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3,4) 신자가 절대로 행해선 안 되는 한 가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8)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7:3,4)

 

대조되는 두 가지 경우

 

예수님은 다른 이로 실족하게 하는 자들은 맷돌에 매달려 익사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2절) 비유이긴 해도 아주 과격하게 들릴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모든 다른 종교의 경전과 아주 판이합니다. 인간 선각자가 각성한 도덕적 종교적 계명의 모음집이 아닙니다. 이 땅과 인간을 포함한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류 역사와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개입하여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온 과정을 당신께서 계시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 같이 부족한 인간끼리라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므로 그렇게 선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도 단순히 형제가 수많은 죄를 범해도 회개하면 용서해주라는 뜻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 누구나 아는 도덕적인 가르침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꼭 강조해야만 하고 또 성경으로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다 잘못을 회개한다고 말하는데 용서를 안 해주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닙니까?

 

당시 유대교에선 세 번만 용서해주어도 최고 의인으로 대접 받으며 세 번을 넘어서면 용서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라고 합니다. 같은 사람이 자기에게 하루 안에 일곱 번이나 잘못을 범한다고 상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간과 쓸개를 다 빼놓지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해도 용서해주라는 것도 하나님이니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당부했으니까(3절) 앞에서 말씀하신 실족하는 문제와 연관된 권면입니다. 주님은 1-2절에서 실족하게 하는 것과 실족하게 하는 사람을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선 만일이라는 조건을 나타내는 접속사를 두 번 사용하였으므로 두 가지 다른 경우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려면 구태여 만일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할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두 경우에 맞추어서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두 가지 방식을 설명한 것입니다.

 

첫 번째의 만일은 행동의 주체를 밝히지 않고 단순히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됩니다. 신자를 포함해 누구나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겪다보면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족하는 형제에겐 본인이 미처 몰랐던 외부의 시험과 훼방은 물론 본인의 잘못에 대해 경고해주어야 하고 그 경고를 수용하여 회개하면 당연히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만일은 실족하게 하는 사람, 그것도 작은 자 하나에게 그러는 사람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과 연관됩니다. 그래서 네게 죄를 지어서 실족하게 만드는 사람도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내가 잘못했다고 회개하거든 용서해주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와 무관하게 실족한 다른 형제들을, 두 번째는 자기를 실족시키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 경우는 쉽게 이해되고 또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으나 문제는 두 번째의 경우입니다.

 

일곱 번의 회개란?

 

하루에 일곱 번이나 회개한다고 해서 성격이 변덕스럽고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잘 살피면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상처나 핍박을 주어서 실족하게 해놓고 한 번이라도 먼저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만도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솔직히 우리 경우에 비춰보면 그 일이 얼마나 의로운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일곱은 완전 숫자로 끝까지라는 의미가 있기에 자신이 잘못해 남을 실족하게 만들었어도 끝까지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주는 자의 입장에서도 그러니까 그를 끝까지 용서해주라는 뜻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고 했으니까 인간 세상에선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죄에 빠트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땅은 가시덤불을 낼 것이며 사람들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창3:17-19)

 

그런데 가시덤불 속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이가 편안하게 소산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으니까 인간 세상은 필연적으로 그로 인한 폐해로 더렵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고통도 늘어날 뿐입니다. 죄의 삯이 서로가 서로를 실족하게 만드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 자체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받는 형벌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처절하게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거룩한 경륜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 자신의 영적 실상이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지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제가 그 동안 주변 사람들을 수도 없이 실족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아져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나만 억울하게 상처받았다고 여기고 상대를 미워했던 일들에도 내 잘못이 아주 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남들보다 의롭게 행동한다고 자부한 것들이 정작 나만의 교만이었고 그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가 되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남들에 비해서 제가 훨씬 더 추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스스로는 꿈도 꾸지 않았던 생각인지라 성령님의 깨우침이었습니다.

 

물론 현실 삶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충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진작 깨닫고 모든 인간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알았다면 최소한 내 쪽에서 먼저 양보 희생 인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 최초의 거룩한 깨달음을 얻고도 여전히 치사하게도 그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할 용기까지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 앞에만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한동안 그들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용서를 구하는 마음은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강조의 수사법을 사용했지만 하루에 일곱 번을 상처주고 실족하게 했다면 그 사람으로선 어쩌면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잘못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잘못인 줄 깨닫자 찾아와 회개하면서 용서를 구한다면 그 사람의 심성이 여리고 순전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 전에 일곱 번이나 죄라고 깨달은 것만 해도 영적으로 대단한 수준입니다.

 

바라새인들의 경우와 대조해 보십시오. 그들은 완악하게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 대적했습니다. 그 전에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신 정신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임의로 만든 추가규정에 따라서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비천한 자들을 외모로만 차별하여서 유대 공동체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자기들 민족만의 영광을 회복해줄 국수주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이 실족하게 만든 자들에게 한 번이라도 먼저 찾아가서 진정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도 음부에 떨어진 부자 바리새인은 땅을 치고 후회한들 이미 늦었습니다. 살아있는 형제들도 죽었던 나사로가 가서 경고해도 믿지 않는다고 주님이 선포했지 않습니까?

 

하루에 일곱 번이나 회개하는 것이나 그런 사람을 군말 없이 용서해주는 것이나 거의 신적인 경지에 이른 것인데 과연 이런 자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회개해도 그렇지 하루에 일곱 번이나 찾아와서 용서를 구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우선 그 사람이 너무 가벼워서 신뢰할 수 없다는 마음부터 생길 것입니다. 자기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 진의를 의심할 것이며 오늘 용서해준들 내일 또 그러면 점차 시쳇말로 영혼 없이 대하다가 아예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대놓고 그러진 않았어도 사실상 정죄 심판한 것과 같아집니다.

 

주님이 지금 인간의 그런 영적 수준을 모르고 이런 권면을 했을 리는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당부했는데 어쨌든 바리새인들의 행태는 절대 따르지 말고 그와 반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너희들끼리 임의로 만든 도덕적 종교적 규정에 따라 하나님 밖으로 쫓아내는 심판은 물론 절대로 차별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에 대한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만의 절대적인 주관 사항이므로 인간끼리는 오직 사랑만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일곱 번이나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주라는 말씀은 죄에 찌든 인간끼리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모두가 참 사랑을 하지 못하니까 형제의 잘못은 끝까지 용서해주어야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용서해주지 않으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질 것도 없이 서로 실족하게 만드는 일이 반드시 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것부터 크게 상처받을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선책이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니까 차선책으로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형제의 범위

 

그럼 그 용서하고 사랑해주어야 할 사람 중에는 어떤 이도 포함됩니까? 주님이 비유로 물에 익사하는 것이 낫다고 했으니 앞서 말한 음부의 불심판과 비교한 것입니다. 그럼 낙원에 간 거지 나사로는 용서할 이유가 없으니 지옥에 떨어질 바리새인들이 용서의 대상이 됩니다. 앞으로 제자들을 괴롭히고 실족시킬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유대 공회원 같은 동족은 물론 극렬한 박해를 가할 이방인들이 그 대상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핍박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의 마지막 소망인 하나님마저 그들로부터 차단시켰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신 주님을 자기들이 만든 규정을 위반했다고 십자가 죽음으로까지 몰아갔습니다. 인간의 이런 부패한 심령을 꿰뚫어 아시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3-48)

 

유대인들이 임의로 저주 심판했던 세리와 이방인들조차도 같은 형제끼리는 사랑을 잘 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사랑은 믿음과 상관없이 본능에서 나오는 사랑 즉, 짐승도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달라지려면 그와 다른 차원의 사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핍박하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명했습니다.

 

본문 4절도 다른 말로 바꾸면 바로 원수도 형제의 범위 안에 넣어서 사랑해주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신자에겐 형제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를 자기가 정하는 것 자체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초대 교회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행태는 너무나 비윤리적이고 심지어 비상식적이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오래 동안 구약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경건의 훈련을 쌓으며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이러했습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거짓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설명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또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 값을 감당하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원수에 대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해주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유대인 형제들에 대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하고는 운명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과 정성에서 당시 최고였던 바리새인 랍비 바울이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다메섹도상에서 일대일로 대면한 후로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고 하면서 유대인들의 구원을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바울은 신자들을 극렬히 핍박했습니다. 그와 똑같이 여호와를 위하는 열성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거꾸로 기독교를 열성적으로 전파하는 바울이 눈에 가시가 되었습니다. 그를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겠다고 사십 명이 결사 단체를 만들어서 암살할 기회만 노렸습니다.(행23:21) 세리와 죄인과는 밥도 한 끼 먹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제 그들과 밥을 먹고 교제하는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밥도 한 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속에 없는 사람들끼리는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복수하는 것은 의롭다고 칭송까지 받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서로 실족하게 만드는 일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당신과 원수 된 죄인을 위해서도 자기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뿐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완악한 동족을 위해서 자신은 오히려 연자 맷돌에 묶여 바다에 빠져도 좋으니 저들이 제발 구원 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곱 번을 용서하려면?

 

그런데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가 그것도 예수 믿고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또 남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일이 하루에도 일곱 번은 더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도 제 경우처럼 상처 주었던 그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치사하게 하나님 앞에만 나가서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가장 큰 죄 당장에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거나 복을 덜 받을 것 같은 것만 겨우 꺼내어 회개하지 않습니까?

 

그럼 언제쯤이나 바울이나 스데반처럼 원수마저 사랑할 수 있습니까? 또 그러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온전하니까 너희도 온전하라고 명했지만 과도한 요구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도 넘게 남을 실족하게 만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경지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너무 어렵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정확히 보십시오. 당장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찾아와서 회개하는 자들을 넓은 마음으로 형제로 받아주라고 합니다.

 

문제는 어떤 잘못이든 누구든 끝까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결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순전하게 따르고 있다면 우리 속에 평생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온전하십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게 하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기도만 하면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감정과 힘과 용기가 불끈불끈 샘솟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신자에게 행하시는 첫째 사역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침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으면 자신이 얼마나 처참한 죄인 중의 괴수이며 믿은 후에도 여전히 그런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철저히 깨닫게 해줍니다. 나야말로 하루에도 일곱 번씩 남을 실족하게 만들기에 주님의 긍휼 없이 스스로 행했다간 한시도 부끄러워서 살아가지 못한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부터 너무나 불쌍한 존재임을 안다면 다른 이들도 나와 똑같이 불쌍한 존재라고 실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영적으로 너무나 비참한 거지인데 거지끼리 서로 자기가 잘 낫다고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비방 정죄하면 아직도 영적으로 파산한 적이 없거나 아니면 완악했던 옛사람이 여전히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속에 어쨌든 남들 앞에 뭔가 내세울 것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저런 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고 그러기는 죽기보다 싫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확히 말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를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그들이 행한 일로 비례해서 기근 홍수 염병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 구원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떠나서 그들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으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네가 원수라고 여기는 바로 그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너희도 당연히 그를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가 하나님이 온전하니까 너희도 온전하라는 뜻입니다.

 

상대의 외모를 보면 특별히 나에게 실족하게 한 행동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의 한 인격체 전체를, 그것도 이 땅에 살아갈 일생 전체를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다 불쌍합니다. 영적으로는 한 결 같이 연약하고 어리석고 가난하고 비참해서 잘나고 못나고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 들 수 있는 인간은 인류 역사를 통 털어도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작은 자로서 목자 없는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런 자들을 판단 정죄 심판하는 자가 오히려 더 불쌍하고 추한 것입니다. 똑같이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니까 매일 수도 없이 스스로 발을 헛디디거나 상대를 걸려 넘어지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주변 사람들의 영혼을 예수님의 심령으로 잘 살펴보십시오. 눈물과 한숨을 짓지 않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설령 나를 실족하게 해도 그 사람만의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사정이 있거나 영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의 좋은 기회

 

거기다 코로나 사태로 사정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것 같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에 목자 없는 양들만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아니 양들이 점점 서로에게 이리 떼가 되어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실로 오묘하고 광대해서 지금이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 전도에 아주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경제적인 궁핍보다는 하늘을 뒤덮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미세한 병균 하나에 피조물 중의 최고로 고급한 존재인 인간이 그것도 첨단 문명을 자랑하면서도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망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전지전능하신 절대자에 의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갈증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의 모든 일들에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냥 허무하게 흘러가면서 흑암의 그림자만 점점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에 부족함이 없고 사치스러워졌어도 단순히 삶을 살아가는 도구와 방식만 더 편리해진 것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넘칠수록 육체의 비만만 늘어나는 반면에 정신은 나태해지고 영혼은 더더욱 부패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교리로만 접근해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의 마음 문이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을 소망한다면 영원한 것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물질계에 제한되어 한시적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제시할 수 있는 영원한 실체는 사실상 없습니다. 그나마 영원에 가장 가까워서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랑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자신에게서 나오는 열성과 섬김만으로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실제로 자기는 죽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최소한 용서해주는 모습만이 다른 이의 영혼을 움직여서 전하고 있는 십자가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더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맺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의 형제가 되는 데는 자격과 조건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 아니라 칠십 번을 잘못해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은 바로 십자가 구원 진리를 간단히 축약한 것입니다. 쉽게 풀면 하나님이 내가 세상 죄인을 죽기까지 사랑해주었는데 인간인 너희는 사랑은 몰라도 용서는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예수 믿는 너희조차 하루에도 수십 번도 넘게 용서해주는데 왜 너희는 남의 잘못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용서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하신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순히 신앙성숙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형제의 범위를 너희 스스로 정하면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거나 최소한 그렇게 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매일 아침마다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볼 질문은 하나입니다. 아직도 내 속에 용서하지 못한 형제가 한 명이라도, 또는 그의 특별한 행동 하나가 계속 싫고 미운 상태로 남아 있는지를 말입니다.

 

(5/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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