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황제숭배(Roman Emperor Worship)
계시록 13장에 묘사된 두 무서운 짐승은 요한 사도의 극적인 비전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된다. 첫째는 참람한 이름을 가진 열개의 뿔이 머리에 달린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었다. 그 짐승은 용, 즉 사단에게 받은 권세로 큰 힘을 발휘하며 온 땅을 돌아 다녔다. 둘째는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달린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같이 사단을 섬기되 특별히 땅에 거하는 자들로 강제로 처음 짐승을 경배케 했다. 두 짐승 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했는데 바다짐승은 성도들과 전쟁을 벌였고, 땅의 짐승은 첫째 짐승을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이 무서운 짐승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체로 주석가들은 계시록의 이미지들은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이 살았던 당시 상황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요한은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 있던 일곱 개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계 2,3장) 그곳은 황제숭배(Imperial Cult)의 중심지로서 제국의 머리인 황제를 신성시하여 그에게 충성과 경배를 돌렸다. 따라서 로마 황제숭배와 급성장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가장 첨예하고 충돌했던 지역이다. 특별히 도미티안 황제 통치 말기(AD 81-96)에 가장 심했다. 그래서 교회의 초기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그 때로 잡는다. 이런 맥락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바다짐승을 로마 제국으로 해석하며 머리 일곱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른 로마 황제들로 본다. 또 땅의 짐승은 아시아 지역에 황제숭배를 강요한 관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계시록의 기록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로마제국의 종교 양식과 그 조직을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제국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황제숭배는 1 세기 후반에 이르러선 로마 국가종교의 핵심이 되었다.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기 전이라 로마의 신들에 대한 충성은 로마 자체에 대한 충성으로 간주되었다. 황제숭배는 아구스도 황제 시대(27 B.C.-A.D. 14)부터 국가종교의 하나가 되었는데 곧바로 황제에 대한 충성이 제국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는 기준이 되었다.
황제숭배는 원래 동방의 헬라왕국 고유의 지도자 숭배 제도에서 발단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신과 인간의 구별이 모호했다. 그리스 도시의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베푼 축복에 감사하기 위해 왕을 숭상했다. 다분히 아첨하는 문구인 “구원자(savior)” 또는 “은인(benefactor)"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왕은 마치 축복을 나눠 주는 힘을 가진 신처럼 여겨졌다. 로마가 헬라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이 관습을 알게 되었다. 로마 장군들이 현지인으로부터 동일한 숭상을 받았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을 숭배하는 것은 거부했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가문의 우두머리를 “천재(genius)”로 존경은 했다. 원래 “Genius”라는 용어는 가장(家長)과 연결해 사용했고 “삶의 능력 (life force)” 또는 “보호하는 영(protective sprit)"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어쨌든 아구스도 황제가 헬라관습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 황제 숭배제도를 만들었다.
아구스도는 삼촌인 쥴리어스 시저의 인기를 이용했다. 당시 옥타비우스로 알려진 그는 시저의 입양된 후계상속자이기에 “신성한 시저의 아들(son of the divine Caesar)"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원로원도 그를 신의 지위로 격상하는 법령을 통과시켜서 신과 동일한 명예(apotheosis)를 수여했다.
아구스도는 재임 기간 중에 뛰어난 업적을 쌓아 황제 숭배의 기초를 놓았다. 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을 종식시켜 모든 주(州)에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동부의 주들은 그를 구원자로 경배했고 신에 버금가는 찬사를 돌렸다. 심지어 로마에서도 그에게 아주 특별한 칭송을 올렸다. 원로원은 주전 27년에 옥타비우스에게 “exalted"(숭고한, 경외할만한)라는 뜻의 “Augustus”라는 이름을 부쳐주었고 인간(mortal)보다는 높고 신보다는 모자라는 신분을 부여했다. 온갖 맹세와 제물들이 제국의 머리이자 “하늘이 내린 아구스도”에게 바쳐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축제와 경기를 주관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선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의식하여 신격화 작업을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AD 14년에 그가 죽자 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명명했다. 사가(史家)들은 이 신격화 의식과 또 그에게 바친 예배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죽은 황제가 신의 왕국으로 오르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화장용 장작더미로부터 독수리를 공중으로 날아 올렸다고 한다. 이후 원로원에 의해 파문당하지 않거나, 또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며 생존 기간 중에 숭배를 요구하지 않는 한에는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이 신의 지위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인기가 없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신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갈리규라(AD 37-41), 네로(AD54-68), 도미티안(AD81-96)도 신이 되지 못했는데, 이들 모두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에 맞지 않는 여러 숭배 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네로와 도미티안은 심지어 그들이 범한 잘못 때문에 원로원에서 공식적인 유죄 선고까지 받았다.
아구스도는 로마를 벗어난 지역에선 신과 버금가는 지위를 비교적 자유롭게 누렸다. 자기에게 바치는 제단과 신전 건립을 허용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신전이 로마의 기존의 신들과 자신에게 공동으로 봉헌되도록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개인적 숭배를 보는 로마 보수주의자들의 반감을 무마시켰다.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지도자숭배 유전(遺傳)은 황제숭배종교의 모델이 되었다. 각주의 로마 총독들은 아구스도에게 신전 건립 허가를 요청했고 로마와 아구스도를 위한 신전들이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인 Pergamum(버가모)와 Bithynia 주의 수도인 Nicomedia에 세워졌다.
아구스도의 뒤를 이은 1세기의 로마 황제들은 그의 전철을 다소간(多少間) 따랐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베스파시안 같은 현명한 황제들은 자신들에 대한 숭배를, 특별히 로마에선 의도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에 대한 헌신을 함께 요구해 신격화에 조화를 추구했으며 자기들이 죽으면 원로원에서 신의 지위를 부여해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전례를 깨트린 황제들은 원로원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황제 숭배는 지방의 주에서 더 크게 발전되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Smyrna(서머나)에 자신과, Lyvia와 로마원로원에 바치는 신전을 짓도록 AD 26년에 짓도록 허락했다. 클라디우스 황제는 새롭게 정복한 영국에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했다. 특별히 아시아 주들이 황제숭배에 가장 앞섰다. 수많은 제단과 신전들이 곳곳에 건립되었다. 개별 도시마다 작은 사당들이 여러 개 있었고 각 주의 주의회는 큰 신전을 건축해 관리했다.
황제가 인정하는 신전을 갖는 것은 신전이 위치한 도시와 그 주의 명예가 되었다. 한 주 안에서도 도시마다 신전 건립 경쟁이 심했다. 신전은 로마당국과 황제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여 경제적 이익을 불러옴으로써 주내에서 그 도시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건축에 오랜 기간이 요구되므로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고 또 신전에서 벌어지는 예식, 축제, 경기 등은 관중을 끌어 모아 지역 경제를 살찌게 했다. 1세기 후반에 도시의 공식명칭에 “temple keeper”(신전지기)라는 뜻의 헬라어 “neokoros”를 사용하는 도시는 황제 숭배의 “수호자”(warden)로서의 자부심과 특혜를 누렸다.
황제 숭배를 장려하는 것은 주의회의 아주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황제의 신전(Imperial Temples-로마제국과 황제 둘 다 숭배하는 곳)은 주로 주의회와 서로 보이는 위치에 건립되었다. “Commune of Asia”로 불렸던 아시아의 주의회는 주내의 중요 도시들을 대표하는 부유한 명망가 의원들과 의장으로 구성되었다. 의회는 주의 중요현안을 토의하고 로마의 지시를 받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 각종 예식과 경기에서 황제에 대한 공개적 헌신을 고백토록 하는 것이 의회의 중요 관심사였다. 신전의 고위 제사장들도 의원으로 봉직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인도하며 제사를 주관했고 황제를 숭배하는 각종 행사를 이끌었다. AD 40년경에는 “아시아의 대제사장”(High Priest of Asia)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일부학자들이 대제사장이 주의회의 의장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행정관리가 맡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여러 비문에는 여사제들에 관한 언급도 있는데 신전에서 직접 봉사한 여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제사장의 아내에 대한 존칭인지 여부에 관해선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다. 주의 발전을 바라는 주의회와 의원들이 로마와 황제에게 열렬한 충성을 나타냈다. 자연히 주의회와 지방 관리들의 관심은 황제에게 적절한 경배를 표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들이 요한계시록 해석의 좋은 근거가 된다. 요한 사도는 1세기의 아시아 주에 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계시록을 기록했다. 황제숭배는 필연적으로 로마의 지방 관리들과 황제에게 경배를 드릴 수 없었던 기독교인들이 충돌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계시록에 언급된 7교회 중 세 도시(버가모, 에베소, 서머나)에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이 있었다.
이 문제는 도미티안 황제 시절에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되었다. 도미티안은 베스파시안 황제에 의해 AD 69년에 시작된 Flavian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베스파시안 황제는 자기 왕조를 견고히 세우고 각 주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황제 숭배를 적극 장려했다. 비록 그의 아들 Titus는 오래 통치하지 못했지만(AD79-81), 차남 도미티안은 15년간(AD81-96) 왕위에 있었다. 그를 로마 역사가들은 신격화를 고집했던 독재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Suetonius에 따르면 그는 자기를 “주(主)이자 신”(Lord and god)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비록 현대 사가들이 그의 통치를 앞선 황제들보다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의 마지막 2년은 극단으로 흘렀다. 나아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아시아에선 기독교 신자들에 대해 지역적이긴 하지만 극심한 핍박이 가해졌다.
아시아에서의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도미티안 황제의 과대망상증보다는 주들 간에 황제숭배를 더 잘하려는 경쟁의 결과였다. 도미티안은 에베소에 새로운 신전(neokrate)을 짖는 특권을 주었다. 새 신전은 시청(Agora) 근처에 특별히 마련된 고지대에 자리 잡았다. 신전은 42X25 ft(약 13X8 미터) 크기의 장방형으로 북쪽은 몇 층으로 이뤄진 주랑(柱廊 stoa -기둥으로만 이뤄진 복도)과 마주하고 있었다. 신상들은 그 주랑의 이층에 세워졌다. Atemis 여신상 앞의 대제단과 닮은 모양의 U-자형의 제단이 도미티안 상에도 설치되었다. 신전 비명에는 “신들의 성전”(Temple of the Sebastoi)이라고 새겨져 있다. Sebastoi는 Sebastos -라틴어 “Augustus”(Exalted)의 헬라어 표현- 의 복수형으로 Flavian 왕조, 즉 베스파시안, 도미티안, 타이투스 황제를 의미했다. 신전이 있었던 현장에서 대형 조각상의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도미티안 자신 혹은 타이투스의 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상은 한쪽 벽면에 붙어있었다. 에베소 신전은 지금까지의 다른 신전과는 달리 로마제국과 원로원과 다른 왕족에 바쳐진 것은 전혀 없고 오직 Flavian 왕조에게만 바쳐졌다. 2세기 이후 건립된 황제 신전들은 이 에베소 신전을 본 따 지어졌다.
이런 사실들이 요한계시록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로마제국에 충성했던 아시아가 1세기 말 무렵에는 주로, 아마 전적으로, 황제에게만 경배를 드리게 되었다. 제국의 머리인 황제는 로마 전체를 대표했고 또 모든 물질적 영적 축복의 근원이었다. 황제숭배는 권력구조에 통일성과 위계질서를 갖추게 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은 최고 권력자를 거역하는 근본적인 죄가 되어 아예 용납될 수 없었다. 주와 지방 도시 관리들은 이점을 분명히 인식했기에 일절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게 경배를 돌릴 수는 없었다. 자연히 그들은 황제를 경배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훼방과 핍박이 닥칠 것이라고 예감했다. Pliny의 서신에 따르면 로마 관리들은 기독교인들이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로마황제와 신들에게 경배하지도 또 그리스도를 저주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이 강요된 황제숭배와 격렬하게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했다. 또 요한은 계시록 13장의 무시무시한 짐승의 정체를 밝히 드러냈다. 그것은 단지 사단의 도구일 뿐이었다. 바다의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했다. 아무리 로마 제국이 그 충성과 연합을 뽐내지만 진정한 경배를 바쳐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과 비교하면 헛된 속임수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우상에 불과했다. 신자를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을 상징하는 땅의 짐승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이 쳐진 신자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황제숭배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거짓이요 공허한 속임수였다. 요한의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음의 사람에게 아무리 막강한 세상 권력이 핍박해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또 오직 홀로 경배 받기에 합당하며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케 해준다.
원전: "Roman Emperor Worship" by Tommy Brisco
10/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