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도 잘 모르는 순종의 진짜 의미
마태복음강해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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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8-12)


일곱 저주를 받을 수 있는 신자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경건을 겉으로만 과시한다고 지적했다. 율법을 남들에겐 엄격하게 적용하면서도 자기들은 실천하지 않고선 랍비 대접만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들을 야단칠 목적만이 아니었고 실제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무리 즉, 일반 유대인들과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셨다.(마23:1) 말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종교적 위선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로만 향한다. 당신의 권능과 사랑에 완전히 항복한 자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당신을 경배할 때에 세상의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하는 친밀한 교제와 동행으로 당신께서 이끄신다. 불신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서 그들을 싫어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어떤 인격적 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도 알지도 못할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쪽에서 보면 그들이 범한 죄에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이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도록 놓아두신다. 또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신자와 똑같이 공급해주신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당신을 거역하는 죄에서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길 측량할 수 없는 인내와 긍휼로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신자들에 대해선 그들을 유익하게 하고 당신의 거룩에 참예시키려고 죄를 지으면 수시로 징계하신다.(히12:10) 또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에서 여러 불편을 겪고 세상과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예수 믿었다고 불신자나 일부 신자가 오해하듯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편애와 특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에 세상에서 안일과 형통만을 목적으로 신앙을 가진 자라면 오늘 본문 말씀이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그런 기복적 신앙관은 갖지 않았지만 본문을 건성으로 읽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같지 않는가? 오늘날의 신자가 배운바 대로 행하지 않으면 예수님 보시기엔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입장에 서게 된다. 그 말은 또 13절 이하의 일곱 저주까지 적용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예수님 말씀(11,12절)대로 실제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있는가? 사장이 직원을, 선생이 학생을,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섬기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그들의 발을 씻기고 있는가? 특별히 목사가 교인에게 그러고 있는가? 간단한 예로 식사 교제 시에 배식판을 들고 함께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가? 또 그래서 교인들에게 가져다주는가? 최소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지는 말아야 하지 않는가?

목사의 가장 큰 고민

목사님들의 가장 큰 고민은 교회성장보다는 설교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교인들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답답함을 해소할 고육지책으로 자꾸 교인이 많아지길 바랄 수 있다. 그럼 쭉정이도 많아지지만 알곡도 함께 많아져 교회 전체의 외적 경건은 분명히 증대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목사 입장에서 목사를 두둔하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설교를 많이 했는데도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둘뿐이다. 첫째 설교를 잘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듣는 이들의 심령을 찔러 쪼개어 만물을 상관하시는 당신 앞에 온전히 드러나게 만들 수 있다. 둘째는 목사 본인이 설교한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잘못한다고 해서 그 내용이 이단이거나 오류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의 일부만 즉, 목사가 자기가 강조하고 싶은 구절만 유별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목사가 설교를 통해 신자들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앞서니까 도덕적 훈계에 치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것을 행하고, 이런 저런 것은 행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럼 바리새인들이 613계명으로 정리해서 365 계명은 하지 말라, 248 계명은 하라고 강요한 것과 거의 같지 않는가? 거기다 목사 본인은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는”(마23:4) 것과 동일한 잘못을 범한 것 아닌가?

그래서 본문의 경우에도 11,12절에만 설교의 초점을 맞춘다. 성도를 변화시키려니까 스스로 낮아져서 남들을 섬기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잠간만 뒤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라. 교인들로선 그런 권면이 생전 처음 듣는 가르침이겠는가? 예컨대 어린이에게 젓가락 쥐는 법을 가르치면 정말로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라 잘 듣고 따라 하려고 하는 차원과 다르지 않는가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겸손해져 다른 이를 행동으로 섬기면, 또 그런 말보다 행동이 앞서면 예수를 믿던 안 믿든 남들이 저절로 인정하고 존경할 것 아닌가? 거기다 세상 윤리나 타종교에서도 동일하게 가르치지 않는가? 구태여 교회에까지 와서 동일한 내용을 들을 필요는 없지 않는가?

교회가 가르쳐야만 하는 말씀

교회에서 가르치고 강조해야 하는 내용은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 사람이 훈계를 듣는다고 변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셨을 때는 그러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이후로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심령이다. 항상 사악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직 자기중심으로 자기 기분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언제 어디로 튈지 자기도 모르는 럭비공 같은 심령이 된 것이다.

인간의 죄는 갈수록 발전 확장되었다. 지금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영악해졌다. 자기를 높이려고 겉으로만 경건을 과시한 바리새인들은 사실상 순진한 편이다. 현대인들은 다른 이의 재물과 권력의 위세 앞에 더할 나위 없이 비굴하게 낮아진다. 나아가 남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길임을 알고 역으로 겸손을 가장하기까지 한다. 정말로 치사한 극도의 교만이다. 교만 중의 교만이다. 죄에 붙들려 있는 인간의 영적 실상이다.

부끄럽게도 그 중에는 저부터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 목사는 인간 심령의 너무나 가난함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스스로 자기 심령의 실체를 보고 애통해하고 통회 자복하도록 영적 찔림을 주어야 한다.  

본문도 예수님의 초점이 11,12절보다는 8-10절에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먼저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더 중요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11,12절의 행함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야단쳤던 이유도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이었지 않는가? 8-10절은 그들이 그렇게 된, 또 지금 교인들이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변함이 없는 원인을 밝힌 말씀이다. 신자들이 말씀을 배우고도 행하지 않는 까닭이다.

주님은 지금 스스로 낮아져서 다른 이를 섬겨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다. 8-10절의 내용이  믿음의 바탕이 되어 행동하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8-10절이 자기 믿음에 온전한 기초가 되어 있는 신자라면 자연히 11,12절의 행함은 따라온다는 뜻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8-10절은 없이 11,12절만 말씀하셨다고 가정해 보라. 그럼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될 수가 없다. 단순히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수준으로 격하된다. 일반 도덕선생에 불과하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는 하나님일 수 없다.  

다시 8-10절을 자세히 보자.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랍비, 아비, 지도자라는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선생이 하나이요, 아비도 하나인데 땅에 있는 육신의 아비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아비가 그 하나이며,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세 직분(선생, 아비, 지도자)을 세 분 하나님과 대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신 예수님

먼저 랍비는 율법을 가르치고 그 실행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은 자다. 그러나 인간 랍비는 수도 없이 많고 세대별로 오고갈 뿐이다. 반면에 선생이 하나인 까닭은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이 신자의 스승 되기 때문이다. 성령은 신자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절대 사사로이 풀어선 안 되고 풀리지도 않는다. 오직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만 정확한 해석과 적용이 가능하다.

특별히 주님은 성령이 오시면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했다.(요16:9-11) 성령이 간섭하여 한 죄인의 영혼을 깨끗케 해주어야만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비로소 임할 수 있고 또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서 신자로 거룩하게 살게끔 인도해 주신다.

모든 신자의 유일한 선생은 목사가 아니라 성령님이다. 목사에게 배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목사를 비롯해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자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성경을 절대적 진리로, 진리가 정말로 진리 되게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아비는 자녀에게 의식주를 제공하여 양육을 책임지는 자다. 그들의 삶을 주관하고 인생의 진로와 방향을 가이드 해준다.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자녀를 보살피며 언제든 자녀의 편에 선다. 땅의 부모를 아비라 부르지 말라고 해서 효도를 하지 말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십계명에서 제5계명 부모공경을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꼽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모든 인생을 통치하는 분은 성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고 가장 좋은 아비를 붙여주신 분도 하나님이다. 또 바로 그 육신의 아비에게도 동일하게 참 아비가 되는 분은 하나님이다. 온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거하여 죄인들을 당신의 백성을 넘어 자녀로 삼아주셨다. 주님의 피로 맺은 아비와 자녀의 혈연관계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절대 부인되거나 훼방 받지 아니한다.  

마지막 셋째로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세상의 지도자나 군왕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이기에 신자들이 복종해야 함은 당연하다.(롬13:1) 특별히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선 그리스도만이 지도자라는 뜻이다. 불신자들의 세계에선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형성되지 않아 하나님을 아비나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부를 리가 없다. 그리스도란 오직 교회에만 해당되는 명칭이다.    

가시적이고 조직체계를 갖춘 개별 지역 교회만을 뜻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우주적 집합체에서나, 두세 명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나 지도자는 인간 랍비나 목사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모임과 심지어 신자 한 사람도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므로 교회인데 그 머리는 예수님이다.

모든 교회는 예수님이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것이다. 십자가의 공로로 성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권세를 지녔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세상에 보여 알게 해야 한다. 모든 민족으로 땅 끝까지 찾아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게 하고 지키게 해야 한다. 목사, 장로, 안수집사 등 교회 안에서 어떤 명칭과 직분을 가졌든 그 기능과 역할만 다를 뿐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 동일한 자격과 신분과 권세를 갖고 붙어 있는 똑같은 지체이자 성도일 뿐이다.

예수님은 지금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신학적 설명을 부연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한 셈이다. 지금 그 교리를 깊이 따질 계제는 아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초점은 모든 신자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나님만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그분만이 경배는 물론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유교에선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가르친다. 공교롭게도 본문의 예수님의 분류와 일치한다. 임금(君)은 본문의 지도자, 사(師)는 선생, 부(父)는 아비다. 세상에서 이 군사부는 누구나 반드시 동일하게 섬겨야 할 최고 높은 자이고 그 이상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 사이에는 그분이 보시기에 어떤 높고 낮음도 없이 똑같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군사부도 교회 안에선 다른 이와 동일하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공동체에선 절대 다른 이를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라는 것은 일반 윤리에서도 가르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선 더더욱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믿음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윤리로 가르치고 실행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 재물, 권력, 학벌 같은 사회적 위치를 갖고 절대 행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유익과 불이익이 발생되어선 안 된다. 교회 내 직분이 서열과 계급체계로 변질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여기까지도 신자들은 잘 알고 있다. 본문에는 더 깊은 의미가 또 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라. 교만해지거나 그 반대로 겸손해지는 일에 관한 개별적 구체적 행위에 대해선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주에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 몇몇 대표적 행위를 예로 든 것과 사뭇 다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랍비, 선생, 형제, 아비, 지도자, 그리스도, 나아가 11,12절에서도 큰 자, 섬기는 자, 높이는 자, 낮추는 자로 칭한다. 즉 한 인간의 인격체 전체에 대해 논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신자를 어떤 특정한 행위에만, 구원 때만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초점을 맞추어 보시고 반응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신자와도 인격 대 인격으로 대면하여 서로 교제하고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교제하고 동행한다는 뜻 자체가 그러하지 않는가? 친구나 부모 자식 사이에 한두 번 잘못한 것 혹은 잘한 것으로 그 관계가 영향을 받으면 교제나 동행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신자더러 너희는 항상 내 앞에 한 개인 인격체로써 신령하고 진정한 존재로 서라고 하신다. 종교 의식이 거룩하고 그 행위가 경건한 것 이전에 그 심령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쪼개어져서 벌거벗은 한 사람의 용서 받은 죄인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요구하신다.  

신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완전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이 자기에게 온전한 하나님, 진짜로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신 절대자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심을 확신하기에 그분을 따라가길 소원하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자기 인생의 첫째 목적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자신의 욕심과 고집과 어리석음과 죄성에 따라 자기를 중심에 두는 교만에 빠져 주님보다 앞서가려 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무릎을 꿇고 하나이자 참 선생이신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나라는 인간 전체를 완전히 항복하고 헌신해서 예수로 인해 살고 예수로 인해 죽어야 한다.

세상만사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 삶에 적용시키는 시각과 관점과 의미와 가치를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인생의 방향과 목적이 불신자 시절과 정반대로 바뀌어져 있어야 한다. 예컨대 당장 다음 달 아파트 렌트 낼 돈이 없어도, 심지어 병상에서 사지가 마비된 환자로 누워있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서 실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관심은 오직 네 속에 정말로 예수를 참 보배로 모시고 있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부다. 헛되고 헛되게 살았던 이전의 자신의 인생과, 나아가 자신의 생명과 예수님을 완전히 맞바꾸는 것이다. 또 그런 바탕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바뀌어야 할 순종의 참 의미

본문 11,12절은 신자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순종의 개념이 새롭게 바뀔 필요가 있다.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행동으로 옮기기 이전에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전체가 완전히 변화되어지는 것으로 말이다.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 좁고 협착한 길을 걷고 있어야 하며, 의가 아니면 행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따르지 말아야 한다.  

순종을 성경의 계명이나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씩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국한하면 자칫 또 다른 율법주의와 도덕주의로 흐를 수 있다. 참 된 순종이란 나라는 인간 전체를 하나님에게 완전히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한 죄인을 성령의 간섭으로 용서 받은 죄인 즉,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준 것이 복음이지 않는가? 죄를 범한 행동 하나 하나를 용서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따라서 내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바치는 것, 나라는 인격체 전체가 주님을 따라가야 참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남들도 기꺼이 섬기게 된다. 그런 자발적 실행이 신자 인생의 온전한 기쁨이자 만족이 된다. 또 그로 인해 오히려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는 일이 생겨도 더 이상 마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신자를 말씀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사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가 전혀 없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느냐가 당연히 목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목사들이 아무리 설교해도 변하지 않는다고 이미 고백했다면 그런 가르침이 순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않는가?

솔직히 많은 신자들의 믿음은 이런 저런 계명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은밀히 보상해줄 것만 기대하는 수준이다. 최소한 고난에서 건져주시리라 믿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나의 행위 하나하나에 비례해서 반응하시는 분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이는 일종의 기복신앙이요 행위구원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성삼위 하나님의 품 안에 이미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나님은 내 편이다. 이 땅의 장막이 무너지더라도 육신의 부모마저 나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 배반하더라도 그분은 절대 그렇지 아니하며 천국의 영광을 나를 위해 보장해 주었다. 신자에게 스승, 아비, 지도자는 오직 그분 한 분뿐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하늘의 생명책에 나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그 신분과 특권을 세상 어느 것도 무너뜨릴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순종이란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께 던지는 것이다. 자기 인격체 전부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달라고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모든 것은 당신께서 책임져 주신다. 본문에서 하신 주님의 약속이자 선언도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아주 쉽게 표현하면 이렇다. “나는 네가 진짜로 너무 좋다. 지금 그대로, 아니 어떤 모습이라도 다 좋다. 구태여 나에게 잘 보이려 이런 저런 모양을 갖추거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십자가 복음이 율법을 대체했다는 것이 구원의 길만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다. 계명 하나씩 지켜서 성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동원해 순종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은혜로 한 사람을 완전히 뒤집어서 구원하셨기에, 그 뒤집어진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성화라는 말이다. 자기 전부를 다 바쳐서 주님과 일대일의 인격적 교제와 동행을 이어나가는 것이 바로 참 순종이다. 그럼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참 생명으로 역사하게 되며 비로소 설교를 듣고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 이런 은혜가 오늘날의 모든 설교자와 신자들에게 있기를 정말로 간절히 기원한다.

3/30/2014

의인

2014.03.31 15:29:14
*.252.153.115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대하20:20)

운영자

2014.04.02 21:15:55
*.231.162.27

제가 컴퓨터가 낡아서 어제 새 것으로 갈면서
워낙 컴맹인지라 자료와 프로그램 옮기는 일이 예사 힘들지 않네요.
아직도 끙끙 대며 헤메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설교본문을 올리면서
본설교로 직접 바로 갈 수 있는 You-tube 주소를 실수로 지워졌습니다.

오디오로 듣기를 원하시는 분은 조금 수고스럽지만 상기 새 주소를 카피해서
유튜브 창에 페이스트 하시면 됩니다.
아니면 유튜브에서 본 설교 제목으로 바로 검색을 해도 됩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샬롬!

사라의 웃음

2014.04.02 22:16:05
*.109.85.156

전 인격체가 변화되어 거룩에 참예하는 자가 되길 원하시는 주님 앞에 자주, 너무도 자주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해 염려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게 겸손인가? 저렇게 하면 거룩한 것인가? 등등 그래서 어떤 올무에 자꾸만 걸려드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고요~~또 대부분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여러 종교적 활동들이 거룩인 듯, 경건인 듯 여겨지기에 그런 잣대로 자꾸 이웃을 판단하기도 하고 자신에게도 그 잣대를 적용하려 할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순종이란 그렇게 종교적인 모습으로 내비췸이 아님을, 송두리채 하나님의 자녀로 가꿔가시는 그 수고하심의 손길 앞에 저의 죄악의 모습들을 보여주심의 기회임을 깨닫고 죄를 인정하며 그러하기에 고쳐주심을 간구함임을, 이런 죄인을 대신하여 흘려주신 피값을 더더욱 알아가며 너무 고마웁고 감사한 복음앞에 여전히 어그러지고 굽어진 저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실 때, 참 인정하기 싫고 변명하고 싶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겸손히 인정하며 고쳐주시길 간구하며 노력하는 매일이 되길 기도하게 됩니다.

Ju Dong-wok

2014.04.15 16:14:35
*.17.88.18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출처 밝히며 담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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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을 깨트린 마리아가 칭찬받은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235) http://youtu.be/Bj6R9JUxih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玉盒)을 ...

복수(複數)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는 두 단어 (마태복음강해 #234 - 마26:1-5) [5]

복수(複數)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는 두 단어 마태복음강해 (234) http://youtu.be/LaccUs1d_Z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

마지막 심판의 기준 (마태복음강해 #233 - 마25:31-46) [2]

마지막 심판의 기준 마태복음강해(233) http://youtu.be/FXgNLGYWj0E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

종말에는 더더욱 세상에 충성하라. (마태복음강해 #232 - 마25:14-30) [10]

종말에는 더더욱 세상에 충성하라. 마태복음강해 (232) http://youtu.be/-d2ImUImfsg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

혼인집 열 처녀 비유의 정확한 뜻 (마태복음 강해#231 - 마25:1-13) [2]

혼인집 열 처녀 비유의 정확한 뜻 마태복음 강해(231) http://youtu.be/qjnfrLYXLtE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마태복음 강해 #230 - 마24:44-51) [1]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 마태복음 강해(230) http://youtu.be/hy8pTp1qZ4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

휴거되지 않을까 결코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9 - 마24:40-43) [4]

휴거되지 않을까 결코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9) http://youtu.be/FQjvqYzGP3k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이미 방주를 짓고 있는 제2의 노아 (마태복음강해 #228 - 마24:32-39) [5]

이미 방주를 짓고 있는 제2의 노아 마태복음강해 (228) http://youtu.be/zEh_opoKjSo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

주님 재림 때에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27 - 마24:23-31) [1]

주님 재림 때에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27) http://youtu.be/GBdEmhm988E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

마지막 대환난을 견딜 수 있는 최선의 길(마태복음강해 #226 - 마24:15-22) [4]

마지막 대환난을 견딜 수 있는 최선의 길 마태복음강해 (226) http://youtu.be/qpt9pAkWVkw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 마24:9-14) [3]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http://youtu.be/ZJFfgXGhOf8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마태복음강해 #224 - 마24:3-8) [3]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마태복음강해 (224) http://youtu.be/xpNSYZ0lMos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란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

예루살렘 제4성전 건축에 숨겨진 비밀 (마태복음강해 #223 - 마24:1-2) [1]

예루살렘 제4성전 건축에 숨겨진 비밀 마태복음강해 (223) http://youtu.be/Sxtp-cfJl-c (클릭하시면 You- 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

예수님 재림의 때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 (마태복음강해 #222 - 마23:37-39) [1]

예수님 재림의 때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 마태복음강해 (222) http://youtu.be/3u4Zz324abo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롤 들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

교회는 공동묘지에 투자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1 - 마23:29-3) [1]

교회는 공동묘지에 투자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1) http://youtu.be/8HGMKWHX4qw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0 - 마23:27-28) [2]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0) http://youtu.be/wevLINUcDt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회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

신자가 범하는 진짜 외식은? (마태복음강해 #219 - 마23:25-6) [4]

신자가 범하는 진짜 외식은? 마태복음강해 (21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교회 중심의 삶은 하나님께 큰 죄다. (마태복음강해 #218 - 마23:23-24) [1]

교회 중심의 삶은 하나님께 큰 죄다. 마태복음강해 (218) http://youtu.be/U6QYMHGNzMA (클릭하시면 You-y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

불신자보다 영성이 떨어지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7 - 마23:16-22)

불신자보다 영성이 떨어지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7) http://youtu.be/Pxl_-9tLeSI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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