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http://youtu.be/mLEnl_Tjkeo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15-22)
머리를 싸매는 유대인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권세를 문제 삼았지만 주님이 세 비유로 응답하자 그들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물러갔다. 종교적 열심을 빼고는 진정한 영성과 도덕성에서 자기들은 예수님과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줄 깨달았기에 말꼬리를 잡으려고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신학적 논쟁으로 이기려는 시도는 포기했다는 뜻이다.
주님이 세 번의 비유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자 세 가지 올무를 준비해서 반격한 내용이 22장에 기록되어 있고 본문은 그 첫 번째 올무다. 본문의 구체적 의미는 다음 주에 살펴보고 오늘은 당시 상황을 전체적으로 한번 점검해보려고 한다. 고난주간 내내 있었던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대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첨예하고 격렬했었다. 그 구체적 진행 과정과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무란 짐승을 잡으려 놓는 덫이나 함정 같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활동에 제약을 주려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꼬투리라도 잡히면 곧바로 올가미를 씌워 살인하려고 모의했다. 또 덫이나 함정은 짐승이 항상 다니는 길에 표시나 흔적이 전혀 없이 감쪽같이 설치하기에 감각이 예민한 짐승마저 걸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예수님께 바로 그런 방식의 질문을 하려는 것이다. 반드시 특정 대답 밖에 없는 질문을 하여 어떤 대답을 해도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빠지게 만들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이 구원에 관한 세 비유로 유대인들의 잘못을 견책할 때에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답이 하나뿐인 질문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 답을 맞힌 유대 지도자들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악한 장남과, 또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사악한 농부가 바로 자기들임을 시인케 했다. 지금 유대인들은 역으로 자기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몰아가려고 한다. 당했던 그대로 앙갚음을 하려는 심보다. 질문의 개수도 정확히 셋이다.
또 그 일에 유대의 정치종교 지배계층이 총동원되었다. 평소에 서로 반목하는 집단끼리도 협력했다. 이름 없는 한 시골 랍비를 잡으려고 온 나라의 고위층 전부가 벌 떼 같이 덤벼들었다. 자기들 기득권이 침해당하겠다는 위협을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바꿔 말해 고난주간의 초반까지는 예수님의 대중적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는 뜻이다.
첫째 올무: 로마에 납세 문제
먼저 바리새인이 랍비 대신에 제자들을 보냈다.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미리 연습시켰다는 뜻이다. 만(萬)에 하나 예수님이 그들이 예상치도 못했던 기상천외의 답변을 해서 다시 말문이 막히면 제자들이 미숙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참이다.
제자들을 누구랑 같이 보냈는가? 헤롯당원이다. 이는 제일 잘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비유컨대 독립투사와 일본군 앞잡이 형사가 손을 잡은 꼴이다. 첫째 질문이 정치적 주제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삐끗해 답변을 잘못하면 현장에 증인으로 와있는 헤롯당원이 곧 바로 로마 당국에 고발하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시쳇말로 손 안대고 코를 푸는 셈이다. 예수님께 호응하는 대중들의 반감을 사지 않아도 된다. 헤롯 당원은 실적을 올려 로마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대답했다. 어떤 인간도 상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단 한 명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너무나 지당한 답이었다. 그래서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날”(22절) 수밖에 없었다. 기이히 여긴다는 것이 이상야릇해서 이해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너무나 경이로워 감탄한 것이다.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 가버렸다.
바리새인 랍비들로선 제자들을 보내길 천만다행이었다. 염려했던 대로 그 만의 하나의 가능성이 적중했다. 인간의 대비가 철저했는가? 아니면 너무나 영악했던 것인가? 한마디로 그들은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했다.
둘째 올무: 사후(死後) 세계 문제
다음으로 계대결혼 제도와 연관해서 부활 후의 부부관계에 대한 질문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총대를 메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기에 이 땅의 삶에 전부를 거는 현실주의자다. 현실적이기에 가장 이성적 논리적인 합리주의자였다. 요즘으로 치면 무신론자가 신자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토론하면 아주 그럴싸한 논리로 신자를 궁지에 몰아넣거나 최소한 승패가 없는 무승부로 끝맺는 것과 같은 결과를 노린 것이다.
이번에도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대답을 했고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33절) 생전 처음 듣는 가르침이라 반박은커녕 놀라서 입도 벙긋 못했다. 유대인들의 전략은 완전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리 가장 논리적이라도 해도 사후 세계에 대한 문외한인 사두개인들더러 영적 질문을 담당케 했으니 자기들 꾀에 자기들이 걸린 꼴이다.
인간의 지혜는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다. 인간 사이에선 통하고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지 순위를 매길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 앞에선 그 허구성과 모순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거짓과 모략에서 시작된 유대인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모퉁이 돌인 예수님 위에 떨어지니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다.
셋째 올무: 가장 중요한 계명
첫 두 번의 시도가 무참히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이 다시 모였다. 그들 중에 율법의 최고 전문가, 지금으로 치면 신학박사 학위 두세 개는 갖고 있는 율법사가 나섰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들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거기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무시하고 제대로 준행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구체적 계명을 들어 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신 근본 뜻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이라고 대답했다.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이는 정답을 가르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이 비장의 무기로 던진 것이 거꾸로 부메랑이 되어 자기들을 향해 날아왔다.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성실히 준행했다고 자신한다면, 과연 그렇게 한 만큼 이웃도 사랑했느냐는 질책이었다.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46절) 용의주도하게 준비했던 세 올무의 마지막 결말이다. 신학논쟁을 할 자신이 없어 말의 올무를 걸려했는데, 이제는 말의 올무를 거는 것조차 포기했다는 것이다.
말의 올무란?
말의 올무를 건다는 것은 아무리 그 내용이 치사해도 일단은 명분은 서는 일이다. 지금도 세상 법정에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법의 규정을 갖다 붙여서 억울하고 불공정한 판결을 많이 내린다. 어쨌든 법을 문자적으로 어긴 점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런 판결이 가능하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형 시키는데 어떤 합리적인 구실과 변명을 확보하려 했는데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말의 올무가 실패하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억지요 무리수다. 강압적 수단과 물리적 폭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예수님께 40에 하나 감한 채찍을 때리면서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멸시했다.
말의 올무를 걸려면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해서 반발 논리를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 설령 논리가 밀리더라도 비합리적인 궤변으로라도 덮어씌우겠다는 뜻이다. 어리아이들이 말싸움을 할 때에 맨 마지막 말을 하면 승리한 것과 같다.
지금 바로 그런 태세로 예수님을 몰아 붙여서 대중들의 면전에서 우선 그가 메시아임을 부인하려는 것이다. 또 랍비의 자격에 결함이 있음을 증명하고, 나아가 이단으로 몰아가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겠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 번의 결과는 오히려 기이히 여겼고, 놀랐고,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주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궤변을 동원할 여지마저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전에서 가르치는 권세를 부인하려 들었는데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가르치는 내용으로 필연적, 자동적으로 당신의 권세를 입증했다. 예수님이 기발한 말재주를 동원한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종교와 사상과 철학을 초월하여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진리를 말했을 뿐이다. 예수님의 세 비유와 유대인들의 세 올무를 합치면 6전6승을 했다. 야구로 치면 퍼펙트 콜드게임에 스코어는 1000:0 정도였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이처럼 마태복음 21장과 22장 전체를 연결해서 살펴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특별히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다가오는가? 우선 절대로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비범한 차원이라는 것도 많이 부족하다. 영성이 가장 뛰어난 랍비도 넘어선다.
바리새인들의 올무는 인간 사회에서 최신, 최고 성능의 덫이었다. 당시에 최고로 경건하고 신령했던 힐렐파와 샤마이파 랍비들이 다 동원되어 구수회의를 거쳐 고안한 것이다. 어떤 인간도 그 함정에 걸리게 되어 있다.
혹시라도 눈치가 빠르거나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도 그 올무 앞에선 고개를 갸웃 주저하면서 대답할 말을 한창을 궁리해야만 하는 차원이었다. 또 어떤 그럴싸한 대답을 해도 최소한 신체의 일부는 그 덫에 걸려 잘려지게 된다. 예수님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빠져나갔다. 전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덫을 피해나간 정도가 아니었다. 그 덫을 그대로 들어내어서 거꾸로 그들로 빠지게 했다.
처음 올무를 듣자마자 “저희의 악함을 하시고 외식하는 자들아”(18절a)라고 야단쳤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는 뜻이다. 바로 앞 16절에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예수님을 칭찬했지만 속에는 살인의 흉계를 숨겼음을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칭찬한 것도 유대 대중들 앞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존경할 만큼 자기들이 아주 관용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뿐이었다.
대중들은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예수님에게 통할 리가 없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8절b)고 지적했다. ‘나’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다. 또 당신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지금 너희가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고 보고 신성모독 죄로 몰아가려 했다. 예수님은 지금 너희들이야말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으므로 너희가 바로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푸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공식
유대인 중에 가장 논리적이었고 율법의 최고 전문가였던 바울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여겼다. 예수를 믿는 신자를 잡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3일간 눈이 봉사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처럼 완전한 죽음을 경험한 셈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난 이후에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 가르쳤던 것이 전부 다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임을 깨달았다. 예수님 그분이 그리스도요, 그분을 아는 것이 바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바로 구원이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복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분 외에 세상의 어떤 것도 몽땅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고백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공식에 의지하지 않고는 성경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마태복음 21/22장의 여섯 번의 논쟁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지 않는가?
인간 사회에서 최고 수준의 논리와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만든 올무와 궤변을 빠져나갈 자는 인간 중에는 없다.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공식에 대입해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세상의 다른 어떤 종교의 경전보다 그 수준이 낮을 것이다. 복잡하고 상충되는 점만 드러나는데다 폭력과 포르노가 난무하는 삼류소설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 예수님이 6번의 논쟁에서 퍼펙트게임으로 이겼다고 그분은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난한 변증이다. 또 그 정도는 누구나 아는 기본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당신께 반발하여 올무를 걸어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준비한 인간의 예상이 가능한 모든 답변에 관한 반박 논리가 무엇인지, 나아가 그들 내면의 악한 모략도 꿰뚫어 알고 계셨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을 예수님이 주도하셨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고난주간 내내 유대 지도층들과 직접 부딪히며 그들의 잘못을 우리가 보기에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꾸중했다. 이어지는 23장에선 그들에게 일곱 가지 저주를 퍼부었다. 그것이 순간적 감정이 격했거나, 바리새인들이 그 동안에 당신이 메시아임을 부인하며 훼방을 놓은 것에 억하심정이 쌓였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정대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셨을 뿐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그들의 약을 올려서 스스로 매를 벌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었다. 예수님이 그들을 조종하거나 강요한 적이 없다. 자기들 기득권을 수호하려고, 또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일을 지키려고 인간으로서 최고의 지혜와 권세와 능력을 다 짜내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구원 사역에서 그들에게 큰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성전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해 시비를 걸었지만, 그들이 오히려 천하 만물을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며 인생만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세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3년의 공사역을 마무리 하는 결론
예레미야 7장 11절 전반을 보자. “내 이름으로 일컫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성전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밖에 보이지 않느냐는 뜻으로 일종의 반어법이다.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취급하였고 또 그렇게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내가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예레미야는 예수님보다 약 600년 전의 사람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은 당신의 가르침을 마감하여 결론을 내는 시기다. 그 첫 번째 사역으로 성전을 정화하셨다. 당신께서 600년 전에 하늘에서 성전을 보시고 도적의 굴혈로 바뀐 것을 안타까이 여기시다 이 땅에 직접 성육신하여 오신 후에 곧바로 성전으로 찾아가 청소하신 것이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가시적으로 두는 이 땅에서 유일한 곳이 강도의 굴혈로 바뀐 것을 결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인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권세를 따지고 살인하려고 말의 올무를 걸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주님은 성전이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될 것이라고 선포하실 수밖에는 없지 않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성전이 도적의 굴혈로 바뀌었다고 한탄하기 직전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내 이름으로 일컫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렘7:10)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들이었나?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알지 못하는 신들을 좇은”(렘7:9) 자들이었다.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인들이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성전제사를 드리니 구원은 이미 얻었다고 큰소리쳤다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은 단지 강도요 도적이라고 선포하셨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소지하고 준행하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이미 구원 받았다고 장담했다. 예수님도 마지막 세 번째 비유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택함도 받지 못했다고 즉, 구원 밖에 있다고 선포했다.
이 선언이 주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3년 간 상대한 후에 깨우친 결론이 아니다. 셋째 비유에서 포도원의 주인이 종들을 보냈지만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다.”(마21:35) 예레미야는 바로 그 많은 선지자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파견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의 모세, 아브라함, 노아, 아담의 때에까지 거슬러서 이스라엘은 물론 모든 인간의 역사가 주님의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이다. 처음 창세기에서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전체 맥을 잊는 연결고리는 예수님뿐이다. 또 그 뜻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도 골고다 십자가뿐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세 올무에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피하고 오히려 그들로 빠지게 한 후에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였다.(마22:41-45) 다윗은 예레미야보다 약 450년 전의 사람이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불렀는데 바로 그 그리스도가 당신이라고 해석해주었다. 다윗이 소망했던 하나님이 당신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니 구약성경의 전문가들인 율법사들조차 능히 대답도 못하고 더 이상 묻지도 않게 된 것이다.
비겁한가? 가련한가?
유대 종교 지도층들의 행태가 너무나도 비겁하지 않는가? 음흉하고 완악하며 사악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너무나 없어 보이지 않는가? 오히려 가련하고 불쌍한 것 같지 않는가? 만약에 무식하고 가난하며 비천한 자들이 그랬다면 덜할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의 것으로 다 갖춘 자들이 그러니 더 불쌍하다. 그들조차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상태가 사실은 이정도 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냉혹하리만치 꾸짖었지만 그들을 위협하거나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직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만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의 최고 전문가인 율법사마저 전혀 깨닫지 못했듯이 모든 인간의 영적 상태는 소경이었다. 그 사실을 주님이 더 잘 아신다. 인간이 절대로 스스로 깨달을 수 없기에 인간이 자력으로 죄에서 벗어날 길 또한 전혀 없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죄에서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주님이 직접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로 올라갈 수밖에 더 있는가?
골고다 십자가가 복음인 까닭은 하나다. 인간의 너무나 비참하고 가련한 모습을 도무지 더 두고 볼 수 없어서 구원하시려고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외국에까지 가서 설칠 때에도 사실은 자기 영혼의 갈급함과 공허함을 채우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보고 아시고 그를 먼저 찾아와 구원해 주었듯이 말이다.
그 주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인간의 무지함, 교만함, 완악함, 가난함, 치사함, 비겁함 등을 다 보고 계신다. 작금의 교회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도 다 아신다. 신자 각자의 현실적 상태는 물론 마음의 생각까지 하늘에서 통촉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당신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서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품어서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주님은 마지막 고난 주간에 인간의 죄악을,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의 사악함을 철저하게 다 까발리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셨다. 인간을 심판하거나 창피를 주려는 뜻이 아니다. 창피와 모멸은 오히려 당신께서 전부 당하셨다. 오직 구원을 주려고 그러셨다.
성경이 예수님 외에는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의 인생의, 특별히 신자 인생에도 예수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또 그분의 십자가는 인간이 예상 가능한 답변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만의 정답이자, 그분만의 은혜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아무리 현실적으로 남들보다 뒤쳐져 있더라도 이 너무나 큰 십자가 사랑 안에 있기에 감사, 찬양, 경배 외에 나올 것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답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데 무엇이 더 두려울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죄악과 사탄의 세력 앞에 얼마든지 당당히 맞서야 한다. 예수님 그분이 바로 나의 소망, 능력, 구원 자체이기에 어떤 일에도 요동치 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참 신자가 된, 최소한 주님의 복음 안에 온전하게 서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2/2/2014
이런 우리의 실체를 너무도 잘 아시기에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오르시어 죽으시며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이 복음을 주시려 지금도 여전히 손 벌리시며 기다리시는 우리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 이런 죄인들을 향해 거저 주시는 이 크신 은총 앞에 가슴 벅찬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