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나이가 몇 살이야?
마태복음강해 (206)
http://youtu.be/5N6l91G_P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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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15-22)
너무나 절묘한 비책
예수님에게 신학적 논쟁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바리새인들이 말의 올무를 걸려고 모든 지혜를 동원해 세 가지 질문을 준비했다. 본문은 첫째 올무로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가(可)한지 불가(不可)한지 물었다. 이는 ‘예스’ 아니면 ‘노’ 둘 중 하나의 대답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납세에 찬성을 하면 유대 민족의 자긍심을 무너뜨리기에 일반 대중의 반감을 사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와 선지자는커녕 랍비의 자격도 없다고 추궁할 계획이었다. 반대로 납세에 반대를 하면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정치범이 되기에 현장에 대동한 헤롯 당원이 고발할 작정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본인도 유대인인데다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와 유대민족을 생각해서 납세에 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헤롯 당원을 미리 동원한 까닭이다. 만에 하나 찬성을 해도 고난주간 초반의 대중들의 예수님을 향한 열화 같은 인기에 일시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가 날 것이다.
어느 쪽이 되어도 자기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예수님을 단숨에 제거할 수 있는 절묘한 비책이었다. 랍비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제자들을 보낸 것도 메시아를 부인케 하던 로마에 고발을 하던 둘 다 부정적인 일이다. 구태여 자기들이 나서서 체면을 구기며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점까지 감안한 것이다. 요컨대 이 질문으로 승부는 완전히 결판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질문은 사실 올무가 두 개였다. 어느 쪽이든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해서 그 두 개의 그물을 동시에 찢어버렸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기고 아무 반발도 못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심사를 꿰뚫어 알고 계셨다. 인간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전지성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서 따로 불려나온 자이지만 천국 가기 전까지는 세상 안에서 살아야만 하기에 시민으로써의 기본의무는 마땅히 다해야 한다.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롬13:1)이기에 기존의 통치 권력이 아주 사악하거나, 기독교신앙의 포기를 강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사를 자세히 살피면 지금껏 배워 이해한 이런 정도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 박해는 유대교가 시초
나중에 로마가 크리스천을 본격적으로 박해할 때에도 아주 간단한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했다. 로마 황제를 주(主) 즉, 자기 인생을 주관하는 주인(lord, master)으로 시인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주로 시인하면 기독교신앙을 포기하고 개종하겠다는 뜻이다. 반대로 시인하지 않으면 맹수의 밥으로 던져졌다. 이 또한 둘 중 하나의 대답 밖에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사실상 이 질문은 신자와 거래는 물론 강요하고 협박하는 차원이 아니다. 진정한 신자라면 황제를 주라고 시인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무조건 잡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신자에게 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요식 행위였다.
바리새인들도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마태복음에만 봐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마12:14)했다. 그 후로 예수님을 살인하려는 계획은 아무 변함없는 기정사실이었다. 따라서 이 질문도 예수님보다는 유대 대중을 향한 요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구태여 질문의 의미를 따지자면 예수님더러 로마에 의해 죽기 싫으면 당장 당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철회하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은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 즉, 외식하는 자다. 성전에서 가르쳐봐야 더 이상 사람들이 듣지도 모이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는 각 식민지의 고유 종교를 인정해주었다. 심지어 황제 숭배가 시작된 이후에도 그랬다. 입으로 황제를 주라고 시인만 하면 다른 종교를 믿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지금은 아직 기독교가 태동도 하기 전이었다.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은 유대교 내부적 문제로 로마에겐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예수님 개인에 대한 조사 추적은 물론 관심도 갖지 않았다. 예수님이 로마에 반역할 활동과 조직은커녕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지금 로마는 가만히 있는데 민족자결주의를 가르치고 선도해야 할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기독교를 박해할 목적으로 로마가 행할 질문을 대신해 주고 있는 꼴이다. 로마에게 예수 사건은 “긁어서 부스럼”일 뿐이었다. 실제로 빌라도가 예수님의 재판을 얼마나 귀찮아했는지 성경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바리새인들이 납세 문제를 제기한 것은 로마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되 반역을 하지 않고 납세를 성실히 하는 두 가지 조건만 내걸었기 때문이다. 납세를 하지 않는 것은 바로 반역과 같으며 사형에 해당되는 죄가 된다.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불가한지의 질문은 로마 황제를 주라 시인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박해 때의 로마의 올무와 그 내용은 물론 형식마저 똑 같다. 이것이 바로 인간 지혜의 한계이며, 세상권력이 사악하다는 표본이자,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에서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올무에 반(半)은 걸렸지 않는가?
이 기사에서 정작 따져볼 내용은 따로 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했다. 그럼 바리새인이 미리 파놓은 함정에 어쨌든 반은 걸린 것 아닌가? 어차피 말 꼬리를 잡아 올무를 걸 작정이었다면 유대 민족을 배반한 자라고 끝까지 몰아붙였어야 하지 않는가?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했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힌트가 본문에 제시되어 있다.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가져오자 예수님은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19절)고 반문했다. 로마황제가 새로 즉위하면 새 동전을 주조했는데 그 한 면에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누구누구”라고 자기 이름을 새겼다. 다른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라는 뜻으로 “폰티팩스 맥시무스”라고 적었다. 로마 검투사를 다룬 "그레디에더"(gladiator)라는 영화에 주인공이 황제를 맥시무스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또 왕권을 표시하는 홀(㧾)과 평화를 상징하는 감람나무 형상을 새겼다. 동전의 형상과 글은 요컨대 모든 인생을 통치 주관하는 최고로 높은 자는 신의 아들인 로마 황제라는 뜻이었다.
지금 유대인들이 질문한 세금은 부자들이 내는 토지세나 소득세가 아니다. 식민지 국민 모두가 한명도 빠짐없이 일 년에 한 번씩 내어야 하는 인두세다.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동전으로 인두세를 바치면 유대인으로선 그 경제적 부담을 떠나 로마 황제가 자기들을 통치하는 주이자 신의 아들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모든 유대인들이 이에 대해 큰 모욕감과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대 성인남자라면 누구나 일 년에 일차 로마의 인두세에 해당하는 성전세를 성전의 세겔로 바쳐야 했다. 상천하지에 유일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분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음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로마에 황제의 형상과 글이 새겨진 동전을 바치면 결국 이런 여호와 유일 신앙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최대한 양보해도 황제와 하나님의 주권을 동시에 인정하는 셈이다. 유대인으로선 너무나 싫은 일이었다.
그들의 그런 속내가 질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로마에 바치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가한지 물었다. 가이사가 과연 하나님과 동격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옳은가라는 뜻이다. 개역성경에는 “가한가?”라고 가능성, 의무, 선택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의 뜻은 합법적인지 물은 것이다. 율법에 합당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인지 물은 것이다. 유대인들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굉장히 예민해 있었고 영적으로도 하나님께 심각한 불경, 모독, 배역으로 여겼던 것이다.
과연 질문할 자격이 있는가?
만약에 예수님이 처음의 반쪽 답변만으로 그쳤다면 유대인들이 벌 떼처럼 덤벼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나머지 반쪽 답변이 그들로 완전히 침묵케 했다. 가이사에게 납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인데 너희가 이런 부분에서 제대로 행했는지 따진 것이다.
예수님이 말하는 “바치라”가 단순히 준다는 뜻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선(17절) 준다는 일반적 뜻이나 예수님의 답변에선(21절)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회복한다는 뜻이다. 원문에 가장 가까운 표준새번역본은 17절은 ‘바치라’, 21절은 ‘돌려주라’로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우선 강도의 굴혈로 타락시킨 성전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전장(21장)의 둘째 비유에서 포도원을 가로채려는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과 아들마저 죽였다. 포도원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인정하고 그 소출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소명을 준행하여 의와 거룩의 열매를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침례 요한도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선언했지 않는가?(마3장)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대답한 까닭도 신자는 천국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의 현실인 로마제국의 정치 경제 체계의 관리와 보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제국의 각 지역에서 그 제도 아래 장사해서 생긴 소득은 마땅히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유월절로 각지에서 유대인 순례객들이 성전에 제사 드리려고 모였다. 가이사의 동전을 갖고 와서 성전의 세겔로 바꿔야 하는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환전상과 짜고 폭리를 취했다. 이미 가이사의 것으로 개인적 치부를 한 것이다. 하나님께 부정한 큰 죄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것을 사용해 가이사의 것을 불리고 있다. 다른 말로 과연 너희가 지금 가이사 납세 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고 주님이 따진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로마 동전 데나리온에 존엄한 신의 아들이라고 새겨진 로마 황제는 세상에서 최고 높을 뿐이다. 예수님은 지금 가이사의 나라는 일시적이며 눈에 보이는 로마의 영화가 아무리 견고하고 거창해보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진심으로 가이사에게 납세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긴다면 그 믿는 바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반역을 꾀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하나님에게 돌려드린다면 로마 같은 현실적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세 번째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임금이 택하여 초청장을 보냈는데도 오지 않은 자들을 군대를 보내어 멸하였다고 했다.(마22:7) 하나님의 선민인데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니까 지금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 성전을 하나님이 만드셨던 목적대로 온전히 되돌려 놓지 않으면 다시 로마를 보내어 성전마저 파괴하겠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가시적으로 보이게 두는 유일한 곳으로 하나님 당신께서 지으라고 명하시고 또 당신께 드리는 제사를 받는 곳임에도 당신께서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데나리온의 글과 형상을 보라고 말한 것은 과연 로마 황제가 이 땅의 주인인지 잘 판단해보라는 뜻이었다. “가이사 나라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지 않는가? 천하 만물과 인생 만사를 하나님 외에 누가 다스린다는 말인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과연 누구인지 잘 생각해보라! 내가 가르치고 치유하고 섬긴 일들을 보고 들은 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정말로 정직하게 따져보라. 내 말과 행동에서 외식한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만약에 그렇다면 너희가 얼마든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멸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앞선 세 비유와 본문의 문답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임을 깨우칠 수 있는 힌트를 계속해서 제시하고 있다. 당신을 잡아 죽이려는 자들에게도 회개의 문을 활짝 열어두신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순순히 인정하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는 일이 되며, 또 하나님의 택한 자를 위한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기이하지 않는가?
이 문답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성경이 오늘날의 독자에게 말하는 바는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행태가 기이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이사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반대하며 옳지 않다고 여겼다. 율법을 가진 백성으로서 두 주인을 섬기는 불법이자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 생각대로 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예수님을 모함하고 살인하는 구실로 악용하고 있다.
진리를 알고도 정반대로 행했고, 선악 간의 구별을 하고도 무시했으며, 양심의 찔리는 소리도 외면했다. 심지어 전혀 명분도 서지 않는 일이었다. 오직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하고도 끈질기게 집착하는 죄의 실상이다. 마치 학생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너무나 지당한 충고를 한 교수를 그 말을 했다는 것에만 앙심을 품고 칼로 찔러 죽인 것과 같다.
그들은 분명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하고 영악하며 사악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그런 차원마저 넘어서는 것 아닌가? 상식과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신”(16절) 분이라고 한껏 치켜세웠다. 대제사장도 야단 쳤을 정도로 누구에게도 겁내지 않고 당당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칭찬하는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럼 로마 황제에게도 겁을 내지 않을 것 아닌가라는 뜻이다. “자!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대답해 보시오.” 장기로 치면 외통수를 부른 것이다. 대항할 다른 수가 없으니 항복하라는 것이다. 아예 헤롯 당원을 대동한 까닭이다.
최고로 경건한 자들이 기껏 고안해낸 지혜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인간 지혜의 한계다. 그들은 앞으로 20-30년 뒤에 로마 군인이 평범한 신자들에게 가이사에게 절할 것인가 아닌가라고 따진 그대로 지금 예수님께 대고 다그치고 있다.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시고 통치 주도하시며 역사를 이끄는 주인 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인 예수님께 말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종교가이자 영성이 뛰어난 자들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꾸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 아닌가?
모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
이것이 그들만의 일이라고 웃고 넘길 수는 결코 없다. 모든 인간의 영적인 실상이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누구나 그러하다. 인간 최대의 근본적인 딜레마다. 틀린 줄 알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혼자 속으로 잠시 반성은 할지 몰라도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는다. 아니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우기기만 한다.
싸움을 하면 나 죽고 너 죽자고 덤빈다. 속으로는 내가 왜 죽나 죽을 놈은 바로 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싸우다 논리에 밀리면 당장 하는 말이 “네 나이가 몇 살이야?”이다. 신분과 위치와 계급을 갖고 따진다. 예수님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야단 칠 때에는 한마디 대꾸조차 못하다가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를 대제사장에게서 받았느냐고 시비를 걸었다. 바로 예수님께 네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는 꼴이다.
논리에 졌다는 것은 사실상 허물과 잘못은 자기 쪽에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그래서 논리 대신에 권위를 갖고 따지는 것은 지금 논쟁 중인 사안이나 이슈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다. 토론에선 이미 졌다는 것을 자기도 속으로 알고 있다. 대신에 ‘자기’가 ‘상대’에게 지는 것은, 남보다 자기가 낮아지는 것은 죽어도 참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싫어서 반대했다. 여호와에게 불충한다는 영적인 찔림과 갈등이 스스로에게 있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로 예수님께 야단을 맞았을 때에도 틀림없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간으로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며 옳다고 절감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로지 예수님을 죽이고 말겠다고 덤벼들었다. 일반적 윤리, 도덕, 철학, 사상은 물론 종교마저 아무 힘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여호와를 믿는 믿음과 영성마저 무력화시키는 어떤 것이 인간을 조종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대제사장과 장로로서의 체면과 자존심이다. 누가 뭐래도 자기가 최고라는 도무지 양보하지 않으려 들고 또 깨어지지 않는 자기 고집이다.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고 신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며 여호와를 모독하는 가이사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이 자기들 영적 자존심으로 도무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진심이 자기들 질문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을 죽였는가? 자기들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자랑하는 도덕, 종교, 영성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라고, 또 하나님에게 선택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예수님이 선포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소견과 기분에 좋을 대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요컨대 “내가 내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과 삶의 주인은 오직 나 자신일 뿐이다. 나아가 온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것을 시기 훼방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도 멀리하고 부인하겠다는 것이다. 아담이 원죄를 저지른 후에 인간은 단 일보도 전진하지 못했다. 아니 더 타락했고 종교로 경건하고도 교묘하게 위장까지 했다.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일에 최고였던 바리새인들마저 그렇다.
인간의 근본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경건한 바리새인들마저 인간의 딜레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자기의 전부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마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이 모든 인간이 갖는 근본 딜레마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특유의 고집스런 교만을 철두철미 부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일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탄이 모든 인간의 영혼에 견고한 진을 치고서 예수님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세우신 성전마저 당신이 파괴해야 했듯이, 인간의 모든 죄 값을 감당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다. 또 당신께서 지으신 인간 중의 일부를 심판의 자리에 떨어지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이 이 땅에서의 사역 중에 마지막 고난 주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격렬하게 대립한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고안하여 최고의 덕목과 가치로 삼는 종교로도 절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들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야 했던 그 의를 하나님이 죄인에게 덧입혀 주고 성령으로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해야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이유를 밝히려는 것이다. 나아가 그 십자가 진리를 오늘날의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성경에 절대적 계시로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사가 크리스천더러 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단순한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탈세하지 말고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라는 정도를 가르치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가르칠 문제도 아니요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판단이 가능한 문제다.
네 복음서를 제대로 읽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지금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신자들 중에 교회 생활, 기도, 봉사, 헌금, 심지어 믿음을 자기를 높이고 형통하는 일에만 동원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는데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어야만 한다고 믿고, 만약 도와주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등한시 한다고 여겨지면 하나님마저 부인하려든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응당 돌려드려야 함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전부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전부와 바꾸어서 새롭고도 풍성한 생명을 주셨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준 십자가의 은혜와 진리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로마 황제를 입으로만 주로 시인하고 내면으로는 예수 믿는 믿음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입술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종교적 계명이나 임무를 지키려 한 것이 아니다. 그들 속에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고 또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있었기에 그와 상반하는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었다. 진짜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었고 또 그 믿은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마땅히 되돌려주어야 한다. 신자라면 응당 살고 있어야 할 모습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 너무 경건하고 엄숙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남들에게서 듣기로 혹은 스스로 느끼기에 말과 행동이 믿음과 다르게 외식하고 있다면, 한두 번은 몰라도 계속해서 그런다면, 당장에 하나님 앞에서조차 내 자존심을 세우고 있지 않나 점검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되돌려드리는 첫 걸음이자 인간이 갖는 근본 딜레마를 극복하는 길이다.
2/9/2014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의미가 되돌려드림의 의미임을 곱씹으며 진정 저의 영적인 문제점을 되돌아 보며 고침받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