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52:13-15) 너무 많아진 억울한 죽음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9)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사52:13-15)
성경을 오해한 바울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를 성자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방향으로만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능통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했을 정도였던 바울조차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라고 여기고 기독교를 말살해서 유대 사회의 도덕적 종교적 질서를 바로 세우려 시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의를 바로 세우려는 바울의 시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무산되었고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유대 사회 공의가 율법을 순전하게 준행함으로써만 세워진다는 그의 인식은 옳았으나, 당장 그부터 율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 중에 영적으로 바울보다 앞선 사람이 거의 없어서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또 바로 그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심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무 냉혹하고 불합리한 분이 아닙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역사하는지 정확히 알면 이런 의심과 원망은 쉽게 해소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인간 통치자처럼 왕궁의 보좌에 좌정해서 매일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TV로 생중계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실체를 절대로 인간에게 직접 보여주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물질계 안에 들어올 수 있으나, 들어온다 해도 더럽고 악한 것들과 단 일 초도 공존하지 못하는 거룩하신 존재인지라, 죄에 찌든 인간이 그분의 실체를 보면 그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소멸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물질계에 제한된 인간으로선 죽지 않고서는 영계로 올라가 그분을 직접 만나는 일도 전혀 불가능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 땅의 인간에게 당신을, 정확히 말해 당신에 대해 보여주어야 하되 인간이 죽지 않도록 매개체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임에도 인간이 죽지 않게끔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죄의 노예로 묶고 있는 사탄의 사슬을 깨트리려고 인류 역사상 딱 한 번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보여주는 범위 내에서만 그분에 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비상한 상황에선 천사를 보내거나 당신의 종을 세워서 당신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게 하고 또 큰 이적으로 당신을 직접 드러내었습니다. 평소에는 인류 역사를 통치하는 방식을 통해 당신의 속성, 권능, 의도 등을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쪽에서 능동적으로 당신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게 갖도록 하는 행위를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부르고 성경은 그분의 모든 계시를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랍비이면서도 그분의 계시를 잘못 해석했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오해했던 내용이 무엇이며 그렇게 된 이유까지도 밝혀줍니다.
박하사탕 같은 성경 계시
본문에서 바울의 성경해석에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 살펴보려면 먼저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에 관한 지식부터 있어야 합니다. 알기 쉽게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손바닥 안에 사탕을 움켜쥐고 있으면 어린 자녀는 아무리 힘을 써도 아빠 손을 펼칠 수 없어서 무엇을 쥐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빠가 먼저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주어야 조금씩 볼 수 있는데, 하나님도 창조 이후로 예수님 오실 때까지 당신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계시해 주었습니다.
우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성경을 몰라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그 만드신 만물에 당신의 신성과 영원한 능력을 드러나게 해놓았습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죽기 직전에 과연 절대자에게 자기가 용납받을 수 있을지 크게 염려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무신론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리 세상에서 착하게 살았던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판받아도 핑계 댈 수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롬1:18-20)
이처럼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므로 사람이 정작 영적으로 분별해야 할 사항은 그분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지여야만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스스로 알아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당신께선 인류 역사가 반드시 지향해야 할 장기적 전체적 흐름만 주관하십니다. 당신의 그런 종합적인 통치 방식에 관해 인간더러 알 수 있도록 계시해 주었으며, 또 인간이 당신께서 계시해 준 대로 순전하게 따르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보호 인도해 주십니다.
아빠처럼 하나님이 움켜쥔 사탕은 흰 바탕에 빨간 줄과 초록 줄이 박혔고 각각의 색깔별로 맛이 조금씩 다른 박하사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빠가 손가락을 어떤 때는 하나만, 어떤 때는 둘 혹은 셋으로 펼치면 아이는 때로 빨강만, 때로 초록만, 때로 흰색만, 어떤 때는 둘 셋이 겹쳐 보입니다.
빨간색은 하나님의 공의로 당신의 백성에겐 환난이나 심판으로 체험되고, 초록색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에겐 구원이나 축복으로 체험됨을 뜻합니다. 흰색은 신자에겐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생활과, 불신자에게도 생존에 문제가 없도록 모든 자원을 베풀어 주시는 일반 은총에 비유됩니다. 그 세 색깔이 별개의 작은 사탕으로 나눠지지 않고 흰색을 바탕으로 한 개의 사탕 안에 같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모든 통치가 궁극적으로는 일반 은총 위에 당신의 특별한 공의와 사랑이 함께 실현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이 양팔을 활짝 벌리고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아빠가 다섯 손가락을 전부 펼친 셈입니다. 주님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최초 인간이 타락하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모략을 깨트리고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 것이라는 하나님의 그 약속(창3:15)이 완전히 실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죄를 죽기까지 저주하고 죄인은 무한한 긍휼로 품어주시는 그런 존재이고, 또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인류 역사를 이끌어 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아빠로선 아이에게 처음부터 다섯 손가락을 다 펼쳐 보일 수는 없습니다. 사탕이 뭔지도 모르는데 손을 펼쳐 보아야 장난감으로 갖고 놀든지 아예 관심조차 안 보일 것입니다. 그 전에 사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또 여러 가지 맛과 색깔의 사탕을 먹어봐야만 마지막으로 그 모든 맛이 융해된 박하사탕의 참맛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린애 같은 인간에게 당신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도록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보였습니다. 창조 때의 그 인류 구원의 약속을 시대별 상황에 맞게 당신께서 세우신 당신의 종들과 조금씩 구체적으로 갱신하고 또 실현해 나갔습니다. 아주 간략히 설명하면 노아와는 인간이 죄로 타락해도 홍수 심판은 없고 자연 질서를 유지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는 그 후손으로 열방 앞에 당신을 증명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다윗과는 유다 지파 그의 후손으로 영원한 왕국의 주권자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예레미야와는 오실 메시아는 인간이 지은 죄를 기억도 하지 않고 용서해 주는 은혜를 베풀 것이므로 외적 행위보다는 심령의 중심으로 당신을 섬기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언약들을 신학교에서 수업하듯이 말로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사탕을 종류별로 맛보아야 하듯이 실제로 인류, 특별히 당신이 택한 족속 이스라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해서 체험적으로 알게 했습니다. 그 역사를 한마디로 줄이면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당신의 백성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여서 제사장 나라로 세워나가는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소명에 순종하면 사랑의 축복으로, 불순종하면 공의의 심판으로 통치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동행했던 체험을 통해 은혜받거나 깨달은 의미에 따라서 그분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샴마, 여호와 닛시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을, 때로는 구약성경 전체를 ‘토라’라고 부르는데 “과녁을 적중시키도록 가르치다”라는 어원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었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민족에게 당신에 대해서 계시해 준 내용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무시당한 메시아 예언
바울은 예수님 다음으로 하나님의 뜻과 십자가 구원 진리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지구상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이 자기 나라 역사를 골고다 십자가로만 이끄셨다는 사실을 구약성경 전체에 점진적으로 계시해 놓았는데도 왜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까요?
본문은 그 답으로 “하나님의 종이 오면....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전혀 새로운 영적 진리를 전파하여서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울 당시까지 그 진리가 계시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에 이어지는 53장부터 마지막 66장까지 그 종에 의해서 새롭게 전파될 진리를 미리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그 진리를 당시는 물론 정작 당사자인 예수님이 오셨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메시아가 수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자세히 설명할 여유가 없으므로 잘 아시는 핵심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메시아가 오시는 까닭이 당신의 백성들마저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걸어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셔서 하나님이 그들의 선조들과 맺었던 언약의 길로 되돌이키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의 방점은 사실상 메시아가 행할 구원보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에 찍힙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인간의 죗값을 갚기 위해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음으로써만 너희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사야가 처음으로 말한 새 메시지도 아닙니다. 아담 때부터 사탄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습니다. 그 후로 이사야 때까지 메시아가 행할 사역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예언케 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십자가 처형을 이사야 53장보다 더 생생하게 현장감 있게 묘사했습니다. 놀랍게도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까지 (18절) 예언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처형의 비참한 실상을 묘사한 다윗의 시편 22편과 그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한 이사야서 53장은 사실상 아빠가 아이에게 손가락을 다섯 개 다 펼쳐 보여준 셈입니다. 그런데도 바울 같은 구약성경의 최고 전문가도 이런 예언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왕권을 회복하려고 구름을 타고 와서 예루살렘 성전에 좌정하여 세상의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리라는 성경 예언들에만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본문 서두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14, 15절)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를 보고는 모두가 너무 놀라서 어떤 말도 못 하고 입을 봉한다고 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거나 어렴풋이라도 짐작했다면 그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는 근원이자 통로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며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냈습니다. 그 약속대로 그의 후손을 열방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라고 출애굽 시켜준 것입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당신의 뜻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거룩하게 살아서 거룩하신 당신을 여러 족속 앞에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여서 이방인들로 여호와를 알게 해주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지만 염려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 내내 당근과 채찍으로, 즉 공의와 사랑으로 여자의 후손이 오심을 소망하도록 이끌어 주었는데도 전혀 정신을 못 차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께 받은 복을 다른 족속들에게 나눠주어야 하는데 독차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유대인
막상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큰 능력으로 온갖 이적을 베풀자, 유대인들은 다윗의 그 영광스러운 후손으로 오셨다고 열광했습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님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고(마22:42), 마지막에 예루살렘 입성할 때까지도 자기들끼리 그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퉜습니다.
그러나 로마 총독이 주둔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고도 주님은 로마에 항거는커녕 아무 야단도 치지 않았습니다. 공사역 중에도 민족의 원수인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고 그 집에 들어가 식사도 함께 나눴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잔뜩 공의의 심판만 기대했으나 오히려 유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만 야단치니까 다윗 왕권을 가진 메시아가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십자가에서 최고의 수치와 멸시를 받을 예수님에 대해 오히려 거꾸로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라고 (13절) 예언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존귀하게 해줄 메시아라면 세상 죄악의 원흉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그래야만 메시아는 물론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들도 형통한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이 땅에서의 인간적인 형통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바라는 영원하고도 거룩한 형통은 당신이 세운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거역한 죄에서 구원받아 원래 소명에 충실한 모습이어야 하는데 전혀 몰랐던 것이며,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주님이 오신 지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변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통 유대교에선 이사야서를 53장을 빼고 가르치는 엄청난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어떤 불신자가 봐도 예수님과 그 십자가 죽음을 예언한 것이라고 쉽게 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제외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체험하고 그 구원의 의미를 깨달은 제자들이 아니고는 기록할 수 없다고 해서 오랫동안 훨씬 후대의 신자들이 첨가한 것이라는 비평을 받아왔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설치던 19-20세기 중반까지는 그런 비판이 오히려 정설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의 입을 봉할만한 진짜로 놀랄만한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사해사본(死海寫本, Dead Sea Scrolls, DDS)이라고 칭하는, 구약성경을 비롯한 900여 편의 고대 종교적 문서가 1947년에서 1956년경까지 사해 서쪽 쿰란 주변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우연히 양치는 소년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뜻임, 한참 자유주의 신학이 기승을 부릴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사본에 포함된 구약성경은 지금 사용하는 구약성경과 완전히 일치했고 예수님 당시보다 이삼백 년 전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마디로 이사야서 53장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지금과 똑같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자기들 선조들이 비록 그 적용은 잘못했어도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였던 말씀을 깡그리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열광하며 추종했으나 자기들 요구대로 로마를 물리쳐 주지 않았다고 십자가에 매달았던 자기들 잘못을 부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지금의 팔레스타인도 포함해서 모든 열방을 구원해 주는 예수가 너무 싫고 대신에 자신들만 높여 주었던 모세와 다윗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래서 신약성경은 아예 인정도 하지 않으며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수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빼버리면 그냥 한 사람의 의로운 도덕 스승이 됩니다. 십자가도 로마 제국을 반역한 죄인을 가장 잔인한 죽음으로 처형하는 나무 막대기에 불과해집니다. 창조 때부터 종말까지 오직 십자가의 무한한 긍휼로 죄에서 구원해 내는 방향으로만 인류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도 없어집니다. 애굽에서 사백 년간 노예로 고생하던 아브라함의 후손을 열 가지 재앙으로 구원해 내신 기록은 창의력이 뛰어난 인간 저자의 판타지 소설이 됩니다. 무엇보다 유대교처럼 구약성경만 믿으면 여호와는 모든 민족 위에 이스라엘만 최고로 높여 주는 유대교 고유의 민족 신으로 전락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복음답게 만드는 말씀은 이사야서 53장입니다. 그것을 빼버리면 예수님이 엄숙히 경고한 대로 하나님께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첫째 역할이 죄인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하는 회심과 중생인데, 예수 십자가가 부인되면 성령이 할 역할 자체가 없어집니다. 신자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들면 이사야서 53장을 부인하는 일에 동참하는 꼴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할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은 열방 중에 가장 작은 민족을 택하여 제사장 나라로 세워 주었습니다. 그 소명을 잘 실현하도록 당신의 말씀을 맡겨 주었고 가장 연약했기에 어느 민족도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이적들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고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가는지 그들에게 충분히 체험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당신에 대한 지식은 그 특별한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는데도 전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해도 심지어 하나님께 수많은 은혜를 받아도, 본성적으로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그분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 입증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마저 그중에 바울 같은 자도 어차피 실패할 줄 아시고서, 당신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직접 수난받는 방향으로 역사를 이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앞으로 때가 차면 하나님이 구원으로 작정한 사람들을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다 보여주었고 이제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인류 역사를 마감할 일만 남았기에 그들이 다시 특별한 위치나 역할을 맡을 리는 없습니다. 성경도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므로 그것에 더 보태거나 빼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시록 말씀으로 완전히 닫혔습니다. (계22:10-21) 이스라엘도 하마스와 똑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불쌍한 인간 죄인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이 오시기까지 구약시대 내내 하나님의 당근과 채찍을 다양하게 맛봤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와서 인간의 죗값을 당신의 죽음으로 대신 치러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하나님만의 비밀이었습니다. 다시 비유하자면 여러 색깔의 사탕은 맛봤어도 박하 맛이 스며든 사탕은 그때까지 맛을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풀이하면 자신들이 형통해야만 하나님의 통치가 올바르다고 간주했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세상의 공의가 굽어졌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편애하는 메시아를 목매달고 기다린 것은 결국 하나님보다는 자기들을 더 높이려는 인간의 철저하게 타락한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도 아무리 율법에 능했어도 예수 십자가에 대해선 정확한 지식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시체였던 것입니다.
제자들마저 십자가를 직접 목격하고도 다윗 왕국을 회복할 길은 이제 사라졌다고 크게 낙담하고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지 곤혹스러워했습니다. 그렇게 실망 가운데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6)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사야서의 수난 예고를 잘 상기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 제자들은 사도들에게 다시 돌아와서 자기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고 이사야서의 깨우침을 받게 된 경위를 보고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그들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서 당신께서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게 되자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바울도 사도들처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인격적 개인적으로 대면함으로써 처음으로 박하사탕을 온전히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해 놓은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온전히 깨달은 것입니다.
죽음의 시기만 다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서의 수난받는 종의 예언까지 정확히 이해했어도 영적 시체인지라 반드시 성령이 간섭하는 거듭남이 있어야만 합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하나님이 고려 참작해 줄 만한 의로운 점은 단 하나도 없고 오직 추악한 죄악 덩어리뿐이라고 처절하게 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자기 영혼이 완전한 절망과 죽음에 빠지는 체험을 겪어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수난받지 않았다면 자기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제대로 몰랐기에 수많은 사람을 심판한 것이 언뜻 불공평해 보입니다. 지금도 하마스 같은 테러 집단의 죄악으로 인해 많은 일반인이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굽어진 공의를 방치하는지,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그런 일들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심과 원망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 문의 제일 앞에 서 있던 바울마저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은 사람이 어려서부터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전부 악하다고, 예수님도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추악한 죄악뿐이며 주변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구약시대 사람들이나, 지금 전쟁 테러 자연 재앙 펜데믹 같은 질병으로 희생당하는 남녀노소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철두철미 추악한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의 억울해 보이는 죽음도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선 단순히 그 시기만 빨라진 것입니다. 심판받을 자라면 먼저 심판받은 것이고 구원받을 자라면 먼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억울한 죽음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선 너무나 마땅한 죽음과 너무나 은혜로운 구원만 있습니다. 이 진리가 이해되지 않으면 아직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모르는 셈입니다.
바울처럼 오늘날 신자들도 저런 악인을 그냥 두어선 안 된다는 의분은 솟구쳐야 합니다. 그러나 공의의 심판에만 집착하면 그들이 악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나는 그보다 덜 악인이요 더 의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믿음이 아닙니다.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었고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도 나중에 멸망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지금의 러시아, 중국, 북한의 공산 세력도 반드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에 제 이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자기들 도덕과 종교로 공의만 실현하려다 실패했듯이, 현재의 세상 악이 제거되어도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에는 계속해서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수난받는 종이란 모든 이가 죄로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 죗값을 당신께서 대신 지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 사회의 굽어진 공의도 절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십자가를 점진적으로 계시해 주는 방식으로 구약 역사를 이끌어 왔고, 신약 이후의 역사는 사람들로 예수를 더 많이 잘 믿도록 하는 방식만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요컨대 세상이 타락할수록 예수 믿는 자를 통해 당신의 공의를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자기 주변에서부터 그분의 공의를 실현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분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원망하면 이사야서 53장도 미처 모른다는 뜻입니다.
(1/28/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