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6:10-13) 인생을 정말로 자유롭게 살려면?

돌아온 탕자 시리즈 (13)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0-13)

 

비유를 비유로 푸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청지기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제자들에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마지막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9절)고 가르쳤습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되 비유의 청지기처럼 이 땅에서의 일시적 장래만 도모하지 말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처소를 위해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과 구원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그 의미를 제자들이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도록 다양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선 두 가지 반대되는 개념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충성하는 것과 불의 하는 것, 남의 것과 너희의 것,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 중하게 여기는 것과 경하게 여기는 것, 하나님과 재물로 대비했습니다. 주님이 청지기 비유로 가르치고 싶은 주제가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처소와 하늘의 영원한 처소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절은 일종의 잠언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흉내 내어서 이 경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회사의 모든 물건을 자기의 것인 양 아끼는 직원은 복사지 한 장이라도 아끼려고 꼭 필요할 때만 복사하기에 복사기도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회사 물건은 돈 많은 사장의 것이니까 내가 알바 아니라는 직원은 용지를 전혀 아끼지 않고 비싼 복사기도 함부로 다룹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복사지나 복사기를 아꼈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평소에 회사의 것을 자기 것 이상으로 소중하게 여긴 것과 돈 많은 사장의 것이니까 낭비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 즉, 근본생각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은 재물이고 그것에 불의한 것은 비유의 청지기처럼 주인의 것임에도 자기 안전만 도모하려고 재물을 자기 편리한 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는 큰 것인 영원한 구원에는 관심이 없기에 전혀 대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절b)고 했는데 여기선 반어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자에겐 참 된 것 즉, 영원한 구원은 맡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소원한대로 실직 후에 이 땅에서 거할 처소는 확보했을지 몰라도 결코 영주할 처소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극히 작은 남의 재물도 자기 것인 양 귀하게 여기는 자는 영주할 처소로 영접된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종의 비유

 

이는 크리스천의 재정 관리에 관한 윤리적 종교적 지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을 잘 관리하여서 구원을 얻도록 노력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눈 기준이 돈과 하나님 중 누구를 주인으로 삼느냐에 달렸다고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최종 결론에서도 주인과 종의 관계라는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이 비유가 뜻하는 바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처음부터 끝까지 복종하는 자입니다. 한 주인을 모시면서 다른 주인의 명령도 함께 따를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한 쪽을 더 중요시해도 안 됩니다.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쪽은 미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돈을 미워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히브리 어법에는 어떤 개념을 강조할 때는 정반대되는 개념과 대조시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는 말씀도(롬9:13) 야곱 즉,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에서 즉, 이방인을 미워한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종은 자기 주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려고 다른 주인인 돈을 미워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돈이 사악한 것이니까 아예 담을 쌓고 지내라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돈은 이 땅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신자도 열심히 자기 직업을 통해서 벌어야 합니다. 주님도 지금 돈을 사용해 친구를 사귀라고 그것도 구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경히 여긴다고 해서 한 쪽을 70% 사랑하고 다른 쪽을 30%만 사랑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둘로 나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후에 영주할 처소에 70%만 들어가고 나머지 30%는 그렇지 못한 처소에 들어가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은 이 땅에서부터도 주인에게 100% 순종해야 합니다.

 

이 결론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웃자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주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로 보충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죽은 후에 거지와 부자 두 사람이 거처하는 처소가 완전히 둘로 나뉘었습니다. 심판을 받은 부자가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브라함에게 저쪽으로 건너가게 하던지 물을 찍어서 목이라도 서늘하게 추기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고 냉정하게 딱 잘라서 거절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 번 죽기 마련이고 죽은 후에는 누구에게나 이처럼 완전히 둘로 나뉘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9;27)

 

청지기 비유의 최종 결론

 

이제 주님이 청지기 비유로 말씀하고 싶은 바는 확실하고 명료해졌습니다. 인간은 딱 두 부류로만 나뉜다는 것입니다. 그 중간의 회색분자는 사실상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오직 돈만 주인으로 모시고 돈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가는 자와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가는 자입니다. 각 자의 사후의 영원한 운명도 그 주인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인간에게 이 땅의 일시적인 처소를 예비해주는 주인은 돈이고 영계의 영주할 처소를 예비해주는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12절의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합니다.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남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해야 의미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것이면 이미 소유주가 너희인데 다른 사람이 주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것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뜻입니까? 대체 주님은 왜 이런 엉뚱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비유에서 청지기는 불의한 죄를 범함으로써 자기 직분을 잃었습니다. 재물을 주인의 뜻에 맞게 의롭게 관리했더라면 자기 직분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의 노예가 됨으로써 자신이 찾아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찾아 먹지 못한 꼴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구원을 얻지 못하면 자기 것도 못 챙겼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원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자 소망이지 않습니까?

 

천국에선 돈이 전혀 필요가 없고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돈이란 이 땅에서의 형통과 안락만을 위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 영생에 대해 관심이 없는 자는 어떻게든 돈만 많이 모으려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면 돈이 주는 이 땅의 것밖에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주님의 이 결론에 대해서 자칫 오해해선 안 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라고 오직 하늘의 영생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신자가 인생을 즐기면서 살면 큰 죄라도 짓는 것처럼 정죄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손해 희생 수고를 당해야 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최저 빈곤선에서 살면서 항상 천국 복음만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 여정은 현실과는 무관하게 오직 천국만 바라보고 걸어가는 고난의 행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면 믿음도 재물처럼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집니다. 믿음은 이 땅의 고달픈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물질은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필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건전한 문화와 문명을 신자도 공유하며 즐길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인간을 위해서 다 마련하신 후에 인간만 직접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만드신 후에 심히 기뻐했습니다. 가장 먼저 인간이 이 땅에서 살게 된 것 자체를 하나님은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육 번성하고 무엇보다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그 지시에 순종하여 모든 과일과 채소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각 종류별로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 각각을 정성껏 경작하고서 그 수확을 맘껏 즐기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하나님도 진정으로 원하십니다. 그분이 인간을 향해 갖는 첫째 소망입니다. 신앙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모든 죄악을 다 물리치고 사탄은 씨도 없이 다 말려서 죽여야만 하는 투쟁의 연속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일 말씀보고 기도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은 십자가 대속 제물로 바쳐져서 죄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에 찌든 상태에선 아무래도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구원의 확신이 생기는 까닭도 그 이후의 이 땅의 삶을 행복하게 살게 해주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이전 삼년 간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실제로 살아서 보여주었습니다.

 

당신께서 베푸신 첫째 기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최상급 포도주로 바꿔주는 것이었는데 일차적으로는 그 잔치의 기쁨을 깨어지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세 율법으로 지켜야 할 결례용 물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지금 청지기 비유를 가르치는 이유도 당신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그런 교제를 한 것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교회나 신자들의 모임에 앞서서 포도주와 성찬을 나누며 함께 즐겁게 교제한 셈이지 않습니까?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냐”는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삼는 것에 따라 구원이 달라지므로 당연히 이 땅에서의 삶에서부터 그 주인들이 주는 행복도 둘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받아야 할 너희의 것이 됩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소망

 

그런 하나님의 소망은 알다시피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써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이 산출하는 다른 모든 재물을 네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당신께서 다 마련해 주셨으니 너희는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단 하나님이 네 주인이라는 사실 하나만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행복하게 살던 아담에게 어느 날 사탄이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도 절대 죽지 않는데 너희가 그것을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까봐 하나님이 그것이 싫어서 먹지 못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아담은 나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데 그것을 막다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고 오히려 미워한다고 여겼습니다.

 

아담은 곧바로 그것을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아니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려 들었습니다. 아담이 몰랐던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이 당신처럼 되는 것이 싫었다면 그 선악과를 그곳에 둘 리는 없습니다. 그곳에 두었어도 이것을 먹는 순간에 너는 정녕 죽는다고 경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인류에겐 큰 불행이었지만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온전한 진리였고 사탄은 거짓의 아비였습니다. 그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죄책감에 휩싸여 두려워졌고 스스로도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니까 이전에 누렸던 행복했던 삶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엄격한 경고대로 실질적인 죽음이 엄습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동기를 한 단어로 줄이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유입니다. 하나님도 나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내 일은 내가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가 내 인생을 조금이라도 통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라고 해도 절대 자기를 간섭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요롭고 아름답던 이 땅에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무성해졌습니다. 자기만 최고로 높여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워지려는 죄인들의 싸움터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전의 동산의 재화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수단에 그쳤으나 인생의 목적으로 변했습니다. 심지어 돈 자체가 인생이고 돈이 인간을 종으로 부려먹는 판국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주인으로 삼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돈이 자신의 안전과 기쁨과 행복이 보장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짧고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느 누구의 통제 조종 간섭 없이 자기 뜻대로 펼쳐보려면 최대한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자유란 자기에게 미치는 어떤 통제력이나 영향력도 제거 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시작과 끝인 자신의 출생과 죽음도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중간과정을 자기 뜻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인간적 철학과 사상의 성지인 아테네에서 전도하면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제한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 땅에 흩어져 살게 하면서 그 연대와 거주의 한계를 정하셨는데 사람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행17:26,27) 연대는 출생과 죽음이고 거주는 민족과 국가인데 인간이 절대 임의로 선택할 수 없고 하나님이 정해준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이 간단한 진리만 알아도 하나님을 찾아서 겸손하게 엎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생성된 첫째문제는 인간이 이 간단한 진리도 외면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사탄에게 속아서 자유의 본질을 전혀 틀리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 부르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겠다는 완악한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악과 명령은 오히려 인간에게 온전한 자유를 보장해주려는 축복이었습니다.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대로 순종만하면 모든 것을 당신께서 다 책임지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인간은 당신의 품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일이라곤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는 바꿔 말해 재물만 주인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온전한 자유를 보장하시면서도 그것을 찾아 누리는 방식마저 인간의 자유에 맡겼습니다. 하나님만이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분의 참 자유에 참여할 때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주인을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으로 바꾸는 순간 곧바로 그 참 자유가 상실된다는 것이 정녕 죽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재물을 주인으로 삼아 이 땅의 안전만 도모하는 자는 너희의 것조차 너희가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돈을 하나님과 같은 인간의 주인 되는 위치에 두었다고 해서 돈 자체가 신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탄이 돈을 갖고 장난치는 것도 아닙니다. 사탄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속이기만 할 뿐입니다. 돈을 잘 활용하면 이 땅에서 거주할 처소를 풍요하고 화려하게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불의한 청지기처럼 실직하게 될 위치에 있는 자에게 네 권한 한도 내에서 주인의 돈이라도 불법 편법을 사용해서 네 앞가림부터 하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사탄이나 돈이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를 제 멋대로 행하고 싶은 탐욕이 앞서는 인간에겐 그 지극히 작은 재물마저 올바르게 사용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지극히 작은 것의 노예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전락합니다. 돈 때문에 너무나 치사하고 추악한 꼴에 빠져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인생을, 나아가 자기라는 존재를 정말로 귀하게 아끼는 자라면 절대로 돈을 주인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생생한 교훈인 셈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고난 중에 힘들어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해서 신자는 항상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돈이 나쁜 것이 아니며 신자도 이 땅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현재 궁핍하니까 하나님이나 자기를 변명하려고 자족하라는 권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풍부에 처할 때도 있었고 그 때도 만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배고프던 풍부하던 기쁨과 감사를 잃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즉, 자유로워졌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도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하면 하나님께 내가 능력을 받아서 못할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했지 내가 그 능력을 받아서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앞에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으니 문맥상으로는 궁핍이든 풍부든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을 뜻을 따라서 살고 그분의 일을 하는 데는 어떤 장애도 담대히 맞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4절에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더러도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으니 잘했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지하여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면 괴로움에 참여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로선 세상 어떤 것도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음을 알기에 온전히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이 땅의 어떤 비방 멸시 핍박에도 심지어 순교까지도 두려움이 없어졌으니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사람이 현실적으로 자기를 망하게 만든다고 해서 주님 안에 거하고 있기에 결코 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자기도 언제든 주님을 위해서 그럴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죽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자유라곤 없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의 신분이면서도 다리오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경배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왕의 조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방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평소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 인생입니까? 이 땅에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만큼 행복한 인생은 없습니다.

 

실제로 사자 굴에 던져졌어도 굶주린 사자 떼들이 입도 벙긋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하나님만 오직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기에 사자 굴 안에서도 하나님의 자유의 울타리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껏 사자들이 하나님의 자유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이나 바울이 자신들의 삶과 일생이 비록 현실적으로는 고달팠어도 행복하지 않다고 또 자유롭지 않다고 불평했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얻는 기준을 현실적 자유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분이 시키는 대로 또 시키는 것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시키지 않거나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시키는 일을 70%만 하고 돈이 시키는 일을 30% 해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아주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자유로워져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매일 그 성취도를 올려나가는 것이 신앙여정입니다.

 

청지기 비유가 말하는 바는 참 자유란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자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삶이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그래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진리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4/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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