이행하려고 종으로 봉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부 보상이 안 되었어도 자유를 주고 채무도 탕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대사회에선 아내를 남편의 재산 내지 종으로 취급했기에 이스라엘에서도 결혼을 하면 여자의 소유는 전부 남편의 것이 됩니다. 슬로보핫의 딸들이 다른 지파에게 시집을 가면 우선 그 기업이 남편 소유가 됩니다. 따라서 희년이 되어 그 딸들에게 돌려주어도 법적으로 남편의 소유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희년은 원주인에게 돌려준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그 후로는 남편이 원주인으로 영원히 확정되어버리는 불합리한 결과를 낳습니다.

 

본문의 3절과 4절의 말미를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먼저 3절은 “그들이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라고 합니다. 아직은 가나안 정복 전이고 또 결혼하기 전이라 단순히 남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될 가능성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선 희년이 되면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삭감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아주’라는 단어를 첨가했습니다. 완전히 남편 지파에게 귀속된다는 의미를 우리말 번역에서 분명히 밝혔습니다.

 

물론 희년 전에 그 딸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남편 소유가 된 땅을 사서 자기 지파 소유로 되 물릴 수는 있습니다. 본문은 희년이 되었음에도 친척들이 모두 가난하거나 섣불리 물리려고 나서는 친척들이 없을 때 즉,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정하여서 염려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기업을 상속 받은 여자들은 다른 지파와 결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기업을 상속 받지 않은 여자들은 당연히 자유롭게 다른 지파에 시집갈 수 있었습니다. 슬로보핫의 딸들도 이 해결책을 수긍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 시집을 갔습니다.(10-12절)

 

융통성이 많은 하나님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이 마치 완벽하지 않고 불합리한 하자를 지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당신께서 제정하시고 백성들이 엄숙히 그대로 준행하겠다고 피의 언약까지 맺은 거룩한 계명들을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수시로 바꾸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추첨으로 배분하라는 이유가 인간의 욕심과 이해타산과 선호도 등이 전혀 개입되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않습니까?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민수기 32장에는 두 지파가 땅을 스스로 고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32:1) 자기들 임의로 모세에게 그 땅을 분배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다른 지파들로선 자기들 욕심만 채우고 또 가나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핑계로 오해했습니다. 자기들 선호도와 무관하게 추첨으로 기업을 받아야하는 다른 지파와의 형평성 문제도 생겼습니다. 그 두 지파들은 공동체에 해를 끼칠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단지 목축하기 좋은 땅이라 분배 받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 내내 선봉을 쓰고 정복이 완료될 때까지 그 땅에 정착하지 않으며 정착 후에도 반드시 다른 지파들과 함께 한 곳에 모여 여호와께 경배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하자 여호와가 그 요청을 허락해주었고 다른 지파들도 수긍해주었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추첨으로 이스라엘 지파의 명수대로 분배하라는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단순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만 피력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면 안 지켜도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하자도 없이 완벽합니다. 그분에게 악하고 추한 것은 절대로 공존하지 못하며 인간을 조종 농락하려는 치사한 위계 또한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한 없이 이용당하는 어리숙한 하나님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손주가 너무 귀여워서 당신의 수염을 끌어당겨도 마냥 좋아하며 사탕을 쥐어주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 아닙니다.

 

기업을 분배하는 방식과 그렇게 하는 목적을 서로 혼동하지 말고 따로 구분해서 따져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명수에 따라 추첨해서 분배하라는 것은 그 객관성과 공평성을 확보하려는 방안입니다. 추첨으로 분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분배한 목적은 인간의 이해관계, 욕심, 감정, 선호도, 등이 일절 개입되지 않게 해서 불평 원망 분쟁을 방지하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공평하게 친히 주신 기업임을 절대 잊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 36:7이 말하는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이스라엘에서 모든 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그 매매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레25:23) 하나님이 주셨기에 인간이 스스로 쟁취하거나 서로 합의 계약해서 취득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각 지파들이 함부로 자기 이익이나 편리에 따라 변경 처분 매매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 슬로보핫 딸에게 상속을 허락할 때의 결론을 다시 보십시오. 딸이 없다면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받게 할지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규례가 되게 할지니라.”(27:11) 남녀차별 금지보다 지파 안에만 기업이 머물게 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그 전에 추첨으로 각 지파별로 땅을 배분하라는 명령을 주실 때의 목적도 동일합니다.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26:55) 한 지파의 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는 법은 절대로 없게 하라는 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도 치르기 전에 두 지파가 먼저 요단 동편 땅을 달라고 요구한 것도 땅의 분배 방식에 관한 문제였지 하나님이 땅을 분배한 목적에는 위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단 서편의 땅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해주었습니다.(32:19) 요단 동편 땅만 너희들 지파의 영원한 기업으로 삼고 다른 지파들의 땅은 절대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방법과 연계되는 측면뿐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종이라도 당신의 궁극적인 뜻과 계획이 손상되게 하는 일은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목적이 실현되는 범위 안에서 세부적인 방식에서 백성들의 변경 내지 추가 요청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모세가 매번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먼저 사정을 아뢰고 어떻게 할지 그 처분을 오직 당신께만 겸손히 맡기니까 그랬습니다.

 

기업 분배에서 궁극적인 뜻은 각 지파가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반드시 그 지파의 소유로 끝까지 남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다른 지파의 소유를 절대 탐내지 말고 그래서 동족끼리는 절대로 전쟁을 치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창조할 때부터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뜻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단순히 부부끼리 힘을 합쳐서 가정을 잘 가꿔나가라는 뜻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가정은 최초의 인간 공동체로 앞으로 생길 모든 공동체의 표상이었습니다. 모든 세대 모든 인간들에게 인간관계에 관해서 주신 최초의 따라서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서로 도우라는 것은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분명히 인삭하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도와야 하므로 하나님 앞에선 신분 위치 계급 특권에서 우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창1:27)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남녀 사이도 당연히 그러하며 그래서 슬로보핫의 딸들에게도 동일한 기업 상속권을 부여한 것입니다.

 

모두가 동등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가정을 누가 주도하며 꾸려가야 합니까? 남편도 아내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자녀들의 모든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지금 바로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가나안 땅에 건설하려는 단계에 있습니다. 더더욱 기업의 분배를 공평해야 하며 그분에게 받은 기업을 각 지파가 책임지고 지파 내에서 아름답고 풍요롭게 보존 유지 개발시켜야 합니다. 배타적 종족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 보이라는 뜻입니다.

 

희년제도의 의미

 

하나님의 그런 뜻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희년규정입니다. 땅은 영구히 하나님 소유이기에 가난해지면 팔아도 된다고 직접 허락해준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난해져서 어쩔 수 없이 땅을 파게 되는 경우를 하나님은 감안해주었습니다. 대신에 자기 지파 내의 여유있는 인척이 대신 채무를 갚아주고 그 땅을 되찾아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마저 못할 때를 대비해서 50년째는 원래 소유주 즉, 가난해서 팔았던 자에게 아무 조건 없이 되돌려 주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자만 일방적으로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채권자는 그 동안에 그 땅에서 경작한 생산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채권 금액과 수확량의 판매가격을 맞추기 위해서 반드시 희년까지의 남은 해수를 먼저 계산하도록 했습니다. 그 남은 기간 동안 그 땅에서 나올 총 소출을 부채금액과 일치시키려는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을 정말로 경외한다면 서로 절대로 속이지 말라고 명했습니다.(레25:17)

 

그럼 채권자가 희년에 땅을 돌려주어도 땅의 소산물로 채무를 다 받은 셈입니다. 율법은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신23:19)고 명합니다. 채무금액과 수확량을 일치시킨 희년제도는 그래서 채권자가 이자 없이 원금만 회수하게 하는 방안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그 원리와 실현에서 하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많은 융통성을 발휘하며 당신께서 제정한 율법을 어기는 것 같아도 사실은 사람들이 욕심과 죄악으로 부패해져 온갖 비정상적인 상황들을 만들어내었음에도 당신께선 그 모든 잘못들을 인내하면서 관용을 베푼 것입니다.

 

희년은 모든 묶인 것에서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선 그분의 백성들끼리는 절대로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자말의 뜻 그대로 정말 기쁨이 넘치는 해입니다. 영어로는 Jubilee 인데 히브리어 “숫양의 뿔”이라는 뜻의 요벨을 옮겨 쓴 것입니다. 희년이 되는 첫해 아침에 이 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어서 온 이스라엘에 자유를 선포했기에 유래한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베들레헴에 태어나 구유에 누이자 하늘에서 허다한 천군천사들의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주님은 땅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임하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이 땅에 오심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1-3)

 

실제로 예수님이 오셔서 이 말씀 그대로 당신의 온 몸으로 실현해 보였습니다. 역사상 어떤 위대한 영웅이나 의로운 선인이나 지혜로운 현자라도 인간에 불과하기에 같은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자유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주님만이 줄 수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 값을 갚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을 당신이 피를 흘리고 몸이 찢김으로써 무너뜨리고 우리를 그분과 화해시키고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 심히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기쁨 안에 다시 거하게 해준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그분을 기뻐할 때만 우리의 참된 기쁨도 넘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으면 온전한 기쁨을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이는 모든 인간에게 지워진 첫째가는 숙명인 셈입니다.

 

아기 예수를 보내는 그 해가 바로 온전한 희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천사들이 요벨을 크게 분 것입니다. 아니 주님 오신 이후 지금까지, 나아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한 해도 빠짐없이 희년입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 쓰러지고 때로 죄에 져서 넘어져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 엎드리기만 하면 그분은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너로 말미암아 즉 너라는 존재가 나와 함께 있기에 그것만으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네가 착하거나 충성해서 혹은 기도와 찬양과 말씀에 능통해서 기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가 너를 지었고 너를 알고 있고 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좋아할만한 이유 하나 없어도 너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어떤 이유나 근거가 있다면 이미 참 사랑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셔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그분이 먼저 추하고 비천한 이 땅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 당신께서 먼저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 상태 자격 능력 등이 그분의 기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잠이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신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흔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에서 악하고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건져내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오신 날 하늘에서 하나님이 너무나 큰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베들레헴 밤하늘에 울려 퍼진 찬양이 지상 최대 역사상 최고의 찬양이었음을 여러분 실감할 수 있습니까? 아니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교리적 관념적으로 그런가보다 이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로 살아계신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대면하여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 그 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엄청난 기쁨을 체험합니다. 그 이후로도 고난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괴롭기만 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기쁨을 누리면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희년보다 더 중요한 목적

 

그리고 희년은 단순히 가난한 자와 종 된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의미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선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모두가 공평하게 땅을 분배받았기에 원칙적으로 가난한 자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찌든 인간인지라 게으르거나, 혹은 크게 욕심을 내어서 사업을 무리하게 벌이다 망하거나, 아니면 엉뚱한 일에 돈을 낭비하는 자는 반드시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빚을 갚기 위해서 기업을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됩니다.

 

그런데 오십 년마다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무슨 결과를 낳습니까? 당시 수명을 오십년이라고 치면 누구나 일생 중에 한 번은 희년을 겪습니다. 그 사이에 채권자는 기업을 돌려주어야 하고, 되돌림 받은 원주인은 채무에서 해방됩니다. 이스라엘에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큰 부자도 찢어지게 가난한 자도 생길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제도를 엄격히 지켰다면 이스라엘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이 공평과 정의가 살아납니다. 모든 재산의 판매가 이 희년 제도에 맞추어 행하라고 하면서 절대로 속이지 말라고 명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수님 당대에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매매를 희년을 기준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희년제도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 아무래도 권력을 동원하여 불법 편법을 저지르거나, 무엇보다 하나님이 명하신 이 거룩하고도 공평한 제도를 지키지 않아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래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예리하게 경고한 것입니다.

 

지파별로 기업을 추첨하여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지파별로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희년 제도는 하나님이 각 개인의 물질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하여서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개별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본문에서 그 희년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함으로써 더더욱 기업을 지파별로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슬로보핫의 딸들에게 상속을 허락한 것도, 오늘 본문에서 그녀들로 다른 지파에게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 문제의 원인이 된 희년제도를 제정한 것도, 나아가 두 지파의 요구대로 요단 동편 땅을 분배하는 예외 조치를 허락한 것도, 모두가 지파대로 그 기업을 존속하라는 것입니다.

 

민수기의 결론 격인 본문 12,13절이 어떻게 끝을 맺습니까?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규례니라.” 기업을 지파대로 영원히 존속시키라는 것으로 율법이 봉인된 셈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정복을 지금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지파 별로 추첨해서 기업을 분배하고 안식년 희년 제도를 성실히 지키라고 마지막으로 다짐한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를 지탱할 골격이자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지파별로 서로 도와주어서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이웃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끝이 아니다.

 

민수기의 영어 제목 ‘the Numbers’(숫자)는 원래 제목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최초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이 인구조사가 두 번 나오기에 알기 쉽게 붙인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광야에서”(in the wilderness)입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은혜로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구원 받고도 광야에서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님을 거역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묵묵히 참으시고 당신만의 열심과 성실로 그들을 기어이 광야를 통과케 하여서 약속의 땅 앞에 이르게 하셨다는 기록입니다. 솔직히 말해 오직 은혜로 구원 받아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참 기쁨 없이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민수기인 셈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의 거역으로 이스라엘의 구세대 모두는 광야에서 헛된 죽음을 맞았고 이제 새 세대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분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구원 얻은 후의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할 참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만 그 약속의 땅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둘뿐이라고 강조한 그대로입니다. 신자들은 그 의미를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니까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적 종교적 계명이 아닙니다. 십자가 구원이 구원의 뿔이요 나팔소리였지만 신앙생활은 절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에서 구원 받은 그 기쁨에만 머물고 있으면 종이나 노예였다가 즉, 채무자로서 희년의 혜택만 받은 것입니다. 주변의 가난한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즉, 채권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희년을 직접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베푼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았다는 의미는 반드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기쁨 가운데 속하지만 말고 각자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로서 본분을 다하여 그분의 기쁨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받아 누리며 서로 나눠주어야 합니다. 주변의 고달프고 슬픈 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서로에게 죄를 짓지 않고 숨길만한 부끄러운 짓도 하지 않고 순전하게 사랑할 때에 에덴동산은 말 그대로 낙원이었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를 그렇게 바꿔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에 빠진 채무자를 구원해주는 것만 목표할 것 같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미리 불러내어 구원의 확신을 심어줄 필요 없습니다. 구태여 예수님이 걸어가신 힘든 길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죽을 때에 혹은 죽고 난 후에 택한 자들을 구원해주면 됩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에 역사상 최대 최고의 찬양이 온 하늘에 울려 펴졌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천사들의 가슴과 찬양 가운데 온전히 묻어져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이 땅으로 오셨고 당신의 백성들 사이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온 백성들로 알고 일상에서 누리게 해주겠다는 사랑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찬양을 들은 자는 들판의 목자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헤롯 왕궁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가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날 밤에 성안에 아주 큰 소동이 났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메시아 강림에 대한 최초의 증인으로 하나님이 택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고 곧바로 그 부르심에 부응하여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고 찾아 나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이웃에게 그분의 기쁨을 전하는 자만이 그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또 그 일에 충성할 때에 그분의 기쁨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해 자기 유익과 필요만을 하나님께 구하면 그분은 귀를 닫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분의 복을 받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서로 사랑하게끔 만들어졌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참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해야 할 대상인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최초 인간이 선악과 금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거역했는데 그 동기가 자기만 높이려는 다른 말로 자기만 사랑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인생길이 광야로 변하며 온갖 불행과 고난의 발단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자가 일생을 걸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두 말할 것 없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절실한 소외되고 고달픈 자들이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이 이뤄주기를 바라는 올 한해 기도할 제목들을 솔직히 점검해보십시오. 그 소망과 계획들이 어떤 동기와 목적을 갖습니까? 하나님은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신자보다는 이웃 사랑을 성실히 수행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아주 기뻐하시고 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을 정의했습니다. 신자라고 예외가 될 수 없는 단 한번 뿐이며 짧고도 광야 같은 인생길의 생수와 만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길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수기 전체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1/1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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