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4:4-5) 대적을 저주하는 기도를 해도 되는지요?
[질문]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느4:4,5)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했으나 스데반은 순교하면서도 대적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태도에서 보이는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가 느헤미야의 기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답변]
기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하고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갖는 의문입니다. 간단히 세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b,3) 기도는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분의 뜻을 미리 알아서 그에 맞는 기도를 할 수는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능통하면 그분의 속성과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는 알지만 구체적인 현실문제에 적용해서 딱 부러지게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처한 형편에 따라서 마음이 가는 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야고보 사도도 정욕으로 구하지 말라고 말하기 전에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한 까닭이라고 전제했습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하고 또 무엇이든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예수님은 구하는 것마다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고,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다고 합니다. 기도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정하기 전에 꾸준히 기도하는 자부터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자가 되면 차츰 자기 정욕으로 구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도들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대적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는 물론 심지어 하나님께 원망 불평을 터트리는 기도도 많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라.
그리고 성경을 볼 때는 가장 먼저 앞뒤 문맥에서의 의미와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육하원칙처럼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등을 잘 분석해봐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당신의 영적진리를 직접 계시한 것인지, 신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일을 행했는지, 단순히 객관적인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 등등을 먼저 확실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에게 성벽 재건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 일을 훼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거역 대적하는 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이 잘 진척되기 위해서 기도했기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합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라고 기도한 까닭입니다.
대적을 저주하는 듯한 기도를 한 까닭은 우선 그만큼 훼방이 극심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기도할 때에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도 됩니다. 기도하면 그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게 됩니다. 신자는 대적에게 대놓고 직접 분노 저주하지 말아야 하고 대신에 있는 그대로 즉, 감정마저 숨기지 말고 주님 앞에 토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대적을 위해서도 의로운 일이 됩니다. 더 심한 죄악을 범해서 정말로 더 큰 형벌을 받기 전에 그 정도에서 중지시키는 효과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때에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를 당신께서 저주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3) 느헤미야는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방 주술사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요청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신탁을 하려고 세 번이 시도했으나 하나님이 다 막아주셨습니다.(민22-24장)
심지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도 그 뜻을 바꿔달라고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거룩한 율법을 수여하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극도로 진노하여서 이스라엘을 멸하고 모세의 후손으로 다시 나라를 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여서 그 뜻을 돌이키게 했습니다.(출32:11-14)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서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라고까지 기도했습니다. 자신은 지옥 가도 좋으니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스데반과 같은 기도를 한 것입니다.
요컨대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받은 소명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기도한 내용을 성경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느헤미야나 모세나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로서 각 주어진 상황에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이다.
구약성경을 볼 때에 신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구약의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관한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뜻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 사역, 특별히 십자가 죽음의 구원 은혜 안에 드러납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반드시 신약성경에, 그것도 예수님의 뜻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편애를 받은 것 같습니다. 애굽이 열 번의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완전히 멸망하고 가나안 족속들도 다 쫓겨납니다. 이스라엘을 침공한 나라들을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해서 물리쳐 주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발람의 신탁을 세 번이나 철저히 막아주셨고 오히려 모압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그러나 이 언약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은 축복과 저주를 직접 받지 않습니다. 그를 통해서 다른 족속이 축복과 저주를 받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불려 나왔을 때에 이미 복을 받았고 그를 통해서 다른 족속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바꿔 말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열방 앞에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운 것입니다. 한 민족을 택하여 그들이 율법대로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통해서 여호와만이 거룩하신 통치자임을 온 세상에 알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항상 보호 인도하셔야 했고 그들의 대적을 나서서 저주해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약 선지자들도 그 약속에 따라서 대적을 저주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제사장 언약을 준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자 그 땅에서 쫓겨나 애굽에서처럼 다시 이방의 노예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이 땅에 세우실 당신의 나라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부터 모든 나라로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을 믿는 자들로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인 실체로 이 땅에 강력히 도래한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2-16)
예수님의 가르침을(마5:43-44) 받은 스데반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고 선언했고 스데반은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서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56) 그 후에 자기 영혼을 받으시라고 무릎을 꿇은 후에(59절)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60절) 그는 이미 성령으로 충만했고 천국으로 자기 영혼이 들려 올려가기 직전에 그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스데반 또한 성령이 시키는 선지자적인 기도를 한 것입니다.
결론을 맺자면 느헤미야나 스데반이나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지만 각자의 상황이 다르기에 그 내용도 달라진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의 기도는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관계에서 행했고, 신약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기초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성도는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으며 그 전에 꾸준히 기도하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성실히 하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나아가 그분의 소명 성취를 위하는 선지자적인 기도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6/2021)
저 역시 과거에 느헤미야서를 읽으면서 시험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어쩌면 그때는 마음속 깊은 무의식 한구석이 율법주의적으로 느헤미야를 판단했는지도 모릅니다. 저 자신도 원수를 사랑할 능력이 없으면서 말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느헤미야의 용기와 신념과 신앙심과 성령충만함을 묵상하며 깊은 은혜를 많이 받게 되었고, 느헤미야 역시 존경하는 신앙 위인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신약과 구약 사이에 계시가 점진적으로 명료화되기 때문에 느헤미야로서는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료하게 모르던 것이 (예수님이라는 인물은 몰라도 복음을 영적인 관점에서 믿기는 했겠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거꾸로 스데반과 느헤미야가 서로 입장이 바뀌었어도 스데반은 저주를, 느헤미야는 용서의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해석 감사드립니다.
의문점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성경통독을 해봐야겠다 싶어 요즘 맥체인 성경읽기를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문맥에 따라 해석하고 제대로 읽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같아 성경을 읽는 태도를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이어 또다시 친절히 답변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목사님을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