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2:25 & 3:7)
너무 불합리한 선악과
세상 사람들은 성경의 선악과 사건을 아주 불합리하다고 이해합니다. 최초 인간 부부가 과일 하나 따먹었다고 그 후손인 모든 인류가 원죄 아래 태어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니 너무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인간에게 자기 임의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어 놓고 다시 거꾸로 벌을 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양이면 처음부터 자유의지와 선악과 둘 중 하나만 주든지 혹은 둘 다 주지 말았어야 한다고 반발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마치 홍시가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담 밖으로 뻗어나가도록 버려두고선 동네 아이들이 따먹길 기다렸다가 곧바로 큰 벌을 주는 심술 궂은 할아버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선 철없는 아이들이 홍시를 따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담 밖으로 가지가 뻗도록 방치한 주인 할아버지에게 있듯이, 인간 타락의 근본 원인도 하나님에게 귀착된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인 아담과 이브는 잘못했다 쳐도 모든 후손을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은 심술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도 없는 최고 독재자라고 비난합니다. 비유의 할아버지로 돌아가면 영의정 벼슬을 하고 있다고 감을 따 먹은 아이들의 가족은 물론 그들 후손까지 대대로 자기 집의 노바로 삼아 부려 먹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지 않았고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도 모르니까 당연한 반발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비방에 대해서 신자들마저 제대로 변증하지 못하며, 더 큰 문제는 일부 신자는 본인도 내심 그런 비난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을 어긴 데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는데, 그 의미를 모르면 자기 신앙이 모래 누각 위에 세워져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므로 이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가 최초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범했다고만 배워왔기에 그렇게 이해하고 치웁니다. 선악과를 따서 먹으면 정녕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위반한 것이니까 그들이 불순종한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이를 불순종의 차원으로만 이해하고 그치니까 그 후손은 하나님을 알아서 불순종하기도 전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그분의 진노 아래 심판받아야 한다는 원죄 교리에 신자들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단순히 “하나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라면 죄를 종교 계명을 위반한 차원으로 제한하는 셈입니다. 거기다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서도 여전히 알게 모르게 성경의 계명에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선 기독교 신자들이 죄를 많이 짓는데도 자기들은 무조건 천국 가고 그들보다 오히려 의로운 자기들은 지옥 간다고 하니까 전혀 수긍하지 못합니다. 또 그런 너무 이상한 교리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을 바보 혹은 광신자로 취급합니다.
성경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인생의 첫째 지침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서 믿고 따르게 해야 할 교본입니다. 하나님께 범한 종교적 불순종만 죄의 본질로 삼으면 기독교인 스스로 성경의 독자층을 이미 믿은 신자로 한정하게 됩니다.
물론 성경은 온전히 믿고 난 이후라야 온전히 믿어지는 신비한 책입니다. 최소한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만 그 진리의 빛을 조금씩 독자의 심령에 비춰줍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하면서 처음부터 무턱대고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악과 사건을 윤리적 차원으로 접근하면 더 큰 난관에 봉착합니다. 부부가 과일을 따서 서로 나눠 먹었으므로 아주 선한 일이었지 잘못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근본이자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문제를 그들이 수긍할 만한 차원으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변증으로 당장 믿게 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에 대한 오해는 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성령이 역사해서 구원의 은혜도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자 본인부터 그 미심쩍었던 부분을 제대로 정리해야만 합니다.
범죄 전과 후
성경의 난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항상 성경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최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일이 왜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죄가 되느냐는 질문의 답도 그렇습니다. 그 일을 범하기 전과 후의 인간의 영적 상태를 설명해 놓았기에 그것을 비교해 보면 됩니다.
범죄 한 후에 인간에게 첫째로 나타난 반응은,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7)라고 말합니다.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되었다고 하나 시력이 갑자기 더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만 먹었을 뿐 자기들 몸에 상처나 문신 같은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어떤 것도 걸치지 않고 사는 것이 일상이었고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했으나 갑자기 뭔가 불편하다고 여겨져서 치마를 걸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전의 상태와 비교해 봐야 하는데, 성경은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라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벌거벗었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가 선악과를 따먹자 여전히 벌거벗은 상태이지만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는 없었고 굳이 필요 없었던 어떤 영적인 안목이 새롭게 생긴 것입니다.
최초 인간에게 생긴 최초의 영적 분별력이 안타깝게도, 아니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부끄러움을 구별할 수 있는 실력이었습니다. 죄의 본질이 부끄러움이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며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이 자동적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위반하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이제 막 그런 상태가 시작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모든 것이 풍족해 그들에겐 어떤 고난과 문제도 없었습니다. 부부 싸움하고 서로 미워한 적도 전혀 없고, 그들의 평안한 삶을 위협하는 존재 또한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지금은 윤리와 종교는 아예 생기기 전이고 그런 교육이나 상담을 받을 상황도 전혀 아닙니다. 아담과 이브 두 사람뿐이라 오히려 그들이 그런 것들을 고안 개발해야 합니다.
지금 자기들이 의도는커녕 전혀 기대 예상하지 않았는데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들의 부끄러움은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속에서 저절로 생긴 것입니다. 혹시라도 인간이 물질에서 진화한 물질적 존재라면 과일을 따 먹었으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지 부끄러워질 리 없습니다. 결론은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지어 놓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경위
아담과 이브는 그동안 선악과가 동산 중앙에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따먹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의지가 있어도 삶이 너무 풍족하고 평안해서 굳이 그 명령을 위반할 필요도 없었고 아예 그럴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사탄이 이브에게 하나님이 왜 꼭 그 과일만 못 먹게 했는지 잘 따져보라고, 즉 하나님과 너희가 정말로 좋은 관계인지 한번 재고해 보라고 부추겼습니다. 지금의 그 평안하기만 한 상태보다 훨씬 더, 아니 세상에서 최고 좋은 일이 있는데 너희가 지금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뉘앙스를 은연중에 내비친 것입니다.
이브로선 특별한 과일도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이 왜 꼭 이것만 먹지 말라고 했을지 그 의도가 너무 궁금해지다가 슬슬 사탄의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악한 사탄이 그녀에게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을 놓칠 리 없습니다. 곧바로 그것을 먹으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까 시기해서 먹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너희를 속였다고 넌지시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선 그 과일을 먹어도 절대 죽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사탄의 확정적인 말을 듣고서 이브가 다시 그 과일을 자세히 보니 이전과 달리 아주 탐스럽게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좋은 것은 무엇이든 다 주리라 믿고 따라왔는데, 유독 이것만 금지했다면 사탄의 말이 옳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처럼 되지 못하게 막았다면 더더욱 따먹어서 하나님처럼 되어야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말하자면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그분을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면서 자기들 마음에서 그분을 지운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주인 자리를 자기들이 차지하겠다고 덤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가장 먼저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서로 상대를 보고서 추하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라고 했으므로 각자가 자기를 볼 때 스스로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금령을 주신 뜻에 대해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워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잠시 의심만 하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으면 자기들을 감춰야 할 만큼 부끄러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불순종의 죄라고 돌아가선 안 됩니다. 이 모든 사태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안 좋아한다고 판단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을 넘어서 아예 안 좋아한다고, 싫어한다고 믿고서 이참에 그 금령의 굴레를 벗어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부부끼리만 서로 사랑해도 충분하다고 자신만만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끼리 살아가는 데에 방해만 되므로 일절 지시 간섭 개입하지 말라면서 그분과 완전히 등을 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되어버렸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설명드린 대로 자기들의 나체를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껏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하나님 사랑의 손길이 다 사라졌기에, 구체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어도 그런 영적인 은혜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허전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독립할 마음은 전혀 버리지 않은 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의 낯을 피하기만 했습니다.(8절) 이제 금령을 위반한 벌인 죽음의 상태로 완전히 들어간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주신 하나님은 절대로 서두에서 비유한 그런 심술궂은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정확하게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정원에 온갖 과일나무가 철에 따라서 풍성하게 열매 맺는데 유독 나무 하나는 꽃은 매우 아름다우나 그 열매에 독이 있어서 따 먹으면 곧바로 식중독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다른 모든 나무의 과일은 얼마든지 먹어도 되는데 그 나무만은 절대 먹지 말라고 그 이유까지 설명해 주면서 신신당부한 셈입니다.
자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로선 혹시라도 자기가 없어서 보호하지 못할 때 먹을까 염려하고 배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모습에 배알이 뒤틀린 집안의 악한 종이 순진한 아이들에게 그 열매는 너무 맛이 좋은데도 너희들에게 주지 않고 아버지가 혼자 다 먹으려고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자꾸 부추긴 것입니다.
모든 선의 근원
어쨌든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었기에 결과적으로 인간을 악하게 만든 것이라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기쁜 뜻이라면 기꺼이 따를 수 있고, 그분의 기쁜 뜻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며 에덴동산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했다는 식으로 사탄이 부추길 때 그들로선 지난 경험에 비추면 그 말이 분명히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브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고는 거꾸로 사탄이 기뻐하는 뜻을 기꺼이 따르고 하나님의 기쁜 뜻은 거역하기로 그 의지를 악용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신과 순전한 관계를 맺을 때만 당신이 베푸는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인간 쪽에서 그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렸으므로 그분의 사랑을 누릴 수 없게 되고 평안도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일에 당신처럼 될까 봐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뜻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악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이라서 인간은 아직 선과 악을 구분할 줄도 모릅니다.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선과 악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분의 울타리 안에 거하면 모든 일이 선이 되고 그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모든 일이 악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이 괘씸해서 인간을 악인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이 끊어지니까 곧바로 악이 형성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지금 하나님 밖으로 나감으로써 처음으로 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종교적 계명에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의 차원으로 접근해선 크게 부족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선을 거부하는 순간 모든 악이 인간을 점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품을 벗어나면 자기가 벌거벗은 줄 알고서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상태가 실질적인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본래의 의도, 목적, 본성대로, 그분의 형상대로 살지 않으니까 참 인간의 모습이 왜곡 파괴되어 죽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둠으로써 자기가 바로 절대 진리이고 자기 판단과 행동이 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뿐인데 인간은 자기가 이 땅의 주인인 양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행하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그분처럼 된 것입니다. 순전히 부정적인 측면에선 하나님처럼 된 것입니다.
타락 전에는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랑에는 수치스러운 요소라곤 하나도 개입되어 있지 않았고 100% 순전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잘 나서가 절대 아닙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과도 순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분께 받은 100% 순전한 사랑을 서로 나눈 것입니다. 반면에 선악과를 따서 나눠 먹은 일은 사탄의 100% 악을 서로 나눠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자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또 다른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 순전하게 사랑하듯이, 아담과 이브도, 모든 인간끼리도 서로 돕는 배필로서 서로 순전하게 사랑하며 동역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이브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 없었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수치스러운 짓을 하려고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그들 사이에서 지워버리자 곧바로 그분의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자기들을 주관하지 않게 되었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수치심에 완전히 휩싸인 것입니다. 창조 때 그들의 심령에 심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았으나 안타깝게도 그 후손은 이미 파괴된 그 심령을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죄의 본질
이제 모든 인간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만든 최초 인간이 범한 죄의 본질이 제대로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인간이 능동적 의도적 적극적 일방적으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악이 되고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만 선이므로,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일은 그 죄가 빚어낸 결과적 행동이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심판 아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존하고 그분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까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인간이 절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분을 경배하기는커녕 아예 그분 사랑의 울타리 밖에서 평생을 자기 멋대로 살기를 고집하므로 그 끝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적 추한 행동도 하나님과 분리되어 온전한 선을 공급받지 못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선 심령부터 왜곡되어서 자기가 절대 선이 되었기에 선과 악을 온전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모두가 최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니까 필연적으로 서로 충돌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에게도 하나님을 믿되 자기만 풍족히 채워서 치장하려는 원죄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분의 능력을 자기 유익에만 이용하려 들고, 심지어 그분의 계명마저 자기 입맛에 맞아야 지키려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수시로 그분을 등집니다. 부모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을 가인이 하나님이 자기는 미워하고 아벨만 사랑한다고 오판하고 아무 잘못이 없는 동생을 죽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사탄의 유혹마저 허락했을 때는 사실은 이렇게 될 것도 다 아셨습니다. 그냥 그대로 방관했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잘못이지만, 그마저도 당신의 거룩한 계획 안에 있었고 그래서 태초부터,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계획해 놓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더러 최고의 절망과 죽음을 겪어야만 최고의 소망과 생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죄 하에서 하나님과 분리 되어서 한동안 실패와 절망을 겪는 아픔보다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누리게 되는 것이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기에 아담의 타락을 허락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품을 벗어난 아담은 아무리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 해도 소용이 없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동산 깊숙이 숨었으나 하나님이 먼저 찾아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불렀습니다. 지금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고,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디에 숨었는지 하나님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 질문의 뜻은 네가 있을 곳은 거기가 아니니까 제발 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죄란 한마디로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며, 그분께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분리된 채 끝나면 그것이 심판입니다.
사탄은 원래 하나님을 거역하여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악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행하는 일이라곤 인간으로 하나님과 떨어지게 만드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브를 교묘하게 속였고 그 후의 인간에게 무엇이든 줍니다. 물질적 풍요와 정서적 안정은 물론 도덕적 의로움까지 줍니다. 심지어 천사로 위장해서 영적인 절정과 기쁨도 종종 누리게 해줍니다. 그 속내는 이브 때처럼 오로지 사람을 실질적으로 죽이려는 것 하나뿐입니다.
사실은 사탄으로선 굳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만 떼어놓으면 되는데 이미 떨어져 있는 인간은 자기들끼리 저절로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 아래에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풍요를 누리는 현세대는 역사상 최고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역사상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도덕적으로도 가장 타락했고 온갖 분쟁과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종말에 대해 전 지구적인 공포심을 일시에 갖는 것도 지금 세대가 처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함으로써, 그 정도가 전 지구적으로 됨으로써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 그분과 분리된 인간의 근본적인 죄와 그 결과적 폐해를 해결하려면,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알게 해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로 골고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죗값을 대신 감당하는 제물로 받으신 사건은, 죄에 찌든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여전히 전혀 변화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최선이자 최종적인 방안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한 번 있었고 실제로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영적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부르면서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서 빨리 당신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오라!”고 십자가를 통해서 간절히 호소한 것입니다.
이제 선악과 사건을 새롭게 해석 적용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 죄가 아닙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아야만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었는데도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심어놓은 자기 형상을 인간이 스스로 죽인 영적 자살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엄격히 경고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단순히 당신은 죄인이므로 예수를 믿어야 지옥 형벌을 면하고 천당으로 갈 수 있다고 전했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그것이 절대적 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절대적 진리마저 실종되었습니다. 그런 심령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씨앗부터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물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참사랑의 관계를 지금 정말로 맺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권해야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당신이 자기 자신부터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점검해 보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지금껏 죄를 거의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았어도 혹시 스스로 자신이 부끄럽다고 여겨진 적은 없는지, 마음 한구석에 갈급하고 허망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는지, 만약 그랬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 진지하게 따져보라고 도전해야 합니다.
남을 도와주며 의롭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자라도 이 짧고도 한 번뿐인 인생을 온전한 참사랑을 한 번이라도 하지 못하고 끝낼 것인지, 그들로선 생전 처음 듣는 그런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땅이 전부이고 인간이 물질로 진화했다면 이런 질문도 필요 없으며, 대신에 당신을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정작 문제는 신자들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에서 구원받았다고만 여기니까 도덕적 종교적 죄만 멀리하려는 바리새인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 성수만 어겨도 하나님께 벌을 받지는 않는지, 심지어 구원이 취소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종교적 치성만 쌓으려 들고, 더 나아가 많이 바치면 그만큼 더 많이 받는다고 믿는 기복주의 신앙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현 계시된 하나님의 참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그분과 온전한 관계로 회복된 자입니다. 영적으로 에덴동산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의지, 즉 그럴 수 있는 능력을 다시 받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래서 날마다 또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 가운데 완전히 푹 잠기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이 땅에서 현실적 고난을 끊임없이 겪을지라도 바울처럼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사랑에서 끊을 것이라곤 단 하나도, 심지어 죽음마저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그런 확신으로 반응하므로 아무리 큰 환난도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가는 필수 여정이기에 기꺼이 감당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평생을 하나님 사랑의 울타리 안에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밖으로 나가도록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그 울타리 안에서 넘어질 뿐입니다. 만약 그런 확신이 흔들린다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려는 이전의 교만이나, 그분의 능력을 이용해서 세상 앞에 자기를 치장하려는 탐욕이 잠시 발동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매 순간 자신의 믿음을 정확히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은 하나뿐입니다. 세상에서 평생 왕처럼 떵떵거리며 사는 것보다 단 하루라도 여호와의 전에서 문지기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좋은가입니다.
(10/20/2024)
요번에 동문들을 시애틀에서 만나서 함께 여행하면서 믿지않는 친구들에게 예수를 증거하다가 한 친구가 화를 내면서 그만 하라고 하더군요. 가기전에 몇달동안 기도하면서 하늘의 지혜를 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하였고 그때 그때마다 좋은 기회들이 있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전했는데 아마도 도가 지나쳤는지 화를 내는 친구를 보자 아, 내가 너무 많이 나갔나 생각들었습니다. 같이 있는 시간동안 굳은일들을 손수 도맡아 하고 특히 저녁 준비, 설거지 및 청소등을 섬기는 자세로 하였는데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각자 헤어지는 공항에서 그 친구가 너의 섬김으로 좋은 여행이 되어서 감사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의 목표의 예수 전함이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친구들 모두에게 전달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