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과학과 창조의 신학은 나눌 수 없다.
최근에 대두된 진화론적 창조란 하나님이 물질에 진화될 수밖에 없는 성향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진화론을 인간기원의 방식에 관한 과학적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인간기원의 의미는 성경의 창조론을 참조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학적 이론과 신학적 의미를 분리해서 이해 적용하려는 것 자체부터 비성경적이며 크리스천 과학자는 물론 신자들이 취할 태도가 절대 아닙니다. 과학은 하나님이 이미 창조해 놓으신 모든 결과를 사후에 추적해서 그분이 피조세계 안에 부여해 놓은 운영법칙을 찾아내어 인간 삶에 활용하는 학문입니다. 말하자면 창조의 신학이 있은 후에야 창조에 대한 과학도 형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과학적인 성향도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형상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과학적인 분이라 과학적으로 창조했기에 그 형상을 닮은 인간도 세상 만물을 과학적인 자세로 접근 분석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는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목적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생존에 적합하고 계속 발전되는 성향만 심겨진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자기 인생의 목적을 부여하고 실현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이 땅에서 진화되어져만 한다는 당위성 즉, 자기 실존이 따라가는 근본 방향성부터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상태라면 아무리 진보되었어도 물질계에 속해 그 틀 안에서 제한 받아야 하므로 스스로 자신에 대해 추적 분석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만이 갖는 우정, 의리, 사랑 등의 성품도 우연히 생긴 것이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존재의 궁극적인 본질은 생물학적으로 진보된다는 성향 하나뿐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갖게 된 도덕적 종교적 성향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마저도 하나님이 인간 안에 심겨준 진보 성향의 결과라고 둘러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사회가 가진 도덕과 종교는 동일하게 진화된 모습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유신론적 진화로 설명하려면 두 가지 방식뿐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심어준 생물학적 유전자가 돌연변이로 온갖 다양한 도덕과 종교로 발전되었다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이 도덕과 종교적 유전자도 심어주었는데 마찬가지로 돌연변이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되었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부터 다양한 도덕과 종교로 나눠지게 하고 그 중에는 당신을 부인 대적하는 모습도 생기도록 만들었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인간 타락의 원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고 인간에게는 그분을 거역한 죄는 전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 구원의 필요성도 생기지 않습니다.
거기다 도덕적 인식이 결핍되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가 영원한 본향에 대한 막연한 소망은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이 진화되었다면 인간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부터 전혀 인식할 수 없었을 텐데도 그렇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는 이 땅이 전부이고 인간도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되었다고 믿는 불신자들의 사고방식과 그로 생긴 결과 등 모든 차원에서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실존의 방식은 결국 진화인데도 하나님의 이름만 살짝 덧붙인 것입니다. 성경이 진화라는 방식 자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에 그럴싸한 명칭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고 미리부터 성경과는 다른 창조론이라고 밝혀야만 합니다.
몇 주 전에 안과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를 기다리면서 문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앞에 놓여 있는 여러 정교한 기기들이 물질로 만들어졌는데 인간이 물질에서 진화해서 이런 수준까지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눈은 환원불가능의 복잡성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기관입니다. 엄청난 양의 세포와 실핏줄로 만들어졌기에 그 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눈으로서 기능을 못합니다. 눈이 장구한 세월동안에 조금씩 진화되어선 인간은 도무지 기본적인 생활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눈을 우연히 진화된 인간이라는 물질이 만들어낸 또 다른 물질이 정밀하게 검사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전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신자나 유신론적 진화론자나 사실상 진화라는 믿음체계를 갖고 있기에 그들을 설득하기는 아주 힘듭니다. 문제는 오히려 순수한 창조를 믿는 신자들입니다. 그런 신자들도 실질적으로는 유신론적 진화론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창조를 단순히 인간이 이 땅에 실존하게 된 하나의 방식으로만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창조를 가르치니까 혹은 진화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창조를 택해서 믿는 정도입니다. 창조와 진화 안에 내포된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런 중요한 의미들을 면밀히 대조 묵상해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창조는 신자에겐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과거의 방식으로만 머물고 치우지 현재의 신앙생활에 어떤 선한 동기 영향 열정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식을 창조주께서 이 땅에 인간을 지으신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꾸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그저 이 땅의 현실 문제를 해결 받고 죽은 후의 지옥 심판을 모면하려는 것뿐입니다. 엄밀히 말해 이 땅의 형통이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은 그 일을 도와주는 분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바로 내 곁에서 나를 항상 바라보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한 후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삶과 인생을 내 뜻대로 내가 꾸려나가고 싶은데 가끔 힘들 때만 멀리 계신 하나님더러 잠시 와서 도와달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손쉽고 빠르고 대박 같은 해결책을 구하려는 망상적인 시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권력자 재력가 의사 정신상담가 등의 수준에 위치해 놓았으니 굳이 자기 인생 전부를 걸고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솔직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과연 지금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실존케 해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계획을 그분 뜻 안에서 세워서 실현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방향이 분명히 그분을 향하도록 맞춰져 있습니까?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을 맞대면 할 때에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서 자랑은 못해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처럼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 대가로 삶이 형통하게 해달라고, 최소한 고난이라도 없애달라고 평생 떼를 쓰다가 신앙생활을 마감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창조의 의미를 진화에 비춰서 무엇이 다른지 성경에 근거해서 정확히 구분하여 자신의 삶에 적응하지 않는 한 믿음은 출발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5/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