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요즘 제가 미친 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미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하나님만 사랑하고 싶어졌고, 하루 종일 기도하고 싶고, 하루 종일 말씀보고 싶고… 하나님만 생각하며 살고 싶어라 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네요. …일해야 할 시간에…하나님 사랑과 주님의 은혜만 생각나고… 그러니 일은 미뤄지고…결과물에 대한 품질도 떨어지고…조만간 짤리게 생겼습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저 며칠만 이대로 푹 빠져서 살면 안 되겠습니까?
대신 하나님께서 저의 일 해주시고요… 아버지 그러면 안 될까요? 그러면 안 될까요?
하나님을 바로 알기 전에는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새벽예배에 참석 못하는 것은 조금 미안했지만... 그 자체로 뿌듯해 하며 살았습니다.
나의 삶과 하나님의 삶은 철저하게 분리가 되어 있었던 거지요...
질문으로 돌아가서...
정확한 표현 인지는 몰라도...삶 자체가 예배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TV를 시청해도, 밥을 먹어도, 운동을 하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주 조금이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온전하게 느끼며
동행하는 삶이 되고 싶은데 가능한 이야기겠습니까?
아니면 신앙과 가족과 일등에 적절한 조화(시간의 분배 등)를 가지고 가야
하는 건가요?
[답변]
한 마디로 너무나 부럽습니다. 모든 신자가 다 동경하는 이상적인 신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질문하신대로 현실적인 문제와 상충이 되니까 탈입니다.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는 각 자가 처한 여건과 또 주위 사람들의 신앙 정도와 무엇보다도 본인의 신앙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몇 가지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일반적인 원칙을 조언하는 것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구태여 조언(助言)이라고 표현한 뜻은 정답을 밝혀야 할 성경적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현실적 여건이 되어서 생업을 접고 하루 종일 주님만 묵상 찬양하며 지내거나 혹은 현재 생업과 삶이 너무 복잡해 주일 성수만 겨우 지키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본인의 신앙관이 십자가 복음 안에 분명히 정립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신자의 신분과 소명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사43:21)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도 첫째 항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세상이 타락한 이후로는 모든 인간은 얼굴에 땀을 흘러야 식물을 먹고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생존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생업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어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이 땅에는 사단의 도성과 하나님의 왕국이 공존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 안에’(within the world) 살기는 하되 ‘세상에 속한’(of the world) 자는 아닙니다. 비록 육신은 이곳에서 살되 영원한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소속된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고전5:8)이지만,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5:4)입니다. 그래서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5:9) 합니다. 그리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길은 맡은 바 화목의 말씀을 충성되게 전하는 것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전5:15-19)
따라서 예수님 이후의 신약 성도들에게는 종신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외에 소명이 한 가지 더 생겼습니다. 불신자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세상 끝 날이 될 때까지 땅 끝까지 맡은 바 말씀을 충성되게 전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세 가지 방법
현실적으로 신자가 주님을 위해 사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질문하신 그대로 하루 종일 주님만 찬양하고 경배하며 사는 것과, 전문 목회자(Full-time Minister)가 되어 사역 자체를 직업으로 하는 것과, 평신도(laymen)로서 세속의 직업을 갖고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방안은 중세의 수도원 제도 같이 독신으로 평생을 주님을 경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일을 않고도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대책이 충분히 서 있지 않거나 또는 부양가족이 있다면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주님을 평생토록 찬양하고 경배는 할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화목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받아서 성경을 연구하여 저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신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택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닙니다.
전문 사역자가 된다면 하루 종일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 경배와 전도라는 두 가지 소명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방안이긴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calling)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또 그 부르심에 대한 배우자의 자발적인 동의와 동역하기 위한 희생도 함께 따라야 합니다.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부부 공히 재물, 권력, 명예 등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은 당연히 전부 포기하고 전적으로 그 길에 평생토록 헌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평신도로서 세속 직업에 종사하면서 주를 경배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겐 직업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인생의 목표는 따로 있기에, 즉 주를 경배하고 전하는 일이 있고 직업은 그 일을 달성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회사 일은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동료 직원이나 고객들에게 전도만 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성실과 신용과 공의로 해야 합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7)
그런데 신자들만 주로 상대하는 전문사역자보다 세상 안에서 불신자를 더 많이 접하는 평신도에게 전도의 기회는 더 많습니다. 그러나 질문자님의 아쉬움대로 주를 경배하는 시간은 아무래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직업과 전도와 경배라는 세 가지를 (특별히 시간적으로)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루 종일 주님만 찬양할 수 있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먼저 살펴보아야 할 사항이 몇 개 있습니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대로 신자는 경배 뿐 아니라 전도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경배도 전도를 위한 경배이어야 할 뿐 아니라 진정한 경배를 한다면 전도를 하고 싶은 열망이 자연히 생깁니다.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오묘하기에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고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앞에서 전문사역자를 Full-time Minister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은 목회자와 평신도 구분 없이 신자라면 누구나 평생을 그렇게 보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 군병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일반적 직업과 목회전문직 중 어느 것을 가졌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수도원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목회자가 된다고 해서 하루 종일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그럴 기회나 시간은 많지만 여러 가지 꼭 해결해야 할 일들이 반드시 생길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령이 종일 주님만 묵상하기에는 너무 연약합니다. 또 신자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죄성과 외부로부터 사단의 방해는 천국 가는 그날까지 끝없이 괴롭힐 것입니다.
따라서 하루 종일 주님을 찬양하려면 신자 본인이 하기 나름입니다. 일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속으로 주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고 있는 일이 방해될 정도로 해선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출퇴근하고 있는 시간 또는 일과 후 남는 모든 시간에 교회나 성도들 모임에 참석하거나 개인적인 경배 시간을 가지면 됩니다. 때로는 며칠 간 혼자서 기도원에 올라가거나 각종 집회에 참석해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셔야 할 것은 신자가 의도적으로 주님을 찬양하지 않더라도 신자 속에 좌정하신 성령님이 신자를 대신해 간구하며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가 영혼의 중심에 항상 주님을 모시는 전적 헌신이 있고 또 수시로 잠간 속으로라도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면, 비록 신자가 지정의로는 아무 의식을 못하더라도 그 영이 하루 종일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에 붙잡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침에 잠시 몇 분이라도 기도한 날과 바빠서 그렇게 하지 못한 날의 업무 중의 심령의 상태가 큰 차이가 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낮에 일하는 동안에 주님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어도 아침에 기도한 날은 평강과 온유와 기쁨이 넘치고 능률마저 오릅니다. 반면에 어떤 날은 다른 날보다 육신적인 컨디션이 더 좋고 회사 일도 잘 풀렸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따져보니 아침에 기도를 빠트렸다는 것을 깨닫지 않습니까? 낮 동안에는 전혀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았어도 아침에 기도했기에 성령님이 그 심령을 주님의 은혜로 채우는 역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 전체가 찬양이 되려면
다시 말하지만 목회자든, 신학자든, 평신도든 모든 신자의 인생 목표는 경배와 전도입니다. 즉,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바울 사도가 십자가복음의 원리를 다 설명한 후에 구원 받은 신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 처음으로 권면한 내용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릴 수 있습니까? 하루 종일 주님만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까? 하루 종일 주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바로 그 다음절에서 어떻게 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첫 마디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또 풀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믿는 지체를 섬기고 또 생업을 통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위해선 그들보다 선하게 살라는 의미보다는 그들 앞에 가장 먼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해야 합니다. 또 그분을 부인하는 사조가 얼마나 큰 죄악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핍박하는 자를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해야 합니다.(12:17,18) 로마서 12장 이하에 구체적으로 기록된 일들을 실제로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의 본질입니다.
시간적으로 어떻게 찬양의 삶과 세상의 삶을 지혜롭게 구분해서 살 수 있는지 물으셨지만 엄격히 말해 성경적으로는 모순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정말 참 신자답게 산다면 시간적으로 따로 구분될 것 없이 그 삶 전체가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집안에서 자녀의 고민을 진정한 사랑으로 들어주는 것도, 별도 기도하거나 말씀 보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산제사요 삶으로 드리는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또 겉으로 예배나 찬양의 형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아니 그 영으로 온전히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는 자만이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질문자님께서도 위에 말씀 드린 내용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씀보고 찬양하며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영이 충만해지기에 오직 그렇게만 살고 싶다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또 신자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삶의 방법 중에 어느 것이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하나님에게 받은 은사와 소명에 비추어, 선택하여 살면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도원의 구도자든, 목회자나 선교사든, 평신도든 24시간 365일 완벽하게 그럴 수 있는 자는 예수님을 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그렇게만 하고 싶은 갈증이 생기면 가끔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Retreat을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3/10/2007
- 거꾸로 읽는 성경 사이트 #139의 글 '급박해진 예수님의 재림'과
-하루를 열며 사이트 # 17 '어떻게 목회자로 헌신할 것인가'의 글을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상기 답변과 위 글들을 읽었음에도 계속해서 그런 소원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한번 전문 사역자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심각히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께 온전한 소명을 직접 받아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셔야 합니다. 또 배우자되시는 분의 자발적인 동의와 헌신을 받아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