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피 그것은 엄청난 사실이고 또 엄청난 진리입니다.
값없이 주신 그 은혜로 인하여 저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 천국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점이 저의 이기주의 입니다. 주님의 고통은 모르고 저만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아주 아주 저의 이기주의 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잔을 옮길 수 있다면 옮기시옵소서"라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는데... 왜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셨을까요? 3일후면 부활을 하셔서 승리를 하신다는 것을 아시고 계시는데... 다가오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전부터 가지고 있던 고민을 질문으로 드려 보았습니다.
[답변]
일류 고등학교에서 전체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는 학생이 있다고 칩시다. 대학 입시 모의고사에서 항상 일등을 해서 그가 서울 대학 어떤 과에 응시해도 떨어진다고는 본인도 선생도 주위 사람 아무도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 때가 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합격할 자신이 100% 있어도 기도하게 됩니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흥미로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알고 계셨는데도 왜 기도했을지에 대해서 비유로 답변 드렸습니다. 수능고사 성적이 전국 Top Ten 안에 들어도 막상 시험 당일에는 떨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신자 학생이라면 실수하지 않고 평소 실력대로 잘 볼 수 있도록 그래서 본고사에서도 Top Ten 안에 들어서 가고 싶은 과를 골라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과는 다릅니다. 단순히 불안해서 기도한 것 이상으로 그분은 모든 일을 반드시 기도한 후에 수행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5:19,20)
주님은 날마다 새벽 미명에 기도했고 번잡한 일이 많을수록 사람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주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했던 기도이긴 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주님의 일상적인 기도의 연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사역이자 또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무슨 일이든 기도하셨던 주님으로선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기 전이라 더더욱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했기에 마치 주님이 그 사역을 거부하기 원했던 것 같은데 있습니다. 또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하셨기에 더욱 그렇게 이해하기 쉽습니다.
성경의 기록 중에 애매모호한 부분은 그 사실을 역으로 접근하는 방식으로 따져보면 이외로 쉽게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겟세마네 동산 기도도 주님이 진실로 십자가 사역을 거부하고 싶었는지, 그래서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당신께서 십자가로 가지 않아도 되는 인간 구원의 다른 방법을 달라고 기도했겠는지 그 답을 구해보자는 뜻입니다.
물론 그 답은 당연히 “No”입니다. 그것도 절대적인 부정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여러 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시므온 선지자를 통해 마리아에게도 통보된 사항입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2:34,35) 세례 요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거부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그런 기도를 했다면 하나님 앞에 위선으로 기도한 셈입니까?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또 설령 기도한다고 해도 피할 길이 전혀 생길 수 없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피하고 싶고 또 기도할 때가 간혹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는 당연히 투옥되거나 심하면 사형당하는 줄 각오하고 또 피할 길이 도무지 없는 줄 알지만 심정적으로는 피하고 싶었고 기도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류가 고안한 사형 방법 중에 가장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 로마의 노예 반란을 그린 ‘스팔타카스’라는 영화에 그 고통을 설명해주는 아주 유명한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반란이 실패하여 모두 로마 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로마 사령관이 누가 대장 스팔타카스이냐고 물었더니 부하들이 대장을 살리려고 바로 자기라고 다들 나섰습니다. 그러자 대장이 눈치를 채고 스팔타카스와 그의 부관을 지목하여서 칼을 각자에게 주어서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대장을 살리려는 마음에 싸우지 않고 바로 실토하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칼을 주자마자 서로 격렬하게 진짜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스팔타카스가 자기 사랑하는 부하를 칼로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둘 다 어차피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면 그 끔찍한 고통에 죽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내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반역 죄인을 반드시 십자가 처형으로 죽인 이유가 가장 고통이 극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고통이 어떠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고 심정적으로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온전한 인간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대 제사장으로 오신 주님은 인간 겪는 모든 시험을 다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죄만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 상처, 허물, 고통 등도 다 안고 가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사53:5)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를 피할 수 없는 사명으로 이미 순종하기로 다 각오했지만 주님의 인간적인 정서는 우리와 똑 같이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의 완전한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단절을 두려워했습니다. 육신은 당연히 완전히 죽었어야 합니다. 또 죄는 없으시나 인류의 모든 죄 값을 치를 대속 제물로 바쳐져야 했기에 실제로 부활하기 까지는 성부 하나님과 어떤 교통도 없었어야 합니다. 공생애 동안 모든 일을 기도하여서 오직 아버지가 보여주는 일을 했던 예수님이 이제는 아버지를 전혀 볼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두렵고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그 일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기꺼이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웠던 것은 사실이며 십자가에서 “나의 아버지 왜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신 까닭입니다. 주님은 그런 완전한 죽음이 아니고는 대속의 사역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쓴 잔을 아무 말 없이 담담하게 마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 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9:11,12, 10:19,20)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고려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님은 아주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왔다가 다시 가서 기도했습니다. 곁에서 기다리런 제자들은 지쳐서 잠을 잤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쓴 잔을 피할지 받을지에 관해서만 기도했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평상시처럼 십자가 사역 전반에 관해 간절히 기도드렸고 잔을 옮겨달라는 기도는 많은 기도 중에 특별히 제자들에게 들리게 된 말씀이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인류를 죄에서 사해 주고, 타락한 세상의 고통과 환난에서 구해주고, 사단의 멍에에서 풀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남겨두고 가는 제자들을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잘 보전하고 또 성령님이 오신 후에 그들을 담대한 십자가 군병으로 바꿔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세상과 제자들과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으로 똑 같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마지막으로 심정적으로는 당신께서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사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까지 다 아시고) 그 고통스런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기도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헌신을 다시 한 번 더 다짐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옵나이다”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내 원대로 해달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들은 기도가 그것이 전부이고 세 번씩이나 와서 깨어 있으라고 야단쳤다면 그들을 깨우칠 목적도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똑 같이 십자가 처형으로 순교 당할 때에도 당신의 기도를 생각하며 똑 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잔을 마실지 안 마실지 선택하는 기도를 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헌신하는 기도였을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그분은 피가 땀방울처럼 쏟아질 만큼 인류의 구원과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 올 모든 세대의 신자들을 위해서 더 집중적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이 십자가 고통에 대해 인간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에 대제사장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역설적인 접근을 해 봅시다. 예수님이 그런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너무나 당당하고도 자신 있게 죽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이 아무 고통도 당하지 않았다면 필연적으로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아예 퇴색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신 하나님이 죽고 부활해야만 완전한 구원이 이뤄지지 만약 슈퍼맨이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하면 한 편의 코미디가 될 것입니다. 구세주가 슈퍼맨으로 오실 것 같으면 로마를 무찔러 주고 처음부터 사단을 없애고 모든 질병과 고통과 환난을 제거해 주어야 이치가 맞게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공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진실로 인간적인 기도를 하면서 먼저 흘리신 핏방울로 인해 더더욱 빛이 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모르는 구원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편리하며 값싼 복음일 뿐입니다. 아니 고통 없는 십자가로는 구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3/3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