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 감정 부조화의 궁극적 원인
감정을 있는 대로 표출하지 말라.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의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를 뜻한다. 특별히 내면에 믿음이 없는데 겉으로는 있는 척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 경건의 정의는 아주 간단하다. 내면의 참 믿음이 외면의 행동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내면의 지정의끼리 먼저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 결국 감정도 믿음과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참 경건이 달성된다는 말이다. 알기 쉽게 말해 감정에 의해 믿음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믿음에 의해서 감정이 거룩하게 충만하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을 절제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온전한 믿음에 따라 조화되고 균형 잡혀진 감정을 꾸밈없이 순수하게 겉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아무리 신자끼리는 영적 교통이 가능하다고 해도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면 온전한 교제가 이뤄지지 않는다. 여러 번 강조한 대로 감정은 신자 개인의 영적 성숙 뿐 아니라 성도의 교제에 거룩한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
꾸밈없다는 것은 과장, 가식, 거짓이 일절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신자라도 그 믿음부터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의 순수한 표출과 완전한 나눔이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인간으로서 영혼에 거하는 믿음과 정신의 지정의와 육신적 행동 모두가 완벽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영적인 슈퍼맨은 없다. 마음과 행동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불완전하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특별히 감정이 완벽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감정으로 인해 내면에 부정적인 흔들림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천국에 가면 그러하다. 우리 영혼에 가리었던 것들이 벗겨지고 주의 영이 있는 곳이라 완벽한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진정한 환희와 평강으로만 가득 차서 보좌를 향한 거룩하다는 찬양으로 일색인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죄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는(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곳이다. 하나님이 좌정하신 천국 보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간 신자의 영혼과 부활한 육신에도 그러하다. 당연히 이 땅에서 죄로 인해 생겼던 모든 왜곡, 모순, 상처, 허물, 눌림, 묶임은 완전히 다 사라진다. 단 한 치의 더러움과 추함은 천국에 아예 발도 못 붙인다.
그런데 천국이 아닌 이 땅에서도 인간이 완벽한 자유함을 누렸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죄가 들어오기 전의 아담과 이브가 그들이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각자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성하며 살고 있었다. 죄가 아예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전혀 두렵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러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반하자마자 사태는 완전히 돌변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으로 환히 밝았던 세상이 완전히 사단의 흑암의 세력에 짓눌려버렸다. 감정의 흐름은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아니 아예 반대로 흘러 두려움과 부끄러움만 양산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자식이 되어서 언제 어디서나 의심, 불신, 시기, 미움의 필터를 통해 주변 환경과 사건에 일차적으로 반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원죄로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자 감정은 하나님과 교제를 아름답게 만들어 믿음을 더 성숙시킬 수 있는 통로에서 죄가 마음 놓고 출입하는 대로가 되어버렸다. 이전에는 믿음에 따라서 감정이 올바르게 절제 되었지만 이제는 그 작동하는 방향이 뒤바뀌었다. 감정에 의해 믿음마저 흔들리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등 오감으로 확인되는 것만 믿었다. 가슴으로 믿어지지 않으면 절대 머리로는 믿지 않았다.
원죄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아무리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도 불완전하다.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신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권세는 분명 가졌지만 죄의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 비록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로 누구든지 하나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활짝 열렸지만 여전히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이 끊임없이 훼방을 놓고 있다.
신자가 이 땅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한에는 죄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결코 없다. 말하자면 완전한 경건 즉, 믿음과 지정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구원을 받고 난 이후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해지는 싸움(free from the power of sin)을 평생토록 피 흘리기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유익하며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되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다른 말로 아무리 믿음으로 감정을 잘 절제했다 해도, 인간이 이 땅에 살아있는 한은 죄가 살아 있는 상태이므로 감정을 발생한 그대로 바로바로 표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아주 순수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그렇게 해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자세히 보면 어린이도 죄를 많이 지으며 심지어 감정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기도 한다. 어른으로 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는 것이다.
신자만이 감정을 제대로 절제할 수 있다.
원죄란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인간에게 바랐으며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상태를 벗어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죄의 영향 아래 놓인 것이다.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제 자리로 되돌려 놓는 길 뿐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새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선 예수를 믿는 신자만이 감정을 제대로 조절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많은 수양으로 품성을 갈고 닦아서가 아니다. 믿음으로 감정을 잘 통제하거나 또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고 의로워졌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그 영혼에 실제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절제한다는 것이 하나님처럼 “완벽하게”라는 뜻은 아니다. 신자도 죄의 본성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자주 흔들린다. 하나님이 그런 “감정을 허락하신 목적에 제대로 따라” 절제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말씀과 기도로 그분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면 감정보다는 그 분별된 뜻에 따를 수 있기에 감정에 의해 믿음이 흔들리거나 지정의의 부조화가 생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령이 없는 불신자의 내면에는 그런 기능이 전혀 없다. 아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다. 오직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단하고 결정한다. 먹고 마시는 물질계 안에서의 풍요와 안락만이 삶의 지고한 가치요 의미가 된다. 감정은 오직 물질의 풍부한지 궁핍한지에 따라 좌우될 뿐이다. 자기 영혼과 정신의 조화와 균형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평생을 두고 수고해도 헛되고 헛되며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로 진정한 평강과 자유를 결코 누리지 못한다.
대신에 성경은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했다. 단순히 장래 계획을 크게 세워서 믿음으로 이루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만물을 거룩하고도 공의롭게 통치하실 뿐 아니라 신자의 영혼까지도 평강과 자유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한 마디로 보이는 것으로 믿음, 특별히 감정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6절) 성경이 또 찾는 자에게 상 주신다고 해서 잘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실히 봉사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계신 것부터 온전히 믿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또 그분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환난에서도 인내할 수 있고 또 그분이 주시는 평강과 자유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분의 뜻대로 살기에 궁극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이 땅에서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에 감정을 성령의 인도에 따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뜻에 맞게 적절히 표출할 수는 있다. 그래서 신자 간에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에 따라 감정을 순수하고도 정직하게 서로 나눠야 한다. 그런 감정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함께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혹시라도 감정상의 왜곡이나 상처가 생기면 반드시 믿음이 좋은 자가 먼저 믿음이 모자라는 자를 용납하여 끝까지 참아 주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감정을 잘 절제하려면 무엇보다 생긴 그대로 바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믿음과 감정의 조화를 이룬 후에 표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조화를 이루는 과정도 단순히 의지적 수양이나 훈련과 정서적 심리 치유에 바탕을 두어선 안 된다. 자신의 내면에 또 성도 간에 개입되어 있는 죄의 권세부터 죽여 나가야 한다.
죄가 개입되면 감정 표출이 부정적으로 흐르지만 죄가 제거되거나 최소한 죄에 구애 받지 않으면 감정 표출은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산출한다. 물론 이 둘 사이의 구분은 아주 미묘하고도 어렵다. 죄도 아주 교묘하지만 감정의 본질 자체가 아주 예민하기 때문이다. 너무 예민해 다루기가 힘들다고 그 절제를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감정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인데 오히려 그만큼 더 감정을 소중하고도 귀하게 다루라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육신, 지정의, 영혼 모두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인간은 당연히 그 모두를 한 결 같이 아주 소중히 여기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루어야 한다. 비록 자기 정신이 자신을 전부 통솔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항상 그분과 성령으로 교통하여 온전한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이 장에선 감정 절제를 잘못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경우들을 살펴보았는데 한 마디로 그 궁극적인 원인은 신자마저 아직 자유롭지 못한 죄의 권세로 판명났다. 그럼 죄의 권세에서조차 자유로웠던 역사상 유일한 인물인 예수님이 어떻게 당신의 감정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추어 잘 절제했는지 알아볼 차례다.
12/11/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