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1:20-25) 기도하면 무엇이든 받은 줄로 믿으라.

기도 시리즈 (12)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11:20-25)

 

예수님은 허풍쟁이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간단하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히12:2) 라고 정리했습니다. 신자가 믿어야할 대상일 뿐 아니라 당신께서 신자의 믿음이 온전하게 자라도록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적용하면 주님은 신자들의 기도를 받아서 응답해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올바른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실제 그 본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 그런 기도를 하게끔 성령으로 간섭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 마음에 믿고 의심치 않고 받은 줄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내가’라는 주어를 사용하여 기도를 듣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렇게 응답하겠다는 뜻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자 모인 무리들이 서기관들과 달리 권세 있는 가르침에 놀랐다고 말한(마7:29) 이유입니다. 인간 종교 지도자라면 “그대로 되리라” 혹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식으로 절대 장담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단순히 이렇게 저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확증했으니 본문만큼 기도할 때 큰 힘이 되는 말씀도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이 말씀을 접하는 신자들은 그리 확신하지 못하고 도리어 조금 혼란스러워 합니다. 산을 명하여 바다로 빠트리는 것은 상징적 의미일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너무 과장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거기다 무엇이든 기도하면서 이미 이뤄진 것으로 믿으라고 합니다. 기도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매직 램프 같고 예수님은 푸른 거인 같습니다. 또 의심치 않고 믿고 기도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니까 언뜻 긍정적 사고나 자기최면처럼 들립니다.

 

거기다 교회에선 신자는 성경말씀에 대해 조금이라도 묻거나 따져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처럼 순전히 믿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고 했고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미심쩍기는 해도 어쨌든 본문대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고 간절히 기도해보지만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거짓말하실 분은 절대 아니며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정도로 과대 포장해서 말씀하실 분도 아니므로 이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 마냥 궁금해집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가장 과장법을 많이 쓴 것 같은 본문이지만 기록된바 그대로 해석해야만 그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절대 의심치 말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전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선 본문 자체의 해석이 어려우니 따져볼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입이 아프도록 강조한 대로 앞뒤 문맥에서의 뜻은 아예 감안하지 않고 본문만 따로 떼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성경은 기록된 때와 지금과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아주 큰 간극이 있는데도 당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자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했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유대의 역사 관습 문화 등은 물론 특별히 그 언어를 잘 알고 있으므로 당시의 성경인 구약말씀을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행17:11) 너그럽다는 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학문이 많고 대범하다는 뜻인데 당시로선 지식층이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읽기만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말씀은 간절한 마음으로 받지만 정확한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날마다 즉, 계속해서 더 많이 따져봤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오래 전 먼 나라에서 일어난 생소한 일들을 그 나라 말로 기록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으로 읽어야만 합니다. 성경이 과연 그러한지 더더욱 상고해봐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미신 내지 광신입니다. 물론 성경을 기록한 당시의 문화나 관습은 전문가가 아니면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신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첨가한 주석 성경은 물론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관련 자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성경말씀을 간절히 받고 싶다면 일반 신자들도 신학 전공자 이상으로 혼자서도 성경을 잘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구태여 관련 자료를 찾아서 참조하지 않고도 앞뒤 문맥만 꼼꼼히 따지면 정확한 뜻은 물론 저자의 의도까지 추정이 가능합니다.

 

자기 멋대로 행하는 예수님?

 

우선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명해도 그대로 이뤄진다는 말씀부터 과연 그러한가 상고해봅시다. 가장먼저 이 말씀을 하게 된 계기부터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20,21절) 그 전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는데(14절) 실제로 뿌리까지 말라서 완전히 죽었다고 베드로가 스승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말을 듣자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수많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실현했기에 단순히 당신의 능력을 믿으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적은 주로 사람을 상대로 했으나 이번에는 말씀 한마디로 나무의 생명을 뿌리부터 마르게 만들었습니다. 만물의 생명을 당신의 의지대로 주실 수도 앗아갈 수도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 자연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이신지라 산을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라고 가르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믿음의 주로서 서기관과 다른 권세를 갖고 계시지만 이 말씀만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상고해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인간 신자더러 산더러 바다에 빠지라는 식으로 명령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기도하라는 설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받은 줄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면 천지개벽까지 일으켜준다고 하니까 여전히 온전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자연에 대고 이렇게 저렇게 되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의 운행질서를 바꾸는 것은 기적입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기도한다고 매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큰 능력을 지닌 선지자 엘리야까지 간절히 기도했지만 가뭄은 삼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우상 주술사들이 몸에 자해를 하면서까지 하루 종일 빌어도 우상 신들의 능력은 전혀 없으니까 구름 한 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엘리야가 기도하자 금방 폭우가 쏟아졌는데 우상숭배의 죄악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왕상18장)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이 기도는커녕 하나님께 원망했는데도 바다를 갈라주었는데 마찬가지로 당신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물을 아무리 하찮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라도 당신께서 저주할 리는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시장한데 나무에 열매가 없으니까 곧바로 저주해버렸습니다.(12,13절) 예수님의 성품으로나 이 땅에 오신 목적으로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저주였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이적들이 유익했는데 반해 유일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인 것은 단순히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갈멜 산이나 홍해 때처럼 당신만의 특별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어제 아침에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당연히 열매가 있으리라 믿고 다가갔는데 하나도 없으니까 저주했습니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이유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13절b) 무화과를 만드신 이도 하나님이요 열매를 맺는 계절도 당신께서 정해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정해준 때가 아니어서 열매를 맺지 못했는데 저주하면 예수님은 매사를 당신 기분대로 행하는 변덕쟁이가 됩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또 예수님이 단지 열매가 없기 때문에 그 나무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예수님

 

나무를 저주하신 목적 또한 문맥상의 의미를 잘 상고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때 곧바로 시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만 들었습니다.(14절) 곧바로 성전에 올라가 하루를 보내고 날이 저물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19절) 나갈 때는 밤이라 제자들이 나무를 쳐다보지 못했고 예수님이 그런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밝을 때에 그 나무 앞을 다시 지나가자 완전히 죽은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가 어제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께 보고한 것입니다.

 

아무 잘못 없는 그 나무가 어제 하루 사이에 말랐다면 주님이 어제 행했던 일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나무를 저주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 들어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야단치며 환전상과 장사치를 쫓아내었습니다. 그러자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이권을 챙겼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논의했습니다. 그 이유로 무리가 예수님의 교훈을 기이하게 여기고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18절) 유대 대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과 달리 권세 있다고 인정했기에 자칫 주님만 따를 것을 염려 시기했던 것입니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열매가 없을 줄 아시고도 제자들이 보고 듣도록 나무에 저주의 선포를 했고 곧바로 성전에서 장사치를 야단쳤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래서 주님께 저주 받아 죽은 무화과나무가 바로 형식과 위선에 빠지고 부정한 재물을 탐할 만큼 부패한 유대교와 그 지도자들을 상징한다고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이 다 이뤄진다고 했는데 그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오심과 그 사역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대표되는 동물 희생제사의 효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대신에 이제 곧 당신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죄인들이 의롭게 될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토록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고 과장된 표현을 한 의도도 성전제도의 효력이 없어진다는 맥락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의 시기와 장소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시기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고난주간의 전반입니다. 베다니에 머물면서 매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마지막까지 천국 복음을 강론하고 있던 때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상입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고 베다니는 그보다 훨씬 낮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과 특별히 성안 모리아 언덕에 위치한 성전건물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주님이 이 산이라고 지시대명사 this를 붙여서 말했으니까 모든 산들을 뜻하지 않고 예루살렘의 성전언덕을 지정해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바다도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갈릴리 바다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며 말라버리게 만든 이유가 더 확실해졌습니다. 산은 예루살렘 성중에 우뚝 솟아있는 유대교 성전으로 무너뜨려야 할 세상의 사악한 왕국이었습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하듯이 예수님의 새 시대가 오기를 믿고 의심치 않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그 산이 바다에 빠지듯이 유대의 썩은 세력들이 완전히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2)고 예언했고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객관적 사실에 비추어 비유했기에 당시 그 의미가 생생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성경은 일부러 어렵게 저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 사건을 당시의 언어로 저작되었기에 시공간의 차이가 나서 어렵게 여겨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들의 이야기이므로 당시의 제자들의 입장에 서서 전후맥락을 찬찬히 상고하면 당시 사건을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받은 줄 믿고 기도하라.

 

따라서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도 난해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산더러 바다에 빠지라고 명하는 것은 유대의 악한 세력이 무너지는 사건을 뜻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산상수훈에서 가르쳤던 모범기도대로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 하늘에서 이뤄진 뜻이 됩니다.

 

이어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럼 하늘에서 이미 뜻이 이뤄진 것은 무엇이든지 받게 될 줄 믿고 기도하면 그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전혀 모순이 없는 너무나 지당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기도 제목을 미리부터 무조건 응답된다고 확신하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대변되는 세속의 사악한 세력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대로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굳이 이런 진리를 몰라도 우리 스스로 책정한 기도 제목들은 아무리 신앙연륜이 깊거나 기도의 은사를 받은 신자라도 온전한 확신이 들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의 정확한 뜻은 알아보려 하지 않고 무엇이든 이뤄질 줄 믿고 기도만 하려듭니다. 하나님도 신자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안 좋아 하시니까 막연히 간절하게 기도하면 이뤄주겠지라고 여깁니다. 자꾸 의심이 생기는데도 의지적으로 부인하고 이뤄질 줄 믿습니다라고 힘을 잔뜩 주어서 반복해 외칩니다. 원래 겁이 많은 개가 더 크게 짓는 법이듯이 스스로 확신이 안 선다는 반증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기도를 위한 기도부터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먼저 여러 복잡한 생각들을 제거하고 심령에 평안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제목들을 미리 혹은 기도하는 중에라도 천천히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과연 이 제목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자기 욕심이나 자랑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따져봐야 하는데 자기 문제는 자기가 잘 아니까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애매모호한 것들은 그런 구별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꾸준히 기도하다 보면 이 제목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기에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 제목들은 받은 줄 믿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뜻은 하나님이 안 들어줄 수 없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가 속히 진정이 되고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최대한 막아주시고 무력을 앞세운 독재자는 무너져서 하나님의 공의가 온 천하에 세워지게 해달라고 온 세계의 신자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와 방식은 그분께 달렸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신자부터 징계하실 하나님

 

따져볼 문제가 하나 더 남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부족하게 이해했을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산이 예루살렘 언덕에 세워진 큰 건물들을 의미한다고 깨닫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덕에는 로마 총독 관저와 군대가 주둔하는 건물도 성전보다 더 높은 곳에 함께 서있었습니다.

 

제자들로선 유대의 위선적이고 탐욕적인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망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하게 로마제국의 강압적인 식민지 통치부터 종식되어야만 했습니다. 주님이 다윗 왕국의 현실적 영광을 회복시켜 주리라 기대하며 바다에 빠져야 할 산을 로마멸망에 초점을 두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끼리 다가올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지 고난 주간 중에도 마지막까지 다퉜던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이 돌아가신지 한 세대만인 AD 70년에 멸망했으나 로마 제국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후로도 몇 백 년간이나 번창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오묘하지 않습니까? 아니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단순히 제자들의 메시아 개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로마를 계속 번창하도록 놓아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선택한 이스라엘이 그 소명을 감당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 나라와 똑같이 행한 것을 더 엄격히 다루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도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목적이 현실의 풍요와 안락만을 추구하려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분의 심판 원칙은 모든 세대에 동일하므로 지금도 교회와 성도들이 이스라엘의 잘못을 답습한다면 우리들부터 먼저 징계 심판하실 것입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그런 뜻을 본문에서 정확히 밝혀놓았습니다. 전체 맥락과는 뜬금없어 보이는 마지막 결론이 그것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25절) 서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세를 뜻하므로 성전에서 기도해야 할 내용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친 말씀과 똑같습니다. 바로 전날 주님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다고 야단친 이유가 성전에서 이런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명대로 기도해야 다 이뤄진다.

 

따라서 주님은 본문에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하늘에서 두 가지 뜻이 이미 이뤄졌다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사악한 세력은 반드시 심판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럼에도 신자들은 끝까지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서 중보기도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장 나라로 세워진 이스라엘의 소명이었고 그 전에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울 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입니다. 주님이 음부를 이기는 열쇠를 주면서 땅에서 악한 세력을 매고 그에 미혹된 죄인들의 죄를 풀라고 명하신 모든 세대 모든 교회의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해주시기 위해서 당신께서 가르치신 대로 기도했고 또 기도한 대로 실천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도 주님은 당신을 죽음으로 이끈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을 향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 처형을 주도한 산헤드린 공회원 중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구원 받은 주님의 종들도 나왔습니다.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성령이 강림해 그 심령에 견고히 자리 잡은 사탄의 진을 무너뜨리고 막혀있던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 경로를 열어주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영적 시체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구원 후에도 신자에겐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 있어서 평생을 두고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주제에 동료 성도는 물론 불신자들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주님도 십자가상의 사형수 죄인까지 용서해주었는데 인간 신자가 다른 인간을 정죄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면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훨씬 더 사악한 로마제국보다 유대 성전과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당했듯이 신자들부터 하나님이 징계하실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그런 죄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예수님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던 유대인들을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주범으로 보고 멸시 핍박하며 반유대주의를 형성했습니다. 창세기의 이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여서 아프리카 같은 미개국들을 무력으로 정복 수탈했습니다. 오늘날 북한 동포들이 공산독재 정권에 계속해서 억압당하고 있는 것도 기복주의로 타락한 남한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받은 줄 믿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뤄진다는 말씀의 의미가 이 결론으로 인해서 더 명확해졌습니다. 본문 결론대로 우선 다른 이의 허물을 용서해주고 자신의 무슨 죄라도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은 줄 믿으면 됩니다. 또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기도하면 다 받은 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서 열심히 일을 찾아서 성실히 행하면 반드시 생활이 안정됩니다. 자기 형편에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직업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버릇이나 습관적인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면 차츰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도 진심으로 용서하는 기도를 하면 그 쪽에서 먼저 찾아와 사죄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서 말씀에 정진하고 자신의 성품을 주님을 닮게 거룩하게 바꿔달라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뤄지지 않을 리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전하여서 모든 입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태초부터 첫째로 확정된 뜻입니다. 신자가 자기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웃에게 주님의 긍휼이 전해지고 또 교회가 합심해서 기도하면서 전도와 선교에 힘쓰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반드시 이뤄주십니다.

 

간혹 성경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라니까 받은 줄 믿습니다라고 본문말씀만 암송하면서 어서 빨리 응답해달라고 떼를 쓰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악한 사탄의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비춰지게 해달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받은 줄 믿고 기도하라는 뜻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그냥 본문 말씀만 반복적으로 외우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주문과 같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기도할 내용부터 정말로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점검해보면 스스로도 많이 놀랄 것입니다. 거의 전부가 자신에 관한 기도뿐이고 당장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심지어 꺼내놓기도 부끄러운 기도제목마저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 받아야 한다는 확신 최소한 그런 열망이 담긴 제목은 한둘만 남을 것인데 그것을 받은 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 됩니다. 예컨대 돈이 천만 불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꼭 주셔야 한다는 이유와 근거를 확실히 댈 수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죄, 욕심, 의, 자랑, 교만 등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고 정말로 하늘에서 이뤄진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하나님이 주지 않으실 리 없지 않습니까?

 

(3/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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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막1:35-39 새해 결심을 성취하려면? master 2017-01-17 66
33 막10:29 예수를 위해 가족을 버린다는 뜻은? master 2015-09-28 2041
32 막4:37-39 무서움의 믿음과 두려움의 믿음 운영자 2015-03-05 389
31 막2:1-4 적극적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아니다. 운영자 2015-01-01 402
30 막1:32-39 너무나 느긋하신 예수님 운영자 2012-02-01 547
29 막9:23,24 능치 못할 일이 많은 하나님 운영자 2011-04-13 1505
28 막1:2-4 세례 요한과 키 재기 시합 운영자 2010-08-18 517
27 막 1:29,30 베드로와 안드레 중에 누가 형인가요? 운영자 2010-07-24 5435
26 막10:18 예수는 선하지 않는가? [1] 운영자 2010-07-24 2352
25 막10:29-30 이 기복신앙을 옹호하는가요? 운영자 2010-07-05 1122
24 막1:35-39 아무 열매 없는 새벽 기도 운영자 2009-10-25 880
23 막16:17,18 신자가 가진 최고 큰 권세는? 운영자 2009-09-19 2386
22 막15:42-47 왜 목사는 분신자살을 하지 않는가? 운영자 2009-09-19 886
21 막14:48,49 유다에게는 잘못이 없지 않는가? 운영자 2009-09-19 905
20 막12:41-44 목사를 불쌍히 여기는 과부 신자. 운영자 2009-09-19 1113
19 막12;13-15 예수께 올무를 던지는 목사들 운영자 2009-09-19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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