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6:19-25) 죽기 전에 인생 역전을 이루라. 

돌아온 탕자 시리즈 (15)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19-25)

 

부자는 지옥 가는가?

 

예수님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악용하여 사람 중에 높임을 받고 치부한다고 야단쳤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한 목적과 정신은 전혀 실천하지 않는 외식적인 경건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모세의 이혼증서규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서 간음죄를 범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어서 세상에서 호사를 누렸던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 반면에 세상에서 고생만 하던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서 편안하게 지낸다는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부에서 부자는 물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던 그 극심한 고통에 대해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미리 경고해주고 싶다는 요청마저 거부당했습니다. 비록 비유이긴 하지만 사후심판에 대해 예수님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명했기에 종말론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비유가 길고 내용이 많아서 두 부분으로 나눠 우선 전반부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한다고 야단쳤다고 해서 비유의 뜻이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는 천국 간다거나 하나님은 부자보다 가난한 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위인들에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창세기의 네 족장은 물론 베드로도 당시로 봐선 부자 축에 속했고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가족의 묘에 묻은 아리마대 요셉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한 장소에서 15장과 16장 두 장에 걸쳐서, 길게 잡으면 17:10절까지 바리새인과 제자들에게 번갈아가며 가르치고 계십니다. 두 장에 걸쳐서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고 있는 핵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돈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주인으로 모시는 두 부류로만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모든 구절들도 그 주제와 일치 내지 연결되도록 해석해야 합니다.

 

주님은 돈을 사랑해서 주인으로 삼는 자는 사람들 사이에 높임을 받지만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는 낙원이 아닌 음부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의 일관된 흐름에 따르면 비유에서 부자는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고 거지는 그들에게 멸시 받았던 세리와 죄인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목사들과 교인들이 지옥에 간다는 아주 심각한 의미가 되므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당시 상황에 비추어서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이상한 비유의 내용

 

그런데 비유에서 그 두 사람에 대한 설명이 조금 이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부자인 것은 맞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사람의 칭찬을 받을 만큼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자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열고 있다고 합니다. 세리들도 부자인데 큰 병을 앓는 거지로 비유했습니다.

 

부자가 호화로운 옷을 입은 것은 바리새인들이 옷깃에 푸른 술을 길게 늘어뜨린 것에 빗댄 것입니다. 날마다 연락한다고 했으니 일상의 삶 자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19절) 말하자면 항상 그렇게 차려 입은 비슷한 신분의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푸짐하게 먹고 마시면서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지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도 배불리 먹으려고 했지만 개들이 와서 상처를 핥았다고 말합니다.(22절) 거지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배불리 먹었으면 죽었을 리 없고 또 힘을 얻어서 개들이 와서 상처를 핥는 것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전염병을 염려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이 거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체면과 자존심을 따질 처지가 아닙니다. 그런 음식이라도 주어먹겠다고 대문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탕자 비유의 둘째 아들이 돼지 사료라도 먹겠다고 덤빈 것과 같은 처지라는 뜻입니다.

 

개가 헌데를 핥았다는 것은 부정적 긍정적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지가 개에게조차 모욕을 받았다는 것과, 사람들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도 개만 관심을 가지고 헌데를 핥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의 원어가 ‘퀴온’으로 길거리에 떠도는 사나운 야생 개를 뜻하므로 아무래도 개마저 거지를 천대했다는 뜻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여기서 떨어지는 것이란 ‘던져지다’라는 수동태로 부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땅바닥에 던진 것을 뜻하는데 야생 개들이 그것을 받아먹은 것입니다. 부자는 매일 배불리 먹으면서 남은 것을 개에게는 던져주었어도 거지에게는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지는 사람인데도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이방인이 쥐엄나무 열매를 돼지에게는 주어도 둘째 아들에게 주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방인은 몇 번 강조한대로 큰 기근 때문에 자기 소유인 돼지를 죽일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지금은 날마다 흥청망청 먹고 놀면서 자기 가축도 아닌 야생 개들에겐 음식을 던져주어도 거지에겐 주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상대도 않는 바리새인들이 사실은 이방인보다 더 악한 셈입니다.

 

전도되는 영원한 운명

 

그리고 예수님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 비유가 유일하므로 그 이름의 의미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인데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1장의 죽음에서 소생한 예수님 친구이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오라버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부자가 음부의 고통이 격심해서 제발 물 한 방울이라도 마시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아브라함은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를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25절)고 설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역본에 부자의 좋은 것 앞에 소유격 대명사가 붙어 있으나 나사로의 고난에는 소유격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재물로 안락을 누렸으나 거지 나사로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유대사회의 구조적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거지를 개마저 관심을 두지 않는 비참한 처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날마다”라는 말이 뜻하듯이 부자는 일생동안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습니다. 일생이 그랬다는 것은 아예 인생관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자기 소유로 자기 안락을 누렸고 자기 소유로 행한 것이라고는 자기를 높이는 것뿐이었습니다. 형통과 출세만을 위해 소유를 늘렸고 소유 자체가 목적인 인생을 산 것입니다. 바로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음부에 떨어진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선 완전히 소망이 끊겼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소망이 생기는 세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밥도 한 끼 나누지 않았습니다.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대문에 누었다고 합니다. 큰 중병을 안고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아보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동족으로부터 받은 상처 비방 핍박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유대 공동체에 들어가 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쳐놓은 철조망은 견고하기 짝이 없었고 아무도 세리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세리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구원의 산성인 하나님에게마저 가지 못하도록 접근 금지 조치까지 내려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싶어도 성전 문 앞에서 제지되었고 그 안에서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될 예배를 상상만해야 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자로 하나님이 행동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으로 그들을 인간 취급해주며 함께 식사해주었습니다.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래서 그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이어가고자 맨 앞자리에 나와 앉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는 자 즉,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가 되었고 그래서 낙원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죽은 후에 운명이 갈리게 된 이유가 단순히 재물의 많고 적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들과 격이 맞는 사람들을 따로 정해서 자기들끼리만 매일 만나서 교제하는 자들이고 거지는 그런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멸시 소외 격리된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비유의 부자는 영적인 충만 마저 자신의 소유를 늘림으로써 스스로 채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였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의 높임을 받았기에 영적으로 충만해졌다고 믿고 살았으나 죽은 이후에는 영적으로는 완전히 파산한 거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거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거지같은 인간적인 의에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땅에선 사람들이 추종하니까 최고로 의롭다고 자부했으나 치명적인 착각이었고 결국 영원한 운명은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반면에 거지는 영적으로 아무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겸비하게 인정했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선 영적으로 파산되어 거지같이 보였으나 사실은 주님이 도와주셔서 죽은 후에는 영적으로 가장 풍요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절망을 하나님이 낙원에서 희락의 찬양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방식대로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세상에선 전혀 불가능하기에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인생역전을 이루어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사람들 규정에 따라 정죄당하며 살았던 죄인이 하늘에선 영원한 의인이 되었고, 반대로 부자는 이 땅에서 자기들이 정한 규정에 따라 잠시 의인이라고 떵떵거렸지만 하늘에서 영원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지옥 심판은 있다.

 

비유이지만 예수님이 낙원과 음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첫째가는 뜻은 사람이 죽으면 구원과 심판 반드시 둘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도 그 존재가 멸절되지 않고 영원히 거주할 처소의 상황이 완전히 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부터 돈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는데 죽은 후에도 그 상태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이 땅에서의 선행과 공적에 대해 개인별로 점수를 따로 매길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녀들만 당신이 품어주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지옥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어떤 죄인도 용서해주시기에 죽은 후에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의 심판을 하실 리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 주장이 옳으려면 이 비유부터 부인해야 하고 그럼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다 부인해야 합니다. 그런 주장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뜻이며 나아가 스스로 성경을 뜯어고치겠다는 뜻입니다.

 

지옥 심판을 하지 않는 사랑뿐인 하나님이라면 이 땅에 살아있을 때도 징계나 연단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도 축복만하고 죽은 후에도 아무 심판도 하지 말아야 하나님의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줘서 공부 못하게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만 바라면 인간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그분을 거역하고 돈을 주인으로 삼는 자이므로 것으로 그분의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려 들다가 도리어 자기들이 부인하는 지옥에 떨어질 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부족분을 보충하려고 새 규정을 만든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의 도움은 전혀 필요 없으며 스스로 당신을 증명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계시된 대로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 없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만약 지옥 심판이 없다면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심각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고 크게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인 것과 사실상 같습니다. 그러면 인생에서 첫째 진리는 돈을 주인으로 삼아서 형통 출세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나 바리새인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을 이용해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최고로 현명합니다.

 

자유자와 노예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낙원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라고 했습니다. 비유란 청중이 익히 알고 있는 사물이나 개념을 인용하기에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또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품에 가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거지는 부자의 대문 앞에서 객사했고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공동묘지 같은 곳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사상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천사들이 받들어 모셔가고 악인은 악귀들이 데려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지가 천사들에게 받들려져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합니다.(22절)

 

바리새인들이 유대인 취급도 해주지 않던 세리도 분명히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그들을 유대인 취급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 엘리에셀의 이름을 따서 거지를 나사로라고 부른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은 정작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히브리 혈통만 가지면 이미 구원 받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심판했는데 하늘 법정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유대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이 계시한 구원의 절대적 진리인 예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영원한 심판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은 몰라도 영적 신분도 아브라함 이후로 누구에게도 종이 된 적이 없이 항상 자유로웠다고 반박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로마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할례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밥도 한 끼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들도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노예가 되어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형통과 출세를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이방 제국 로마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도덕과 종교의 잣대만으로 자기들 임의대로 사람을 차별하는 바람에 모든 이를 이웃 삼아 아름답게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간 최고의 자유와 완전히 담을 쌓고는 자기들 율법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거역했으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은 부자는 죽은 후에는 괴로움을, 살았을 때에 고난을 받은 거지는 죽은 후에는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25절) 인간사회에서 인간이 정한 규정에 묶여서 노예로 살았던 세리와 죄인이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에선 자유자였고 반대로 도덕과 종교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른 바리새인들은 인간사회에서부터 사탄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또 죽으면 육체는 이 땅에 남아서 무덤에서 썩으나 모들 사람의 영혼은 마지막 날의 부활을 기다리며 음부라는 한 장소에 들어가 무한정 잠을 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자 말자 돈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낙원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는 음부로 나누어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의 인식이 가능해서 아브라함과 교제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우편의 강도가 진정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고 선언했습니다. 오늘이니까 곧바로 낙원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선 불가능했던 순전한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는 예수님이 설명한 음부의 물리적 상태에 대해선 구체적인 의미를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공간으로 제한되어 사는 인간은 영계의 일을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것뿐입니다. 어쨌든 낙원은 지극한 기쁨이요 음부는 지극한 고통인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이더러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이 땅에 살아있을 때부터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분

 

이 비유에 우리 세대가 귀기우려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엄숙한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주일마다 정장을 화려하게 빼입고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찬양에 맞추어 감동적으로 눈물 흘리는 화려한 예배 당 안에 예수님이 과연 함께 하실까요?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우리가 이웃을 정해서 날마다 끼리끼리 만나고 있다면 말입니다. 혹시 예수님은 교회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거지를 씻어주시고 아들이 입을 예복을 입히고 아버지의 인장을 끼워주고 있지는 않을까요? 말하자면 코로나 사태를 통해 일 년이나 교회 문을 열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그 동안 이 문제를 심각하게 따져보라는 것이 아닐까요?

 

오래 전에 제가 한국에 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업무 관계로 만난 불신자 독거노인이 너무 안타까워서 복음을 전하고 제가 다니는 교회로 초대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어떤 부정이나 스캔들이 없고 목사님은 성경대로 말씀을 잘 전하기로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저로선 최고 좋은 교회라고 추천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주만 출석하고는 다른 교회를 찾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봤더니 교인들 분위기가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기복신앙을 철저히 부정하기에 부자들을 별로 없고 중산층들이 많이 출석했습니다. 신자들도 그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도 아무래도 교회가 강남 8학군에 위치하다보니 자기는 외톨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열등감 내지 자격지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그분에게 그동안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그만큼 깊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삶의 무게에 눌려 바쁘게 살아야 하는 우리 책임과 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명색이 신자이면서 그런 소외된 사람들의 상처 내지 열등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평소에 그만큼 남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예수님은 막상 그런 자들에게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알기 쉽게 바꾸면 인간이 정한 규정과 관습인 도덕과 종교로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절망에 빠진 자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이 돼지 취급도 받지 못했던 그 돼지우리에, 나사로 거지가 개 취급도 받지 못한 그 부자의 대문 앞에까지 찾아오셔서 함께 울고 슬퍼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이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 사람과 장소에만 가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를 만나줄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단순히 현실에서 돈이 없어서 괴로운 자가 아닙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구조적 사회적으로 떠밀려서 변방에 밀려난 자들입니다. 너무나 힘든 지금 이 세대에는 그런 자들의 아우성이 천지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세상에선 얻을 수 없는 영적인 위로를 받으려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만 찾아다니십니다. 주님의 마음과 몸이 가시는 곳에 신자의 마음과 몸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목적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제발 세상과 돈에서 위로를 찾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현실 세상 안에서 삶을 영위하려면 돈이 필수적이며 신자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주님이 정작 문제 삼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자기를 높이려들면 자연히 돈만 목적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으로서의 참 자유가 돈에 속박되고 그 묶인 채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천국에서 역전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불신자들에게 나중에 천국에 가서 보자는 식의 생각을 가져선 안 됩니다.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할 지옥으로 떨어질 그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반대로 말해 신자라면 이 땅에서의 핍박 멸시 고난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런 고난 가운데 주님의 권능과 은혜가 더 커지니까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비슷한 고난 중에 있는 자를 찾아가 위로하며 기도해줄 수 있습니다.

 

신자가 죽음 이후 역전될 인생만 소망해선 안 됩니다. 불신들도 그런 소망은 갖고 있습니다. 신자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9,10)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역전된 인생 즉, 돈의 묶임에서 풀린 자유자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사랑하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죽음을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정답을 미리 알고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만큼 무서운 자는 없습니다. 죽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 끊어지지 않고 날마다 더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자에게 더 이상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4/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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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민25:6-13)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세상을 질투하라. master 2019-12-2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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