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제 친구는 어릴 적 가족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자신만 살아난 것에 죄책감에 휩쓸려 살았고 너무나 힘든 시절을 보냈어요. 지금은 성인이 되어 그러한 상처에 사로잡혀 살지는 않지만 아직도 그 아픔이 치유되지는 않은 상태예요. 오늘 친구에게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친구를 사랑하시며 함께 하신다는 말을 했는데 대뜸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고 그러한 고통을 주고 나아가 세상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왜 저렇게 많으냐고 하더군요. 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완전하심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고 그런 제 자신에 사실 좀 화가 났습니다. 친구의 반응 또한 맘이 아팠구요. 친구가 정말 예수님을 알아 그 인생이 변화되길 너무나 소원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 세상의 불의 혹은 타인의 잘못으로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을까요?
[답변]
대부분의 신자가 자주 겪는 참으로 난감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롭게도 복음을 전하는 자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똑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전도하고픈 열정이 지나쳐서 교리를 갖고 논쟁을 하게 되거나 심하면 말로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특별한 수가 없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한 마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뿐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신령한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너무나 간단한 논리입니다. 사랑이란 반드시 관련 당사자 간의 실제적인 감정, 지성, 의지의 교류가 있어야 하며 또 그런 교류를 이뤄내는 체험들이 쌓여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 친구가 어떤 형편에 있던 함께 하고 사랑하신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그녀 자신이 실제로 그렇다고 체험하고 느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에 성령의 인도로 인간의 영이 감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 친구 본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아무래도 하나님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성경문답 사이트 #48: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를 참조 바람.)
그녀는 어린 시절의 불우한 사고의 기억이 남아 있고 세상의 고통스런 형편들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벽을 견고하게 쌓고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일 여지가 더더욱 좁아졌습니다. 그 벽을 허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말로서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롬10:14) 듣지도 못하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있다는 자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간절히 기도한 후에 아무리 온유함으로 복음을 전해도 불신자로부터 예를 든 것 같은 반발은 따라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은커녕 호기심조차 그 마음에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10:3-5)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속의 그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선 무엇보다도 친구 스스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이 간섭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때를 얻든 못 얻든 말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당신의 택하신 자녀에게 당신의 때에 당신의 주권으로 이루십니다. 신자는 아무리 불신자에게 거리낌이 되고 미련해 보여도 십자가의 도만 전하면 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을 두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할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한 영혼이 구원 받아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천국 잔치가 벌어질 만큼 엄청난 일입니다. 정말 그 영혼을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안타까이 여기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신이 아니라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 율법사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전도자 스스로 전도가 너무나 귀중한 일이기에 혹여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게 되기를 조심하면서 불신자를 향해 항상 주님의 사랑으로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세상에 재앙이 없다면?
아무리 구원이 성령의 역사로만 일어난다고 해도 불신자의 반발이나 의심에 대해서 신자는 타당한 설명을 해줄 필요와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자기에게 그런 불우한 일이 일어나며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가라는 의문도 분명 난제이긴 하지만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논리 정연한 설명을 정해주어도 불신자는, 심지어 일부 신자들마저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신자의 경우는 믿음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불신자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덤비니 큰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몰라도 기독교만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데 불신자는 기독교의 그런 특성조차 못마땅해 합니다.
어쨌든 우선 성경(창3장)은 인간 세상에 고통이 상존하는 이유를 아담이 하나님을 배역하는 죄를 범하여 이 땅도 함께 벌을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체계에서 벗어나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믿지 못하는 불신자가 선악과와 원죄의 관계를 이해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설명을 해주면 인간이 범죄할 줄 알면서도 선악과를 주었고 또 위반하자말자 심판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고 또 다시 반발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식적인 판단력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만약 이 세상에 고통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되물어 보는 것입니다. 걱정거리라고는 없고 어떤 불의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으며 무한정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전혀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 정말 무료한 세상에 불과할 것 아니겠습니까?
선만 있다면 결코 선이 선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악만 있는 세상도 악이 악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선은 악이 있어야 선이며 악은 선이 있기에 악이 됩니다. 고통 하나 없는 세상은 행복한 곳이 아니라 도무지 살 가치와 의미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기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또 왜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 재앙이 일어나며 그것도 해마다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느냐고 따집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재앙이 없으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스스로 찾겠습니까? 천둥 번개가 치면 누구나 그 엄청난 자연의 위용 앞에 자기라는 존재가 너무나 미약하게 여겨지며 심지어 지은 죄 때문에 혹시 벌 받는 것은 아닌지 괜히 두려워지지 않습니까? 자연에 재앙이 없으면 그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폭풍후의 호수의 고요함이 참 고요함이지 항상 고요하다면 고요의 멋을 깨닫지 못할 것 아닙니까? 나아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도 발견하지 못하고 항상 그런 상태로 존재한다고만 여길 것입니다.
주로 가난한 나라들이 피해를 입는 이유도 그런 나라일수록 자연 재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어떤 형태로든 자연 재앙을 겪지 않는 나라와 지역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가난한 나라를 골라서 더 큰 재앙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자연을 정복하여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재앙을 통해 인류가 더 발전하도록 하며 또 그럴수록 당신을 더욱 감사함으로 경외할 수 있게끔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더러 불행과 대비해 행복을 더 크게 느끼라고 하나님이 일부러 고통을 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저주한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의 재앙처럼 여겨져도 세상의 고통과 불행의 대부분이 인간의 과실, 잘못, 죄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 분이 어렸을 때에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 모르지만 교통사고로 일가족이 몰살하고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고의 원인이 정비 불량, 운전 미숙, 과속 혹은 법규 위반 어디에 있든 인간의 부주의 내지 잘못이지 않습니까?
설령 전적으로 상대 운전자에게 과실이 있다 해도 하나님에게 책임을 물을 성격이 아닙니다. 만약 불량 운전자마저 하나님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엄청나게 과속을 하던 술을 마시고 운전하든 일일이 찾아가 사고를 막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고가 날 염려가 전혀 없으니까 누구나 제 멋대로 운전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악이 만연한 곳에선 악을 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럼 또 하나님이 잘못을 범한 상대만 다치게 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따질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너무나 억지입니다. 술이 취해 중앙선조차 잘 분간 못하는 운전자더러 차선을 잘 지키게 만들거나 혹시 중앙선을 넘더라도 상대편 차를 곡예사처럼 피해가게 만들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다른 건물을 받거나 저절로 전복해 다치거나 죽게 만들라는 요구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같이 음주 운전이 상습화 되어 있고 도로 사정이 복잡하며 차가 많은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밤마다 너무나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술에 취해 꼬불꼬불 몰고 가는 차들이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마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출귀몰한 모습으로 곳곳에서 날라 다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으로선 죄의 결과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까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치는지 인간더러 분명히 깨달아 알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근본적으로 죄에는 육신적, 정신적, 영적 죽음이 그 삯으로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에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사망의 아비 사단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못한 상대 운전자만 죽게 하라는 요구에 당장 응하지 않는 이유도 그분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살리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더러 선하게 살게 하기 위해 고의로 형벌을 더 가중하게 부과하는 일은 아주 비상한 경우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 결과는 반드시 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고통의 대부분이 인간의 허물과 죄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뜻입니다.
왜 죄 지은 자기를 벌해달라고는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무작위로 재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누구를 지정해 고의로 힘들게 하려고 고난을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할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3-15)
만약 이유 없는 재앙을 막아주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는 반발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인정해야 합니다. 즉 그런 반발을 뒤집으면 이유가 있는 재앙이라면 달게 받겠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 쪽에 죄나 허물이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그럴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 쪽 잘못으로 세상에 재앙이 끊이지 않을 정도인데도 인간이 잘못할 때마다 일일이 벌을 주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잘못과 죄를 참아주고 계시다가 벌을 주지 않으면 안 될 때에만 벌을 줍니다. 따라서 인간은 왜 이유 없는 재앙을 내리느냐고 하나님 앞에 따지기 전에 왜 이유 없는 은혜를 주느냐고 따져야 더 마땅합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 지은 죄와 허물이 더 많습니까? 선하고 의로운 행동을 한 적이 더 많습니까?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아무 선행을 하지 않아도 예수만 믿었다고 천국 갈 수 있느냐고 반발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근본적 의미는 내 죄가 내 선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또 그 죄를 스스로 도저히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한 일로 따지면 벌을 더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주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이로운 은혜(amazing grace)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결과로 얻는 영생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그분과 동행하기에 죽어서도 당연히 그분의 품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죽은 후에 따로 더 큰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죽은 후에 지옥 형벌을 추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관계가 죽어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요3:16-18)
하나님은 법대로 하자면 인간이 지은 죄 그대로 일일이 벌을 주어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당신 아들의 죽음으로 그 모든 죄 값을 담당케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이유 없는 재앙이란 거의 없고 오히려 이유 없는 축복을 더 많이 주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는 계속해서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되므로 자연히 영생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그 사랑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끝까지 그 사랑 밖에 있게 됩니다. 성경는 지금 바로 그것이 심판이지 별도의 심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친구 분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한 번 이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 당장 수긍하여 믿으라고 하지는 않겠어. 그런데 네가 믿어지든 안 믿어지든 또 현재 네 형편이 어찌하든지 간에 만약에 하나님이 진짜 너를 사랑하는데도 네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니? 당연히 그 사랑 밖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평생을 지내게 되지 않겠니?”
물론 위에 든 설명이나 또 이런 권면도 사실 친구 분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열심히 바치기만 하면 형통하게 된다고 가르치는 일반적인 종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도록 십자가 복음만 전해야 합니다. 재앙을 없애서 인간을 편하게만 만들어주는 것이 참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이 만연해도 그 죄를 벌하기보다 사랑으로 용서해주는 예수님을 말입니다. 불신자들이 반발할 때마다 기독교만이 답할 수 있는 인간 존재와 죄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질문들을 오히려 그들에게 자꾸 던져야 합니다.
고난의 진짜 원인
어떤 미국 목사가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열렬히 사랑했던 여자 친구가 도무지 그 원인과 치료방법을 알지 못하는 병에 걸려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 후에 이유 없는 고통을 주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다고 교회 출석도 그만 두었습니다. 차츰 방탕의 길에 빠져 마약에도 손을 대다가 결국은 죄를 짓고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사정을 아는 친구나 교회 동료들로부터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다시 힘을 내십시오.”라는 위로의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속에서 “도대체 당신이 나의 고통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래! 또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하나님이라면 나에게는 필요 없어!”라는 울분이 치솟았고 위로하는 자들이 오히려 미워죽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와 똑 같이 사랑하는 연인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게 되어 방탕하게 살다가 감옥까지 흘러 들어온 동료 죄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정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정말 상대가 너무나 불쌍하고 측은해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게 된 이유가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을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또 그런 참 위로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세상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통을 하나님만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분은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죄와 허물과 고통을 다 감당하시려고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죽으셨음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그동안 그토록 미워하던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의 참 사랑을 알게 된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불의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신 이유까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신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던 그 참 사랑을 주위에 자기와 똑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불쌍한 이웃을 찾아가 나눠주라는 뜻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3-7)
이런 고통의 참 이유를 알지 못했던 이전에는 자신이 교회를 그렇게 오래 출석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감옥 안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 출소한 이후에 바로 신학교에 입학했고 또 목사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방관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며 계속해서 방황하는 이전의 자기 같은 자들이 너무나 불쌍해졌던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은 없다.
예의 미국 목사님의 연인도 심판을 받아 일찍 요절할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죽였다든지 그 죽음을 막아주지 못했다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현대 의학조차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합리적이라고 해서 비성경적 해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특별한 바이러스도 오랜 기간 동안 인간들이 욕심에 사로 잡혀 지은 죄의 결과로, 즉 환경과 체질이 부패한 부산물로 나타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쪽에 있는 것입니다.
새삼 강조하건대 불신자들이 주장하고 인간이 수긍할 수 있도록 죄 없는 자 상 주고 죄 있는 자 벌 줄 것 같으면 모든 인간은 몽땅, 그것도 서너 살 이전에 다 죽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죄가 만연해도 그대로 두시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입니다. 그리고 그 죄악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켜 주실 때까지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며 그 재난으로 일찍 죽는 사람도 여전히 많을 것입니다.
세상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변함이 없을 것임에도 결국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멸망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의 결과인 재난부터 막아주는 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대신에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더 이상 그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여서 한걸음씩 거룩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고의나 임의로 죽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결과인지라 인간에게 억울한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사57:1,2)고 선언합니다.
누구나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며 그 전에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불의의 재난으로 죽는 자는 오히려 평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전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자만이 이 땅에서부터 하늘에서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6,27)
불신자만 손해다.
이유 없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아무리 반발을 해도, 그럴 리는 결코 없지만 설령 그 주장대로 맞다고 해도, 하나님의 세상을 주관하는 방식에는 지금과 다른 변화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시쳇말로 불신자가 불신의 이유나 핑계로 무엇을 갖다 대든 하나님으로선 꿇리거나 손해 볼 것 하나 없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만약 불신자가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이 심술궂다면 그 앞에 엎드리지 않는 자는 더 크게 혼을 낼 것 아닙니까? 그 반면에 위에서 언급한대로 정말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인간이 그 사랑 밖에 있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절대적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엄연히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먼저 따져야 할 것은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결코 아닙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섭리가 분명한 실재(實在)임부터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도 반드시 스스로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살아 계신 것이 확실하다면 우선 그분과의 관계부터 정립해야 합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증거를 확보했다면 구태여 재앙이 그분 탓이니, 이해할 수 없어 믿지 못하겠다는 말은 아예 할 필요도 의미도 없습니다.
사람이 진짜로 억울해 하고 심지어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은 이 문제를 완전히 결말짓지 않고 그냥 자기 뜻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맞춰가며 사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해가 안 되는 재난이 있고 인간의 고통을 하나님마저 외면하는지 끝까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그렇다면 그런 인생이야말로 살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대면만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는 근본적 계기이자 출발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해도 기독교도 다른 종교처럼 인간의 사상과 수련으로 도를 깨우치며 선하게 살려는 노력밖에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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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지금도 분명히 살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진정으로 겸비한 마음으로 당신을 알고자 만나길 원하는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만나주십니다. 또 당신의 사랑을 어떤 형태로든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자에게는 어려운 개인적 문제를 붙들고 함께 기도하여 응답받는 체험을 하는 것이 그 마음을 여는 데에 가장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도를 하지 않을 테니까 신자가 대신해주다가 차츰 함께 하고 나중에는 원하면 혼자 직접 해보라고 권해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이 되면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인간의 개인적인 고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해주시려는 분이라는 것이 사실로 판명될 뿐 아니라 그분에 대한 신뢰를 쌓게 만들어 줍니다. 또 기도 가운데는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임해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서도 깨닫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미국 목사의 경우처럼 고난을 통해 주님의 위로를 받은 신자가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는 불신자를 찾아가 위로할 때에, 즉 어려운 문제로 함께 기도해 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더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유 없어 보이는 고통이 복음의 전파를 가로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똑 같이 이유 없어 보이는 고난이 신자에게는 은혜의 통로로 불신자에게는 은혜로부터 더 멀어지는 기회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서두에 말한 결론을 다시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비를 성령의 역사가 없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불쌍한 그 영혼을 붙들고 주님의 은혜가 부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정말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도 복음에 반발했던 불신자 시절에 똑 같이, 어쩌면 바울 되기 전의 사울처럼 더 극성으로 반대했던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함과 온유함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6/29/2007
그 중에서 함께 꼭 나누어야 할 신앙 일반에 관한 질문은
질문자의 인적 사항은 빼고 따로 이 문답 사이트에 올립니다.
이 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제 글이 비교적 긴 편인지라 가능한 프린터 아웃해서 보시고
또 이왕에 인쇄한 것은 버리지 마시고 주위에 적당한 분과 나눠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