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0:22-25) 두 얼굴을 가진 성령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행20:22-25)

 

이상한 성령의 역사

 

바울은 약 3년이 걸린 소아시아 서부 지역을 순회한 삼차 선교 여행에서 당시 ‘아시아의 보물 창고’로 불릴 정도로 번창한 항구도시 에베소에서의 목회에 주력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앗소에서 출발한 배를 탔으나 오순절 안에 급히 이르려고 에베소는 들리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배가 밀레도에 잠시 기착하자 사람을 보내어 그동안 정들었던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내렸습니다.(행20:13-17)

 

본문은 그 장로들을 상대로 행한 고별 설교 중에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목적을 밝힌 부분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는 전부 대중을 상대로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하는 선교적 내용이었습니다. 본 설교는 유일하게 장로들을 상대로 했기에 이미 설립된 에베소 지역 교회들과 성도들을 잘 섬기라는 목회적 권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후 경과를 살피면 성령의 경고임에도 바울이 무시 아니 거역한 것 같아서 많이 의아해집니다.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는 성령의 경고를 각 성에서 받았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각 성에서’라고만 했으므로 바울이 혼자만 그런 경고를 받았는지, 아니면 곳곳의 성도들도 기도 중에 그런 경고를 받아서 그에게 전해주었는지 분명하지 않은데,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둘 다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성령이 분명히 여러 번 경고했기에 이번 환난은 평소와 달리 아주 심각할 것입니다. 거기다 ‘결박이 기다린다’고 했으므로 감옥에 갇히는 죄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장로들에게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했으며, 설교를 마친 후에도 서로 울면서 염려하며 이별했습니다.(36-38절) 비장한 마음으로 행한 바울의 이 설교는 에베소 장로들에겐 그의 유언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에베소 장로들과 헤어진 후에 가이사랴에 이르러 바울이 전도자 빌립의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더 구체적인 성령의 경고를 받습니다. 유대에서 온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렇게 결박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행21:10,11) 그동안 받았던 경고를 아가보가 가시적 모습으로 확실하게 재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고 선언합니다. 결박은 물론 순교도 두렵지 않으므로 예루살렘 귀환 계획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21:14) 더 이상 말리지 않았습니다. 가이사랴 성도들과의 마지막 대면도 마치고 바울은 며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처럼 성령의 경고를 여러 번 분명하게 받았다면 당장 계획을 취소 내지 연기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집니다. 성령 하나님도 바울이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을 텐데도 왜 계속 그런 계시를 했는지 선뜻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고이지 금지가 아니다. 

 

신자들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간단한 열쇠 하나를 놓치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울이 앞으로 당할 결박과 환난에 대해서 ‘경고’만 했지, 올라가지 말라고 ‘금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물론 주변 사람 모두에게도 그랬습니다. 

 

그런 경고를 금지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이 계획을 중지했어도 하나님이 벌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자마자 신자들을 핍박하려고 했던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그곳 유대인들에게 거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시기하고 분개한 유대교인들이 그를 죽이기를 공모했고, 그곳 신자들이 밤에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내려주어 탈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행9:19-25) 그는 사역을 시작하자 즉시 받은 핍박에서 곧바로 피신했고 그 후로도 비슷한 경우들이 여러 번 있었을 것이므로, 이번에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거기다 바울은 성령의 경고를 받았지만, 사실상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성령의 계시도 함께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라고 했습니다.(22절) ‘매여’라고 번역된 헬라어 ‘데오’는 끈을 묶다, 채우다, 책임을 지우다, 의무를 지우다, 등의 뜻으로 영어 성경은 “bound in the spiri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문이 수동태 형식이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바로 바울 네가 반드시 행할 일이라는 성령의 지시도 뚜렷하게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마도 각 성에서 환난에 대한 경고부터 먼저 받았을 것이므로 그 문제를 두고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뭔가 매우 심각한 핍박이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제가 올라가야 할지 올라가지 말아야 할지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아니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올라가야 한다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물론이고 주변 성도들에게 성령이 그런 경고의 계시를 준 의미나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사전 경고였습니다. 이번은 지금껏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잠시 참으면 끝나는 그런 차원의 환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기간 구금되거나 심지어 순교까지 될 수 있어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다시는 못 만날 수 있다는 인식이 바울에게 들었던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도 바울이 예사로 고난을 겪었지만, 그를 위해서 기도했더니 이번만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두려움을 느꼈고 체포될 것이라는 계시도 받았기에 간곡히 만류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이 성도들과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크게 위험하다고 경고해 놓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바울더러 올라가게끔 강권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그 뜻에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은 결박된다고 경고만 했지 올라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경고한 것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뜻은 바울이 앞으로 행할 사역이 비록 환난이 따라도 너무나 중요하니까 성도들더러 계속해서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장차 그를 통해 어떤 역사를 이룰지 지켜보고서 영적으로 잘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별 설교에서 바울이 밝혔듯이(35절), 그가 사도로서 자신의 소명을 어떻게 달성하는지 잘 보고서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장로들더러 에베소 지역의 교회들을 바울이 이전에 사역했던 대로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만 가르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너희도 그렇게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실현하다 보면 바울이 당할 환난이 똑같이 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 대적하므로 에베소 성도들도 한 성령 안에서 합심하여 기도하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그 싸움을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그런 심각한 영적 전투에 대비하라고 일종의 경고 사이렌을 울린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인 바울 

 

그에 반해 우리는 이 기사를 볼 때 단지 성령님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고 지레짐작합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을 아주 미숙하고도 일차원적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일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엄밀히 표현하면 죄송하지만, 점쟁이처럼 자기에게 일어날 장래 일을 알아맞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의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성령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고 건성으로 읽고 치우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잘못은 하나님을 자신의 현실 삶에서 발생이 가능한 위험을 미리 제거해 주고 대신에 축복을 많이 베푸시는 분으로만 믿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초보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성공과 형통이 보장되는 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고, 성경 말씀에서 어느 부분이 그에 해당하는지만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만사와 신자 개인의 일생을 예수 십자가 복음이 최대한 확장 실현되는 방향과 목적으로만 당신의 뜻을 실현하십니다. 그 가운데는 신자의 환난, 질병, 나아가 죽음을 통해서도 당신만의 더 큰 영광을 이루시는 모습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대하지 않으면 기독교도 일반적인 기복 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데, 유감스럽게도 이미 그런 것이 대세입니다. 

 

바울이 결박을 각오하고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한 목적에 대해선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기근을 구제할 헌금을 마케도니아 교회들에서 받았는데 직접 전해주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다른 사람을 대신 시켜도 됩니다. 

 

또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서원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지키려 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 절기에 맞춰서 도착하려 했고 바울이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다는 기록에 근거해서 그런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면을 먼저 받았기에 그대로 따라 성전 결례를 행한 것입니다.(행21:23,24) 많은 유대인이 바울이 율법을 무시한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려면 그런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 예루살렘 교회에 서원한 유대인 신자 네 사람이 있으므로 함께 성전에 올라가 바울이 비용을 대고 머리를 깎게 하라는 권면을 받고서 그들의 결례에 참여한 것입니다.

 

바울이 ‘함께’ 결례를 행했다는 두 번의 표현으로 인해서(행21:24,26), 단지 오해를 풀기 위해서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는지 아니면 바울 개인적으로도 서원한 일이 있었는지 조금 애매합니다. 설령 개인적으로 서원한 일이 있었고 또 그 준행 기간이 오순절이었다 쳐도, 결례를 지키는 일을 앞두고 생명을 아끼지 않겠다고 비장하게 말할 리는 없습니다.(24절) 

 

그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예수 믿기 전에는 유대 관습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죽다 살아남으로써 자신이 자랑했던 인간적인 의가 쓰레기를 넘어서 배설물에 불과함을 절감했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이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달았기에, 모세의 율법을 대체하는 은혜의 복음을 정립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전하고 가르쳤는데, 이제 성령이 경고했고 성도들이 그렇게 만류하는 데도 단지 결례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면 자신을 부인하는 짓입니다. 가르침과 실천이 이율배반적이므로 앞으로 그가 전하는 은혜의 복음을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서원한 일로 정결례를 행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예루살렘 방문의 첫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목적

 

그가 예루살렘에 왜 올라갔는지 본문이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고’”(24절a) 올라간 것입니다. 바울에게 주님이 주신 소명은 알다시피 다메섹에서 봉사가 된 그에게 안수하여 빛을 보게 해준 아나니아가 대신 전해주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고 말입니다. 

 

가장 먼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고, 둘째 임금들도 복수로 칭했으므로 이방 국가 왕들입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자손들이라고 했으니까 이방 지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그가 세 번이나 지중해 세계를 순회하며 선교에 집중한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에게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동일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중에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로마 식민지 다소가 고향이며 헬라어에 능통했던 바울에게 특별히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맡긴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 유대 율법과 관습을 잘 알기에 그에 대비해서 십자가 은혜를 그만큼 논리적 이성적으로 잘 설명할 자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미리 그를 예비 훈련 시켰다가 때가 되자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맡긴 것입니다.

 

바울은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통해 당시의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거의 다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하자면 유다와 사마리아에는 복음이 전해졌고 남은 지역은 복음이 미처 들어가지 않은 땅끝뿐입니다. 그는 지금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의 땅끝인 스페인으로 마지막 선교 여행을 가려 했던 평소의 계획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고 합심하여 그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총회 본부 격인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해 총회장 격인 예수님의 동생 사도 야고보에게 먼저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행21:19) 선교 보고를 한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설득한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극한 가난 가운데도 아끼지 않고 구제 헌금을 모았던 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넘쳤던 성령이 역사한 열매라고 간증했을 것입니다. 스페인까지의 여행은 사도 가운데 가장 담대했던 바울에게도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가 지중해 지역을 평정해서 어느 정도 안정은 되었으나 스페인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므로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한 것입니다. 

 

일상적인 핍박

 

그전에 바울에게 핍박은 사실 전혀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23-27이나 사도행전의 관련 기록들에 따르면 그에겐 환난이 일상적으로 따라다녔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잘 받아들이는 자는 극히 드물고 비방 멸시 모욕 박해로 반응하는 자가 훨씬 많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 선행이나 공적도 없이 예수라는 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헬라인들은 무식한 원시 종교라고 무시했습니다. 예수는 도덕이나 종교 계명에 관한 경건하고 심오한 저술을 한 권도 남기지 않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로마의 죄수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십자가 처형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죽음이라서 로마 시민권자에겐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에 나무에 매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명시해 놓았기에(신21:23) 예수를 구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전에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 기득권만 침해하기에 시기하여서 빌라도 로마 총독이 그 처형을 주저하는데도 회유 협박하여 십자가에 매달도록 주도했습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마다 부정적인 받응을 너무 자주 많이 받다 보니까,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전제했습니다.(고전1:23) 그런 후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고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는커녕 오히려 수치스럽고 비이성적 비도덕적으로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풍성한 지혜가 실현되었기에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래 노력해도 자기 죄를 스스로 깨끗이 씻어서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예에서 보듯이 아주 의롭게 살았던 자라도 막상 죽음이 닥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되면 고개를 바로 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지혜에 따라 구원해 줄 자를 택하여 성령으로 간섭하여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인간 사형수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추어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의 형벌을 인간 대신에 받게 함으로써 인간의 죄를 씻어주시고 원수마저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셨기에 그것은 하나님만 행할 수 있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는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지혜입니다. 하나님만의 그 지혜가 바울에겐 예수 믿는 제자들을 극렬히 핍박했던 원수였음에도 당신의 사랑으로 완전히 용서해 주시는 모습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거기다 이방인들에게 자기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함께 누릴 사도로 세워주셨습니다. 

 

바울은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였다가 정반대로 열렬한 기독교 사도가 되었으므로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극렬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율법의 전문가임에도 그를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의 사도로 세운 것인데 이 또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아깝지 않은 생명

 

핍박이 일상적인 일이었어도 바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천국에 올라가 예수님을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고 말했겠습니까?(빌1:23) 그런데도 지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답도 간단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이 자기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주님에 의해서 자기가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하였고 이제는 덤으로 살고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평생 처음으로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도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자신과 함께하여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마음의 생각까지 아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은혜를 매일매일 체험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 이전에는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계명으로 받아들여져서 자신이 여호와를 위해서 열심히 바치고 행해야 할 의무만 따졌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바로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범사에 먼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일생 전부를 계획 주관하시면서 당신의 영광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도 언제 어디서나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계획에 순종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풍성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자신의 영혼과 정신과 육신에 참된 안식이 충만히 채워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았고 그 나라의 희락이 자기 삶에 드러나는 것을 매일 실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인격적이고 친밀히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이 바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의 실체적인 자기 간증이었습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서 주님의 품 안에서 눈을 뜨리라는 사실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부활의 영광이 기다린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귀한 복음을 주변에 전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고 또 그러다 죽으면 그만한 영광이 없다고 절감한 것입니다. 에베소 사역을 마감할 즈음에 이방인의 사도라는 자기 소명의 실현을 마지막으로 땅끝에 가서 마치고 싶다는 마음이 강력하게 든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은 신자에게,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자에겐 필수적으로 따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지 않았거나 세상 종교나 도덕과 타협하는 가짜 복음을 전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적으로 가장 어리석어 보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같은 십자가 도를 자꾸 전하는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이해도 안 되므로 마냥 귀찮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택한 사람 빼고는 그렇습니다. 그 택함 받은 자도 처음부터 바로 반기지 않으며, 성령이 역사하여 바울 본인처럼 절망과 죽음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새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가 맡은 교회에 앞으로 닥칠 핍박을 십자가 진리의 말씀만 붙들고서 이겨내면 천국의 기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의 소명

 

모든 신자는 바울처럼 복음이 생명보다 더 귀하므로 목숨까지 걸며 전해야 합니다. 생업을 포기하라거나, 자기 소망이나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전임 사역자로 헌신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선 자기 일에 하나님을 개입시켜서 자기 뜻대로 이루려는 아주 잘못된 기복 신앙부터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자기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 안에 있고 그분이 인도하고 계시므로 자기 전부를 그분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 전하다 죽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의 임무는 아닙니다. 최고로 충성된 종의 표시도 아니며, 천국의 최고 큰 상급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 이유도 아주 간단합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그것도 아주 짧습니다. 유한한 인생으로 누구나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인생 전부를 걸만한 최고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하고 또 끝까지 온전히 의탁할 대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분의 독생자가 이미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신자에겐 최고의 가치이고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이 신자가 따라야 할 유일한 인생 교과서입니다. 

 

바울로선 단순히 당시의 땅끝인 스페인으로 갈 생각만 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박이 되고 어떤 환난이 기다릴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번만은 자기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할 일생일대의 일이 기다릴 것이라고 짐작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들 말려도 하나님이 맡기시는 마지막 땅끝 사역이 기다린다고 믿고서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 중에 가장 신실하고 신령했던 바울과도 달랐습니다. 스페인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수도인 로마의 왕실에 복음의 폭탄을 투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로마로 올라가 2년간 가택에 연금되게 해서 에베소에서처럼 복음만 가르치도록 성령님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의 삶은 가는 곳마다 복음의 향기가 드러나므로 핍박과 고난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말로 신자답게 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며 사도행전 전부가 그런 기록입니다. 어떤 핍박이 따라도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전해져야 합니다. 죄에 찌든 모든 인간에게 십자가의 도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절망 가운데 죽어가던 신자 자신부터 십자가 복음을 통해 참 생명을 받았기에 어찌 주변에 전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정말로 주님께 헌신한다면 끝까지 남게 되는 것은, 신자의 충성된 업적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그것 하나 자체여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하니까 진리의 말씀만 붙들라고 유언처럼 권면한 까닭입니다. 충성한 교회와 목사와 성도의 이름이나. 그들이 이룬 명예로운 역사를 남겨선 안 됩니다. 죽음에서 살려내는 참 생명인 예수님의 이름만 이 땅에 영원토록 남아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렇게 하려고 자기 생명마저 아끼지 않고 예루살렘을 거쳐서 스페인으로 가려 한 것입니다. 그것도 간절히 기도한 후에 성령에 온전히 매여서 말입니다. 

 

(8/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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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7) [1]

(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7)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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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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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6) [2]

(왕하 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6) “그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소년이 이르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나이다 예후가 이르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누구에게 하려느냐 하니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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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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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1]

(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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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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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5) [2]

(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r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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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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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4-20) 참 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6) [1]

(막1:14-20) 참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6)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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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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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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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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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18-25) 원색적 복음이 실종된 기독교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5)

(고전1:18-25) 원색적 복음이 실종된 기독교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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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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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5:9-14) 행위 구원으로 변질된 믿음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3)

(왕하 5:9-14) 행위 구원으로 변질된 믿음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3)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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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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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1-5) 예수님은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다.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4)

(마7:1-5) 예수님은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다. 새롭게 읽은 신약성경 (14)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보라 네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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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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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6:11-13)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다고 확신하는가?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2)

(창16:11-13)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다고 확신하는가?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2)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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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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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6:7-10) 살피시는 하나님과 눈물 흘리는 하나님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1) [1]

(창16:7-10) 살피시는 하나님과 눈물 흘리는 하나님 새롭게 읽은 구약 성경 (11)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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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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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8:1-6) 하나님이 숨겨둔 변절자가 되어라.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0) [2]

(왕상18:1-6) 하나님이 숨겨둔 변절자가 되어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0)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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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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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5:1) 신자가 믿은 후 가장 먼저 행할 일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3)

(롬5:1) 신자가 믿은 후 가장 먼저 행할 일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3)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신자로서 첫걸음 예수를 믿고서 교회에 출석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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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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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0:22-25) 두 얼굴을 가진 성령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2)

(행20:22-25) 두 얼굴을 가진 성령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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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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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9-11) 서원은 악하니 하지 말라.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9) [2]

(삼상1:9-11) 서원은 악하니 하지 말라.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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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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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8:1-6) 성육신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1)

(행28:1-6) 성육신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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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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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7:5-7) 기독교 부흥의 최고 비결 -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8)

(삿7:5-7) 기독교 부흥의 최고 비결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8)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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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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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23-29) 하나님의 비전을 최대한 줄여라, -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7)

(신3:23-29) 하나님의 비전을 최대한 줄여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7)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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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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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3:10-16) 구원의 확신이 없는 진짜 이유 -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0)

(빌3:10-16) 구원의 확신이 없는 진짜 이유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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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3
  • 조회 수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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