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7:1-5) 예수님은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다.

새롭게 읽은 신약성경 (14)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1-5)

 

산상수훈의 주제

 

최근 한국에서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회자(膾炙)되고 있는데, 내가 간통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그러면 불륜이라는 뜻입니다. 정치판에서 오리발 내며 거짓말하는 데서부터 발단하여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고 있습니다. 자기 잘못은 부인하는 것을 넘어서 거꾸로 선하게 포장하고 남의 잘못은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정죄하는 위선을 풍자하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본문에서 그런 외식적인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눈의 들보부터 빼라고 말했습니다. 신자는 남의 잘못을 고쳐주기 전에 자기 잘못부터 엄격하고도 정확하게 따져서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에게 남아 있는 잘못 때문에 남을 비판했던 그대로 자신이 비판받는다고 합니다. 

 

둘째는 외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면 자연히 자기가 그보다 선하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절대로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태도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 들보를 먼저 본 후에 상대에게서 티끌을 빼라고 했습니다. 자기부터 먼저 고친 후라면 그의 잘못을 알려 주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셋 다 초점은 자신부터 고치라는 것에 모입니다. 

 

그런데 이런 권면은 다른 종교나 일반 윤리에서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단순히 윤리적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도덕을 무시해도 좋다는 반율법주의를 가르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신 분이며 그분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인지라 믿음과 상관없이 당연히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불신자들도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성경에서, 아니 모든 종교 중에 최고 수준의 도덕률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성육신이나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교파에선 심지어 산상수훈만이 성경에서 신자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절대적 계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잘 살펴보면 산상수훈 전부가 표면적으로는 윤리적 문제를 다루지만 사실상 천국에 관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지막에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고 하면서,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자만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고(24-27절) 결론을 내립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란 믿음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의 구원 진리에 두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산상수훈을 다 듣고 난 후의 청중들의 반응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8, 29절) 서기관들은 윤리적 종교적 관점으로만 율법을 가르쳤는데, 만약 주님도 그들과 같은 맥락에서 조금 더 잘 가르쳤다면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경도 없고 신학은 물론 교리도 몰랐으나 주님의 말씀이 천국을 가르치는 영적인 설교였다고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성경 66권을 소지하여 통독하고 있고 교회에서 체계적으로 교리와 신학도 배웁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가르치는 산상수훈에 포함된 본문에서도 내로남불과는 다른 차원의 교훈을 찾아서 자기 믿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내로남불이다. 

 

우선 주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칠 때 시적인 수사법을 많이 동원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이라 요점을 간결하며 분명하게 표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본문에서도 주님은 문장끼리 ‘라임’(rhyme)이 서로 맞아떨어지도록 했고 무엇보다 가장 강조하려는 주제를 맨 앞에 두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어감을 매끄럽게 하느라 어순을 바꾸어서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이 앞에 나오지만, 원문은 비판하지 말라가 먼저 나옵니다. 그것도 ‘말라’(not)라는 부정사로 시작하는 도치법을 사용했기에, 원문을 직역하면 “하지 말라 비판을!”이 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첫째가는 주제는 ‘너희는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모든 제자와 청중을 뭉뚱그려서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로 받았습니다. 청중 중에는 아직 주님을 믿지 않은 자도 많았을 것이므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대놓고 ‘내로남불’의 외식을 하는 일부 사람들만 꾸짖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모든 인간은 절대로 남을 비판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신 셈입니다. 

 

자기 허물이 더 클 수 있으니까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서 남들부터 비판하지 말라는(3-5절)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서로 다툼이 생기면 내 탓이라고 먼저 겸손히 인정하고서 미처 몰랐던 자기 허물부터 되돌아보라는 가르침에 그치지도 않습니다. ‘너희’라는 대명사가 의미하듯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내로남불’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뒤 문맥으로 따져도 본문이 윤리적 가르침을 넘어선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주님은 현실적 궁핍만 해결하려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해지면 불신자들도 나름 기도하므로, 천국에 입성할 신자는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 먹고 마실 것들은 채워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6절)도 천국에 관한 내용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은 당연히 ‘내로남불’ 같은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천국 복음’입니다. 개나 돼지도 단순히 유대인들이 율법을 모른다고 죄인이라고 멸시했던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으로 인해서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하는 불신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선교 훈련에 내보면서 천국 복음을 받지 않으면 미련을 갖지 말고 그 집이나 성을 떠나고 발의 먼지를 털라고 가르쳤는데,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마11:14) 바울은 지성적인 사람들이 세상 진리를 토론하길 즐기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심히 전도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지역에서처럼 선교하려고 더 머물지 않고 곧바로 그곳을 떠나버린 까닭이기도 합니다. (행17:16-34)

 

이처럼 본문은 앞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과, 뒤의 천국 복음에 관한 말씀 사이에 위치합니다. 주님이 느닷없이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말씀을 하실 리는 없으므로 본문 또한 같은 맥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이 남을 비판하지 않는 문제를 천국과 연결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인간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모든 사람이 ‘내로남불’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영악하고도 치사하게 외식하는 위선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불신자 중에도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겸손해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도 많으며, 거꾸로 신자 중에 성경적 지식을 자랑하며 소속 교회의 교인들마저 대놓고 무시하는 자도 있습니다. 

 

주님의 모든 교훈은 인간이 외적으로 실현하는 윤리 측면보다는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에 관해서 다룹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는 남들보다 아주 선하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남들이 자기보다 선하지 않다고 판단되므로 항상 자기 들보는 뒷전이고 남의 티끌만 빼려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려는 것이 인간에게 하나의 본성처럼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 잘못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들보와 티끌에 비유했을 뿐이지 남을 비판하는 일에 우열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의 참뜻이 죄에 질적 양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하려는 심보는 항상 똑같다는 것인데 그와 같은 표현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인지라 상식 수준의 윤리의식은 누구나 소지합니다. 선행을 하고 나면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고 또 죄를 범하면 내가 악하다고 여깁니다. 선행과 악행이 교차하니까 모두가 자기 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의 악마와 천사 중에 누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따져보라고 하면 그 대답은 모두 똑같을 것입니다. 천사가 악마를 이긴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악마가 천사를 더 자주 더 크게 이겼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사실은 전혀 착하지 않은데 스스로는 착하다고, 최소한 남들보다는 더 착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는 고백도 사실은 자신의 본성적인 죄악을 감추려는 위선일 뿐입니다. 내가 범한 잘못은 내가 아니라 내 속의 악마가 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선행은 자기 속의 천사가 아니라 남보다 의로운 자기가 행했다고 자랑합니다. 

 

결국 모든 인간이 자기 눈에 들보를 갖고 있으며 그 들보에 우열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으니까 남을 비판하게 되면 바로 그 비판한 일 때문에 본인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흙탕에서 뒹굴며 놀았던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더럽다고 말하는 그런 꼴입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은 죄인일 뿐이지 절대로 더 악한 죄인과 덜 악한 죄인으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뜸 비판하지 말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내로남불 하려는 본성이 심겨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해도 이 근본적인 죄성 때문에 상대를 비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로남불은 자기 속에는 천사가 남의 속에는 악마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잣대로만 다른 사람의 선악 간을 자기중심으로만 생각, 판단, 결정, 시행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착하니까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윤리적 잣대는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 잘못을 범해도 실수였을 뿐이거나, 금방 고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또 때로 잘못을 범해도 자기 존재 자체는 의로우니까 굳이 개별적 행동을 일일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죄의 실상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자연인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이 바로 이런 상태에 처해있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포악한 성격을 갖고서 그 성격이 이끄는 대로 죄악을 즐기면서 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서 스스로는 아주 착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해도 의로운 자신이 했으므로 죄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고 그런 식으로 계속 죄를 지으니까 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아담이 사탄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서 먹자, 하나님이 어떻게 걱정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아담이 선악을 하나님만큼 알게 되었다면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상태로 영생하지 못하도록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것이 선을 더 정확하고도 깊이 알아서 삶에 실현할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기와 남에게 적용할 선악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바로 절대적 선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선악에 대해서 그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이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당신처럼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탄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보다 더 선해지고 좋아지는데 하나님이 시기해서 먹지 못하게 했다고 아담을 유혹했습니다. 아담이 그 꾐에 넘어갔더니 선악 자체를 하나님처럼 정확히 판단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선악을 적용하여 실행하는 경로와 방식만 하나님처럼 스스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너무나 교묘한 거짓말이자 속임수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속으로 하나님 그분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완전히 제외해 버렸으니까 자연히 자기만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하게는 자기를 그렇게 최고로 선하게 높이려니까 절대적이고 지고의 선인 하나님마저 죽여버린 것입니다. 아담은 곧바로 하나님께 조건 없는 용서를 받아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그의 후손 모두는 사탄의 교묘한 거짓말에 오염되었습니다. 자신이 자기의 유일하고도 절대적 주인이 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물과 사안을 자기중심으로만 판단하고 더 나아가 자기는 유일하게 혹은 최고로 선하니까 모두가 ‘내로남불’ 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고, 남에게는 관용적 태도를 보이라는 정도는 인간 스승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으므로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 말씀대로 남에게 비판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그래서 싫은 사람을 상종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합니다. 주님은 그러니까 앞에서 인간의 그런 태도를 크게 야단쳤던 것입니다. (마5:46) 

 

포기하지 않은 예수님

 

주님은 지금 사실상 모든 인간이 외식하므로 다른 사람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 셈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일상적 관계를 통해 서로 교제하고 섬기는 것을 금지하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심지어 크게 존경받는 영성이 깊은 목사라도 인간에게서 완전한 선이 나올 것은 전혀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인간에게 자기 삶과 인생을, 특별히 영적 상태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려고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진짜 영적 실상을 정확히 알면 인간은 서로를 믿고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인자로 계실 동안 어떤 사람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2:24-25) 주님은 모든 사람의 속을 아시므로 사람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았고 또 다른 이가 당신에 대해 변호 증언해 주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이 아셨던 사람의 속은 당연히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마15:19)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의 가르침 대로 거짓 증언과 비방도 포함되었습니다. 만약 사람의 마음에서 사람을 근본적으로 의롭게 바꿀만한 능력이나 소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주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고도 서기관을 통해서 율법을 가르치고 훈련 시키면 됩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직접 오셔서 가르치신 내용부터 서기관과는 전혀 달랐지 않습니까? 

 

주님은 안타깝게도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마지막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람의 변호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일절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단지 도덕 선생이었다면 당신의 대적들을 고쳐보려고 끝까지 선하게 말로서 권면하고 또 당신에 대해서 변호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므로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기에 아무 말씀 없이 그냥 죽어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을 전혀 믿지 못해도 절대로 인간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웠고 나아가 그럴수록 더욱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모두가 자기는 선하다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애처로웠겠습니까?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지체 부자유 아들은 자기가 그런 줄은 전혀 모르는데, 어쨌든 겨우 몇 발 걸었고 또 구구단 외우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그리고선 스스로 아주 능력 있고 똑똑하다고 착각하고 부모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고 우기는 경우와 같습니다. 범사에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데도 자기 맘대로 놀게 놓아두지 않는다고 자기 부모가 아니라며 대들면 부모로선 더더욱 애처롭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구약시대에 많은 선지자를 계속 보냈어도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극소수의 남은 자들 외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선지자들을 거의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무 말 없이 죽으셨지만, 인류에게 던진 침묵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사탄에게 속아서 너희만 높이려다 보니까 너희가 의롭다고 너희 스스로에게 완전히 속고 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 선을 네가 정하고 네가 바로 절대적 선이라고 끝까지 고집한다. 과연 그러한지 나의 이 십자가 죽음을 보고 판단해 보라. 이제 내가 십자가에 죽어서 사탄이 너희에게 지운 멍에를 완전히 깨트려 부수고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상태로 돌려놓겠다. 그 약속의 보증으로 사흘 만에 부활하고 또 너희를 위로할 성령을 보내주겠다. 그러니 제발 스스로 의롭다는 착각을 버리고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고 조건 없는 이 사랑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주님이 당신께서 사람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 앞에 성경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22)고 증언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주님이 생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비로소 성령의 간섭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이며, 그분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은 은혜의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가?

 

신구약 성경 66권은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모든 이가 원죄 아래 사탄에 미혹되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의롭다고 믿는 완악한 고집을 예수님께서 뜯어고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전혀 믿지 않았으나 너무나 불쌍해서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아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인간 부모도 장애아가 자식 중에 가장 사랑스럽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합니다. 

 

자기 들보는 절대 스스로 보지 못하는 영적 장님인 인간을 고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며 그것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영적 시력을 회복시켜 줄 수술을 하는 의사,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똑같이 눈에 들보를 갖고 있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고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중생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 구원자여야 했기에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또 그런 구원의 진리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모습으로 직접 가르쳐야 했기에 완전한 인간으로 모두가 스스로 속고 있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작 강조하는 내용이 따로 있는데 맨 끝에 나옵니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신자는 너무나도 당연히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되며, 자기 눈의 들보를 완전히 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밝히 볼 수 있기에 형제 눈 속의 티를 ‘볼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빼리라’고 했습니다. 남의 눈에도 티끌이 아니라 들보가 있지만, 신자더러 그를 위하는 마음으로 티끌이 있다고 진심으로 권면해 주는 것을 넘어서, 자기처럼 그 들보를 온전히 보고 뺄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먼저 돌아온 신자가 그들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먼저 자기 착각에서 벗어난 신자더러 불신 이웃에게도 그 은혜를 증거하여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초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도 함께 도래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로 이 땅에 세우게 할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 상호 비판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자기의 영적 실상을 전혀 모르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니까 서로 비판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말씀부터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21세기 이 세대에, 사실은 인간이 생존하는 한에는 모든 세대에, 정확히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두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바로 절대적 선이라고 고집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자기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남들에게 비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이가 따라야 할 절대적 선과 악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지금은 하나님을 완전히 죽여버린 세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좋은 대로 행하는 것을 다른 인간이 절대 비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작금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에 대해 끝까지 코웃음치고 기독교를 우매하기 짝이 없는 광신자들만 따르는 케케묵은 종교라고 비난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예수님이 역사상 최고의 성인이었고 그 가르침도 최고의 도덕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래 놓고 자신의 판단과 자신이 최고의 선이라고 우깁니다. 방금 예수님이 최고의 선이라고 해놓고 또 자기가 최고의 선이라고 하니까 자기가 예수님의 자리를 꿰찼거나 그분보다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을 전혀 믿지 않았고 또 그래서 당신께서 십자가에 말없이 죽으시는 길 말고는 인류에게 소망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지금 절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나 세상 사람과는 정반대의 이유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니까 그래선 안 된다고 하고, 주님은 모두가 본성적으로 악하니까 그래선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절대적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 거짓입니다. 누구도 예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롭고 지혜롭다고 우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모두가 사탄에 미혹되어 자신에게 속아서 거짓을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의 잘못을 탓하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것도 모르는 영적인 봉사입니다. 현세대의 영적 흐름을 살펴볼수록 신자들은 주님처럼 그들이 너무 어리석고 안타까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이전에는 내로남불의 본성 때문에 남을 심심찮게 비판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원죄의 잔재인 줄 성령의 간섭으로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죄로 타락해 진흙탕이 된 이 땅에 함께 뒹굴고 있는 이웃을 비판해선 절대 안 된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비판 대신에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사탄에 미혹되어 스스로 자기가 가장 의롭다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 십자가 은혜를 증명하고 있습니까?

 

(9/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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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6) [2]

(왕하 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6) “그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소년이 이르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나이다 예후가 이르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누구에게 하려느냐 하니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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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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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1]

(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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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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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5) [2]

(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r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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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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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4-20) 참 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6) [1]

(막1:14-20) 참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6)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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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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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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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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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18-25) 원색적 복음이 실종된 기독교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5)

(고전1:18-25) 원색적 복음이 실종된 기독교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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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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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5:9-14) 행위 구원으로 변질된 믿음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3)

(왕하 5:9-14) 행위 구원으로 변질된 믿음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3)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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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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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1-5) 예수님은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다.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4)

(마7:1-5) 예수님은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다. 새롭게 읽은 신약성경 (14)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보라 네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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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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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6:11-13)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다고 확신하는가?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2)

(창16:11-13)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다고 확신하는가?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2)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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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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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6:7-10) 살피시는 하나님과 눈물 흘리는 하나님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1) [1]

(창16:7-10) 살피시는 하나님과 눈물 흘리는 하나님 새롭게 읽은 구약 성경 (11)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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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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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8:1-6) 하나님이 숨겨둔 변절자가 되어라.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0) [2]

(왕상18:1-6) 하나님이 숨겨둔 변절자가 되어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0)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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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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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5:1) 신자가 믿은 후 가장 먼저 행할 일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3)

(롬5:1) 신자가 믿은 후 가장 먼저 행할 일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3)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신자로서 첫걸음 예수를 믿고서 교회에 출석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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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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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0:22-25) 두 얼굴을 가진 성령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2)

(행20:22-25) 두 얼굴을 가진 성령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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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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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9-11) 서원은 악하니 하지 말라.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9) [2]

(삼상1:9-11) 서원은 악하니 하지 말라.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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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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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8:1-6) 성육신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1)

(행28:1-6) 성육신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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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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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7:5-7) 기독교 부흥의 최고 비결 -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8)

(삿7:5-7) 기독교 부흥의 최고 비결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8)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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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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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23-29) 하나님의 비전을 최대한 줄여라, -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7)

(신3:23-29) 하나님의 비전을 최대한 줄여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7)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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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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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3:10-16) 구원의 확신이 없는 진짜 이유 -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0)

(빌3:10-16) 구원의 확신이 없는 진짜 이유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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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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