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믿음은 얼마나 큰가?
마태복음 강해 (#165)



http://youtu.be/H478WztE6P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1-28)


끈질기면 좋은 믿음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까닭은 죄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구원에서 이방인을 제외하기는커녕 차별할 리도 만무하다. 그런데도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가나안 여인에게 당신은 이스라엘 외에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도 그녀를 아주 쌀쌀맞게 대하다가 마지못해 요청을 수락해주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선 갑자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거꾸로 칭찬해주었기에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고 예수님이 변덕스런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지금껏 예수님이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대답한 것으로만 해석해 왔다. 여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매달리는 믿음을 보이자 그에 부합하게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나아가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했으니 자기 소원을 붙들고 끈질기게 기도만 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신다고 신앙생활에 적용해왔다.

물론 그렇다. 원칙적으로 하자가 없는 해석이자 적용이다. 그러나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누구나 몇 번만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는 표면적 의미이지 않는가? 예수님이 그렇게 냉정하게 구신 이유가 단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할 목적뿐이었다면 비유컨대 잔뜩 약을 올린 후에 사탕을 주는 셈이다. 과연 예수님이 그런 분인가? 또 그것이 예수님이 의도한 것의 전부일까?

만약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구하는 것이 큰 믿음의 의미라면 새벽마다 천 일 기도 제단을 쌓으면 어떤 위중한 문제나 환난도 다 해결되어야 한다. 또 의지력과 인내심이 믿음의 핵심이 되어버린다. 심지가 굳고 끈기 있게 버티는 자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거나, 더 받는다면 뭔가 모순되지 않는가 말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신자라면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고 또 끝까지 그래야 한다. 하나님도 언젠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반드시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하신다. 간혹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도 거절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는 반드시 신자로 알게 하신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응답인데, 바로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럼에도 만약 끈질김이 큰 믿음의 본질 내지 핵심이라면 기독교 신앙은 참 가난한 것이다. 본문의 의미도 사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20번 이상 대화를 주고받았다 가정해보라. 그런데도 그 대화의 구체적 의미는 살피지 않고 20번이나 포기 하지 않고 주님께 매어달린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만 강조하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예수님의 세 가지 반응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 사이에 비록 세 번 밖에 질문과 대답이 오가지 않았지만 깊이 음미해볼 만한 내용이 풍부하다. 우선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하자(22절),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다.(23절) 이방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예수님이 묵묵부답 하자 여인이 계속 소리치며 따라온 것 같다. 제자들이 23절 말미에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다. 이방 여자가 자꾸 귀찮게 구니 쫓아 보내자는 뜻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외는 당신이 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24절) 예수님의 두 번째로 보인 반응은 거절이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연거푸 간청하자 예수님이 보인 세 번째 반응이 어떠했는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자녀는 동족인 유대인이고, 개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멸시하여 부르던 관습적 호칭이었다. 내 떡을 유대인에게 줘도 모자랄 판인데 개 같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젠 모욕마저 주었다.

예수님의 반응은 침묵, 거절, 모욕으로 갈수록 더 매정하게 바뀌었다. 보통의 여자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그 자리에서 돌아갔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비심이 많고 훌륭한 인격과 놀라운 능력을 갖춘 분이라고 들었는데 소문과 완전 정반대라고 크게 실망하면서 말이다. “그래 너희 유대인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고 욕을 안 하는 것만도 다행일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니 제발 나에게도 부스러기를 달라고 했다.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정말 대단한 믿음이다. 그럼 예수님이 그녀의 정성과 열심에 감복해서 큰 믿음이라고 칭찬했는가? 그렇지 않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병(病을) 줘놓고 다시 약(藥) 주시는 분이 아니다. 실컷 어려움을 주었다가 끄떡없이 잘 견디면 풀어주는 분이 아니다. 당신께 바치는 치성의 질과 양에 비례해서 보상 수준을 정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중도에 포기한다면 믿음도 아니다. 신자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자의 믿음이 떨어져도,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기도마저 하지 못해도, 심지어 죄악 중에 빠져 있어도 당신 쪽에서 먼저 포기하는 법은 절대 없다. 하나님은 신자를 보호 인도하여 당신께서 신자를 위해 계획한 자리에 반드시 도달하게 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런데도 신자가 중도에 포기하면 그 영광을 보지도 못할 것 아닌가?

하나님은 신자를 예정하고 선택하여서 구원하셨다. 언약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신자가 그 언약 안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기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서 그분의 언약 가운데 있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이다. 신자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은 아니다.  

해석의 결정적 열쇠

항상 강조하지만 성경은 참으로 정미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다. 흥미롭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다. 분명히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그분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와 권능이 꽁꽁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본문에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본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가 본문 안에 있다. 바로 23절 말미에 제자들이 귀찮게 구는 여자를 보내자고 한 말이 그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를 하지 않았다. 이방 여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제자들이 그런 말을 한 것이나,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이 침묵으로 반응한 것은 물론, 그 후에 거절하고 모욕을 주었다고 해서 현장에 있던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대인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했다고 간주한다. 예수님과 그 여인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성경이 참으로 흥미롭다고 말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3절 서두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지만, 24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라고 했다. 예수님이 대답하신 여부를 명료하게 대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자가 딸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보내소서라고 하자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24절의 대답 즉, 당신께서 이스라엘 외는 가지 않는다는 말은 제자들을 향한 대답이 된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의 말에 동조해 준 것인가? 동족 유대인을 더 사랑하고, 동고동락하는 제자들의 편을 들어준 것인가? 아니지 않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밝히는 책이다. 모든 세대의 인간에게 진리가 된다. 오늘날의 믿음이 전혀 없는 불신자가 봐도 제자들의 말이 틀렸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물며 예수님이 제자들의 그 말을 옳다고 인정해 주었을 리는 절대 없다. 표면적 내용은 제자들의 말을 인정해 준 것 같아도 그 내면의 의미는 정반대다. 제자들더러 너희가 어떻게, 왜 틀렸는지 지금부터 규명해줄 테니 잘 새겨들으라는 것이다. 일종의 반어법을 구사한 것이다. “너희는 내가 유대인만 구원해주는 메시아로 생각하느냐?”라고 그녀보다 제자들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여인에게 한 대답이기도 하다. “네가 들었다시피 내 제자들이 나더러 이스라엘 외의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말고 배척하라고 권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유대인 제자들의 말을 들을까, 아니면 이방 여인인 네 요청을 들어줄까? 내가 해야 할 바가 과연 어느 쪽이겠느냐?”라고 간접적으로 물어본 셈이다.  

예수님이 당신께 가르침이나 고침을 받으려 나오는 어떤 이에게도 이 여자처럼 냉정하게 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침묵에서 거절로, 거절에서 모욕으로, 그녀를 거부하는 수위(水位)를 점차 높였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다. 보통사람의 경우에는 아무리 미워도 상대가 자세를 완전히 낮추어서 도와달라고 싹싹 빌면 아무래도 차츰 누그러지지 않는가? 그 정반대로 행하셨다면 반드시 당신만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큰 믿음이었다.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이미 크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또 그에 비해서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이 훨씬 낮음에 분개하셨다. 그래서 그 둘의 믿음을 대조 비교해서 모든 이로, 성경을 읽는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그 차이를 깨닫게 하려고 아주 매정해 보이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간 것이다.

우선 그녀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다윗의 자손은 알다시피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별칭이다. 유대인들 소경이나 문둥병자들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고서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에 ‘주’(主)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병자들처럼 단순히 질병만 고쳐달라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순히 극존칭의 뜻도 아니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전부를 다 바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마저 주관하는 분으로 인정한 것이다.

주가 단순히 존칭의 뜻이 아님은 이어지는 대화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하기 전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다. 그 딸에게 매일 시달리다보니 죽을 지경인지라 고쳐주면 자신이 좀 편해질 것 같다는 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딸과 자기를 일체화시켰다. 딸의 고통이 바로 자기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딸이 정상인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더라도 딸을 살려내고 싶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외에는 가지 않는다고 대답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저를” 도와달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내려놓은 것이다. 이 여인은 자기를 주어로 삼아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예수님과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개 즉, 이방 여인에게까지 나눠줄 떡이 없다고 모욕했다. 그에 대한 여인의 반응을 보라. 자신을 개의 신분이라고 스스로를 낮추면서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받아먹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에 빠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중동에선 당시나 지금이나 미리 구운 마른 떡을 손으로 떼서 먹는다. 손으로 떼다 보면 부스러기는 자연히 생겼다. 개가 그것을 받아먹는 것까지는 주인이 금하지는 않았다. 개의 입장에선 이제나 저제나 주인이 상에서 식사하는 시간만 기다렸다. 개에겐 주인 상 곁에 머무르는 것만도 큰 즐거움이었다. 아니 주인이 떡을 떼지 않으면 개는 떡을 먹을 방도가 전혀 없었다. 오직 주인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었다. 주 다윗의 자손이 극존칭이 아니듯이, 여기서 자신을 개라고 한 것도 극비하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긍휼만 바란다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지만 병을 고쳐주는 능력의 하나님만 찾았다. 또 자기 민족만 번영시켜주는 보편적, 객관적 “우리의 하나님”에 머무를 뿐이었다. 반면에 이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만나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모든 것의 온전한 주인이 되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나의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한 마리의 개일지라도 주인의 상에 반드시 참여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냈다.  예수님이 유대인을 먼저 구원하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인정했다. 그녀는 여호와가 그들을 택하였고, 애굽에서 구원해내었고, 율법을 수여했으며, 당시에 유일한 창조주 참 하나님만 믿는 유일한 민족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런 참 하나님이라면 자기처럼 가난하고 연약하고 비참한 여인을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배척할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도 확신한 것이다. 애굽 여인 하갈을 그리 아니했듯이 말이다. 만약에 주님이 자기를 박대하면 더 이상 자기 인생에는 어떤 소망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절망과 사망밖에 남지 않으니 제발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유대인이 믿는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함께 믿고 또 그분의 자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우상만 숭배하는 이방 세계에선 무슨 짓을 해도 평강과 안식이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부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사랑을 참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싶다는 것이다. 주인의 상 곁에만 머무르게 해주면 다른 소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고라 자손의 이런 고백을 한 셈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악인의 장막은 바로 두로와 시돈 지경이었는데 단지 이방지역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어 흑암의 세력에 눌려 잇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문지기는 주인 상 곁에 엎드린 개라도 되고 싶은 이 여인이다.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땅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이방 땅에 있는 이방 여인이라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여호와의 문지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를 때부터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상당하다는 것을 이미 아셨다. 개라고 멸시해도 끝까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까지도 아셨다. 그래서 그 믿음에 감탄을 하셨고 또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잠시 두고 보느라 침묵하신 것뿐이다. 그런데 예상한 대로 제자들은 재수 없는 이방 여인인데다,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둘 정도면 보나마나 엄마도 이상할 테니 곧바로 쫓아버리자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과 그 밖의 양떼로 구분하는 말씀으로 대답했다. 본문이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니”라는 말로 시작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께서 이방 땅에 들어온 것이 제자들이 염려한 것처럼 산헤드린으로부터 있을 박해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헤드린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유대인만 구원을 주신다고 가르치는데 너희도 그들과 같은 생각인지 따진 것이다. 나아가 당시로선 최고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바리새인들은 물론. 당신에게 직접 배우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조차 이 정도니 당신이 이스라엘의 양떼에게 먼저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 없는 믿음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 7:9의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이스라엘 중에 없는 믿음이라고 한다.

유대인들 중에도 친구인 중풍병자의 치유를 위해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내리운 자들이 있었고(막2:4), 또 다윗의 자손이여 부르면서 고쳐달라고 따라온 소경들도 있었다.(막9:27)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더러 믿음이 크다고 하지 않았다. 신령한 능력을 발휘하는 메시아만 찾았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간구하는 것이 큰 믿음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제자들은 오직 외모만으로 사람 됨됨이를 판단했다. 스스로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바리새인과 하나 다를 바 없었다. 예수님은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일관되게 그녀와 유대인 제자들의 믿음을 대조하는데 초점을 모았다. 그렇다고 계속 어려운 궁지에 몰아넣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인의 떡을 받아먹는데 성공하는 여인의 끈질긴 믿음을 보이려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은 비록 개의 신분으로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되 주인의 상 곁에 남아 있어서 주인의 긍휼만 얻고 싶다는 고백을 하게 한 것이다.

제자들의 고착된 종교적 편견, 선입관, 관습, 의식, 사상 등을 완전히 깨트리려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상에서 그 때까지 인간 세상에서 서로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다 깨트리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당신의 긍휼, 권능, 사랑을 베푸는 데 어떤 방해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당신께서 먼저 당신의 모두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 앞에 인종, 민족, 문화, 종교는 장벽은 다 무너졌고 남자와 여자, 자유자와 종 같이 인간 사회에서 통하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만드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누구라도 겸손하게 당신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앞에 엎드리면 죄와 사탄과 사망의 멍에에서 다 구원해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바꾸시고 자라게 해주신다.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어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유와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해주신다. 이 땅에서의 장막이 무너져도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할 수 있는 천국의 영광으로 인도해주신다.

손 씻고 먹는 떡과 개 같이 먹는 떡

이 사건의 성경기록이 참으로 흥미로운 까닭이 또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님이 떡을 떼어서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앉아 있는 상에서 그 수많은 유대인들이 부스러기를 받아먹은 셈이다. 그 순간만은 2002년 한국 월드컵의 거리 축제처럼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장애가 다 사라졌다.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이라곤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천국잔치를 이 땅에 배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땅의 인간들 중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일 잘 믿고 가장 의롭고 신령했던 바리새인들은 왜 손 안 씻고 떡을 떼느냐고 시시콜콜 따졌다. 반면에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한 이방 여인은 손을 안 씻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땅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고 한다. 비유이긴 해도 많은 먼지와 병균이 묻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의 상에서 떨어진 것이기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받아먹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 말씀대로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인간을 추하게 만듦을 알았다. 모든 인간이 나면서 타락한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녀는 주님에게 내 고달프고 불쌍한 형편을 도와달라든지, 혹은 내 죄를 바르게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다. 자기 존재 전부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와 용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방 여인을 개라고 표현했지만 헬라 원어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말로 "개 XX" 식으로 경멸하는 단어 대신에 애완견을 부르는 강아지 같은 어감의 단어를 사용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방여인을 멸시할 뜻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이 여인이 그런 박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붙드는 믿음을 보였기에 큰 믿음이라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큰 믿음은 없다.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면 아무리 어린 소녀라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축사 기도하려고 남자 목사 여러 명이 힘껏 붙들어도 뿌리쳐낸다. 지금 예수님은 직접 가지 않고 멀리서 한마디 말씀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 하나님만이 보일 수 있는 권능이다. 그런 능력은 주님께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께서 능치 못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능력만 보이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나 가능하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이 땅의 모든 질병을 눈 한번 깜박하는 사이에 다 없앨 수 있다. 그 반대로 이 더럽고 추하며 갈수록 패역해가는 인간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최후의 심판을 내릴 수도 있다. 지금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동성결혼에 관한 심사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합법화 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 단지 시기 문제다. 최근 인도에선 관광 온 여인들이 백주에 여러 명에게 강간당하는 일이 빈번하다. 한마디로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 때와 똑같아졌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유황불을 당장 내려야 마땅한데도 그러지 않으신다. 당신께서 지으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나오길 원하시기에 계속해서 당신만의 긍휼로 인내하고 계신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예수님은 이 여인처럼 절망 중에 눈물을 흘리고 한숨과 시름에 빠진 자를 먼저 찾아가신다. 그들이 소망을 세상에 두지 않고 오직 하늘에만 붙들어 매기만 하면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은혜와 권능과 사랑을 반드시 베풀어주신다. 우리 가운데 연약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고, 죄 중에 빠지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음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구태여 병 주고 약 주어 믿음을 시험할 이유가 없다. 병을 주면 약을 주기도 전에 다 쓰러져버리지 제대로 일어설 수 있는 자가 우리 중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여인처럼 저는 개에 불과하지만 주인의 상에 붙어 있기를 진정으로 소원한다고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며 고백하는 자는 구태여 그 믿음이 끈질기지 않아도 주님은 단 번에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다. 반면에 그런 고백 없이는 아무리 천일 제단을 쌓으며 울며불며 매달려고 하나님은 짐짓 의도적으로 더 묵묵부답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 딸만 어서 빨리 고쳐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에는 그렇다 는 뜻이다. 다시 고라 자손의 시편을 인용하자면 여호와 궁정의 하루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바로 이 여인처럼 고백하는 것이다. 또 세상에서의 천일은 비록 장소는 교회일지라도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외치며 천일 제단을 쌓는 것이다.    

큰 믿음이란 사실상 없다. 인간 세상에서 종교적 잣대로 판단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최대한 낮아지는 큰 믿음이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믿음의 본질이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발가벗고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는 겸손함이다.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세상에서 방황과 타락의 절정에 치달았다. 하나님은 그런 그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가 너무나 더럽고 추한 죄 가운데 빠져서 당신과 원수가 되었음에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자비로 끝까지 인내해 주시고 결국에는 빛 가운데로 옮겨주셨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제대로 받아서 계속해서 그 사랑에 붙잡히게 된 그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실토한 바로 그것이 큰 믿음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 유대 사회는 바리새인,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의 순서대로 하나님께 가깝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그 순서를 단순히 정반대로 바꾼 것이 아니다. 외적 조건이나 종교적 경건은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아니다. 그분은 외모는 전혀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이 당신께 가장 가까이 있는 자부터 믿음이 크다고 보신다. 진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오직 예수만이 소망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큰 믿음인 것이다.

이제는 큰 믿음의 정의를 바꾸어야 한다. 자기 소원을 하나님의 능력만 빌려 끈질기게 이뤄내는 것이 큰 믿음이 아니다. 그것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보적인 작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으로 자신 안에 가득 채워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을 따라서 완전히 순종하며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고 있어야만 큰 믿음이다. 그렇게 되려면 자신은 어떤 형편에 처해지든 여호와의 궁정에서 문지기로 하루만이라도 근무하는 것이 세상의 군왕으로 지내는 천일 보다 낫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한다. 말하자면 이 비천한 가나안 여인처럼 큰 믿음을 이미 가지고 있어야 끈질긴 믿음도 자연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4/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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