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지옥 갑니까?
[질문]
전 세계에 기회가 없어서 한 번도 기독교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다 지옥에 가야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비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오해하고 있는 주제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흔히들 평생을 두고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지옥으로 떨어트리면 너무나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냐고 반발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죄나 잘못이 전혀 없는 데도 일방적으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 외부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신자마저 이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 되어 있지 않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외부의 문의, 반발, 비방에 대해 제대로 변증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복음을 신자나 불신자나 공히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과 반발은 성경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잘못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구약 시대에,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 기독교는 태동도 하지 않았을 때에 구원 받은 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구약 시대의 믿음의 위인들이 그들로서, 오늘날의 불신자들이 따지는 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알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인 유대인들만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니 유대인들 가운데도 구원 받지 못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도합 850명과 서로 신에게 빌어 3년간 계속된 가뭄을 없애는 시합을 벌려 이겼습니다. 그 후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들자 두려움에 휩싸여 호렙 산으로 피신했을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런 말씀으로 위로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하19:18)
그렇다면 엘리야와 그 칠천 인 외에는 아무도 구원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7천은 실제 숫자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을 충분히 남겨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당시에 우상 숭배자가 다수였고 여호와를 믿는 자는 소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없던 시절에도 당신을 온전히 따르는 자는 구원해 주었고 우상에게 절하는 자는 심판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에는 아브라함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이긴 하지만 아직 율법을 수여 받기는커녕 유대 민족이 형성되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우상숭배를 했던 자로서 도덕적으로도 아주 하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 하나님을 만나 회개했고 또 그분의 언약에 오직 믿음으로 동참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원칙은 혈통이나 율법에 따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나아가 아브라함 이전의 에녹과 노아와 아벨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셋 다 바벨 탑 사건 이전의 사람으로 당시는 민족이 나눠지지 않았고 구음조차 하나였습니다. 인류 모두가 동일한 조상을 둔 한 혈통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은 인종, 언어, 문화, 종교마저 초월해서 모든 죄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들 셋을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온전히 믿은 자는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까닭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구원의 진리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만약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수단이라면 불신자들의 그런 반발은 당연합니다. 수단이란 규정된 사용법대로 따르기만 하면 소기의 목적하는 바를 누구나 자동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즉, 구원의 수단을 소유하기는커녕 그런 수단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에겐 그 수단을 갖지 못한 것 자체가 자기들 잘못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 반드시 그 수단을 먼저 가르치고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예수를 들어보지 못해 구원으로 가는 길 자체가 아예 폐쇄되어 있는 자를 무조건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수단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영적 원리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원리의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여 과연 타당한지 아닌 지부터 따져 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죄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이 진술이 짧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을 많이 함의(含意)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왜 그렇습니까? 또 왜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최종적으로 심판과 구원으로 나눌 절대자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입니다. 죄의 본질이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헛된 교만을 좇아 사단의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 그분을 배반했습니다. 그분은 당신께서 심히 좋게 창조하여 당신의 대리자로 삼아 이 땅을 아름다고 거룩하게 다스리게 하려든 인간을 사단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인간은 가해자이며 그분은 피해자였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야만 구원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반드시 피해자 쪽에서 자발적으로 먼저 제안되어져야 합니다. 그것도 어떤 손해보상도 요구하지 않으며 일말의 원망, 분노, 저주의 찌끼 하나 없이 기꺼운 뜻에 따라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죄에 빠져 자기와 원수 되었음에도)을 이처럼(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사랑하사” 인간과 화해를 이루려고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먼저 오셨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 값을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전부 감당하셨습니다. 당신이 입은 손해와 책임을 가해자 인간 대신에 도리어 피해자인 당신께서 다 보상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진정한 용서를 베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 쪽에선 당신과 화해를 이룰 생각이 아예 없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은 자기 죄를 깨달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만큼 영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는 참 회개를 이룰 능력이 전혀 없었기에 하나님이 직접 오신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죄를 즐기며 탐닉하여서 하나님과 완전히 원수 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9-18)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인간 스스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혹여 깨닫는다 해도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도 또한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의 죄책을 직접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적 심판자인 하나님의 입장에선 인간의 실상(實狀)만 따져 판단하면 오직 죽음의 심판뿐이지만, 그러자니 당신이 만든 피조물로 당신의 대리인으로 세울 인간을 모두 죽여 없애야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죄를 반드시 처벌해야 하는 공의를 실현하지니 사랑이 희생되며 그렇다고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주는 사랑을 베풀자니 공의가 실종됩니다. 그 둘을 완전히 만족시키며 인간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방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죄 값을 치르되 죄인은 살려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해결해야 장벽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는 이미 말한 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전무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영적으로는 완전한 시체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한 영을 새롭게 바꾸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당신과 모든 속성과 권능은 동일하되 단지 위격만 다른 또 다른 보혜사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음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16:7-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성령을 보내신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개인에게 실제로 적용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모든 인간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의에 이르기는커녕 형벌로 따지자면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지만 당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그 죄 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진정으로 그 진리를, 즉 자신은 사형수였으나 하나님이 예수님의 의로 자기에게 덧입혀 용서해 주셨다는, 깨달아 당신께 돌아오는 자는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으므로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성령이 각 개인의 영혼에 내적으로 역사하여 온전한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께로 회심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여 그분께서 끝을 맺으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성자 하나님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계획을 완성시키셨고, 성령 하나님은 완성된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여 실현되게 합니다. 인간이 할 일이라고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이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인간은 단지 그 선물을 받는 수혜자의 자격으로서 참여만 하면 됩니다.
다른 말로 기독교에서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표현했다고 해서 기독교나 믿음 자체가 애초부터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수단이란 다시 말하지만 공구나 매뉴얼처럼 그 사용법을 습득하여 실행하면 소기의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라면 인간이 사용법을 미리 습득할 수 있는 성질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십자가가 구원의 수단이 아니고 원리라고 해서 인간이 납득, 인정, 공감, 직관, 성찰, 득도 등의 방식으로 스스로 터득하는 개념이나 사상과도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오순절에 보편적으로 강림하신 것 모두가 역사적 사실입니다. 나아가 각 개인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확실한 개인적 체험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직접 이 땅에 오셨고 또 한 죄인도 성령을 통해 그분과 인격적으로 대면해야만 구원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구원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죄인의 영혼 속에 일으키신 구원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자신이 구원 받은 의미를 알고 나아가 그 결과 자신이 실제로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요컨대 기독교 구원은 여러 종교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나은 것 같아 스스로 선택하고 입교하여 그 가르침대로 따른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물론 제 발로 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성경 말씀을 배우는 과정 중에 성령이 역사하면 얼마든지 구원은 일어날 수도 있지만 교회 출석한다고 다 구원 받은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모든 인간의 상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악에 빠져 있어서 점수로 치면 완전히 빵점이다. 아니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기에 오히려 마이너스 무한대다. 당연히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죄악을 뉘우쳐 돌아올 능력조차 없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방도라고는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죄는 철두철미하게 저주하시되 그 죄인은 살리려는 그분의 긍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신다.”
예수 모른다고 핑계 댈 수 없다.
만약 예수가 구원의 수단이라면 예수가 전해지지 않은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구원 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라면 구약시대에 많은 자들이 구원받았듯이 언제 어디서도 기독교 전파 여부와 관계없이 구원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없었던 시대와 장소는 단 한 번도, 단 한 곳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구원 받을 사람은 복음이 직접 전해지는 시대와 장소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못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구원 받을 확률이 지극히 낮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장소와 시대의 인간들은 참 하나님을 모르고, 아니 외면 거부하며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거나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들이 예수를 안 믿기 때문이 아니라 죄악에 빠져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 즉 그분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아마 또 다른 의심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원리를 성령이 간섭해야만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영적 시체로 태어난다면 인간에게 근본적인 잘못이 없지 않는가라고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가 전해지지 않아 모르는 곳과 시대에도 당신의 구원의 원리를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18-20)
우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였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흔적이 양심의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근본적인 죄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기에 죄를 지으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즉 도덕과 종교를 몰라도 필연적으로 두렵고 부끄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혹여 죄를 짓더라도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죄를 즐기고 탐닉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단순히 도덕적 회개만 촉구하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를 당신과 연관해 정말로 심각하게 다룰 것을 요구합니다. 말하자면 죄책감이 느껴질 때마다 반성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런 양심을 자기에게 심어준 이가 따로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절대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요 교육으로 가꿔진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인간은 죄를 짓고 심지어 즐기되, 아무런 도덕 교육을 받지 않아도 죄를 지으면 다들, 그 정도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죄와 떨어져서 살 수 없으며 죄지을 때마다 두렵고 떨린다는 사실은 모든 인생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과제가 바로 죄책감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하나님께 들고 나가 씻음을 받은 후에 그분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미하도록 그분께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기독교의 전파 여부와 상관없이 아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또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보면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자연을 묵상하며 관찰해 보면 그 배경에 창조주 하나님이 분명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능력과 지성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 땅과 동식물과 인간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주인이 결코 인간이 아니며 또 만사가 절대 인간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간단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양심과 자연이 계속해서 참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하는데도 아예 무시하고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간혹 오지에 사는 미개인들도 신(神)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나름대로 경배를 하기에 일방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주장은 고금이래로 지금까지 있어온 기독교 이단을 포함해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심지어 사탄도 일종의 신이므로 사탄숭배종교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으면 사실상 구원을 절실히 받을 필요나 소망이 없어집니다. 결과적으로는 확실한 구원이 단 하나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런 주장에는 큰 오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하신 말씀으로 이방인들도 자기들 신에게 나름대로 간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만 구하지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자기만 형통하는 것을 목표로 인생을 살기에 그 일에 보탬이 되는 부분만 신에게 빈다는 것입니다. 매사를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달라거나, 혹시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면 제거해 주거나, 인간의 행위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신경질을 부리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주인이고 신은 인간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궁극적인 계획과 뜻과는, 따지고 보면 그분 당신과도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한 거룩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자체도 모릅니다. 그들이 아는 신은 참 하나님과 전혀 다릅니다. 말하자면 미개인이나 이방인들의 신에 대한 숭배는 참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기에 구원은 아예 실현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이방인들이나 현대의 미개인들은 윤리 도덕적으로도 하나님의 의에 도저히 이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분을 찾아 그분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배반하고 오히려 우상으로 대체한 죄인이기에 심판 받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의 인간이라도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의 의에 비춰 볼 때 자신은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음을 온전히 믿고 그분께 자기 인생 전부를 진정으로 바친 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택하여서 성령으로 그런 믿음이 생기게 된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누가 구원받았는지 여부는 오직 하나님과 본인만 알 수 있지만 말입니다.
임의로 선택해 구원 주는 하나님은 불공평한가?
그럼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구원을 주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지 또 다른 반발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불공평한 하나님이긴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각 인간을 다르게 만드셨고 또 각기 다른 인생을 살도록 주관하셨습니다. 토기장이의 비유가 뜻하듯이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왜 나를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항변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왜 나를 구약시대에 그것도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나게 해 구원 받을 확률이 낮아지게 했느냐라고 반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 기준도 없이 무조건 당신 기분대로 하는 독선적인 분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어서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롬9:22,23)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이 정말 공정하게 하자면 점수로 쳐서 모두 마이너스 무한대의 죄인인 인간을 당장에 전부 죽여야 마땅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래 참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 가운데서 일부를 당신의 영광을 알게 하여 그들로 세상 사람들 앞에 그것을 드러내게 하려는 계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몽땅 사형수이지만 그중 몇몇을 구원하여 그 변화된 모습을 통해 나머지 사형수들도 회개로 인도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택했고, 신약 시대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불신자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받았습니다.(고후5:17,18)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또 다시 그럼 모두 구원해 주면 되지 왜 일부만 구원하느냐라고 따질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를 다시 들지 않더라도 구원 의미 자체가 없어집니다. 모두 구원하면 사실상 구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죄악이 워낙 완악해서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도 나옵니다.
혹시라도 그 거부하는 자마저 하나님이 책임져야 하지 않느냐라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반발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말꼬리만 잡는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더러 구원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셈입니다. 즉 처음부터 인간 모두를 로봇이나 완전한 성자 둘 중 하나로 만들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로봇이 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인간답지 않고 기계나 동물 수준으로 전락하겠다는 뜻이며, 완전한 성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꼴입니다. 또 모두가 성자면 동일한 원리로 이미 성자로서도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가 되었어도 모두 그러니 하나의 기계에 불과합니다. 요컨대 인간이 현재 상태 이르게 된 것과 그런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통해서만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의 오류와 불공평성이 없이 완벽하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4-18)
예수가 오기 전이든 후든 인간의 공적과 자격은 전혀 구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당신께서 택하여 구원을 주십니다. 죄에 빠진 인간을 향한 그분의 긍휼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을 소원하여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내어드린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는 죄악과 사단에 미혹되어 이 구원의 진리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던 인간들에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은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단 인간이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 객관적인 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사람이 철저히 깨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주관적 체험으로 믿어야만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성령의 간섭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만한 조건이 단 하나도 없고 죄를 씻을 수단도 세상에 단 하나도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한다는 처절한 고백이 저절로 따라 나와야 합니다.
착한 자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예수를 모르는 시대나 장소의 사람들이 단순히 착하게 살았다고 구원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착하게 산다는 것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한 번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이지 인생 전체를 두고 평가할 때에 선하다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도 단지 행위로 행한 것뿐입니다. 말과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 따지면 도저히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죄를 짓습니다.
간단한 예로 거짓말을 하루에 3-5번씩은 한다고 하는데 평생을 치면 10만 번도 넘습니다. 그에 비해 정말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선한 말을 과연 얼마나 했겠습니까? 간혹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이 살았다고 큰 소리 치는 자를 만납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의 인생 전부를 한 시도 놓치지 않고 비디오로 촬영한 것을 남들과 함께 볼 자신이 그에게 있겠습니까? 아니 스스로 부끄러워서라도 혼자 숨어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후에 하나님과 함께 그분과 자기 평생의 비디오를 본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쥐구멍을 찾든지, 양손 양발 다 들고 납작 엎드려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겠습니까? 행동과 말뿐 아니라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쳐들고 감히 착하다고 큰 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교만하고 부끄럽다 못해 어리석고 두려운 짓 아닙니까?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 없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2-15)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지만 서두에 언급한 대로 그들 전부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유대인들로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나아가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그 율법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긍휼만 소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받았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도무지 그대로 지킬 수 없으니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도 없습니다.
바꿔 말해 당시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 족속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따로 차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양심이 율법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들이 송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게” 한다고 합니다. 그들도 정말 양심이 호소하는 대로 자신을 따져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 그분의 긍휼을 소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따라 착하게 살았다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기록된 말씀인 율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으므로, 양심에 따른다고 해서 구원 얻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인간 양심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며 부패되어 있기까지 하므로 양심에 따라 산다고 해서 완전한 선을 실현할 수조차 없습니다. 양심으로는 율법처럼 단지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을 받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가 전해지지 않은 장소와 시대의 사람이라도 그 불완전한 양심만으로도 율법처럼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을 소망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것도 하나님이 저희 속에 보이셨는데도 그분을 경외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으로 대체했으니 심판 받아도 도무지 핑계치 못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롬1:18-23)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는 인간이 훈련 습득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참 생명입니다. 기독교를 몰라 예수 믿지 못했다고 심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그분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그 가운데 그분의 긍휼을 입은 자만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아무나 택해 구원 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의 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를 구원합니다. 자신의 무능, 불완전함, 죄악을 철저히 깨달아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소원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그분의 보호와 인도에 따라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를 소원하는 자입니다.
6/26/2008
본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비슷한 주제로 이미 두번이나 다뤘습니다.
따라서 답변의 요지는 그 글들과 같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했습니다.
가능하시면 아래 두 글도 함께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이순신 장군은 죽어서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
# 47 구약의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 받았나요?
또 하루를 열며 사이트의 "# 562 십계명을 정녕 위반한 적이 없는가?"도 함께 참조하시면
이해하시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