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마10:1-7)
열두 사도의 선택
예수님은 당신의 공사역을 처음부터 열두 명의 제자와 함께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은 언제부터 몇 명으로 공동체를 결성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네 명을 처음으로 제자로 부르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꾸어주겠다고 약속한 후로 많은 제자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 일 년 정도 지난 후의 어느 날 주님은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서 제자 중 열두 명을 택하여 사도로 임명했습니다. (눅6:12-16) 그때까지 그 열두 명을 포함해 모든 제자에게 약속하신 대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본문은 그 배운 대로 처음 실습을 내보낸 열두 사도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틀림없이 이 열두 명은 여러 면에서 가장 우수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나중 행적을 보면, 특별히 베드로나 가룟 유다의 경우, 주님이 왜 그들을 뽑았는지 조금 의아해집니다. 우리로선 언뜻 이해하기 힘들어도 주님이 오래 기도한 후에 택했으므로 분명 당신만의 목적과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열두 명으로 한정한 뜻은 앞으로 이 땅에 세워질 이방인들까지 아우르는 당신의 나라는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계승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 새 나라의 백성들도 하나님과 모든 믿는 자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창12:1-3)의 동참자요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도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는 복의 근원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세상 땅끝까지 끝 날까지 전하라는 주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이 이 열두 사도들로부터 실현될 것입니다.
주님이 사도(使徒, apostle)라고 명명한 뜻부터 그렇습니다. 그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파견된 자’, ‘사자(使者)’라는 뜻의 히브리어 ‘살리아’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실현하라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보낸 자의 말을 대신 전할 뿐 아니라 그 권세도 함께 행사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실습 내보내는 열두 사도들에게 첫째로 귀신을 쫓아내고 고질병을 치유하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둘째로 더 중요하게는 그동안 당신께서 가르쳤던 복음 대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담대히 전파하라고 명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의 고을로 가지 말라고 명했다고 해서 그들을 구원 대상에서 제외하신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당시는 도보로 여행해야 하므로 첫 실습부터 굳이 멀리 가서 어렵게 전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누룩처럼 번져가야 하므로 주변의 가까운 사람부터 복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순절에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유다에서 출발해서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다시 그 원리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맺은 아브라함 언약은 물론이거니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동족에게부터 전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배반자 유다를 택한 이유
예수님이 당신을 배반할 줄 알고도 가룟 유다를 제자로 세운 일에 관해서도 너무 이상하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그를 제자로 뽑지 않았다면 주님도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을 것이며 유다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당시 주님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와 분노가 매우 극렬해서 유다가 배반하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십자가에 매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아니라도 제자 중에 누구라도 배반했을 것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스승을 세 번을 부인했고, 나머지 모든 제자도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나눌 때도 주님이 당신을 배반할 자가 있다고 예언하자, 모두가 혹시 자기가 아닐까 염려했습니다.(막14:19) 요즘 유행하는 MBTI는 사람을 열여섯 유형으로 나눕니다. 삶이 아주 단순했던 고대에 열두 명은 사실상 모든 부류의 인간을 모은 셈인데 그 중 반드시 배반자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자가 마침 유다였을 뿐입니다.
유다가 처음부터 배반할 작정을 했으면서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 유대인들은 주님께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켜 주길 열렬히 기대하다가 전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으니까 그 열망이 결국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으면 증오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유다도 같은 기대를 품다가 차츰 실망하고서 배반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그가 돈에 탐심을 가지긴 했어도,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그 비싼 고급 향유를 주님께 들어부어도 오히려 칭찬만 하니까(요12:4), 주님께 큰 배신감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이 사도로 세울 때부터 그가 나중에 배반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배반한 잘못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그에게 돌아갑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주님이 예언하자 절대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결국 자기 의도와 달리 그대로 실현되자 자신의 도덕적 가난함과 영적 비참함을 절감하고서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배반 예언이 분명히 자기를 지목하는 줄 알고도, 말하자면 마지막까지 주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계획대로 시행했습니다.
스승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자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는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으나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치유, 회복, 구원을 베푸신 죄 없는 메시아를 억울하게 죽게 만든 잘못을 자기 생명으로 갚은 것이 의로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인간이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죗값을 치르려 했으나 십자가 복음과는 정반대되는 인간 사회의 불완전한 윤리와 특별히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에 따른 충동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 삼 년간 천국 복음을 배웠으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려고 오셨다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궁극적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유다는 그분 앞에 진정으로 자기 죄를 참회하지 않고서 단지 인간 세상 앞에서 자신의 수치와 죄책만 지우려 한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십자가에 당신이 처형당하지만,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해 주었습니다. (마17:23) 그는 자신의 배반으로 그 처형이 시작된다는 점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서슴없이 기껏 노예 한 명의 몸값에 해당하는 은 삼십 냥에 스승을 팔아 버렸습니다. 십자가 처형 후에도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는 스승의 예언이 실현되는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사람을 낚는 어부 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신 공사역 내내 자기 뜻대로 주님의 능력만 이용해 볼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구약 예언의 실현
유다는 스스로 영원한 멸망의 길로 걸어 들어갔으나, 그럼으로써 메시아가 은 삼십 냥에 팔리고 또 토기장이의 밭이 죽음의 골짜기가 된다는 구약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슥11:12, 렘19:1~13) 유다 본인은 물론이고 그와 동조한 대제사장과 공회원들도 자기들이 그 예언을 실천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사탄에 미혹되어서 추악한 탐욕과 시기와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어쨌든 자신들의 자유의지대로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허용하고서도 당신께서 수백 년 전부터 선지자를 통해 계시한 내용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실현했습니다.
베드로가 호기롭게 십자가 처형을 적극 말리겠다고 나서자,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야단쳤습니다. 실제로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체포하러 온 관속들에게 과감히 맞섰으나 또 동일한 주님의 꾸중을 들었습니다. 인간적 의로움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에 어떤 영향도 끼쳐선 안 되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만 이뤄져야 했던 것입니다.
초자연적 지략과 능력을 갖춘 사탄은 베드로를 포함해 우매한 인간들을 조종하여서 예수의 메시아 역할을 십자가 처형이라는 무참한 실패로 끝나게끔 이끌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사탄은 너무 기뻐서 춤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다니엘이 예언한(단7:12,13) 마지막 날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자였습니다.
주님은 태초에 사탄을 만든 뒤 계속해서 통솔하고 계시는 하나님이기도 했기에,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오히려 사탄의 계략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창조 때 에덴동산에서 예고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창3:15), 모든 인간을 묶어놓은 죄의 멍에를 끌러주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사탄마저 자기 의지대로 맘껏 행하도록 놓아두고서도 태초부터 세운 삼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 타락할 줄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너무나 광대하고 완벽해서 모든 세대의 모든 개인과 모든 공동체의 자유로운 행동과 절대 모순과 상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힘과 뜻과 마음을 다하여 평생토록 경배하고 사랑하고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며, 또 그래서 환난 중에도 영광스러운 결말을 설레면서 기쁨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배반을 알고도 수제자로 삼은 것은 아무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의로워도 참 인간으로 온전히 살 수 없음을 입증해 주려는 뜻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를 택한 뜻은 물질적으로 공평하게 배분하여 가난을 없애고 세상 악인을 당장 일일이 벌을 주는 공의만으로 인간 세상의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나 유다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완벽하게 실현된 공의와 사랑의 구속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인간의 절망과 죽음은 도덕과 종교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그들이 스승을 부인하고 배반할 줄 알고도 택한 것입니다. 요컨대 이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복음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지옥행 기차를 타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한 제자 선택
예수님의 열두 제자 선택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베드로나 유다는 비교적 많이 논의 되어 왔으나 이 두 제자의 선택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세리 마태와 가나나인 시몬인데, 복음서를 저작한 마태는 비교적 잘 알고 있으나 시몬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시몬을 ‘가나나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셀롯’(Zealots)인 열심당원(눅6:15, 행1:13)을 뜻합니다. 열심당은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해서 유다 독립을 꾀하려는 정치적 종교적 열망이 강한 집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숫자와 무력으로 너무 열세이므로 로마 제국의 고관을 암살하거나 그들 시설에 테러를 가하는 일종의 비밀 결사 조직이었습니다.
반면에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로마 당국에 협조하여 세금을 대신 거두어 주며 로마로부터 봉급을 받는 세리였습니다. 로마는 제국의 백성에게 인두세(人頭稅)를 거두면서 재정 능력에 차등을 두지 않고 일률적으로 똑같이 매겨서 가난한 서민들의 원성을 많이 들었습니다. 세리는 또 유다 국경선의 세관에 앉아서 수출입 관세를 매겼는데 자기 임의로 고율의 세금을 매기고 차액을 착복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연히 돈에 눈이 어두워서 동족을 팔아먹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바리새인들은 아예 백성들더러 세리와 상종하지 말라고 금했습니다. 아니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자연스레 세리를 그렇게 대했습니다.
다른 열한 명의 유대인 제자들로선 그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았을 것이며, 특별히 셀롯 시몬으로선 기회만 닿으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을 것입니다. 유다의 별칭 가룟이 이카리옷이라는 지역 이름을 뜻한다고 하나, 일설에는 셀롯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셀롯이 아니라도 가난한 자를 염려했던 유다 또한 마태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원래 원수보다 자기들을 배반하고 원수에게 빌붙은 동족이 더 미운 법입니다.
그 외에도 출신 성분이 다른 열두 제자들 사이에, 가뜩이나 죄에 찌든 연약한 인간인지라, 이런저런 알력과 시기가 생길 것이라고 예수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주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주님부터 그들을 편애하고 특혜를 주는 듯한 인상을 다른 제자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곧바로 제자로 지목해서 택했고, 그가 치부한 돈으로 동족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식의 언질도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의도적으로 서로 시기하다 못해 원수처럼 미워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든 셈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하마스 테러분자와 이스라엘 군인을 섞어 놓은 꼴인데, 주님의 숨은 뜻이 과연 무엇일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갈등을 조작한 예수
그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처음 약속하신 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꿔 주려는 것인데, 주님의 이후의 가르침에 드러납니다. 산상수훈에서부터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라고 가르쳤습니다. 마태는 산상수훈 후에 자기를 제자로 택했다고 기록하지만(9:9), 마가(2:13-14)와 누가(5:27-28)는 그 일을 사역 초기라고 말합니다. 그 순서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산상수훈 같은 가르침을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공사역 3년 내내 반복했다고 봐야 합니다. 말하자면 마태가 있는 자리에서 시몬을 비롯한 모든 제자가 그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가장 악한 자로 간주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악인들도 자기들과 신분 계급 직업 수입 등이 같은 동료나 이웃은 얼마든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고, 본능적으로 우러나오는 동료애나 동류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짐승도 그런 사랑을 하므로 그것으로만 그치면 짐승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7)라고 덧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를 배척하고 온갖 우상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율법을 몰라서 세상 쾌락과 죄악을 즐기는 이방인을 아예 하나님의 저주받은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악한 자인 이방인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문안하며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 사회의 도덕과 종교에 따라 배척받는 세리와 이방인도 사랑할 수 있어야만 참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유대인끼리만 그것도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과만 문안하고 사랑하면 너희가 그렇게 저주하는 세리와 이방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자 당신의 제자로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 지금 행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랑을 당신의 공동체 안에서부터 먼저 연습 실현해 보라고 유대인의 원수인 세리와 최고 애국자인 열심당원을 함께 묶어서 제자로 택한 것입니다. 주님부터 세리와 이방인과도 식사하며 그런 사랑으로 교제하는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몬으로선 처음에는 마태가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장 삭개오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그의 집에서 유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눅19:5) 그날 삭개오는 주님의 큰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재산을 가난한 자를 위해서 쾌척함으로써 주님께 칭찬과 함께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시몬을 비롯한 모든 제자가 스승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마태를 죽이기는커녕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열두 명을 함께 모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세울 당신의 나라에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 혈연, 재물, 권력, 지성, 신분, 직업, 민족 등으로 전혀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참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게 하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율법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라고만 했지,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인데, 지금도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서 보듯이 세상에선 원수 갚는 일은 아주 의롭다고 여깁니다. 율법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했고,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으므로 원수도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에 넣으라는 것입니다.
실패한 제자 교육
불행하게도 주님이 삼 년간 그렇게 공들여서 가르친 것이 전혀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세리 마태와는 큰 충돌 없이 지냈습니다. 아마도 마태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일을 그만두려는 마음이 들었으나 딸린 식구가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실토했을 것입니다. 제자들로선 어쨌든 그 수입이 좋은 세리 직업을 미련 없이 그만두고 주님을 따랐고 또 그 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어쨌든 열두 제자들은 같은 신학교를 다니는 동기생인 셈이라 대놓고 싸울 수는 없었으나 이런저런 갈등이 내재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도 누가 더 큰지 다투었습니다. 심지어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이 주님 나라의 보좌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20:20-21)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주님을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줄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은 남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자신하고 또 신분과 권력으로 사람을 차별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삼 년간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으나 완전히 허사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실은 이 또한 주님이 바랐던 대로 된 것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로만 한 죄인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제자들은 십자가 후에야 진심으로 회심하고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은 신분, 직업, 지성, 재물, 권력, 집안, 민족 등으로는 그 우열을 절대 나눌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따라서 두 부류로만 나눠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참 인간으로 바꾸어주거나 아니면 끝까지 썩어질 인간으로 남게 되는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십자가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면 삼 년간 가족처럼 지낸 스승도 베드로처럼 부인하거나 유다처럼 배반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이 진심을 담아 가르치고 실제 삶과 사역의 본으로 보여주어도 모든 제자가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말로 해서 알아먹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전부 악한 것뿐인데, 어폐가 있지만 삼 년에 걸친 역사상 최고였을 주님의 가르침도 제자들을 제대로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만 오합지졸이 아닙니다. 누가 그분의 제자가 되었어도 모두 철저하게 패배했을 것입니다. 수백 명을 당시의 의인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원, 바리새인, 율법사만으로 채워도 골고다 십자가 앞에선 스승을 배반하는 자, 도망가는 자, 부인하는 자, 세 부류로만 나뉠 것입니다.
사람을 낚으려면?
인간을 온전히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사탄의 노예로 묶여서 영적 시체가 되어 있으므로 성령이 새사람으로 바꿔 주는 내면의 재창조가 없이는 인간은 절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했으나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이나 그를 사랑으로 품어주자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인간적 도덕으로 세상의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겠다는 이전의 자기 믿음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죄악의 괴수로서 폭압적인 원수 로마만 물리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으나, 정작 문제는 스승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로마가 극도의 죄악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도 그들보다 못하지 않는 죄인이라는 점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지혜의 영인 성령 세례를 받자 비로소 예수님이 스스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한 말씀의 의미가 온몸으로 체험되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성전에서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만 구했으나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더 큰 복을 구한다는 그 비유의 뜻도 온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지난 삼 년간 자기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를 자랑하면서 알게 모르게 멸시했던 세리 마태보다 전혀 의롭지 않았다고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부터 죽여서 낮추어야만 다른 이를 사랑으로 섬기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 번 배반할 줄 알고도 자기를 끝까지 수제자로 대우해 주신 스승의 은혜에, 이전에 대제사장 관저에서 하녀 앞에서 흘렸던 눈물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드디어 성령에 사로잡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고 실제로 곧바로 성전에서 삼천 명을 낚았습니다.
오늘날의 신자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전파, 뜨거운 기도, 사랑으로 섬김, 다 필요하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에서부터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 하고, 신자들의 삶에서도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구별해선 안 됩니다. 부흥하던 교회가 나눠지거나, 흔히들 누구 꼴 보기 싫어서 교회 가지 않겠다는 까닭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의 믿음은 열심당원 시몬처럼 우월하므로 세리 마태 같은 자들과 함께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도 예수님도 모르는 불신자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십자가에서 원수의 죄까지 짊어지신 예수님만이 모든 인간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신자 자신부터 하나님의 원수였음에도 골고다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용서받은 자입니다. 여전히 단지 용서만 받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도 인간 원수를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최소한 용서하고서 그를 위해 기도는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안에서 서로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신자니까 도덕적 선을 행해야 하거나, 주 안에서 같은 형제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천하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모두가 모두에게 쉽게 원수가 될 수 있기에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신자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에게 원수가 되어서 큰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너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구원의 취소는 아님, 가르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 각자가 속한 교회와 직장은 물론 가정 안에도 너무 싫은 사람들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정말로 진지하게 잘 새겨보길 원합니다.
(10/27/2024)
저희 부부가 교회를 떠나게 하고 아직까지 미워하며 내려놓지 못했던 그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 저도 용서받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싫은 사람들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제가 되게 도와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