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14-20) 참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6)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1:12-20) 

 

성경해석의 큰 오류

 

성경을 읽을 때 신자들이 예사로 범하는, 간혹 일부 목회자도 그러한데, 아주 잘못된 습관 하나가 있습니다. 본문이 정작 말하는 바는 뒷전이고 자기 쪽의 필요나 기대에 부합되는 말씀에만 주목하는 것입니다. 주로 현재 겪는 문제와 고난을 이길 위로와 힘을 주는 의미부터 찾으려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일을 기록한 본문도 이미 과거에 끝난 사건이고 또 전임사역자로 헌신할 의사가 없으므로 자신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여깁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나름대로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는 노력합니다. 그런데 거의 모두가 또 다른 오류를 범하는데 성경을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이라는 차원으로만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도 최초의 제자들처럼 재산과 생업에 관심을 끊고서 주님만 따라가야 하는데 지금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부터 느낍니다. 그러다가 선교사나 목사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애써 자기를 위로하고 치웁니다. 

 

성경이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신자를 위로하여 힘을 주고 또 도덕적 종교적 성장을 가르치는 말씀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말씀에서 고난 중에 위로받는 의미를 찾아도 감정적인 차원에서 일시적 효과로 그칩니다.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을 얻어도 솔직히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온전히 실천하지 못합니다. 결국 성경 말씀으로 자신이 성숙해진 경험이 거의 없기에 한 번도 통독하지 못한 신자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에서 현재 상황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만 찾으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바라는 바가 아무리 의롭다 해도 엄격히 말해 인간이 하나님을 주관하겠다는 완악함입니다. 반드시 성경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먼저 찾아서 자신의 현재 상황에 반영 실현해야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달리 단순히 도덕과 종교의 계명을 편집해 놓은 책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어야만 참 인간답게 살 수 있으므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평생토록 자기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그분의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먼저 또 일생토록 바라는 사항도 ‘특정한 거룩한 일을 하라’가 아니라 ‘너 자신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본문을 읽고 당장 모든 것을 희생하며 주님만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제발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때가 찼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이 말하는 바가 정작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가는 구약 성경과 여호와와 율법을 모르는 로마인을 대상으로 저작했기에 아주 간결하고도 쉬운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굳이 심오하고도 신령한 뜻을 찾으려 할 필요 없으며, 각 용어의 뜻과 앞뒤로 연결되는 흐름만 잘 따져도 충분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친 후에 공사역을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가장 먼저 선포하신 메시지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15절a)입니다. 때가 ‘찼다’(fulfilled)라고 번역된 헬라어 ‘플레르오’는 꽉 차다, 다른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완성하다. 만기가 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도 이와 평행 되는 단어가 있는데, 어려운 한자 말로 관영(貫盈), 쉬운 말로 ‘가득차다’(full)로 번역된 ‘솨렘’입니다. 구약 성경에선 특별히 죄와 연관해서 사용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라는 말씁입니다. 사람이 악만 저지르고 선은 눈 닦고도 찾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노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신구약의 두 단어가 똑같이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채울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지금 구약의 의미도 적용해서 때가 찼다고 말한 것입니다. 땅에 죄로만 가득 찼기에 하늘에서 정한 구원의 때도 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한 것입니다. 가나안에 아모리 족속의 죄악으로 가득 차자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그들을 진멸시키게 하고서 당신의 나라를 세웠듯이, 지금 예수님은 이 땅을 뒤덮은 죄악을 당신께서 제거하고 당신의 복음으로 대신 가득 채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가까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at hand’라고 번역되었듯이, 굳이 거리를 측정할 필요 없이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바로 곁에 왔다는 표현입니다. 그 나라를 취득하느냐 못하느냐는 본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비유컨대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 셈인데, 먹고 안 먹고는 본인 소관이자 책임입니다. 

 

그렇게 하길 원하면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간단하게 두 가지만 요구했습니다. 그 전에 복음도 아주 쉽게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시므로 그에 관한 메시지라면 당연히 좋은 소식입니다. 구원을 온전히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도 하나님뿐인데, 그 복음을 지금 예수님이 전하고 있으므로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당신을 믿으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며 그래서 당신을 따르라고 명한 것입니다. 

 

회개 대신 회심

 

그렇다고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 없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회개가 구원의 전제 필수 조건이 되어버리면 필연적으로 개인별로 회개의 질적 양적 수준을 따져야 합니다. 그러면 또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의로운 자와 미처 실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러고 싶어도 구조적으로 할 수 없는 무력한 자로 나눠집니다. 그러면 절대로 구원의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부담과 죄책감만 불러일으킵니다. 

 

무엇보다 우리말 신약성경에서 회개(悔改)라고 번역했는데 원어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범했던 온갖 추악한 행동이나 습관을 뉘우치고 깨끗이 바로잡는다는 윤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 헬라어 ‘메타노에오’는 '다르게 생각하다', ‘마음을 바꿔 먹는다’(change one’s mind)라는 뜻이므로, 회심(回心)이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마음을 바꿔 먹으라고 했으므로 사람이 선행과 공적과 치성을 얼마나 많이 쌓았는지는 구원에서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각 개인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종교관을 뜯어고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므로 그분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만이 진리입니다. 본문 상태에서 유대인 제자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개념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본문을 ‘요한이 잡힌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이 대변하는 율법 중심의 유대교는 완전히 끝났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더러 복음을 믿으려면 마음을 바꿔야 하는데, 그동안 몸에 완전히 배어있는 유대교 적인 사고부터 완전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고 율법도 잘 지키는 의인이므로 이미 구원은 확보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이제 하나님에게 바라는 사항은 오직 하나로 현실적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만 재현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유대인 제자들을 향해서 그 생각을 바꾸라고, 즉 그런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충돌되므로 새롭게 고쳐먹으라고 명한 것입니다.

 

회심이 복음이다.

 

결국 주님은 복음을 믿어야 할 때가 찼다고 말한 셈인데, 그렇다면 복음이 이 땅에 실현될 시기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창조 직후에 아담이 타락할 때부터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이 인간에게 씌울 죄의 멍에를 벗겨 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창3:15) 성경에 최초로 계시 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서 ‘원시 복음’이라고 칭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라고 설명했습니다. 주님이 유대교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 사이에 태어난 것은 바로 그 유대적 사고를 버리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때가 완전히 찼기에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본문에서 삼 년 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이 모든 인간의 죗값을 대신 지고 하나님께 영단번(永單番, once for all)의 제물로 바쳐지면, 삼위 하나님이 태초에 세우신 구원 계획의 만기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 값없이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회심이 종교관을 바꾸는 문제라고 해서 단순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자기가 아주 의롭다고 자신했고, 이방인들도 치성을 최고로 바칠 자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둘 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쟁취하는 방식입니다. 그 생각을 바꿔야 하므로 반드시 인간의 공적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겸손히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성전 제사 등을 엄격히 지키면서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고 따랐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뿐”(마15:19)이라고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노아 홍수로 심판하실 때 인간의 마음에 죄만 가득 찼다는 그 선언과 동일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죄악뿐이라면 인간 전체가 죄악의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선의 원천이자 공급자인 하나님을 이방인은 아예 거역 대적했고, 유대인은 자기들 욕심 때문에 순전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 세우려는 그 완악한 본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선이 실종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죄악뿐입니다. 

 

따라서 회심의 진짜 의미는 자신의 그런 영적인 실체를 정확히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임을 절감하고서 또 그 죄를 세상에 있는 어떤 인간적인 방안으로도 씻을 길이 전혀 없다고 실감해야 합니다. 

 

문제는 모든 인간이 영적인 시체라 스스로는 자신의 그 실상을 깨닫지 못합니다. 성령이 택한 자에게 임하여 간섭하여야만 근본 마음의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성령으로 인해 죽음의 절망에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야 제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진심 어린 고백을 하며 십자가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회심은 그래서 하나님마저 자기 뜻대로 조정하려고 자신을 주인으로 살았던 삶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두 가지를 요구했으나 사실은 한 가지인데, 회심해야 복음이 믿어지고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회심하는 것이며, 그것도 동시에 일어납니다. 

 

생업을 버린 까닭

 

그런데 제자들이 과연 주님의 간단한 그 한마디에 곧바로 회심하고서 복음을 온전히 믿었을까요? 또 그래서 모든 생업을 뒷전에 두고 주저없이 단번에 주님을 따랐을까요? 물론 주님에게서 풍기는 범접할 수 없는 신적 권세를 온몸으로 느꼈고 또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강력한 내적 인도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단지 신비한 능력을 부려서 자기 제자들을 모을 분은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는 동년배의 이름 없는 랍비 한 명이 서있습니다. 같은 갈릴리 출신이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거나, 아니면 출신 집안 정도는 알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언제 어떻게 실현할지도 모르며 또 그 구체적인 실상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한다고 해서 쉽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상당한 보상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주님을 스스로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는데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바로 그 약속 때문입니다. 제자들로선 하나님이 세울 나라가 다윗 왕국의 재현으로 오해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도 그 왕국의 관원들을 모집하는 최고위 관리가 되나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복음서 기록에 드러난 제자들의 이후의 행태를 보면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오해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현실적 보상만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고기만 낚는 어부였는데 그것으로 삶과 인생의 기쁨과 만족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당장은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라도 어쨌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한 줄기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들을 어부라고 무식하며 비천했다고 평가절하해선 안 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서 모세 율법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당시로선 상당한 의인 축에 들었습니다. 그들이 가난해서 현실적 형통에 혹한 것도 아닙니다. 자기 배가 있고 삯꾼들도 부렸던 베드로와 세베대는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유지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만 없다 뿐이지 자기들 인생에 온전한 소망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자기 동네에선 이름깨나 날렸으나 여전히 로마의 압제 아래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하고 일등 시민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이 이방 헬라의 데가볼리 도시들과 가깝기에 그쪽 관습에 물들어서 이방 족속과 다름없다고 여기고 천대했습니다. 이방인들도 문화나 사상적으로 아주 열등한 이스라엘의 하층민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역적인 특성상 이방 세계와의 잦은 접촉으로 상당히 진보적 개혁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예루살렘의 외식적 형식적인 바리새 종교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유다 공회의 관원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니고데모조차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지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자들도 종교적으로 정확히 정리하지를 못해서 그렇지 그 심령이 까닭 모르게 억눌려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람 낚는 어부, 즉 지금까지 했던 생업과 전혀 다른 일을 하게 해준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그 말만으로 소망이 생기고 솔깃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탄의 때도 찼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 왔다고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 후에 완전한 실체를 드러낼 것이지만 겨우 삼 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창조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주님은 사탄이 새빨간 거짓말로 모든 인간을 미혹시켰던 모략을 온 천하에 완전히 생생하게 드러내서 죄의 노예로 묶고 있던 멍에를 완전히 깨트리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긴장하고 있는 존재는 바로 사탄이자 그 졸개들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자마자 헤롯을 부추겨서 죽이려 들었으나 하나님이 아비 요셉에게 성령으로 지시하여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사탄은 그 후로도 주님이 언제 공사역을 시작할지 항상 조마조마하며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사탄으로서도 이제 여자의 후손으로 온 예수와 일전을 겨뤄야 할 때가 점점 다가왔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자기가 묶은 흑암의 권세에서 못 빠져나가도록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부터 유대 땅은 영적으로 아주 심하게 짓눌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죄를 회개하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대비하라는 물세례를 베풀자 유다 각처에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바라며 몰려들었던 까닭입니다. 새날이 새기 전이 가장 어둡듯이 흑암이 세상에 가득 찼으나 필연적인 반작용으로 메시아 소망도 이스라엘 온 땅에 가득 찼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도 그런 영적인 어둠을 충분히 감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 말씀이 서기관과 다르고 권세가 있는 한 랍비가 하나님의 나라가 손만 뻗으면 잡힐 것이라고 하면서, 그 나라에서 사람을 낚는 직분을 맡겨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차피 계속 고기나 잡고 있어 봐야 자기 인생에 쌓이는 것이라곤 눌림과 실망과 좌절뿐이니까 그 제안을 마다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의 랍비 교육은 합숙하면서 스승의 말과 행동을 똑같이 따라서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역사상 최초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서로를 섬기는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삼 년 뒤에 세워질 그 나라의 시민으로 미리 준비시키려고 여전히 영적인 시체에 머물던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분명히 당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당신을 따라오기만 하면 당신께서 복음을 가르치고 삶에서 실현하는 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이제 천국의 참된 모형이 역사상 최초로 이 땅에 조직 결성될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역사상 최초로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시민권을 미리 받은 것입니다. 아직은 다윗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반드시 주님께 앞으로 삼 년간 천국의 진리에 대해 더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게 되면 그동안 배웠던 말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결정적으로 오순절에 진리의 영인 성령이 강림하면 영적으로도 온전한 천국 시민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삶이 너무 은혜롭고 풍성해서 십자가 복음 안에 거하면서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도 그 은혜로 초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본문이 말하는 바는 예수 믿어서 신자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이 땅에서부터 주님을 머리로 모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해서 장차 들어갈 영광의 천국을 미리 맛보고서 주위에 선전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바꿔 말해서 제자들이 생업을 버리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던 일이 도덕적 종교적 차원의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인생이 아무런 소망도 없이 흑암의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생전 처음으로 일생을 두고 자기 전부를 걸고서 따라갈 의미와 가치가 있는 생명의 빛을 붙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단순히 당신을 종교적으로 섬기는 기독교인으로 살게 놓아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에 원했던 그런 참사람으로 바꾸어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당신과 거룩하게 동행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미 천국 시민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보호 인도해 줄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통치를 항상 실제로 받고 있기에 그 인생도 실제로 아름답고 진실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이전 삶과 주변 불신자들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세워주었다고 해서 모든 신자가 목사나 선교사로 직업을 바꿀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처음 제자들은 장차 승천하여서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을 예수님의 대리인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유대 랍비 방식으로 교육받은 그대로 주님과 똑같은 사역을 하면서 똑같이 좋은 소식을 온 천하에 선포해야 했습니다. 십자가 대속 구원이 완성된 뒤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아니라 지금 완전히 임했으므로,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순전하게 부르면 천국 시민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구원으로 간절히 초대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천국의 시민권을 받은 자들도 함께 모여 진정으로 서로를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나갔습니다. 그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이 땅에 결성된 천국의 모형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서 시샘이 나게 해 그 나라 시민을 계속 늘려 나갔습니다. 그 예수 운동이 염병처럼 강력하게 번져 나가서 그것을 막아설 세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것이 갈릴리 어부들의 새 직업이 되었고 이전의 생업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강권하지 않았으며 회심하여서 복음을 순전히 믿음으로써 자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 새로운 일은 오히려 너무나 큰 영광이요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며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오지에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사가 바로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가?

 

신자가 성경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 대로 따르는 것은 아주 선하며 신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온전해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 당신께서 신자의 일생을 주도해 주십니다. 그런 뜻을 구약 시대에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명백히 밝혔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삼하7:5~6) 하나님은 인간더러 당신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반대로 당신께서 언제 어디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보살펴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지금 제자들더러 생업을 포기하고 가진 전부를 당신께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따르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게 된다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현실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믿음의 가장 좋은 모습이 절대 아니며 오히려 가장 나쁜 모습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식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천국 같은 삶을 맛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늦추면 늦출수록 사탄의 족쇄가 더 강하게 조여질 것이므로 너희들의 손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세속 직업은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영적 직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신자만이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즘 말로 치면 사람 낚는 어부가 ‘본케’이고 현재 가진 세속의 직업은 ‘부케’인데 ‘본케’를 잘할 수 있게 하는 통로와 수단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신자는 천국을 가는 길에 함께 갈 자를 모집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자기 일생을 두고서 예수님을 묵묵히 따라가야 하고 주님이 평생을 동행하므로 자연히 그렇게 되며 또 그런 삶이 너무나 큰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천국 가는 길동무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정말로 아름답게 변하고 활기가 넘쳐야 하는데 정말로 주님만 순전하게 따르면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자기가 처한 현재의 환경과 행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굳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그럴싸한 직업이 아니어도, 천국의 빛을 자기 주변에 조금씩 비췰 수 있습니다. 

 

물론 일생을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지치고 고달프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연약해서 쓰러지고 옛사람이 되살아나 때로 죄도 짓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걸어가는 방향과 바라보는 최종목적지는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손에 힘이 빠지는 법도 없습니다. 주님이 아직은 유대교의 신앙에 머무는 제자들을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교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 낚는 어부로 기어이 바꿔 주었듯이, 우리도 반드시 당신의 영광된 일꾼으로 당당하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하게 확정된 미래이므로 우리는 지금의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주변 사람도 그 큰 기쁨에 동참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본문에 비추어 어떠한지 정말로 진지하게 재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실제로 천국을 향해서 매일 예수님과 동행하기에 현재의 삶과 모든 인간관계가 즐겁고 기쁘고 충만합니까? 아니면 주님 만나기 전의 유대인들처럼 교회 밖에서 나름대로 죄만 이전보다 덜 지으려고 노력하고, 교회에선 자기 고난을 해결하려고 열심히 기도 봉사하는 정도가 신앙생활의 전부입니까? 

 

(10/13/2024)


모루두개

2024.10.13 23:24:17
*.230.44.2

본캐의 정체성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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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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