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 피해의 주범(主犯)은 자기다.

조회 수 2148 추천 수 178 2008.10.29 21:10:09
5. 감정적 피해의 주범(主犯)은 자기다.
(감정에 대한 잘못된 반응들)




감정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내부와 외부의 자극에 대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차적 반응이다. 내부 자극에도 감정이 생길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어떤 생각에 잠기다보면 특정한 감정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일차적 반응이라는 뜻은 처음 생긴 감정에 추가적인 반응이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따른다는 것이다. 초기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절제되느냐에 따라 차후 행동과 심지어 이차로 발생하는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바꿔 말해 자연히 생긴 반응으로서의 일차 감정은 인간의 통제 밖이지만 그것을 일단 인식하고난 이후는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감정에 잘 반응하기 위해선 스스로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고한 인식부터 가져야 한다. 감정도 자기의 소중한 내면으로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또 자기 인생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무엇이든 스스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대상을 잘 다스릴 수는 결코 없다.

요컨대 감정 절제의 주체가 바로 본인이기에 당연히 그 책임과 결과도 자기가 떠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감정을 촉발시킨 상대나 주변 환경에다 탓을 돌려봐야 자기 손해일 뿐이다. 격한 감정일수록 결국 자기 속만 부글부글 끓고 타들어가게 마련이지 않는가? 아무리 감정 발생의 원인이 상대에게 대부분 있거나 또 그 영향이 상대에게 상당부분 미칠지라도 자신과는 별개 내지 부차적 문제일 뿐이다.

잘못된 감정 통제의 일차적 직접적 파장은, 우리가 너무 자주 체험하듯이, 자신의 정신 뿐 아니라 육신과 영혼에까지 미친다. 일거에 전인격을 파탄 낼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야금야금 축내는 차이가 있더라도 최종 피해자는 자신이다. 자기 수명을 재촉하고 정신을 멍들게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까지 망치는 주범(主犯)은 감정이 아니라 바로 감정을 잘 절제하지 못한 자기다.  

따라서 초기 감정을 제대로 절제하는 길을 알아보기 전에 잘못 반응하는 대표적 모습들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무슨 일이든 잘하기 위해선 잘못된 것을 먼저 고치는 것, 아니 무엇이 잘못인지부터 정확히 아는 것이 급선무다.

억압(Repression)

감정의 골이 조금이라도 깊어지려면 무조건 눌려 놓고 보는 것이다. 감정의 장점, 심지어 그 존재조차 부인하려 든다. 특별히 슬픔, 염려, 분노, 시기, 절망 등이 생기면 크리스천에겐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 양 그래서 아주 큰 죄를 지은 양 치부하는 것이다.

일단 생긴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내면에 남아 있게 된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엉뚱한 불씨가 튀거나 폭발하게 마련이다. 고무풍선의 원리를 생각해보라. 풍선의 한 쪽을 누르면 반드시 다른 쪽이 튀어나오는데 풍선 안에 든 공기의 양이 일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초기 감정을 잘 절제 내지 분출하지 않고 억압하기만 하면 당연히 자신이 의도하지 않고 또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다른 쪽 출구가 생기게 된다.  

물론 감정으로 인해 잘못되고 아팠던 기억이 많고 또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 추한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고 억압만 하다가 본의 아니게 남에게 분풀이하는 결과가 생기는 것은 더 나쁘다. 기독교 윤리의 근간은 자신이 손해보고 희생하며 심지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남을 살리는 것이지 않는가?

아무리 감정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이 나빠질 확률이 높다 해도 스스로 맞부딪혀서 자기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억압만 하면 인간은 평생토록 크고 작은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절대 없다. 다른 말로 스스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외면하는 꼴이 되어버리기에 무책임을 넘어서 게으른 인생을 사는 것이다.

질식(Stifling)

좋든 나쁘든 감정으로 충만해진 상태를 분명히 느끼는데도 겉으로 분출은커녕 표현마저 하지 않는 것이다. 유교적 사고에 젖어 있거나 율법적 종교 훈련을 많이 받은 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이겨내는 극기(克己)는 무조건 선(善)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겉으로 자기 진짜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특별히 자기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한 상태에선, 자연히 선이 된다.

내면에 꽉 차있는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되지 못하면, 심지어 억압되어 있지도 않다면, 속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감정은 한 가지 종류로만 단순하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여러 종류의 감정이 단 번에 발생하거나 초기에 발생한 한 종류의 감정이 연관된 다른 감정들로 파생 내지 발전하게 된다. 요컨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 미묘한 것이 감정의 보편적, 아니 정상적 상태다.

그런 미묘한 감정들이 충만 된 상태로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면이 제대로 안정되지 못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뒤죽박죽 뒤엉켜서 혼잡할 뿐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양 시치미를 뚝 떼고 있어도 속은 펄펄 끓는 냄비다. 그저 끓는 냄비이기만 하면 다행히 쉽게 식기라도 하련만 뒤엉킨 실타래까지 같이 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마냥 어쩔 줄 몰라 초조하기만 하다.

나중에는 감정의 홍수에 파묻혀 질식해버린다. 홍수를 잡으려면 댐이든, 제방이든, 수로 관리든 반드시 폭우가 내리기 전부터 적절히 대응하고 최악의 경우 내린 후라도 피해를 줄일 조처가 따라야 한다. 그냥 두면 범람해서 가축도 집도 아니 자신마저 떠내려가게 된다.

표류(Drifting)

감정이 생기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방임하는 것이다. 초기 감정에 따라 차후의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이 이뤄진다. 중간에 잠간 중지하거나 여과하는 장치가 전혀 없다. 말하자면 감정에 예민하고 충만한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감정에만 좌우되는 감정주의자다. 감정이 자신의 삶을 이끄는 힘이요 심한 경우 인생의 목표까지 된다.

다른 말로 문제 되는 것은 오직 “지금 당장 여기서 나만의 기분”이다. 좋은 기분만 생기거나 추구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쁜 감정에마저 삶의 모든 부분이 좌우된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 분을 못 이겨낸다. 감정이 자신의 이디올레기 내지 종교가 되어버린다. 다시 강조하지만 감정주의로 흐르면 나쁘지만 인간이 감정적인 것은 좋은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감정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버려둔다. 문제는 오고가는 중간에 브레이크가 없다. 감정을 직면하여 그 실체와 원인과 대책을 찾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당연히 모든 감정이 일시적 우발적 표피적 자의적(恣意的)일 수밖에 없다. 아무런 절제 조치를 취하지 않으니까 안 그래도 복잡 미묘한 감정인지라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한다.

감정을 고민하거나 절제하려 한 적이 전혀 없으니까 자연히 이상한 버릇만 생긴다. 설령 겉으로 다 드러내는 습성이 있더라도 실제 현실은 항상 그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도무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거나 상대가 전혀 반응이 없으면 나쁜 감정은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속에 동아리를 틀면 트는 대로 방치해 둔다는 것이다. 그 여파는 언제든 불시에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좋을 때는 한량없이 좋은 사람이 되지만 나쁠 때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기묘한 모습이 되어버린다. 예컨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죽기 살기로 그것도 돌발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다. 그 상황 자체에서 생긴 감정은 별 것 아닌데도 속에 동아리 틀고 있던  것들이 힘을 보태기 때문이다.  

진짜 더 큰 문제는 감정에 표류하다 보면 점차 나쁜 쪽으로 더 악화된다는 것이다. 좋은 감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굳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나쁜 감정의 경우는 속에 쌓였던 것까지 쏟아져 나오니까 악화일로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부부간에 질투의 화신이 되어 의부 의처증으로, 또 간단한 말다툼마저 습관적 손찌검으로 번지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감정에 표류되기 시작하면 본인의 대외적 이미지를 망칠 뿐 아니라 아예 본성이 그런 자로 낙인 찍혀버린다. 정상적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도태되기도 한다. 부정적 감정의 경우뿐 아니라 즐거운 감정도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만 가면 동일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단순한 기도(Prayer for Deliverance)

상기의 세 가지 감정에 대한 대표적인 잘못된 반응은 신자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불신자의 경우는 감정의 출발부터 통제까지 그야말로 자기만의 문제로 자기가 판단 행동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반면에 신자는 감정으로 인해 잘못되지 않도록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기도가 상기 세 가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다. 예컨대 분노가 생기면 부정적으로만 해석하여 무조건 분노를 없애달라는 기도만 한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상관없이 감정에 질식 표류하지 않게 하고 심지어 부정적 감정은 아예 생기지 않게끔 완전히 차단해달라고 기도한다.

바꿔 말해 신자는 항상 비단결 같은 마음씨와 선하고 아름답기만 한 감정 흐름이 생겨야 하고 만나는 사람과 사건과 환경마저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으로 옮겨서 살게 해달라는 요구나 다름없다. 지금 바로 여기를 완전한 천국으로 바꾸지 않는 하나님이 오히려 잘못하는 셈이다. 따라서 감정을 스스로 직면하여 그 실상과 원인과 대책을 분별하고자 하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 대신에 감정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간주해 외면 억압 부인하려고만 시도하고 또 그럴 수 있는 믿음과 절제력과 여건을 달라는 것이다. 심지어 상대의 감정마저 하나님이 책임지고 좋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는 기도라는 종교적 행위만 했다 뿐이지 사실은 감정에 억압 질식 표류하겠다는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다. 특정한 감정을 없애달라는 그런 식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기도를 해야 할 때가 물론 있고 또 기도한 대로 응답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러는 것이 옳다면 조금 과한 감정만 생기면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말과 다름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더러 감정을 다스리게 하는 근본 뜻은 그것이 아니다.

그런 기도는 아주 격한 감정에 한해 일시적 대응책은 될지언정 상시적이고도 근본적 대책은 될 수 없다. 어떤 일에도 분노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식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땅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완벽히 다다르지 않는 한에는 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도 분노하셨다. 하나님이 분노할 때는 분노하라고 분노의 감정을 선물로 주셨는데 절대 분노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꿔 달라는 기도가 응답이 될 리가 있겠는가?

만약 그런 기도를 간절히 한 사람에게 나중에 혹시 분노가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나는 왜 아직도 이 꼴인가? 내 믿음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하나님은 대체 언제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인가?” 같은 말도 안 되는 자책감과 의심이 생길 것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의심과 불만이 또 다른 분노의 기폭제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인내력이나 분별력이 모자라 쉽게 화를 내는 본성을 고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를 냈던 사건 자체를 회피하지 말고 대면해야 한다. 감정을 자기 인격과 품성을 도야하는 문제로만 연결시키지 말아야 한다. 외부에 대한 자연발생적 반응은 본인의 도덕성, 종교성, 심지어 영성과도 근본적으로 관계없다. 분노가 발생한 그 일의 배경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도로 물어보고 또 자신이 이차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무조건 감정을 없애거나 참을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는, 인간이 원죄 하에 있어서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감정을 아주 좋은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뜻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동양 사상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도통한 성자란 없다. 훈련과 수양으로 인격이 얼마나 거룩해질지 모르지만, 오히려 죽기 전까지 죄인임을 더 절감하는 것이 성경적임, 사실은 세상사에 전혀 간섭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자나 아예 멍청하게 사는 바보가 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감정은 인간의 사고와 말과 행동을 선하고 거룩하게 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도록 수정, 격려, 소망하는 작용을 한다. 그런 기본적 인식이 없으니까 즉, 감정의 좋은 면도 보지, 아니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없애거나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만 한다.

감정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분의 뜻대로 누리고 사용해야 한다.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또 성령의 인도를 잘 받기 위해선 자신의 죄를 없애고 세상과 사람과 사단의 조종을 받았던 것들을 제거하여 영혼부터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 영혼이 먼저 소생되어야 지정의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다. 말하자면 신자 속에 있는 성령이 감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절제케 해주는 원천이다.

따라서 신자가 영혼 부분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즉, 예수님의 보혈로 죄부터 씻어내지 않고 단지 심리학적 방책으로 지정의만 취급하는 치유는 근본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일시적 부분적 정신적 진정 효과는 분명 있지만 자칫 감정적 흥분 내지 안정을 은혜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은혜란 오직 죄와 연결되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받아야 한다.

의외로 신자들이 속으로 곪아 터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겉으로는 경건한척 해보지만 실제 속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분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한 목적대로 잘 절제해야 한다. 왜 교회마다 내적치유가 유례없는 붐을 일으키는가? 어렸을 때의 상처를 씻는다는 명분도 있지만 많은 신자들이 그 동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속에서 곪아 터지려는 감정 문제를 심리적 방책으로나마 해결 받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자는 감정의 실체를 직면해야 한다. 무조건 싸워 이기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감정이든 그 발생 원인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뜻을 잠시 물러서서 기도하며 지혜롭게 분별해야 한다. 무조건 하나님 도와 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부정적 파괴적 감정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긍정적 생산적 그것도 아주 말랑말랑한 감정으로 바뀌지 않는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오로지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에 감정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는 법이다.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에만 자신의 전부를 매달면 그 열매는 절대 금지할 법이 없다.  

10/28/2008

김순희

2010.10.26 12: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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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와서 사기꾼과 흡사한 목회자들을 보면서 생긴 감정이 바로 분노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이 그런 목회자를 뒤에서 흉보고 욕하면서 그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 사람들, 차라리 욕하지 말고 그런 행동을 하면 밉지나 않을 터인데.. 분노에 분노로 치닫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ㅠㅠ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성격 때문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구... 그러나 은혜로서 그런 분노 앞에서 곰곰이 자신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갖게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치유하신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참 말씀으로만 치유가 가능함을 그리고 그 참 말씀으로만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음을, 옥체를 가르시어 마치 반석이 갈라지며 물이 솟음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배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기쁨만이 이런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귀한 말씀 감~~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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