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오늘 아침 사도행전 1장 9절에서 11절 말씀을 묵상 중에 궁금한 점이 생겼어요.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3일 만에 다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셔서 부활하셨는데... 그럼 승천하실 때도 똑같은 육의 몸으로 승천하신건가요?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는데 엉뚱한 글들만 있어서 더 혼란스러워졌어요. 승천하실 때에도 똑같은 육의 몸으로 승천하셨다는 구절이 있나요? 영만이 승천하셨다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하는 이야기이죠?
[답변]
성경 해석의 기본 원리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은 성경은 완전한 진리이지만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 하나님이 당신께서 창조한 이 땅과 특별히 인간을 섭리하심에 관한 진리는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계시 해 놓았습니다. 특별히 인류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멍에에서 구원해 내는 계획과 그 섭리는 영원하고도 온전한 진리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분의 뜻을 실제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할 부분은 전부 다 언급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진실이나 사상적 원론은 기술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설명이 없거나 심지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사안도 많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대두됩니다. 성경은 반드시 다른 부분에서 같은 주제를 언급한 말씀과 연관해서 풀되 성경이 말하는 범위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질문하신 주제처럼 성경을 통 털어도 명료한 설명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선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주제의 언급이 성경에 있고 실제 삶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쉬운 예로 낙태나 난자줄기세포 같은 경우에 신자가 해도 되는 일인지 성경에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물이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형제를 욕을 해도 살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신자를 태중에서부터 선택하여 구원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낙태는 살인죄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인간이 막아버리는 엄청난 죄가 됩니다. 따라서 낙태나 난자줄기세포는 금해야 하는 것이 당연히 성경적 진리인 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 어디에도 유사한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인간이 경험할 수도 없는 사안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질문하신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천국에 관한 묘사입니다. 물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되살아난 기록이 있고 실제로 심장이 멈추어 의학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생으로 언젠가는 다시 죽으므로 영원히 사는 부활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부활과 종말의 심판과 천국에 관한 것들은 그야말로 성경의 기록된 범위 이상으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물론 다각도로 추측은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로만 받아들여야지 확정적인 진리인 양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신 몸의 상태에 관해선 성경은 몇 군데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록된 그대로만, 즉 분명히 드러난 사실만 진리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나머지 구체적인 상태는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서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 할 때에, 나아가 우리 또한 육신으로 부활할 때에 정확하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도저히 성경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로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구체적 기록이 없는 것은 인간에게 비밀로 해 두어야 할 그분만의 필요와 이유가 반드시 있습니다. 대신에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의 깨우침으로 계시해 주시며 또 그 계시가 당신의 뜻과 맞는지 성경 말씀으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자체가 진리이기도 하지만 구체적 개별 사안에 대한 진리의 기준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복음서의 중요 기록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쌔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8-10) 여자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또 그 발을 붙잡았습니다. 분명한 육신의 부활입니다. 무서워말라는 것은 완전히 죽었다고 믿은 자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지 기괴한 모습으로 부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 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15,16,29-31)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다 날이 저물어 함께 유하러 들어가 음식을 먹은 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알아보았고 또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허깨비 같은 영으로 부활하신 것은 아닙니다. 두 제자는 예수인 줄 깨닫기 전에는 동행한 자를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부활하셨고 그래서 함께 음식도 잡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로 당신을 볼 수 있게도 없게도 하는 능력을 당신의 필요에 따라 발휘한 것뿐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행9:7) 서있게 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는데 얼마든지 분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차에다,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가 아니라 다만 따르는 무리였기에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것도 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요20:19) 문을 닫아 놓고 모여 있는 제자들 사이에 예수님은 문도 열지 않고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20절)와,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22절)라고 말하듯이 분명히 육신을 입고 부활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셨던 모습 그대로 부활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 하신대 ...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어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요21:9,10,12,13) 여기서도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과 함께 구운 생선과 떡을 나눠 먹었습니다. 또 제자들이 스승을 다 알아보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영의 모습이었다면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또 틀림없이 뭔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을 것입니다. .
마지막 승천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승천 직전까지 육신으로 부활하신 모습 그대로였으며 또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올리워 갔습니다. 구름이 가리워 제자들이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구름은 성경에서 항상 하나님의 나타나실 때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이자 상징이었습니다. 육신은 부활한 채 그대로였고 당신의 능력만 사용한 것입니다.
특별히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어느 때이니까”라고 묻지 않고 “이 때이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승천할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고 성령을 주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유다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리라 기대했다는 증거입니다. 또 만약 예수님이 영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 있었다면 그런 섣부른 기대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젠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했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이 때에” 그렇게 할 꿈은 꾸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분명히 육체와 함께 부활하셔서 인간이 하는 일상적인 활동을 다 수행했습니다. 심지어 죽기 전의 모습 그대로 부활했습니다. 어떤 제자도 그 육신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대로 승천했습니다.
단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 땅의 시공간이나 물체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임의로 이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부활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은 당신의 완전한 신성을 입증하는 초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사용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도 사용한 것뿐입니다. 부활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나아가 이 땅의 모든 물체와 인간을 만드시고 시공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앞에 이 땅의 어떤 것들도 전혀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 신자에게 동일한 부활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롬6:5, 23, 7:11)그 성도의 부활 모습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예표로 볼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주 안에 먼저 죽은 성도나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신자나 모두 육신까지 완전히 부활하게 됩니다.
당연히 성도의 부활 육체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과 비슷하겠지만 완전히 똑 같다고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지만 성도는 아무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해도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부활 육신에 대해서도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 이상으로는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의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39-44)
따라서 신자가 부활에 대하여 정작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부활된 육신의 형체가 아니라 반드시 마지막 때에 육신과 정신과 영이 합해진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날이 갈수록 영생의 소망을 더 견고하게 붙들어야지 구체적 형태에 대해 호기심을 갖거나 명확한 결론이 없는 토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1-5) 아멘!
7/11/2007
인생에서, 나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믿음과 소망이 요구되는 부분이
명확한 설명이 가능한 부분보다 훨씬 많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