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혹시 사단의 음성을 들은 것 아닌가요?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법)
[질문]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 어떻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구별할 수 있었을 까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건 근동지역 이방신들이었는데, 하나님의 품성과 맞지도 않는데, 과연 이 음성이 사단의 소리가 아닌지,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인지 알고 (알아도 실행하는 건 정말 믿음이지만) 실행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법은 정말 많은 신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더러 백세에 낳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질문자께서 의아해 하는 대로 하나님의 품성에 도저히 맞지 않는 잔인하고 악한 명령처럼 여겨집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고 그러니 더더욱 하나님 음성을 바로 분별하는 것이 중차대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먼저 이해 하셔야 합니다. 당시 그가 처해 있는 상황과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낸 하나님의 뜻을 따져 보지 않고선 그 의문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1) 아브라함이 처한 특별한 입장, 2)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의 뜻, 3)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 음성을 구별하는 법의 순서로 답변 드리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처한 특별한 입장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믿음의 초대 조상으로 세웠습니다. 그 이전에는 올바른 믿음을 가진 자가 세상에 한 명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자신도 사실 불림을 받기 전까지는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던 아비”(수24:2) 데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 부모의 명이 절대적이었던 관습에 비추어 보면 아마 직간접으로 우상 숭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의 모든 인류의 상황은 로마서 서두에서 말하는바 그대로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그래서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고.”(롬2:5)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또 자연의 엄청난 위력들에 놀라 보이지 않는 큰 힘, 절대자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분에게 올바른 경배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죄 된 본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본성에 더욱 사로잡혀 자기들 입맛대로 신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십계명이 우상을 금하면서 “너희를 위하여”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해서 불행을 막거나, 신에게 바쳐서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하거나, 신을 자기 요구대로 다 해주는 종으로 삼기 위해, 심지어 마음의 안정 혹은 부도덕한 세상 쾌락을 즐기기 위한 도우미로 부려먹기 위해 각기 그 목적과 용도에 맞는 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만물을 운행 섭리하시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하신 창조주는 실종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온갖 우상들이 하나님을 대신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19,20)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는 당신의 형상을 닮은 높은 차원의 지정의와 다른 피조물이 갖지 못한 도덕적 본성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지정의를 제대로만 사용하면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또 양심의 찔림으로 인해 그분 앞에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의 원죄로 인해 그 영혼이 타락된 인간들은 하나님을 외면, 부인, 거부, 반발 심지어 저주까지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양심과 자연만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을 수 없는 지경에 빠졌고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그 후손으로 당신을 따르는 한 민족을 이루게 하며 그들 가운데 구세주를 보낼 계획을 세운, 사실은 태초부터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단순히 양심과 자연(신학적 용어로 일반계시)만이 아닌 더 직접적이고도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계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우상 종교와 그 제사장과 경전들은 흔해 빠졌지만 그에게는 성경, 목사, 동료 성도 등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따를 방도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신께서 그의 개인 교수가 되어주어야만 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뜻을 오해 없이 정확하게 알아듣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전의 노아처럼 그에게 직접 현현(顯現- 실체로 나타나 밝혀 주는 것)해 주었습니다. 그 통로는 여호와의 사자, 천사, 음성, 타는 횃불, 사건, 사람 등 여럿이었지만 당신의 음성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게 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던 이전에는 치성을 바치기만 했지 그 신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라고는 없었던 그인지라 분명하고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라고 처음부터 온전히 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갈 바 모르지만 오직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는 하나님의 음성은 너무나 강렬한 권능으로 넘쳤고 아마 모르긴 해도 여러 번 들렸을 것입니다. 그 후 그 음성이 약해지거나 잠시 침묵하면 그도 자기 뜻대로 행동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내를 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속이고, 여종에게서 아이를 낳는 등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적 실패 후에도 하나님이 간섭하여 그의 믿음을 다시 바로 세워주었기에 갈수록 그는 오직 그분께 순종하는 것만이 선을 이루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마지막 순종의 시험으로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한 것입니다.
요컨대 아브라함에게 들렸던 음성(그 음성이 귀에 들렸는지 성령의 깨우침으로 심령에 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은 도저히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하나님 당신의 뜻이었습니다. 모두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일어난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상상 중에 나타난 환상이거나 묵상 중에 스스로 깨우친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두고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면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믿음의 1대 선조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경우, 그것도 이삭을 바친 사건으로 오늘날의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아는 표본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2.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의 뜻
우상이란 깎아 만든 것으로 실존하지 않기에 인간과 교통 자체를 아예 못합니다. 반면에 엄연히 살아 활동하는 영적 존재 사단은 인간에게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음성은 사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를 온전한 믿음의 선조로 세우려는 하나님이 사단의 방해를 허락할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을 더 성숙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묵인했을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 대상에서 단연코 빼야 합니다. 이 단계에 이른 그의 믿음은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사단의 것과 분별할 줄 아는 수준은 충분히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단 중에 누구의 음성인지 여부보다는 하나님이 왜 사단 같은 명령을 했는지 그 이유와 의미를 따져야 합니다. 그 근본적인 답은 지금껏 배운 대로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마저 포기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묻는 시험이었습니다. 돈, 권력, 명예, 외모, 건강, 자식,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 품안에 거하는 것만이 인생의 참 능력이자 목적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부흥해 아브라함은 그런 명령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은 분명히 있으리라 믿고 순순히 바쳤습니다. 지금껏 그가 거쳐 왔던 신앙 연단과 마찬가지로 이 일을 통해서도 그분은 더 좋은 결과를 맺어 주리라 확신했습니다. 심지어 이삭을 죽이더라도 부활을 시키거나 또 다른 아들을 주시던지 아니면 번제할 제물을 하나님이 미리 마련하시리라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믿음은 성숙해져 있었습니다.(창22:5,8절 참조) 한 마디로 그에게는 아무리 자기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생겨도 하나님은 절대로 옳고 선하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은 그렇다 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사단이 시킨 것 같은 방식과는 달리 시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계속 남습니다. 이에 대한 답의 힌트는 사실 그 질문 속에 있습니다. 성경으로 하나님과 사단에 대해 이미 많이 배운 우리조차 의아해 한다면 그런 지식이 없는 아브라함 또한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명령이라 그가 순종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떤 명령이라도 순종할 태세는 되어 있는데 꼭 이래야 하는지라는 의아심은 떨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아브라함이 그러리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따져 오히려 그더러 의아해 하라고 바로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뜻이 됩니다. 그의 여호와 신앙의 출발은 갈대아 우르였고 최종 완성은 지금 모리아 산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하는 곳을 떠나게 해서 참 믿음을 심어주었는데 그 완성마저 우상숭배와 비슷한 모습으로 마치도록 했습니다. 쉽게 말해 그더러 사단을 당신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밀하고도 철저하게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가 떠나온 우르 지방은 그 이름이 불(火)을 뜻할 정도로 우상에게 인간을 불 태워 제물로 바치는 일이 흔했던 곳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최고의 정성과 열심을 신께 바친 것입니다. 인간을 산 제물로 바친 이상 더 바칠 것은 사실상 없습니다. 또 최고로 바쳤다는 것은 최고의 것으로 돌려받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믿은 우상 신들은 반드시 인간이 바친 것에 비례해서 돌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배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에게 복을 받는 기준은 인간의 공적이었습니다.
또 우상을 숭배하는 원시 종교에도 나름대로 계명과 그를 위반하는 죄는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룩하게 고치려는 도덕적 차원과는 달랐습니다. 그 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인간적 의도였을 뿐입니다. 어쨌든 그 공동체 나름대로 죄는 있었고 또 그 죄를 신에게 용서 받는 방식으로도 산 인간의 제물이 최고였습니다. 최악의 죄를 최고의 제물로 씻으려는 시도였는데 신에게 죄 사함 받는 측면에서도 인간의 공적이 기준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까지 모든 인간이, 심지어 예수를 모르는 오늘날과 앞으로의 인간들마저, 갖고 있는 신(神)에 대한 개념입니다. 바치는 만큼 돌려주는 신입니다. 사실은 신에게 바치는 데에는 정작 관심이 없고 더 많이 받으려는 욕심이 앞선 죄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주체가 되어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신도 협력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 일에 방해가 되면 신도 가차 없이 그 지위에서 강등 내지 박탈됩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든 사단의 동일한 장난에 여전히 놀아나는 것입니다. 인간더러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네가 이 땅의 주체가 되라, 아니 그분의 자리까지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산 나무의 실과는 모두 따먹어도 되는데 선악과만 금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에게 모든 자유를 허용하되 하나님 당신의 권위에만은 도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오는 데는 어떤 정성과 열심도 필요 없었습니다. 바친 만큼 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 땅의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거룩하게 다스리도록 인간에게 몽땅 위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간이 어떤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과는 전혀 연관 짓지 않고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 대 인격의 순수한 교제만 이어가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고 인간은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바쳐야 할 정성과 공적이, 또 그에 비례해 돌려받아야 할 상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친 아버지와 친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들마저 바친 후에 실제로 받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지 않습니까? 선악과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일대 조상으로 세울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실히 다짐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브라함더러 세상에서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바치게 했습니다. 그의 심령 깊숙이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우상 숭배 때의 잘못된 잔재를 완전히 씻어 없애려는 뜻이었습니다. 왜 꼭 이전에 사단에게 바치던 방식이어야 하는지 의아심을 들게 만들고 그것마저 깨끗이 씻어주려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더러 네가 그동안 믿었고 앞으로 이삭과 야곱 등 네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줄 신앙은 절대로 강 저편에 있었을 때의 것과는 완전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친 만큼 돌려받을 수 있는 신도 아니며, 인간의 공적을 보고 죄를 씻어주는 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을 당신께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명령을 내렸던 이는 성부 하나님이며, 준비된 어린 양은 성자 예수님의 표상이며, 또 그로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는 고백을 하게한 이는 성령 하나님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세우신 계획을 모리아 산에서 합동으로 실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은 바로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이 스스로 마련하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제물이었습니다. 모리아 산 이삭의 제물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의미는 상당부분 빛이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험이 있었으므로 십자가는 더욱 빛이 나고 그 의미가 신구약을 꿰뚫으며 완성 되었습니다.
인간의 공적을 바쳐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구약 성경의 의미를 곡해하고 있는 유대 율법사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마려하신 속죄 제물 어린 양을 보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구속의 은혜에 참여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 믿음의 조상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의 조상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할 시험이었습니다. 비록 언뜻 보면 사단의 명령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3.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법
3. 1. 신앙에 매뉴얼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법이란 질문은 엄밀히 따지면 “그분의 음성을 듣는 법”과 “이미 들은 음성을 구별하는 법”의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또 각각의 주제는 사실상 책으로 그것도 여러 권을 써서 다루어야 할 정도로 방대한 분야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바치라는 음성이 하나님의 명령인지 사단의 시험인지 궁금해 하셨으므로 질문의 초점이 후자에 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실제적으로는 그 둘은 거의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신자에게 알려주는 경로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영적인 영역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당신의 뜻을 계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분은 반드시 어떤 행태로든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며, 예배드리고, 성도와 교제하며, 전도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등의 신앙 활동뿐 아니라 세속의 일에 종사하면서 만나는 사건과 사람을 통해서도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신자를 향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음성을 들었다면 실질적으로 그분의 음성을 구별한 셈입니다.
문제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아브라함 당시와는 달리 오늘날의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직접적 현현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없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어떤 방식이 되었든 특정한 생각과 말씀을 이미 받았어도 과연 그것이 자기를 비롯한 인간의 뜻인지, 사단의 유혹인지,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아가 사단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인간의 뜻도 탐욕과 죄악의 모습을 띄기보다는 오히려 선하고 의로워 보일 때가 대부분이므로 더더욱 구분하기 힘듭니다.
신자로선 하나님이 이런 당혹한 사정을 잘 아실 텐데도 직접 계시를 해주지 않으시니 때로는 야속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그분은 절대로 특정 매뉴얼이나 프로그램에 매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믿음 생활에서 발생하는 어떤 문제라도 모든 신자에게 딱 부러지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간단명료한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신자의 인격과 인격이 만들어내는 친밀한 관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이 신자를 사랑하는데 특정한 방법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매뉴얼 보고 하는 법은 없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 형식이 아니라 오직 그 내용을 가지고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신약시대의 신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인간 세상에 대한 당신의 궁극적 계획을 이미 다 밝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구약 성경 66권도 마련해 주셨고 또 실제 삶에서 당면하는 문제들을 성경에 드러난 당신의 뜻과 연결해서 해석해주시는 성령님도 내주케 해주셨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와 들은 음성을 구분하는 기준 둘 다 기본적으로 성경과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 성도도 지금껏 설명 드린 내용을 알고는 있지만 실제 적용하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현재 일어난 사건이나 들은 음성을 성경의 어느 구절과 연결시켜야 하는지, 또 기도하거나 말씀 보며 묵상하는 중에 미세하게 들리는 음성이 과연 성령님으로부터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힘듭니다.
신앙에 매뉴얼이 없다고 말한 대로 이에 대한 확실하고도 쉬운 해결책도 사실상 없습니다. 각자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되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 체계를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려고 부단히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많은 오류와 실패와 환난을 심지어 시험과 죄악에도 빠져봐야 그나마 그분의 음성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드리는 답변은 모든 신자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아주 기초적인 원리 몇 가지입니다. 또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은 아니며 나아가 이미 들은 음성을 구분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그 분별에 적용되는 기준일 뿐입니다.
3. 2. 하나님 음성을 분별하는 기준
우선 무엇보다도 마음에 염려 불안이 없어지고 평강이 드는지 여부입니다. 평강이란 확신이 전제되지 않고는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음성이 확실하다면 당연히 온전히 믿을 수 있고 하나님도 반드시 평강을 함께 심어줍니다. 불안, 염려, 초조가 수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온전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땅에는 평화가 임할 것이라고 했고 마지막 승천 직전에도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리라고 기원하셨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그분과의 실질적인 대면이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그분의 계획과 뜻이 신자에게 확신으로 남게 되고 불안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확신이 생기지 않고 염려 불안 초조가 따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섣불리 단념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데다 사단의 방해마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다가오는 어떤 위험이나 사단과 죄악의 유혹에 빠진 것을 경고해주려고 성령이 탄식하는 형태로 신자에게 불안감을 심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확신과 평강이 들 때까지 당신의 음성인지 아닌지 그분께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경고로 생긴 불안감도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경고인지 확신이 들 때까지, 나아가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지혜나 직접 구원해주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당신께서 이미 음성을 들려주었고 또 재차 그 진위 여부까지 간절히 묻는데 하나님 뜻이 확실하다면 어떤 형태로든 응답을 주시고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평강을 주십니다.
만약 아무리 기도해도 그런 확신과 평강이 서지 않는다면 기드온처럼 가시적인 징조까지 요구해도 됩니다. 그러나 아주 위급한 경우에 한해 정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그것도 목숨까지 걸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단지 그 음성이 하나님의 것인지 모를 때에만 하라는 뜻입니다. 또 자신이 어떤 상황을 가정해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 뜻인 줄 알겠다고 요구해선 안 됩니다.
기드온이 징조를 요구한 것은 닮아도 되지만 그 징조의 방식까지 닮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드린 대로 구약시대와는 달리 신자에게 성경과 성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 신자가 요구할 수 있는 징조란 일의 진행과 만나는 사람과 처해진 환경 가운데 이미 들은 음성과 연관된 분명한 표식을 볼 수 있거나 그 의미를 쉽게 깨달을 수 있게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와 말과 행동을 하는 훈련의 일종입니다.
결국 거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신자가 계속해서 기도한 문제에 관해 응답을 해주는 형태로만 당신의 음성을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전혀 기도도 하지 않은 문제에 관해 그분이 불쑥 나타나 음성을 들려주는 법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구태여 예를 들자면 바울이 다메섹에서 전혀 예상치 않은 가운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도 따지고 보면 그가 유대교 율법주의와 십자가 복음주의 가운데 어느 쪽이 바른 하나님의 구원의 길인지 따져보자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기에, 즉 평소에 묵상하고 기도했기에 듣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가장 기초적이자 두 번째 기준은 내가 기도한 내용과 연관되는 문제인지. 최소한 마음으로 소원하고 계획한 것과 연결되는지 여부를 따져야 합니다. 불쑥 엉뚱한 생각이 우연히 드는 것은 거의 모두 자신의 잡생각 내지 사단의 방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주위 할 것은 신령한 모습을 띄면 띌수록 하나님보다 사단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계속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을 구하는 죄 된 본성이 있으며 그 본성을 스스로 만족시키려 우상을 만듭니다. 사단은 그 틈을 이용하여 인간을 종으로 부려 먹으려고 오히려 더 가시적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신자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당신을 진정으로 찾기를 원하기에 오히려 더 그런 방식으로는 계시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지금껏 기도한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더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들린 음성이 선한지 악한지도 반드시 따져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악한 것을 들려주실 리는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선한 것이라고 해서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 일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 뜻이라고 보아선 안 됩니다. 사단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사단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고는 그 더럽고 추한 실체를 절대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선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게 나타나며 그것도 성경 말씀을 들고 교회 일을 빙자해 나타납니다. 교회에 분쟁이 나서 피 터지도록 심지어 세상 법정에까지 들고나가 싸우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기독교의 옷을 입고, 심지어 기도, 말씀, 예배, 전도, 교제, 구제가 더 확장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도 사단이나 인간의 뜻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구별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의 영광이 더 전면에 나타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확장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구별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아무리 교회가 크게 성장해도 예수님 십자가를 증거 하는 모습보다 담임목사와 성도들의 업적을 자랑하는 소리가 크면 사단입니다.
예컨대 교회에서 헌금으로 예배당 건물부터 지어 성도가 늘어날 것을 대비해야 한다, 아니면 그 돈을 구제와 선교에 먼저 사용해야 한다고 싸우는 경우 서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음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뜻인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양쪽 다 그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 법정까지 가서 싸우는 것은 절대 하나님 음성이 아닙니다. 목사와 교인, 즉 인간들이 잘못한 일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 교회까지 몽땅 싸잡아 욕을 먹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는 일단은 서로 화해할 때까지 양쪽 다 자기 측 주장을 철회, 연기, 보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갈 데까지 가서 한쪽을 억지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헤어지더라도 구제나 예배당 건축 등 종교적 일부터 성취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한 목적과 모습을 갖는 일이라도 반드시 인간의 죄와 사단의 추하고 악한 실체가 드러나고 그 죄악을 십자가 복음으로 이겨내는 결과가 나지 않는 한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음성은, (직접 현현하셨기에 확실한 그분의 뜻이라고 믿을 수 있는 음성에 따르면), 오직 죄악만 통렬하게 지적하여 철저한 회개로 이끌려는 목적과 또 그런 내용의 메시지뿐이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단순히 죄만 드러나서도 부족하고 반드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함께 임해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당사자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로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컨대 인간적 도덕과 종교적 의무만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3. 3. 일이 끝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선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예수를 증거 하는 가운데도 인간, 사단, 하나님의 음성이 혼재될 수 있기에 반드시 그 과정은 물론 결과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즉 목적도 하나님이 주신 것,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도 그분의 것이어야 하며, 당연히 그 열매도 하나님이 맺어주는 그분의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은 오히려 일을 시작하기 전이나 과정 중에 보다는 끝난 후에 그 열매를 보아야 알 수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뜻입니다. 또 그 열매를 두고 구별할 수 있는 기준도 당연히 성경 말씀입니다. 아무리 선한 목적이 선한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성경에 기록된 진리와 어긋나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에 꼭 제일 먼저 적용해야 할 기준이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성령이 역사하여 나타나는 결과를 설명한 말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성도라면 그 품성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서 화합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육체의 일,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경우는 어떠합니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5:19-21) 단순히 개인이 도덕적 죄를 짓는 수준을 넘어서 이웃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대조되는 설명에 주목해야할 표현이 각각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뜻을 당신의 권능으로 인도해주기 때문에 신자는 그를 거역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고, 더 정확하게는 신자의 속에서부터 충만한 기쁨이 솟아 열정적으로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신자에게 은혜가 넘치며 당신의 목적이 성취되는 모습으로 당신께서 이끌어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단순히 신체(body)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의 욕심과 뜻으로 하는 것을 의미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열매’가 맺히지만 육체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신자가 그분에게 붙어만 있으면 자연히 열매가 맺힙니다.(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 요15장 참조) 반면에 육체의 경우는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하는 일이 됩니다.
또 그 육체의 일은 현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히려 은밀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하는 일은 누가 봐도 확연히 알 수 있는 결과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영혼부터 변화시키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물질세계에서의 영달만 꾀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단이 더 가시적으로 풍요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기본적 양심과 이성만 동원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어떤 일이 악한지 선한지 금방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계획과 욕심에서 하는 일인지 여부는 정작 본인이 잘 알 수 있는데도 도리어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도 크게 예외는 아닙니다. 본심은 자신의 안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존심과 명예를 높이고 하나님보다 인간적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임에도 얼마든지 교회와 이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치장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조금만 자신의 속을 정말 솔직히 쳐다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역으로 말하면 현저히 드러난 그런 육체의 일들을 전부 제해 버리면 나머지는 성령의 열매이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도 됩니다.
결론적으로 신자가 정말 간절히 하나님의 음성인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면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아니면 금지할 수 없는 충만함 둘 중의 하나로 반드시 응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령에 불안 초조 염려가 사라지지 않거나 뭔지 원인은 알 수 없는데 계속 눌림과 허망함과 우울함이 따르면 이는 이미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반면에 넘치는 기쁨이나 심령에 충만함이 있다면 두말 할 것도 없지만 맨 처음 말한 기준인 확신과 평강만 따라주어도 바로 하나님 뜻인 것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을 비교한 뒤에 이런 말씀을 덧붙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5:24,26)
신자가 항상 성령의 인도를 구하면 따로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궁굼해 할 것 없이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전에 신자가 할 일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 단순히 물질적 소유의 질과 양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 즉 자신을 위해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을 완전히 못 박아야 합니다. 물질은 단지 자신을 치장하여 세상과 사람 앞에 자기의 헛된 영광을 드러내려는 방식에 불과함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3. 4.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려 들지 말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절대 쉽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구약시대처럼 단 번에 직접적으로 들려주시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초자연적인 모습을 띄면 사단의 것인지 먼저 따져 보아야 합니다. 대신에 신자는 날마다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씨름해야 합니다. 자신을 죽이며 성령의 인도만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항상 기도한 문제에 관해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모든 관심을 집중해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명을 특별히 선정된 자에게 주시지 않는 한 가만히 있는 신자에게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습니다. 대개는 신자가 기도한 문제에 관해 음성을 들려주실 뿐입니다.
아침에 잠깐 기도하고 말씀 본 것으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대로 하루 종일 그분 중심으로 묵상, 분석, 적용해야 합니다. 기도와 삶을 분리하면 안 됩니다. 기도한 내용과 받은 말씀을 서로 비교해 가면서 이미 일어난 사건, 만나는 사람, 일이 되어져 가는 과정, 자신이 처한 환경의 변화에 연관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특별히 매일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보다 새롭게 생기는 일에 초점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음성이 성경의 진리와 부합하는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헛된 뜻은 없는지, 과연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지, 오직 그리스도가 더 크게 선전되는지,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과 확신이 생기는지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사항은 나보다 이웃이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일인지와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처럼 내 것이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우선적으로 드러날 것인지 여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부터 모든 것을 포기해도 하나님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준비와 헌신 아니 실천이 심지어 그것이 몸에 밴 생활습관으로 따라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오히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라고 직접적인 음성은 더 안 들려주시는 법입니다. 한 걸음씩 손을 잡고 인도할 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선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성취 될 것이니까 구태여 염려 안 해도 되고 아예 실패하고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뒤집으면 자신의 위험부담부터 줄이려는 의도입니다. 반드시 이뤄질 일만 골라서 함으로써 골치 아프게 신경 안 써도 되고 미리부터 어려운 장애는 피해가겠다는 영악한 심보입니다.
실패할 확률과 예상되는 장애를 최대한 줄여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고 한 일을 잘 해야겠다는 선한 의도라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일을 결국은 성취시켜 주되 그 중간에 함께 할 온갖 어려움을 미리 보여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억울하게 체포당할 것이라고 성령이 미리 가르쳐 주었지만 “주 예수께 받은 소명과 하나님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하며 기어이 올라가 옥고를 치룬 바울처럼 할 자신이 있습니까?
미리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신자는 아주 드뭅니다. 대개의 경우 그분의 뜻과 길은 어지간히 믿음이 좋은 신자의 그것과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을 분별하겠다는 선한 의도가 오히려 그분의 일에서 도망가는 핑계로 작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진토 같은 체질까지 아시기에 확실하고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령이 신자의 영혼에 금할 수 없는 충만과 기쁨으로 채우시고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열매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또 만약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면 자연히 기도와 말씀에 등한해질 것 아닙니까? 나아가 어떡하든 하나님 뜻만 쉽게 빨리 알아채려고만 듭니다. 처음에 의도한 것은 그렇지 않았는데 차츰 무의식중에 신비주의, 은사주의에 빠지며 그렇지 못하는 신자를 열등하게 보게 됩니다. 나아가 그러지 못하는 신자는 하나님 대신에 주위에 그런 은사를 가진 자에게 의존하려 듭니다. 말하자면 크리스천 샤머니즘이 태동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고 역사하는 내용은 그 일어나는 일과 처한 여건을 풍성하고 안락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존재 자체를 바꾸는 것이 목표입니다. 일과 여건은 그러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신자가 자꾸 어떤 일에서건 하나님의 뜻을 미리 분별하겠다고 덤비면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는 내 주위에 일어나는 일의 진행에 관심이 더 많다는 반증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든 내가 그분의 온전한 자녀로 서있기만 하면 됩니다. 주위에 그분의 빛만 전하겠다는 소원과 헌신과 실천만 있으면 신자가 어디로 행하든, 그 방향이 종이 되었든 횡이 되었든 그 땅을 모두 차지하게 해주십니다.
그럼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인간적 욕심이나 사단의 계략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됩니까? 그것마저 괜한 기우이자 인간적 욕심입니다. 우선 바울처럼 자신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복음이 확장되는 일에 쓰임 받겠다고 진정으로 헌신한 자를 하나님이 바르게 인도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매일 기도하며 말씀보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 소원하는 자에게 말입니다.
물론 그도 연약한 육신을 지닌 인간인지라 때로는 인간적 욕심이 은연중에 개입되고 사단의 방해도 있었겠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것마저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싸우고 헤어졌지만(행15:39) 하나님은 오히려 선교지를 두 곳으로 나누어 복음이 더 넓게 퍼지게 했듯이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염려는 자기 스스로 인간적 욕심이나 사단의 계략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부터 인정한 것입니다. 순간순간 자기 욕심을 죽이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며 사단과 영적 전투를 하고 있으면 구태여 하나님 음성을 분별하지 않아도 범사를 그분이 인도하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 잘못되어도 하나님이 합력해 선으로 이끄시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신자가 자꾸 하나님의 음성을 빠르고 쉽게 분별하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초자연적 간섭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어야 합니다. 그런 역사를 부인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내고자 자신의 전부를 바치고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고 기적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진정으로 자신부터 성결하게 바꾸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려 하면 자기가 세운 계획을 통해서도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 오직 자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만 목표로 사는 것이 우선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음성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5/3/2008
제가 설렁설렁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으로 다른 글도 다 그러하듯이 글이 좀 깁니다. 가능하면 프린터 아웃해서 읽어주시기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