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이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나요?
[질문]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글을 다 읽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뭐가 맞는 말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중심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마귀가 미혹으로 악한 생각을 침투시켜서 인간이 실족하면 지배할 수는 있어도 마음과 생각은 읽지 못한다가 맞는 건가요? 아니면 생각을 읽어도 마귀는 미혹밖에 할 권한이 없고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걸까요? 아니면 인간의 행동 패턴을 사탄도 잘 알 테니 그냥 사방에 미혹거리를 뿌리고 흔히 낚시하듯 하나 걸려봐라 하는 걸까요?
[답변]
질문에 대한 추정하신 답변 몇 가지를 미리 제시해주셨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보충설명이 필요하지만 “생각을 읽어도 마귀는 미혹밖에 할 권한이 없고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걸까요?”가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된 성경의 대표적인 예들을 통해 왜 그것이 정답에 해당되며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추적해보기로 합시다.
인간의 약점을 꿰뚫고 있는 사탄
사탄이 인간을 미혹하되 불신자와 신자를 대하는 방식이 각기 다릅니다. 불신자는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미 사탄의 종이 되어서 그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사탄의 입장에선 이미 자기 뜻대로 부려먹는 종들을 굳이 다시 미혹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해주어도 시비를 걸며 죽이려드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물론 육신적인 아비가 아니라 영적으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조종당한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 아담이 타락할 때 생긴 하나님을 거역대적하며 인간인 자기만 높이려드는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않으면 본성적으로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영혼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요한사도는 사탄의 권세에 묶인 세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질1:16).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브가 선악과 금령을 어겨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거짓의 아비 사탄의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자 하나님을 좇던 마음이 사라지고 대신에 생긴 심령의 변화와 같습니다.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창3:6) 보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등진 불신자들은 오직 이 땅만 전부로 알고 재물 명예 권력만 좇게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사탄은 이미 신자를 포함한 인간 심령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신자를 집어삼키려는 사탄
불신자는 사탄이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면 정확히 살펴볼 사항은 사탄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진정으로 회심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신자에겐 평생토록 성령님이 내주해주십니다. 사탄에 묶여 있던 영혼의 사슬이 풀려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언제든 그분께로 있는 모습 그대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신자가 되어서도 자기를 높이려 들었던 불신자 시절의 본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으로 향하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수시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신자도 잠시라도 하나님 중심의 생각이 흩으려지면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세상의 형통과 평안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도록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경고를 한 까닭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꾸짖음을 들은 비참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자 수제자인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렸습니다. 주님은 곧바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꾸중했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사탄이라는 뜻도 아니며, 귀신들렸다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사탄이 그런 생각을 집어넣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베드로 자신의 지정의에 따른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탄이 그의 자유의지를 좌지우지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성령이 강림하기 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천국과 구원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뜻부터 온전히 깨닫지 못했으니 자기 판단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설명한대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는데 사탄에 미혹되었던 옛날 본성대로 이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윤리로 따지면 스승을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게끔 하는 것만큼 의로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주님이 성부 하나님께 완전한 대속 제물로 바쳐져서 죄인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므로 주님이 그렇게 야단친 것입니다.
사탄의 존재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들로 최대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신자라도 예수를 믿으려 들면 최대한 훼방을 놓습니다. 불신자 집안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하려면 가족들이 그러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말리는데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잠시 세상에 눈이 팔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곧바로 인간의 일 위주로 생각이 몰리고 그에 따라 판단 행동하기에 결과적으로 사탄에게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는 사자 같이, 배고파서 우니까 곧바로 단 번에 삼켜버린다는 의미임, 삼킬 신자를 찾고 다니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고 신자도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은 사탄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본성 때문에 사탄에게 넘어갈 수 있다.
반드시 주목할 사항은 사탄이 인간의 생각을 아는 것과 그 생각을 조종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사탄의 종이 되었다는 것부터 영적차원에 국한됩니다. 원죄 하의 모든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등을 지고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힌 것뿐입니다.
그 외의 지성 감성 의지가 작동하는 이성의 차원에선 비록 오염은 되었어도 인간은 자유의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인간의 그런 영역에까지 제멋대로 조종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불신자의 이성을 사탄에게서 하나님이 지켜주신 셈인데 신학적으로 말해 일반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등짐으로써 온전한 선을 행할 수는 없으나 당신의 형상대로 닮게 지어진 흔적이 양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사회의 유익과 발전을 위해서 상당한 수준의 도덕을 실현하며 창조적인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등진 상태에선 죄를 예사로 짓고 그 결과 귀신들려 사탄에게 완전히 농락할 가능성은 훨씬 높습니다.
앞에서 설명 드렸지만 베드로가 스승의 십자가 처형을 말린 것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자신의 이성과 의지에 따라 말한 것입니다.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해 하나님의 구원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만찬 때도 다시 주님의 처형을 목숨 걸고 말리겠다고 나섰는데 이 또한 자신의 선한 생각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예언대로 막상 자기 목숨이 위태해지자 스승을 세 번 부인했는데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절망 중에 빠진 그를 먼저 찾아와서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을 물었습니다. 당신을 세 번 부인한 죄를 전혀 추궁하지 않고 깨끗이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비로소 그의 영혼에 성령이 간섭하여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통이 가능해졌고 그분의 일을 온전히 깨달아서 충성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스승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비겁한 자리에서 주님이 예언한 대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도”(요21:18) 담대히 감내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어도 그에겐 여전히 옛 사람의 본성은 남아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예수 믿는 신자들도 할례 같은 모세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눈치를 보다가 바울에게 야단맞았습니다.(갈2:11-14) 베드로가 사단이 우는 사자에게 집어삼키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권면했던 또 다른 이유입니다. 그렇게 야단친 바울도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 때문에 크게 고뇌했습니다.(롬7장)
가룟 유다에게 생각을 집어넣은 사탄
반면에 최후의 만찬 때에 스승을 팔려고 먼저 그 자리를 떠난 유다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증언합니까?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눅22:3,4)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마찬가지로 사탄이 유다에게 직접 들어가거나 그의 졸개인 귀신이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귀신이 들어가면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어 자기에게 복종시키려는 사탄의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전혀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자기 의지에 따라서 스승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표현한 것처럼 유다는 하나님의 일보다 인간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유다도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는 분명히 자신의 선한 의도가 있었고 자세히 살피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스승을 배반한 것도 그 나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성적 판단대로,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며 때로는 악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행동한 것입니다. 그 전에 예수님이 몇 번이나 회개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자기 생각대로 인간의 일을 쫓았기에 주님도 성령으로 간섭하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바꿔 말해 유다는 삼년 간 주님의 제자로 따라다녔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사탄에 미혹된 불신자였던 것입니다. 주님도 그 사실을 다 아시고 십자가 사역의 완성을 위해서 즉, 아무리 복음을 배우고 회개의 기회를 주어도 끝까지 믿지 않는 자의 본으로서 그를 제자로 거두어주신 것입니다.
마귀가 그에게 주님을 팔 생각을 집어넣었다는 것도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 전에 없던 생각을 새롭게 생기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던 그가 갖고 있던 이전의 본성에 집중하게끔 이끌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판단 결정 시행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다이고 그 책임도 사탄이 아니라 그가 져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사탄은 사람의 생각을 알 수는 있어도 조종하지는 못합니다. 제대로 알 수 있는 분야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영적인 차원에 제한됩니다. 그 외의 일상적인 분야에선 하나님이 불신자라도 사탄에 함부로 조종당하지 않고서 자기 이성과 의지대로 행할 수 있는 일반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는 것도 부분적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욥의 믿음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판단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잘못 판단했던 제대로 알았던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신자에게는 어떤 나쁜 일도 일으키지 못합니다.(욥1,2장) 따라서 사탄이 인간의 생각을 어디까지 어떻게 아느냐 따질 필요가 없고 관심을 둘 이유도 없습니다. 신자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면서 이미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가치관에 따라 범사를 행하면 됩니다.
사탄은 절대로 신자를 조종 농간하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게을러져 이전의 본성이 꾸물꾸물 나타나면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상기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대신에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불신자를 위해서 하나님께로 막혀 있는 영혼의 교통이 뚫리도록 성령이 역사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주면서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3/11/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