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만드는가? 비우는가?

조회 수 788 추천 수 84 2009.12.17 18:36:22
그릇을 만드는가? 비우는가?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 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왕하4:5,6)


엘리사가 선지자 학교 생도의 한 과부로부터 빚을 갚지 못해 두 아들을 종으로 넘겨야할 딱한 사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동네에서 빌려 오는 빈 그릇마다 기름을 채워줄 테니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오병이어 같은 이적이었습니다.  

이를 다룬 대부분의 설교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엘리사가 “그릇을 빌되 조금 빌리지 말고”(3절)라고 당부한 말과 본문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는 두 구절을 연결한 뜻만 강조하기 바쁩니다. 말하자면 동네의 모든 그릇을 다 빌렸더라면 기름이 더 나왔을 텐데 너무 아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그릇을 키우라고 당부합니다. 너무나 크신 하나님을 크게 의존하여 자신의 비전도 크게 키워 큰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크게 틀린 측면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당부에서 설교자나 회중 모두의 주된 관심이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일과 자기 비전을 크게 이뤄내는 일, 둘 중에 어디에 가있는지는 따져 봐야 합니다. 만약 후자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자로서 예의 내지 의무에 따른 공치사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분을 자기 종으로, 그것도 아주 크게 부려먹겠다는 심보일 뿐입니다.  

기름을 채우려면 그릇이 비워져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한 사실은 쉽게 간과해버립니다. 과부의 아들들이 정성이 모자라 그릇을 적게 가져왔을 가능성은 오히려 적습니다. 엘리사는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했습니다. 또 “조금 빌지 말고”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단 “빈 그릇을 빌되”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그릇을 빌리려 다녔지만 빈 그릇을 더 구하지 못했던 것이며 이미 다른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워야만 채워주십니다. 그것도 완전히 비워져야만 채워주십니다. 때로는 조금 비워도 그 비운 만큼만 채워주실 때도 물론 있습니다. 신자의 믿음이 너무 쥐꼬리 같아서 조금 밖에 부족하지 않은데도 절망에 빠져 헤매는 것을 당신께서 긍휼히 여기신 까닭입니다. 신자가 너무 실망하다 못해 당신을 잊을까 그분이 오히려 염려한 것입니다.  

신자가  연약해진 곳에 하나님의 강함이 차고 들어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모든 부분에서 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아무 계획을 세우지 말고 또 그 수행도 하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내 똑똑함이, 내가 가진 자원이, 내 성실함이, 나아가 내 믿음이 이 일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빼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일로 이루려는 궁극적 목적이 자신의 평안과 형통인지 아니면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인지 세밀히 점검해야 합니다.  

근자에 “내려놓음”과 “비움” 등이 신자들 간에 최고 인기 있는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조금이라도 현실을 도피하거나, 초자연적 은사만 사모하거나, 종교적 경건성만 강조하거나,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플라톤적 이원론의 색깔을 뛰거나, 자기 내면의 도덕적 수양만 독려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절대로 배격해야 합니다. 성경은 결코 그런 사상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도, 간접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그 화두의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모든 사고, 말, 행동, 주의 등을 완전히 버리라는 뜻이어야만 합니다. 즉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앞서려는 자신의 뿌리 깊고도 완악한 죄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의 것이 깨끗이 비워져야만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새 그릇을 더 만든다고 채워주지 않습니다. 비전을 크게 잡는 것은 새 그릇을 만드는 일일 수 있습니다. 신자의 “먼저 비움”의 절차가 행해지지 않아 하나님의 “후에 채움”도 따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비전이 처음부터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엘리사도 과부에게 분명 이렇게 먼저 물었지 않습니까?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2절) 하나님은 그 과부의 집에 유일하게 남은 한 병 기름을 사용해서 넘치도록 채워주는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예수님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막6:37,38)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신자에게 이미 주신 은사와 재능을 들어 사용해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자기 은사와 재능은 무시하고 무조건 새로운 계획만 크게 잡는다고 이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 사모님이 아내, 엄마, 성도, 남편 목사와의 동역, 교회의 각종 사역 등 다중의 역할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보다 못한 선배 사모가 “집에 가서 문들 닫고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그런 다음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이웃 사람들의 텅 빈 그릇에 다 부어주세요.”라고 권했습니다. 그 사모는 간절히 기도한 끝에 자신의 충만함을 스스로 추구한다고 해서 자신의 공허함이 매워지지 않으며 도리어 성도를 섬기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야만 자신도 채워질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말하자면 지금껏 계속 스스로 채우려는 모든 시도가 결코 성공한 적이 없었다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을 떨쳐버리고 교회 내 성도들 뿐 아니라 이웃 불신자 가정의 십대 아이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기왕에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을 부어주려 하자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무력증은 완전히 사라지고 성령의 무한한 능력에 의존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넘치도록 채워주심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완전히 비워진 그릇에만 기름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다그쳤을 때에 만약 조금만 비워진 그릇을 드밀었더라면 절대 기름이 채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려 온 빈 그릇이 동이 나자 비로소 기름 나오는 것이 멈췄습니다. 더 많이 빌려오지 못한 신자의 열성 부족만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빈 그릇이 있는 한에는 기름이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이 일을 이루시며 저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간절한 진심으로 아뢰어도 만약 자기 욕심이나 그릇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면 이미 그것들로 채워진 그릇일 뿐입니다. 또 자기 은사와 재능을 무시하고 세운 큰 계획은 당연히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 비전에 크고도 순전한 믿음이 작동할 측면은 사실상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눈 가리고 아웅 하려는 꼴입니다. 아무리 그분을 크게 믿고 또 자기를 다 비웠다고 자부할지 몰라도 자신의 종교적 실력과 열성에 속아 넘어간 착각일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믿음의 그릇은 사실상 너무나 작습니다. 믿음이란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두고도 그분을 과연 얼마나 알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바닷가 모래 알 중에 한 움큼이라도 쥘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위로가 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그릇이 아무리 작고 하나뿐이라 해도 완전히 비우면 그분이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것도 주위에 아무리 많이 나눠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주위에 자신을 다 나눠주려 했을 때에 더 그러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채우려는 웅덩이는 그 밑이 터져서 아무리 해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우리의 그릇이 비워지면 비로소 하나님이 그동안 터졌던 밑부터 막고서 채워주시기에 자연히 넘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12/1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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