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은 그때까지 인간을 묶고 있던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 부순 것입니다. 죄인의 구속 사역을 완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은 네(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고 하신 예언을 성취한 것입니다. 나아가 타락 이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 계획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어서 ...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히10:19,20)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열리고 들어갈 수 있는 보좌란 지성소이며, 또 지성소란 백성의 죄를 씻는 곳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 앞에서 구약의 동물 제사와 대제사장이자 대속제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비교 설명한 것입니다. 또 바로 직전에는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0:18)고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미리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의미를 밝혔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믿은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선언한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 즉 사단의 사슬에서 죄인을 해방하였다는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구원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인간을 묶고 있던 죄와 사단과 사망의 사슬을 끊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세 가지 사슬만 끊은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멸절 시킨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사단은 영계에서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 세상은 죄악이 기승을 부리며 인간은 육체적 영적 사망의 덫에 갇혀 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복음마저 여전히 망하는 자들에게는 가리어져 있는데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이루신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당신의 뜻의 비밀을”(엡1:4-9 발췌) 만천하에 알리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하나님을 배반 거역하고 있는 죄인들에게 밝혀 보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죄를 사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는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구원의 세 단계 중에서 죄(원죄)의 영원한 형벌에서 풀리는(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칭의(稱義, Justification-차후로는 구원이라고 대칭함)만 완성된 것입니다.
구원 이후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기 위해 죄의 권세를 이겨내는(free from the power of sin) 성화(聖化 Sanctification)와, 천국으로 옮겨져 죄의 실재(實在) 자체에서 해방되고(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주님의 영광으로 덧입혀지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단계는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루신 것이 아니라고만 말하면 어폐가 있기에 보충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그 두 단계는 이미 신자에게 그 결실은 보장되어 있되 그것을 이뤄나가는 책임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권리이자 축복으로만 맡겨졌습니다. 천국 입성 즉, 구원의 완성은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확보된 영생 안에서 살기에 신자로선 예수님을 더 닮아가며 그분 뜻대로 살아갈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 행사를 많이 한 것이자 하나님의 복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 믿은 신자에겐 더 이상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 받으려 스스로 노력할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성화를 잘 이루어서 부끄럽지 않는 구원을 달성하느냐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확보된 영생을 신자에게 보증하고 또 성화를 이루는 일을 인도하며 돕고자 성령을 내주케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그 일차적인 뜻은 율법을 준수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온갖 부담을 지우는 당시의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십자가를 통해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초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께 배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따라서 함께 교제 동행하라는 요구 즉, 성화를 이루라는 뜻도 겸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벼운 까닭은 당신의 계명이 율법을 다 폐지했거나 그 가르침이 율법보다 경박한 내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아가 복음 안에선 무슨 죄를 짓거나,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영화로 완성될 것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가르침의 내용은 오히려 더 깊이 있고 풍성하며, 무엇보다 멍에를 예수님이 함께 메어주기에 가볍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신자 자신의 능력과 방식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점진적인 성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입니다. 성화는 여전히 신자가 이루어야할 부분으로서 이제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성령과 함께 이루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화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똑 같이 신자의 책임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신자가 행해야 할 종교 행위가 파격적으로 개혁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동행 여부만 새로이 달라진 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죄를 씻어서 영원한 형벌에서 제외시킨 (칭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십자가로 폐기 시킨 것도 구약 중에서 죄를 씻는 것에 관계되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잘 설명한 대로 동물 제물을 바쳐 죄를 씻는 방식입니다. (사실은 이도 더 자세히 따져볼 측면이 남아 있는데 율법에 관한 아래 단락들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십일조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죄를 씻어서 칭의를 이루는 구원과 연관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처음 십일조 규례를 정할 때부터 그 목적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서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을 얻거나, 믿음이 생기거나, 믿음의 좋고 나쁨의 문제보다는 믿음을 더 성숙시키는 차원에서 십일조를 제정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다 폐지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율법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측면에서부터 오해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율법을 행위언약으로 해석하여서 마치 그대로 다 준행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율법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도로 주신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신구약 시대를 통 털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도 전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 않습니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4:3) 예수님도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구원의 진리를 확인해 주었지 않습니까?
심지어 율법을 하나님께 직접 수여 받은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바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속하여 광야를 방황할 때에 한 세례를 받고 다 같이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먹고 마셨는데, 그 백성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그리스도시라”(고전10:1-4)고 증언했습니다.
또 율법 이후의 인물 기생 라합의 경우도 율법 특히 제사법을 준수하여 구원 받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설령 만에 하나 유대 공동체에 들어온 이후로 율법을 다 준수했다 해도, 그녀는 여리고 성 전투에서 믿음으로 이미 구원 받았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의 경우를 보십시오. 율법을 준행했기에 구원 받았다는 진술은 단 한마디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간과 행위언약을 맺은 것은 아담과 선악과로 맺은 단 한 차례뿐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위반하지 않으면 영생을 얻고 만약 위반하면 죽음의 벌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아담이 그 둘 중 하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인간은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으며 원죄에 묶이어 죄의 삯으로 사망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원시복음을 예언해 주셨고 또 직접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이 타락할 줄도 아셨지만 인간을 짐승과 다른 존재로 만들고 또 언젠가는 자의로 기꺼이 자신을 경배케 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하셨습니다.(골1:16-19)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8),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영원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4-25)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선택한 자에게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믿음이 심겨지고 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율법은 구원의 길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구원이었습니다. 만약 율법이 구원의 길로 주어졌다면 당연히 율법의 전부는 자동적으로 완전히 폐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기에 당연히 다 폐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율법은 무슨 목적으로 주었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언뜻 보면 언약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언약은 이미 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모든 민족을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언약의 연장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도 그가 받은 언약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이미 선택을 받아 그분의 소유가 되었고 제사장 나라가 되는 소명도 부여 받았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을 필두로 이제 모세를 통해 주실 모든 율법은 거룩한 백성으로 당연히 지켜나가야 할 계명이었습니다. 지켜야만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맺는 언약은 세상에서 인간들끼리 맺는 쌍무 혹은 종주권 계약과는 다릅니다. 언약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풀어 놓은 은혜를 당신의 백성더러 찾아서 누리라는 뜻입니다. 서로에게 부과된 의무를 이행해야만 계약이 유효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약속하신 것은 영원토록 신실하고 반드시 이뤄지며 인간은 단지 수혜자로서 참여만 할 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공원으로 일요일 오전 열시까지 오는 사람은 바비큐 갈비를 무료로 주겠다고 하는 것과 회사에서 야유회에 가는데 마찬가지로 갈비를 무료로 줄 테니까 공원에 열시까지 오라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열시까지 가지 못하면 절대 갈비를 공짜로 먹을 수 없습니다. 행위가 조건입니다. 갈비는 조건이 이행된 보상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갈비를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근거는 이미 회사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야유회에 가지 못하면 갈비를 먹지 못하고 또 늦게 가면 이미 먹고 남은 찌꺼기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준행하면 구원을 얻는다면 전자의 경우입니다. 율법이 구원을 얻는 길이자 조건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이미 택함을 받은 백성이 거룩해지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후자에 해당됩니다. 성화를 이루는 방식으로서 신자가 누릴 축복이자 권리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율법의 목적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신6:1,2)
건너가서 얻을 땅 즉, 가나안에서 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방 족속들 사이에 그들의 우상에 넘어가지 않고 제사장나라로서 참 하나님을 아는 구별된 모습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죄를 씻어서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화를 이룰 구체적 방도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나 율법에서 이방에서 성행하는 우상 숭배와 성적 부도덕에 대해서 가장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무엇이 폐지되었는가?
하나님이 율법을 구원이 아니라 성화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면 죄 씻음에 관한 계명만 빼고는 원칙적으로 폐지될 이유는 아예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폐지될 이유가 없다는 뜻은 성화를 실현하는 형식과 시대적 특수 상황에 임시로 적용되는 조항들만 폐지 내지 변경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안에 함의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동물 희생 제사입니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과 그 의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며 생명은 피에 있기에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은 오직 흠 없고 죄 없는 어린양 예수의 죽음에 동참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을 제물로 죽여서 바친 것은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피의 제사로 속죄를 구하는 의미는 십자가 구속의 진리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영단번의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께서 구원 사역을 완수했기에 당연히 이 제도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동물 제사의 두 번째 의미는 성화에 관여된 것입니다. 매일 상번제를 드리고 또 속죄제, 속번제, 대속죄제 등 계속해서 동물 제물을 바친 까닭은 도덕적 종교적 죄를 수시로 정결케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설파한 대로 그 효력은 일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법이 불충분했다든지 그 제물을 일부만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죄를 지었기, 모든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도덕적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진정한 죄 씻음 즉, 구원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1-4)
아무리 동물 제사에 성화의 의미가 있고 그 정신은 살아 있다 해도 신약 시대에 동물을 죽여 제물로 바쳐서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동물 애호 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성령이 이미 내주한 신자는 그런 외적 형상, 물건, 생물을 구태여 바칠 것 없이 심령으로 애통해 하는 회개를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루에도 세 번 씩 상번제를 드렸듯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는 율법의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성화의 의미를 갖는 동물 희생 제사의 형식은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고 또 시대 상황도 바뀜으로서 자연히 폐지된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성화의 방식으로 주신 율법이긴 하지만 이 외에도 폐지된 것들이 있습니다. “첫 언약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인간이 가시적으로 속죄를 비는) 성소가 있더라. ...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1,7-10)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폐지될 율법의 범위를 명확하게 밝혀 놓았지 않습니까? 죄를 씻는 동물 희생 제사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지만, 그 외에도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에 관한 율법도 개혁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맡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바꿔 말해 그 법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확실히 폐지되어야 할 것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우선 “먹고 마시는 것”은 부정한 음식에 관한 율법입니다. 성소에 바칠 정결한 제물을 구분하고 또 당시의 위생적 상황에 맞추어 제정한 법입니다. 그러나 성전 제사가 폐지되고 위생 상황이 바뀐 현재에 와선 구태여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아니하며(롬14:17),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합니다.(고전8:8)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분명하게 폐지되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씻는 것”은 제사장, 성소, 성전기물을 정결케 하고 문둥병 등이 나은 후에 성전에서 결례를 드리는 것들과 관련 있는 율법들입니다. 이 또한 성전 제도가 폐지되었으니 당연히 함께 폐지되어야 합니다.
율법에 그럼 상기의 것들만 있습니까? 그 외의 계명들은 없습니까? 신자 개인이 도덕적으로 거룩해지는 사항에 관한 것과 사회적 공동체를 하나님 뜻에 맞게 다스릴 수 있는 조항들이 있습니다.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정국가를 표방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원리까지 있습니다. 이런 율법들에 포함된 근본 목적과 뜻 자체는 폐지되기는커녕 타협, 융화, 수정도 되지 않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은 단지 그 목적과 뜻을 실현하는 방식만,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는 형태로 아주 조금씩 바뀔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라고 해서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의 드러난 하나님의 근본 통치 원리에 비추어 성령의 인도를 구하면 얼마든지 그분의 뜻에 합당한 방식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같은 십계명은 계속 유효한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십계명을 다 지켜야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성화를 이루는 기준으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얼마나 성적 순결에 대해 강조했습니까? 구약 율법과 달라진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는 심판만 유보했지 용서해 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강조했지 않습니까?
그럼 십일조는 어떤 범주에 들어갑니까? 구제에 사용하고 제사장들의 사례를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미 형성된 신앙공동체를 아름답게 다스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이 명시적으로 폐지되었다고 선언하는 율법 즉, 죄 사함을 받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과 씻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제사장의 사례이기에 성전제도가 사라졌으니 십일조도 함께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 #34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자세하게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설령 성전제도와 함께 제사장 사례의 목적이 사라졌다고 해도 신앙공동체더러 성도와 이웃을 구제하라는 뜻은 여전히 살아 있고 교회가 존속하는 한 계속해서 권면 장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한 예수님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7-11)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그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미 처음부터 갖고 있던 동일한 계명이지만 구태여 그렇게 명명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구원의 은혜 가운데 진정으로 들어온 자는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이기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약의 도덕법이 그대로 계속 유효하되 신자가 그것을 실현하고 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는 방식만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이 새로 주는 계명이 될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럼 구약 시대에는 미워하라, 사랑할 필요 없다, 사랑 안 해도 된다는 등의 계명을 주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율법사가 모든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물었더니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근본적인 목적과 뜻이 바로 그 둘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신구약을 망라한 모든 세대 모든 신자가 영원토록 지켜야할 가장 큰 두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도덕적 율법이 여전히 유효함을, 아니 둘째는 그와(첫째와) 같으니라고 하셨기에 하나님 사랑과 동등하다고까지 강조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설명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이웃도 응당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십일조에 들어 있는 구제의 정신이 없어지기는커녕 예수님에 의해서 더 강화된 셈입니다.
산상 수훈에서도 예수님이 율법의 도덕법을 더 강조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마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려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육신적 생명을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합니다. 형제에게 모욕 준 것으로 공회에 잡히고 지옥 불에까지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놈이라는 원어의 뜻이 영어로 치면 “머리가 텅 빈 놈: empty head”입니다. 머리가 빈 것은 바로 인간 구실을 못한다(lifeless)는 모욕이기에 살인과 방불한 것입니다.
옛 계명인 살인치 말라는 것이 취소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확장 강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옛 사람이 살인치 말라고 했고 이제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고 해서 옛 계명이 취소되고 즉, 이제 살인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 아닙니까?
하나만 예를 더 들어 봅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8,39) 마치 복수를 강조한 옛 계명을 폐지하고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트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찌니라.”(신21:26,27)
주인이 남종을 다치게 하면 주인에게도 똑 같은 위해를 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언뜻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종으로선 주인에게 이빨이나 눈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종에서 풀어지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겠습니까? 율법의 동해(同害) 보복법은 오히려 지위나 권력이 높다고 과도한 복수를 하지 말고 피해당한 만큼만 정확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옛 계명의 그 뜻은 취소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과도하게 핍박하거나 복수하는 자를 만나도 똑 같이 과도하게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넘어서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는 계명과 맥이 일관되게 연결됩니다. 공평한 대응을 넘어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까지 그 의미가 확대 된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모아진다고 했지, 옛 계명을 없애고 이제 이 두 새 계명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이 말씀을 단순히 십자가 구원 사역으로 율법이 마감되었다는 설명으로 보면 안 됩니다. 분명히 명시적으로 율법이 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천지가 있는 동안에는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유효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구약 율법의 도덕적 계명과 산상수훈을 비롯한 당신께서(하나님의 자격으로) 가르친 모든 계명도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손수 본을 보여 다 실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실천의 대표적 예를 들어 봅시다. 원수에게 동해의 보복만 해도 사실 세상 윤리로는 의로운 셈입니다. 거기다 미워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으면 아주 큰 의인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까지 하면 정말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세상을(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던 죄인들을 하나님으로서) 사랑하셨고, 또 마지막 순간에도 당신을 십자가에 달았던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지 않습니까?
죄가 없으신 분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에 기준에 완전히 합당한 자로서 십자가의 완벽한 대속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도 완벽하게 달성되었기에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예표하거나 죄를 씻어 정결케 하는(정결한 음식에 관한 법도 포함) 구약 율법은 폐지되었습니다. 반면에 당신이 몸소 도덕을 실천하여 거룩해진 것처럼 당신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당신처럼 거룩해지라고, 그것도 다시 와서 최후 심판할 때까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신자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합니다. 구약 율법대로 동해만 보복하는 자들도 다른 이방 족속보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편이었지만 당신의 백성은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하신 것입니다.
여전히 유효한 십계명
그럼 두 가지 의문이 새로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정말로 인정해 주었는지, 또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어떻게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해질 수 있는지의, 둘입니다. 첫 질문은 비교적 쉽게 답이 나옵니다. 그들은 문자적, 형식적으로만 지켰습니다. 십일조도 절고 병약한 제물을 동원해 숫자만 채워서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옛 계명에 들어 있는 정신을 더 확장시켜서 말이나 마음으로 짓는 죄를 오히려 더 강조했으며,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은 제사보다 상한 심령의 곁에 있다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외식하는 자로 예수님께 야단맞다 못해 유일하게 저주받는 부류가 되었습니다. 그들보다 의가 나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처럼 율법의 의로운 계명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지키되 특별히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지키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해 보면 간혹 자기들은 교회는 안 다녀도 십계명을 어긴 적이 없기에 죄인이 아니며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미신 같은 우상 숭배 하지 않고, 부모를 잘 공경하고, 살인 도적 간음 같은 것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첫째 계명인 하나님을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뒤집으면 바리새인의 의처럼 십계명도 문자적으로는 다 지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말로 살인하고, 마음으로 간음하는 죄를 몰랐을 뿐 아니라 십계명에도 자기들이 절대 지킬 수 없는 두 가지 계명이 있음을 몰랐습니다. 불신자인지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계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 열 번째의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 속담으로 바꾸면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다 적용할 수 있다는 속담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솔직히 이 계명에서 떳떳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십계명 안에도 행동이 아닌 마음으로 짓는 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둘 째 계명입니다. 흔히 깎아 만든 신상에 절하는 정도로 이해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계명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상은 없는데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또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만족, 기쁨, 안전,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또한 우리말 속담으로 바꾸면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하고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권력이 자신에게 행복과 안전을 갖다 줄 것이라고 집착해보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인생의 독이 되어 행복과 안전은커녕 실패와 멸망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자는 반드시 건강, 외모, 지성, 명예, 돈, 권력, 등 각 자만의 우상이 몇 개씩은 다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따지면 예수를 믿는 신자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조차 절대로 완벽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위 두 계명을 수시로 위반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상시적 죄의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말로서 모욕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의심 불안 심지어 불신앙에 떨어질 때가 많은데 바로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셈입니다. 신자 불신자 막론하고 십계명이라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면 율법은 구원의 길로 주신 셈이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이 또한 당신의 백성들의 성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으로 따져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십계명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도무지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로 주신 것입니다. 또 십계명 안에는 십자가의 표상이 실제로 들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첫 네 계명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의미하며 나머지 여섯 가지 사회적 계명은 인간끼리의 수평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수직적 관계를 먼저 강조하셨기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올바른 수평적 관계도 따라 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수직과 수평이 함께 교차하는 십자가의 형상이 십계명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속한다고 규정하신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십계명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수여하신 첫 째 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나타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이 없느니라.”(롬4:15) 율법은 인간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1-24)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진리가 완전히 계시되었기에 거기까지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율법의 역할이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은 능히 살게 하는 즉, 구원의 길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뒤집으면 능히 죽게 하는 역할은 여전히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십계명만 해도 불신자는 물론 신자마저 제대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즉, 죄 앞에서 인간이 너무나 무력함을 알도록 해줍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율법이 십자가의 예표로서의 역할은 끝났지만 도덕적 영적 계명은 여전히 성화로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5:20-6:2)
율법이 가입한 것은 일차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비록 계속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있더라도 더 이상 죄에 거할(居: 습성이 되어 묶여 있을) 수는 없기에 자신이 범죄 했음을 더더욱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의 은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처럼 구원을 얻고도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자는 오직 예수뿐!”이라고 절규할 수 있으려면, 율법 중의 도덕적 계명과 그 뜻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결국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 율법의 도덕률에서 공통점이 하나 도출 됩니다. 비록 예수님이 신자더러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명령을 주셨더라도 절대 인간은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기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겸손해지고 죄에 대해 심각하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어떤 인간도 쉽게 도달할 수 없다 해도 궁극적인 목적지는 반드시 밝혀 주어야 합니다.
누구나 쉽게 깨달아 온전해질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런 계명을 주실 필요도 사실 없는 것입니다. 제대로 그러지 못하니까 아주 강조하면서, 때로는 과장하는 표현을 동원해서까지, 당신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라고 독려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진짜 속마음이나, 또 누구나 이웃에 대해 갖는 탐심을 드러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말과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예리하게 속속들이 밝히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성경적 의미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새 언약을, 새 계명이 아님,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계명은 인간이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언약은 하나님이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1-34)
자세히 보시면 언약의 내용은 옛 것이나 새 것이나 하나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항상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남편이자 하나님이었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분의 백성답게 살지는 못했어도 언약의 내용은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인간은 그분을 배역하여 원수까지 되었지만 그분은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로서 여일(如一)하게 사랑했습니다.
앞에서 아담에게만 행위언약을 주었고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인 은혜 언약으로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시험한 선악과 금령도 사실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였습니다. 인간을 모든 피조물 위에 세워서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고 또 유일하게 하나님을 스스로 경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 아닙니까?
다른 말로 창조 그 자체부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 있는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긍휼이 없으면 인간은 한 시도 절대 인간답게 살지 못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뜻도 바로 그러합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면 절대 안 된다는 종교적 형식적 성수주의는 물론 배격해야 합니다.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느냐, 예수님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느냐는 차원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신의 형상을 닮아 심히 좋게 창조된 사실만으로 그분께 평생을 두고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 뿐 아니라 지성, 건강, 재물, 지위 등 현실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오직 그분께로만 왔음을 고백하고 그분께 능력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주일 예배입니다. 주일은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하루를 당신께 경배하는 날로 따로 구분하신 그 질서에 순응하여 자신을 세상과 성별(聖別) 시키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성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그것도 부활로 완성되었기에 부활하신 첫날에 십자가 앞으로 자신을 구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실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얻을 이름으로 인류에게 예수 외에 다른 것을 주신 적은 창조 때부터 마지막 날까지 절대로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율법이 아니라 예수로 구원한 것입니다. 그 구원이 인간 앞에 확실히 드러난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시대별로 나눠질 뿐입니다.
다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새 언약을 주게 된 계기는 하나님 쪽에선 여전히 이스라엘의 남편이었는데 이스라엘이 바람이 나서 반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돌비에 십계명을 똑똑히 적어주었고 수많은 가시적 이적과 권능을 보여주었는데도 그랬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은 싫고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는 한 가지 이유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새 언약을 주겠는데, 다시 말하지만 내용은 같은데,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언약을 확실하게 믿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을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자나 작은 자의 구분 없이 즉, 인간의 조건과 자격은 전혀 묻지 않고 오직 당신의 주권에 따라 구원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당신께서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하나님의 신이 만민에게 부어지는 그 날이 오면 말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의 간섭이 없는 자연인은 십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없음을, 특별히 둘째와 열째 계명은 더더욱, 깨우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깊은 뜻도 완전히 믿음을 갖고 난 이후라야 제대로 이해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소망과 의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마음에 새겨진 법으로라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오직 내주하신 성령의 인도와 능력에만 의지해야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도덕률은 폐지되지 않았고 신약에 와서 더 보완 확충되었습니다. 그 깊은 의미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방도로 성령을 내주케 하신 것이 옛 언약과 다를 뿐입니다. 보완 확충되었다는 것은 계명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이 실현하는 방식만 달랐지 그 내용은 똑 같았듯이, 나아가 아담 때부터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와 무한한 사랑 가운데 살고 있음이 똑 같듯이 말입니다. 그럼 십일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특별히 구제 목적이 신약시대라고 해서 변함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