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3:13-16) 비방하는 세상을 부끄럽게 하라.

세종 한마음 교회 4/16 주일 설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3-16)

 

소망에 관한 질문을 받아봤는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해보겠으니 진지하게 생각해서 답변해 보십시오. 최근에 본문 15절 말씀대로 불신 이웃으로부터 “당신이 그리스도를 마음의 소망으로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조금 쉽게 말하면 “당신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습니까? 추측하건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듣지 못한다면 이 성경 말씀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신앙이 사상적 종교적으로 현재 세대를 주도하지 못하게 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거꾸로 인간 사회의 발전과 화합에 오히려 해를 끼치는 대표적인 종교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누구라도 기독교나 예수님에 관해서 한 번이라도 물어 봐준다면 너무나 반가운 일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개척 교회의 경우에는 전 교인이 나서서 섬기고 기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로선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실제로 그런 질문을 종종 받고 있었기에 이런 권면을 한 것입니다. 그럼 어째서 우리는 받지 못하는 질문을 그들은 종종 받을 수 있었는지 알려면 베드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이런 권면을 했는지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본 서신은 네로 황제에 의한 기독교에 대한 일차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AD 64년경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저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교인들더러 앞으로 닥칠 큰 고난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라고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작되었기에 “격려의 서신”이라고 불립니다. 서기 64년 7월에 콜로세움 근처 작은 기름 가게에서 우연히 일어난 화재가 가게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로마시 전역을 불사르는 재앙으로 발전했습니다. 가뜩이나 네로의 독선적 통치에 불만이 많았던 민심이 그 대화재로 급격히 흉흉해지자 네로는 크리스천들이 방화했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 결과 로마 당국보다는 오히려 시민들이 신자들을 더 학대했습니다. 실제로 이때 가로등처럼 신자들을 산 채로 나무에 매달아 태워서 거리를 밝힐 정도로 로마 시민들의 신자에 대한 증오가 극심했습니다. 대화재로 졸지에 재산과 생업이 잿더미가 된 위에 사랑하는 가족도 잃었을 테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것입니다. 대화재로 죽은 자기들 가족의 원한을 갚겠다는 복수심이 발동해 신자들을 똑같이 불에 태워 죽인 것입니다. 

 

그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을 극도로 증오하며 핍박하는 중인데 어떻게 그 믿음의 소망에 관해서 물어볼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성령의 영감에 따라 단순히 후대의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편지는 초대교회에 실제로 회람되었는데 당시 교인들은 자세한 설명이 없는데도 본문만 읽고서 베드로가 전하려는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라.

 

신자들로선 적극적으로 항변하거나 변증하면서 무죄를 입증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사실은 네로의 음모라고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먼저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3절)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말에 봉사가 기름값 대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봉사는 불을 밝힐 필요가 없어서 기름을 살 일도 없는데 너무나 억울하게 기름값을 갚도록 강요당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로마의 신자들이 공교롭게도 기름 가게에서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물게 되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정치적 모략으로 사람들의 분풀이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는 아무리 억울해도 맞서지 말고 열심히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로마 시민들은 악을 악으로 갚았으나 신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굳이 변명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선으로 갚아야 하는데 열심히 선을 행했는데도 계속 박해하면 그들이 악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곧바로 이어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14절a)라고 위로한 것입니다. 현재 세상의 권력은 네로와 로마 시민들이 쥐고 있기에 현실적으로는 그들이 형통할 수밖에 없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너희가 지금 너무나도 억울하게도 죽음까지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교회사적인 이런 큰 박해나 성경의 유사한 기사들을 보면 종종 하나님은 너무 냉정하고 심지어 잔인하신 분처럼 여겨집니다. 오늘날도 심심찮게 신자의 아이가 나자마자 불구나 불치병에 걸렸고, 너무나 신실하고 헌신 된 주님의 일꾼이 큰 화를 당합니다. 예컨대 새벽 기도에 가는 연로한 권사님이 음주운전 차에 치여 소천하는 일이 생깁니다. 반면에 세상의 완악한 불신자들은 갈수록 더 형통하고 풍요를 누리고 죄송하지만 선데이크리스천에겐 좋은 일만 넘칩니다. 세상의 형통과 출세는 바라지도 않는 신실한 신자로선 최소한 억울한 손해나 힘에 겨운 불행은 막아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생깁니다.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도 본문 안에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14절b)라고 말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로마 시민들은 지금 신나게 신자를 박해하는 중인인데 사도는 오히려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냉혹하게도 신자에게 고난을 주거나 막아주지 않는다고 여기는 신자의 불만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박해를 가하는 그들이 도리어 불만과 불안에 가득 차 있고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가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간디가 인도 독립운동에서 그렇게 한 것을 기독교적인 가치를 실현했다고 높이 평가하는데 조금 부족한 해석입니다. 간디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며, 그는 분명히 의로운 동기에 따라 훌륭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시에 현실적으로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무저항이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무리 때려도 한마디 대꾸하지 않고 계속 다시 일어서는 상대가 가장 무서운 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비폭력 무저항은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 박해하는 로마 시민들이 핍박받는 신자보다 더 두려워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히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아담의 타락 이후 왜곡 파손되어도 양심과 종교심의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죄를 지은 가해자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오히려 더 괴로워지게 마련입니다. 당장에는 분노가 치밀어 박해를 가했어도 아무 잘못 없는 신자를 죽였기에, 설령 신자의 잘못이 아닌 줄 몰랐어도, 짐승과 다른 인간인지라 폭행 살인한 것만으로도 로마 시민은 결코 발 뻗고 잘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경적 하나님을 믿지는 않아도 종교심이 발동해 어떤 형태로든 신의 처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신자더러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복수하면 똑같이 양심과 믿음에 저촉되어서 똑같이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며 영혼의 평안을 결코 누리지 못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신자들을 박해한 로마 시민이 하나님의 긍휼이 절실히 필요한 더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미 예수님을 믿었고 그분을 모시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은 아직 하나님도 모르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해도 오직 절망과 죽음으로 치닫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억울한 경우를 당해도 하나님의 불신자를 향한 긍휼한 심정을 잘 알기에 예수님이나 스데반처럼 죽어가면서도 원수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비폭력 무저항에 그쳐선 안 되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천국 소망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해자를 진심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기며 선으로 갚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현실적으로 최고의 풍요를 이룬 솔로몬이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하나님 없이 해 아래에서 행한 불신자들의 모든 수고와 업적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전12:8) 히브리 어법에는 비교급과 최상급 표현이 없기에 두 번 반복하면 비교급이고, 세 번 반복하면 최상급입니다. 헛되다고 세 번 반복했으니 헛됨의 최대치입니다.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인생에는 헛됨뿐이라는 것입니다. 실패, 절망, 죽음으로 가득 차지 그 반대로 의로움은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의 영광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서 형제와 동족 간에 살육하는 참극과 음란한 우상숭배로 이어졌지 않습니까?

 

불신자들의 삶이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고 풍요롭게 보여도 그들의 내면은 항상 허망하고 갈급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명확히 인식하지 못해도 수시로 까닭 모를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제가 미국 이민 가서 사는지도 만 32년이 되었으나 항상 발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라는 존재의 뿌리인 부모와 친척들이 있는 모국을 떠나있는 데다 여전히 영어가 서툴러서 미국 사회에 온전히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 중에 간디처럼 정말로 의롭게 사는 자도 많지만, 그 실존의 뿌리인 하나님과 관계가 완전히 끊겨 있기에 평생토록 자기 삶에 결코 충족하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바람 부는 대로 공중에 떠다니는 그들이야말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세상이 신자에게 무엇을 왜 묻는가?

 

이제 네로 시대에 신자를 핍박하는 자들이 오히려 두려워하고 신자에게 신앙적 소망에 관해 물었던 이유와 내용이 밝혀졌습니다. 자기가 신자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부인하면 생명을 건지고, 또 혹시 신자들이 있는 곳을 밀고 하면 큰 보상을 받을 텐데도 그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담담히 박해를 받아들였습니다. 로마 당국자들과 시민들로선 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신자들이 오히려 더 평온하므로 그들의 두려움은 더 커지고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알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로선 신자들의 생각과 행동거지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 교인 중에는 당시의 엘리트층인 왕족, 귀족, 군인, 지주들도 있어서 무식하거나 광신적인 착각에 묶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자기들이 부리던 노예들과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서로 동등하게 진심으로 교제하며 섬겼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신자들이 날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며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였고 무엇보다 온 백성으로부터 착한 행실로 칭송을 받았기에 점점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2:44-47)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단번에 영적인 찔림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왕족 귀족이 노예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섬기니 자기들 체면과 위신을 깎아내린다고 엄청난 비방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재산을 팔아 노예, 창녀, 병자, 귀신 들린 자 같은 비천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니 종교에 한 번 잘못 빠지면 저렇게 된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도대체 대책이 서지 않는다 등등 얼마나 뒤에서 숙덕거렸겠습니까? 자기들 사교 모임에 아예 발도 못 들여놓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이 네로의 박해 때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로마 당국과 일반 대중의 극심한 박해를 받는데도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모습으로 그 핍박을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불에 타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찬송을 부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로마의 귀족과 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 박해 때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는 오순절 후 예루살렘에서부터 무고하게 큰 곤욕을 겪었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하게 쓰임 받고 있음을 오히려 기뻐하면서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행5:41) 그렇다면 사도는 지금 순교를 당한 것도 신자가 열심히 선을 행한 것이자 그중의 최고라고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무리 때려도 쓰러지지 않거나 쓰러져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상대에게 가장 질리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성경 말씀에 능통하고 기도를 뜨겁게 한다고 믿음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자라면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일이며, 그보다는 아무리 죄로 넘어져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배짱 좋게 믿고서 진심으로 회개하며 죄를 씻어버려야 합니다. 어떤 힘든 고난이 닥쳐도 아침마다 기도와 말씀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은총을 다시 붙들고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는 것이 가장 좋은 믿음입니다. 

 

네로 핍박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그런 모습에다 도덕적인 의로움과 영적인 신령함까지 갖추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세상 사람들로선 자연스레 거룩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가능하도록 지어진 존재인지라 진실로 하나님께로 오는 신령함과 그분이 역사하는 거룩함과 마주치면 소름이 끼칠 정도의 영적인 찔림을 반드시 받게 마련입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살아있는 횃불이 되어 불에 타면서도 찬양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두렵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많은 이가 광신자라고 비난 조롱할지라도 그중에 하나님이 택하였다면 신자들의 너무나 경건한 모습에 속으로 고개를 숙이는 자도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저들이 저럴 수 있는 근거나 힘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으로선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일이므로 저들의 배후에는 분명히 신령하고 거룩한 절대자가 역사하고 있을 것이다. 저들 같은 믿음을 나도 가지고 싶으며 그러면 세상 어떤 고난에도 담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자들이 너무나 어리석게도 인생을 허무하게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들의 찬양과 기도를 들을수록 신기하게도 정작 자기들이 잘못되었고 저들의 인생이야말로 이 땅에 없는 절대적이고 거룩한 진리를 찾아가는 아니 이미 찾아서 붙들고 살고 있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본문 설명대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왜 아무 소망 없이 인생을 허비하느냐? 너희 믿음이 시쳇말로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혹시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비밀이라도 있느냐? 무슨 배짱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느냐?” 그에 대한 신자들의 대답은 한결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처럼 비참하고 가난한 죄인을 구원하려고 직접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내가 올라가야 할 십자가에 오르셔서 내가 받을 죽음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그 은혜를 받아들인 나를 용서하여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다.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고 내 속에 그분의 영이 와 계심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주님이 사흘 후 부활하심으로써 그분과 연합된 나도 부활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자 무덤들이 터지고 먼저 죽은 성도들이 살아나 예루살렘 온성이 그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지 않았느냐? 주님이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으며 오직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다.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주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내지 못한다. 부활이 보장되었으므로 죽음조차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한 치도 건드리지 못한다. 예수가 없는 너희들 인생이 오히려 아무 소망이 없기에 너무나 어리석고 헛된 죽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을 받는 것은 나에겐 과분한 최고 영광이며 주님을 찬양하며 죽을 수만 있다면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이다.”라고 대답해주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접하면?

 

사도는 신자더러 세상을 향해 자기가 믿은바 소망에 관해 한마디로 “나는 천국의 영광을 확보했기에 부활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라고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16절) 되는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부활의 복음을 들은 불신자가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하신 불신자라면 성령이 간섭해주시므로, 자신의 영적 실체가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죄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생전 처음 발견하고 스스로 아주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부끄러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랑 앞에 비추어서 자신은 너무나 추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절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사렛 이단인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으나 그의 너무나 평화로운 순교와 오히려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영적 찔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자신이 영적으로 가장 의롭다고 자부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비춰 봄으로써 비로소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로선 여호와를 위하는 종교적인 열정으로 신자들을 핍박했지만, 예수님은 전혀 벌주지 않고 먼저 찾아와서 용서해주었습니다. 자신의 그 사악했던 지난 잘못마저도 천하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구원해주려는 하나님의 능력이 작동한 섭리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부끄럽게 여길지라도 오히려 십자가 복음이야말로 천하 만민에게 소리높여 자랑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느끼는 둘째 부끄러움은 첫째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런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 듣고도 여전히 세상의 형통, 풍요, 사치, 쾌락이 더 좋아서 자신의 영적 부끄러움을 전혀 인식 못하고 거꾸로 신자들이 어리석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장차 겪게 될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영원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교회가 가야 할 길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왜 오늘날 우리가 믿는 소망에 관한 질문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지 못합니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이 신자들이 갖는 소망에 관해서 물었으니까 그들이 보기에도 당시 신자들이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해답이 나왔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오늘날 신자들은 아무런 소망을 붙들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는 관점이 이제는 예수쟁이들은 너무 뻔해서 호기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찬송하고 자기들만 천국 가고 다른 종교는 우습게 안다는 것입니다. 말로 전하는 천국 복음과는 달리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으니 콩으로 매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자들이 바라는 소망도, 교회에서 뜨겁게 기도해 이루려는, 사실상 자기들처럼 현실의 형통과 출세이니까 굳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남들보다 더 착하게 살고, 교회 안에 추문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일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일반적인 도덕과 종교가 다 가르치는 내용이고 실제로 불신자 중에는 아주 의로운 자도 많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짐승의 탈을 쓰지 않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하고 당연히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차원과 내용을 기독교인들 스스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저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 착해질 수 없기에 예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순전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그 후로는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평생토록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예수 십자가를 몰라서 하나님 밖에 있으면 자기 의만 자랑하는 악이 됩니다. 

 

이제 갓 개척한 교회의 기를 죽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소망이 얼마나 고귀하고 감사한지 여러분 각자가 절감하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가 바로 전해지고 실현되면 반드시 모든 이에게 생명 아니면 죽음의 냄새만 풍길 수밖에 없기에, 어정쩡한 그 중간은 절대로 없기에, 신자의 삶도 세상 앞에 그 두 냄새만 풍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여러분은 정말로 완전히 다른 교회와 다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성도 간의 교제가 좋고, 청년들 단합이 잘되고, 부정 불법이 없고, 목사님 인품과 설교 좋다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진짜로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신자와 교회여야만 합니다. 세상 앞에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전혀 별종의 인간, 마치 외계인 같다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들로 거룩한 영적 찔림을 받게 해야 합니다. 너희가 믿는 믿음이 뭔지 나도 갖고 싶으니 제발 좀 가르쳐 달라는 말을 듣는 교회와 신자여야 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이는 극악한 죄인이 교회 문을 두드려도 신자들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눈물 어린 기도와 선포되는 십자가 복음으로 그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아주 간단하며 답도 쉬운데 신자들이 평소에 생각지 않거나 못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실 확률이 얼마일 것 같습니까?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하니까 50-70%입니까? 확률을 높게 가질수록 신앙이 좋고 낮게 여길수록 신앙이 아직 미성숙한 것입니까? 

 

동전을 던져서 한쪽 면이 나올 확률은 50%입니다. 앞면과 뒷면이라는 두 가지 상수(常數)가 있으므로 어느 면이 나올지 변수(變數)는 예컨대 백번 던지면 앞면과 뒷면이 거의 50번씩 번갈아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있으면 있고, 절대로 없으면 없습니다. 그럼 확률은 100% 아니면 제로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기에 그분의 실존 확률은 100%라고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무 뻔한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절대적인 100%의 확률로 실존한다면 신자의 모든 생각 말 행동을 그에 맞춰야 합니다. 그분은 절대적 진리이자 절대적 선이자 절대적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신자를 향한 사랑은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전부를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다 내어주셨지 않습니까? 그럼 신자의 그분에 대한 사랑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신자는 절대적으로 거짓되지 않고 진실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악하지 않고 의로워야 하고, 절대적으로 추하지 않고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소망에 관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들이 질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신자로선 하나님 그분이 각자에게 “네가 나를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껏 드린 말씀을 한 문장으로 바꾸면 “절대적으로 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100% 확률로 살아계신다고 입으로 시인하면서도 과연 네가 지금 그 모습 그 꼴로 살고 있어도 되겠느냐?”라고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물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소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을 이미 확보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미 소지하고 있는 부활의 권능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미래에 누릴 천국의 삶을 미리부터 살아가는 자입니다. 영광스러운 미래에 합당하게 현재도 영광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절대 시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뒤엎을 권능을 이미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머리이고 성령이 역사하여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면 반드시 엄청난 영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교회와 여러분이 단순히 또 다른 개신교 침례교 교회와 교인으로 멈춰선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볼 때 부끄러워지고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되어야, 최소한 우리가 가진 소망에 관한 질문이라도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교회들을 폄하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으로 기독교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참 생명이 교회의 모든 사역과 성도들의 교제와 섬김에 살아서 역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 서신을 저작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 예수님은 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을 다시 가르친 후에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땅에서 행하면 하늘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교회와 성도에게 온 우주를 거룩하게 바꾸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들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불신자들의 조롱거리가 되다 못해 그들의 향락의 밤을 밝혀 주는 횃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모습을 보고 타락의 도성 로마는 실제로 뒤집어졌고 복음은 염병처럼 어떤 사람도 막을 수 없는 권능으로 순식간에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신자라면 순교해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부활 소망이 없는 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보다 세상 사람들로 오히려 부끄럽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부활 소망으로 살아가는 단 한 명의 교회가 진짜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과 죄악과 사탄의 추악한 세력에 절대 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1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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