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5:9-14) 행위 구원으로 변질된 믿음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3)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5:9-14) 

 

아람 왕 같은 나아만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준 일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기분이 상해서 화를 내었으나 생각을 고쳐먹고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하나님이 깨끗이 낫게 해주었다고 이해합니다. 

 

이는 조금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만은 믿음으로 순종했기보다는 마지못해서 순종하는 척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어쨌든 순종한 것은 사실이고 결과도 하나님께 치료받았으므로 복잡하게 따질 것 없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건전한 믿음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으로 늙은 왕이 자기들 신전에 들어갈 때 그의 손을 잡고 의지할 정도로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지휘하는 군대 장관은 왕에게 모반하기 가장 좋은 위치인데도, 왕이 자기 몸을 손수 직접 의탁할 정도면 그를 가족처럼 믿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아람에선 왕 다음의 이인자 격이었고 당연히 권력, 부, 명예를 다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병환자였는데 영어로 leper라고 번역했으나 살점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는 한센병은 아닙니다. 한센병이었다면 왕이 신전에 들어갈 때 그의 손을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병은 대체로 심각한 악성 피부병을 뜻합니다. 

 

부족할 것이 전혀 없었던 나아만인지라 국내는 물론 인근 나라까지 수소문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치료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당시로선 치유할 수 없는 피부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 온 자기 아내의 여종이 사마리아의 한 예언자를 찾아가면 나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여종은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엘리사가 베푼 이적들도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으로선 여종의 말에 솔깃해져서 왕에게 사마리아 방문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왕은  흔쾌히 허락하면서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이 치료받을 수 있게 협조해 달라는 편지와 함께 왕에게 줄 많은 예물도 하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으로선 아람 왕의 편지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아만의 병은 당대의 최고 의술과 민간요법과 아람 제사장들의 신탁을 다 동원했어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에서도 당연히 치료하지 못할 것인데 그것을 구실로 삼아 침략해 올 모략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모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준 엘리사의 권능을 이미 한번 경험했으나(왕하3장), 불치병의 치유까지 가능할지는 아직 몰랐던 것 같습니다.

 

왕이 아람 왕의 편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크게 염려한다는 소식이 엘리사에게 전해졌습니다. 왕에게 나아만을 자기에게로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절)라고 확언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아만은 말을 타고 부하들을 거느린 아주 거창한 모습으로 엘리사의 집 문 앞까지 왔습니다. 

 

너무 교만한 엘리사

 

그런데 엘리사의 반응이 나아만의 기대와 너무 달랐습니다. 예언자는 집안에 틀어박혀서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고 사환을 보내어 근처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는 말만 전해주었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이 그 왕의 편지를 갖고 왔으면 왕을 대신해 온 셈인데, 문전박대하는 것은 무례하다 못해 큰 모욕이라 크게 분노했습니다. 당장 엘리사를 쳐 죽이고, 이스라엘 왕이 염려한 대로 그것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도 됩니다. 

 

나아만이 분노한 이유가 자기는 물론 아람 왕까지 홀대하는 상식 밖의 결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람의 선지자 주술사 제사장들은 자기를 한 번도 무시하지 않고 매우 공손히 대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믿고 따랐던 아람의 신들도 자기의 요구에 맞춰주었는데 엘리사와 이스라엘의 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도 자기들의 신들에게 온갖 치성과 제물을 바쳐서 그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애를 씁니다. 인간 세상의 고난 불행 재앙 등이 특정 지역과 인생살이의 특정 영역을 관장하는 신들이 분노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 신들의 존재 목적은 오직 인간의 현실 삶에 형통과 풍요를 갖다주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런 목적이 잘 달성되기 위해서 이방 족속들은 최대 최고의 제물을 자기들 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들의 신들 쪽에선 인간들에게 바라는 바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 신이 자기 인생에 바라는 바를 가르쳐 주면 내가 그대로 따르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우상은 인간이 스스로 위로받으려고 인간이 고안해 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세 십계명의 둘째 우상 금지 계명은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로 시작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엄격히 금지한 것입니다. 

 

인간이 너무 어리석지 않습니까? 자기들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환난에서 구출 받으려고 여러 신들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리고선 자기들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자기들이 깎아서 만든 조각상들 보고 당장 해내라고 떼를 씁니다. 그 신상들이 먹지도 못하는 제물과 사용할 수 없는 물건들을 잔뜩 바치면서 그럽니다. 무생물 조각상인지라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실존하지 않는 허상이라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사실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배후의 음흉한 사탄이 때때로 주술사를 통해 큰 능력을 발휘해 우매한 인간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줌으로써 마치 우상 신이 그렇게 한 양 미혹시킨 것입니다. 

 

엘리사에겐 나아만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절)라고 자신이 분개한 이유를 정확히 밝혔습니다. 신에게 소원을 의탁하는 행위를 하려면 반드시 엄숙하면서 가시적으로 거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들 주술사나 제사장의 그런 외식적 행위와 관습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단지 말 한마디를, 그것도 직접 대면하지 않고 사환을 시켜서 전하기만 했습니다. 나아만에겐 엘리사가 마치 신처럼 행동하는 양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그로선 자기를 무시하는 엘리사의 교만한 태도도 문제지만, 자신이 믿고 있는 신(神) 관념과 너무 달라서 도무지 엘리사를 믿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요컨대 엘리사가 인간의 요구에 따라서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눈에 보이게끔 치료하지 않아서 화를 낸 것입니다. 

 

마법의 물 요단강  

 

거기다 엘리사는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너무나 평범한 치료법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미지근한 물과 같다고 꾸중한 데는 근처의 약효가 있는 온천물이 그 배경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질병의 종류나 증세가 단순했기 때문에 치료 효능이 있고, 특별히 피부병을 낫게 하는 물들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나아만도 소문난 온천이나 강물을 다 방문해 봤으나 치료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적국이나 다름없는 사마리아의 한 선지자의 집 문 앞까지 자존심을 죽여가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언뜻 흙탕물처럼 탁하고 개울보다 그리 크지 않은, 실제로 지금도 요단강 대부분이 그러함, 귀찮게끔 강물에 무려 일곱 번이나 목욕하라고 명합니다. 

 

그는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12절)라고 크게 화를 내면서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강물에 목욕만 할 것 같으면 훨씬 깨끗하고 크고 또 때로 엄청나게 범람해서 그 강에 있는 신들이 화를 낸 것 같은 다메섹의 강들이 차라리 낫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런 강에서 많이 씻어봤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약효라곤 전혀 없어 보이고 또 신이 살 것 같지도 않은 구정물에 굳이 왜 내가 몸을 담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하들이 치료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귀찮고 힘든 일도 해야 하는 판국에 잠깐만 참으면 되니까 어쨌든 시도라도 해보라고 간곡히 권했습니다. 부하들이 엘리사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하들도 엘리사의 거만한 태도에 함께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료법이 너무 간단하니까 그대로 해보고 효과가 없으면 죽여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나으면 너무 좋고 낫지 않으면 합당한 조치를 하면 되므로 어차피 손해 볼 장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만도 부하들의 권면에 일리가 있어서 밑져야 본전 식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하찮은 방식이었지만 여호와의 선지자가 말했으니까 믿음으로 순종해 보자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진술을 잘 따져보면 나아만이 요단강에 자기 몸을 담갔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꿔보는 그런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14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대로 따랐을, 원어의 뜻도 그러함, 뿐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 몸을 잠그니’라고 합니다. 한 번 두 번 물에 들어갔다 나올수록 몸이 점차 깨끗해진 것이 아니라 일곱 번째 담그고 나오니까 단번에 아기 피부처럼 확연히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일곱 번 물에 몸을 담글 때까지는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그의 분노 게이지도 계속 올라갔을 것입니다. 처음 몇 번은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가 일곱 번째는 역시나 하고 물에 잠겼을 것입니다. 구정물에 불과한데 엘리사가 자기를 완전히 갖고 놀았다고 여기면서 물에서 나가면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단강물에 약효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몸을 담글수록 조금씩 변화가 있어야 했고 성경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의미를 언급했을 것입니다. 또 그러면 완전히 깨끗해진 후에 나아만과 부하들이 서로 앞다퉈 강물을 병에 담기 바빴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그 땅의 흙만 노새 두 마리에 잔뜩 싣고서 돌아갔습니다.(17절)  

 

참 선지자 엘리사

 

나아만은 마지막 일곱 번째 몸을 담그고 일어나는 순간 피부가 새하얗고 부드럽게 변했음을 한눈에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치료는 약효가 전혀 없는 강물이 아니라, 강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모든 인생사를 주관하는 엘리사가 믿는 신에 의해 일어난 기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선 아람에서 해왔던 관습대로 또 진심으로 감사해서 엘리사에게 가져온 풍성한 예물을 바치려 했습니다. 엘리사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거절했는데, 나아만이 치료되고 아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막으려고 치료해 주었을 뿐이지, 개인적인 유익을 바라고 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아만은 다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처음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라고 장담한 대로, 나아만은 참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니까 겸손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참된 종일 수밖에 없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강물과 관계없이 말씀 한마디로 기적적인 치유를 일으켰습니다. 수시로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해주면 병이 낫는 베데스다 연못에 도무지 들어갈 수 없었던 불구자를, 예수님이 그 연못 물과 상관없이 말씀 한마디로 순간적으로 완전히 치유해 준 사건(요5:1-18)의 예표입니다.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강물에서 일곱 번째 몸을 일으키면서 완전히 깨끗하게 된 몸을 보고서 나아만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지금까지 치료를 위해 행했던 모든 일이 헛되었고 또 자신이 자랑했던 모든 사회적 지위가 엘리사의 사환보다 의미가 없다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당장 나병환자임에도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아람의 이인자인 군대 장관이 되었다는 자부심부터 산산조각났을 것입니다. 세상 최고의 권력 재물 명예 지성을 지녔다고 한껏 자랑했으나, 엘리사가 아니라 자신이 오히려 너무나 교만하고 완악한 자였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람의 주술사와 제사장들의 엄숙하고 거창했던 모든 신탁은 허공에 메아리로 사라졌으나, 엘리사의 말 한마디가 지난 허송세월을 일순간에 완벽하게 보상해 주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바울과 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7,8) 여기서 그리스도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꾸면 나아만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이스라엘과 이방 족속도 숫자는 적어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바울도 자기가 그렇게 미워하며 분노했던 예수님에 의해서 삼 일간 죽은 것과 다름없다가 다시 그분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자랑하던 가문 학식 신분 권세 등 모든 것이 필요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설물이었다고 깨달았습니다. 더러워서 당장 버려야 하는 배설물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며 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버린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빠짐없이 준행했다는 자신만의 종교적 의로움이자 교만이었습니다. 나아만도 지금까지 갖고 있던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관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만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아니 모든 인간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가 그 땅의 흙을 가져간 것은 논의의 여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지역별로 관장하는 신이 각기 다르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이스라엘의 신을 모시려면 이스라엘 땅의 흙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온 천하’에 이스라엘의 신만 있다고 고백했으므로, 아람 땅에도 여호와의 통치가 임한다고 인정한 셈입니다. 그래서 아람 땅에는 우상 신들의 제단과 신전뿐이므로, 인간적인 순진한 생각으로, 자기 집 뜰에 이스라엘의 흙으로 여호와를 위한 별도 공간을 만들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 

 

살펴본 대로 나아만은 여호와를 믿고서 엘리사에게 순종하여 요단강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밑져야 본전이므로 안 되면 엘리사를 죽이고 이스라엘을 침공하겠다는 분노에 차서 그 물에 몸을 씻은 것입니다. 마지막에 단번에 완치되는 기적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께 완전히 항복한 것입니다. 또 그래서 여호와의 종인 엘리야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그는 일곱 번째에 이르러선 큰 분노와 함께 절망의 나락에까지 떨어진 것입니다. 이마저 실패하면 인간적 세상 수단이 완전히 고갈되어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포기하는 단계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대 장관 체면 때문에 부하들 앞에서 소리칠 수는 없었으나, 속으로는 세상만사는 물론 내 인생을 주관 통치하는 거룩한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지 마시고 제발 고쳐 달라고 절규했을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절망에 빠졌던 바울처럼 하나님이 나아만도 사방이 완전히 막힌 상태로 밀어 넣으신 후에 그의 영적인 안목을 열어준 것입니다. 그는 순종할 믿음이 있어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온전히 선물로 받고 나서야 비로소 순종한 것입니다. 도저히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 앞에 꼼짝없이 항복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항복의 의미는 자신에게선 평생토록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온전히 선한 것도 절대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인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이 일로 깨달은 사항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참 하나님께 기적적인 은혜를 받고서 그분을 온전히 자기 주인으로 모시게 된 데는 엘리사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전쟁에 승리하여 포로로 잡아 온 바로 그 여종입니다. 그 여종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런 엄청난 은혜를 받을 수 없었고 아람 땅에서 헛되고 헛된 인생으로 마감했을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에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 여종은 자기 어깨에 붙여 놓은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취득한 여러 훈장 중에 아주 사소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여자아이가 예쁘고 똑똑해서 자기 아내에게 줄 선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찮고 비천한 신분의 그녀가 자기를 온전하게 살려내고 제 이의 참된 인생을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로선 자기 지혜와 실력으로 부하들을 잘 지휘해서 전쟁에 이겼기에 그동안 자기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 여종이 현실적으로는 자신보다 비천한 자기 노예였으나, 영적으로는 자기가 그 여종보다 훨씬 비참했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종이 자기 집에 오게 되고 또 사마리아 선지자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큰 은혜를 주려고 여종을 자기에게 미리 붙여주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진짜 승리는 여종도 엘리사도 아니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가 아람 땅에 여호와를 섬기는 종으로 세우려고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나아만에게만 허락된 매우 특별한 치료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사건을 각기 고유의 방식과 뜻으로 각자에게 가장 합당하고 유익하게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와 가족을 여호와 신앙으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나귀에 싣고 간 흙으로 제단을 쌓고 그 여종과 또 가족과 함께 감격과 기쁨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따로 드렸을 것입니다. 그 여종에게서 모세의 율법까지 배워서 그대로 따랐을 수 있습니다. 바울로 인해서 목숨을 건진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던 일이 나아만의 집에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여호와와 예수가 같은 하나님이고 구약 백성도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는 참믿음

 

이 사건을 두고 나아만이 믿음으로 순종해서 나았다고만 해석하면 너무 표피적인 신앙에 머무는 셈입니다. 신앙생활을 신자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선택 결정 시행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 사회에서 착하게 살고 교회에서 경건하게 보내는 정도로 제한됩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행해야 하고 아주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주도하는 신앙은 어차피 연약한 인간의 한계 안에 갇히므로 삶에서 발휘되는 능력도 불완전하고 때로는 오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신자 쪽의 노력에 초점이 맞춰지니까 혹시 의로운 열매가 맺히면 자칫 자신의 영적 의로움을 자랑 내지는 증명해 주는 훈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신자가 믿음으로 도덕적 종교적 활동에 집중하는 것은, 나아만이 치유받기 전이나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믿음입니다. 나아만의 우상 신관은 화려하고 신령한 제사 절차에 따라서 자기 쪽에서 최대한 정성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율법의 행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게 판단해 주기를 바랐고 심지어 이미 의롭다고 자신했습니다. 회심 전의 둘은 인간 신자 쪽의 치성과 행위로 하나님께 받을 복을 조절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목사님들이 굳건한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는 그럴 수 있지만, 믿음의 순서를 뒤바꾸어버린 가르침입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와 섭리에, 자기 형편이 어떠하든 또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든, 순전하게 반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도적으로 주도하는 참 은혜를 순전하게 받으면 신자의 믿음도 점점 참되어지게 마련입니다. 평소 그분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 동행만 해도 필연적으로 또 자연스럽게 순전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심어주는 믿음인데 행동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심어줄 리 없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하라고 성령님이 신자에게 내주해 주십니다. 실천으로 이끄는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면, 삼위 하나님은 단순히 깨달음만 주는 도덕과 종교 선생으로 전락합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앞으로는 오직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로 헌신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 일은 계획은커녕 전혀 꿈도 꾸지 않았던지라 이전과 전혀 반대의 사람으로 이미 변한 것입니다. 그렇게 변한 사람이니까 반드시 변한 행동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절하는 경우 빼고는 절대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듯이 말입니다. 시간은 더디게 걸릴지라도 자기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지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드러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가 된 후에도 체질이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남아서, 특별히 현실 고난이 닥치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수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잠시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회상하면 내주하신 성령님이 반드시 다시 온전한 믿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스라엘 여종을 보내어 나아만을 고쳐주신 그런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말하자면 당신만의 완벽한 계획에 따라 지금의 이 고난도, 이 풍요도 이끌고 계시므로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참된 위로와 평안으로 채워주십니다. 신자가 행할 일은 그저 마음 턱 놓고 범사에 기도하면서 그분께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뿐입니다. 

 

이 사건에서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종은 평소에 나아만의 신뢰를 얻었고, 나아만도 아람 왕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인격, 성품, 행동에서 신실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자였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품도 사람이 인정해 주어야 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더더욱 하나님 그분이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질 때는 혹시 성령의 인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종교적 열성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바울처럼 성전을 위하는 열심히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지나 않았는지 겸손히 자신의 영성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믿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묵묵히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것입니다. 순종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순응하고 있기에 그분의 축복받는 인생이 이미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로 더 받을 복이 없으므로 늘 평안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믿음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행동으로 하나님의 복을 더 받으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불신자 때의 기복주의 신관과 행위 구원관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나아만처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하나님 쪽에서 먼저 내미는 은혜의 손을 잡아본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 개인적으로 대면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함께하신 성령님이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이미 바꿔 주었거나 바꿔나가는 중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며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9/2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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