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덜 충만히 임재할 수 있는지요?

조회 수 1040 추천 수 23 2011.12.19 21:13:27
성령이 덜 충만히 임재할 수 있는지요?


[질문]


말씀단상 사이트의 글 중에 "죽은 자를 살리는 법"이란 글을 읽다가 평소 궁금했던 점이 있어 문의드립니다. 전 평소 성령의 '충만함'이란 것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었습니다. (충만함? 덜 충만함? 안  충만함?..뭐 그런 데 대한 의문입니다)

글 중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 또 '성령의 인도가 아주 세밀하고도 강하게'등의 표현을 보며 글 중에서 말씀하시듯이 성령의 권능자체는 줄어들 리 없는데 성령의 덜 임재로, 또는 성령의 인도가 둔하고도 약하게 다가와 성령의 권능이 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엔 제가 쉽게 이해가 안갑니다.

성령하나님이 그 어떤 에너지도 아니신데 충만, 덜 충만, 둔하고, 세밀하고, 강하고 약한 개념이 우선 용납이 안 됩니다. 더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기껏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분의 뜻에 의해 있고 없고가 분명하지 덜 고치시고 덜 살리시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지 덜 계시고, 온전히(충만히) 계시고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다르시니 너무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불경스럽게 여겨집니다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사실입니다.

[답변]

흔히 생각지 못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해주셨습니다.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살펴야 합니다. 거창하게 신학적 전제라고 했지만 실은 질문자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또 해답으로 거의 다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해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다 알고 있는 두 가지 전제

우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등의 우열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그 위격만(person) 다를 뿐입니다. 요컨대 성령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방식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간략하게 일부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홀로 완전히 자족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아무 영광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오, 모든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가장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며, 그것들에 의하여, 그것들을 위하여, 또는 그것들 위에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한마디로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 별개로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며 오직 자신의 주권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 안에서, 혹은 위에서 그것들을 위하시고 자신의 뜻을 “자유롭고도 기쁘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성령이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간섭 역사 하십니다. 예컨대 신자가 아무리 방언 같은 은사를 갖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까지 해도 오직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고전12:11)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신 성령의 존재하시는 양태(樣態)가 “덜, 혹은 더” 충만하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인류역사와 신자의 삶을 이끄는 이는 성령 하나님인 셈입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사역해도 그 실체가 이 땅에 실재하는 분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속성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며 권능도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영으로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신자 개인은(고전6:19) 물론, 신자들의 모임에는(고전3:16)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승천 직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또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의 실체가 아니라 바로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실 때에는 당연히 온전한 하나님으로서 임하는 것이지 일부러 강하거나 약한 모습으로 위장, 가장, 과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특성과 능력에 주변 상황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가감(加減)이 있다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분명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덜 충만한 성령님이 내주하시다가 신자가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야 다시 충만해지시는 그런 분도 또 그런 내주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또한 질문자님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미처 모르고 있는 두 가지 전제

그런데 미처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자주 잊어버리는 두 가지 전제가 더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삼위 하나님끼리 교통하실 때에 어떤 경로나 수단을 사용하는지 우리로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할 때는 인간의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러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을 낮추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고 또 그 보여주신 부분만큼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 인간이 알도록 하려면 인간의 지정의 수준에 맞추어줄 수밖에 없기에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교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모든 이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자연의 경이로움)(롬1:19,20)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실재성(實在性)을 확인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자기 인식일 뿐입니다. 그 둘만으로 그분의 품성과 인간과 역사를 이끄시는 뜻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과 뜻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인간 언어를 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언어는 둘인데 당신의 절대적 진리를 글로 기록한 성경과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실제로 골고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육안에 훤히 보도록, 말하자면 그 이해수준에 맞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길은 성경과 예수님 말고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외의 경로를 이용했다면, 예컨대 개인의 체험이나 명상이나 학술적 접근 등,  그분에 대한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진술일지라도 성경과 예수님에 계시된 내용과 다르면 틀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계시하다보니 성경에는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모습이나 속성을 가진 것 같은 형식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불같이 진노하거나, 크게 애통해 하거나, 기뻐서 춤을 추거나, 깊은 탄식을 한다는 등의 표현입니다. 이를 두고 전문 용어로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천국보좌에 계시며 그 거룩한(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실존에는 하등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보좌에 일어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마음이 그렇게 기쁘다는 뜻을 인간에게 정확하게 또 강조하면서 알게 해주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표현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신학적 혹은 영적 진술에도 당연히 그런 양식이 채택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간과하기 쉬운 전제는, 실은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함,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주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절대로 당신 뜻대로만 행하십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능력과 품성에는 전혀 변함없지만 당신께서 인간과 세상에 행하시는 사역에는 강약(强弱)과 가감(加減)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설명한 전제와 연결시키면 그분의 실체에는 하등 변함없지만 그분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양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실체가 신약시대의 그것보다 약하거나 적었던 것은 전혀 아니며 또 이 땅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하게 임재하셨음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인류 역사에 간섭하여 사역하시는 모습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그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때에 덜 충만하게 임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제한적으로 역사하셨기에 마치 구약시대에는 덜 충만하게 임재하고 또 역사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임재와 사역의 차이  

위에서 설명 드린 네 가지 전제를 종합하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간단하게 도출 됩니다. 성령님의 실체는 피조물의 상태에 전혀 영향 받지 않으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으로 인간에게 덜 혹은 더 충만히 임재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분의 실존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행해지며 또 그 자유로운 모습을 인간에게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인간의 인식 수준에 맞추어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의 실존(實存)과 사역(使役)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이해하려다 보면 질문하신 것과 같은 혼동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성령이 충만하지 (혹은 임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뜻은 그분이 신자에게 간섭하여 행하시는 사역에서 자유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이해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님이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성도들에게 당신의 임의로 나눠주시거나, 독생자 예수님이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유롭게 역사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이 두 경우 다 인간이 느끼기에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가 더 혹은 덜 충만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비유컨대 아들이 아비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졸라대지만 아비는 더 좋은 뜻과 계획을 가지고 아들의 변화부터 유도하려고 지켜보면서 침묵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비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본인의 품성과 능력과 실체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완전한 아비일 뿐입니다. 아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느끼기에는 마치 자기에겐 아버지가 없거나, 아예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대표인 다윗마저 시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얼마나 자주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신인동형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얼마나 엄청난 진술입니까? 성령이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해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두고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분은 분명히 충만히 신자에게 임하고 계시며 대신 기도까지 해주시니까 그 역사마저 충만히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막상 신자는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아주 약하게, 덜 충만하게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하다면 즉,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어지고 있다면 성령이 탄식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통탄해, 이 또한 인간 이해 수준에 맞춘 계시이지만, 하셨습니까?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50:2) 당신의 품성, 능력, 임재에는 전혀 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으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2,3절)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1,2절) 하나님은 전혀 이스라엘을 외면한 적이 없는데 그들 스스로 영적 간음을 저질렀고 바로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류했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재차 그런 뜻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이스라엘에 충만히 임재는 하시지만 당신의 역사는 약하게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히 임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정말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인간의 죄나 영적무지로 인해 당신의 역사를 약하게 하는 것 자체도 그분의 완전한 자유함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품성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질문자도 비슷한 염려를 하셨는데 이런 표현도 사실은 모순이 있고 엄밀히 따지면 불경스러울 수 있음, 그 역시 당신의 절대적 주권일 뿐입니다.

이런 완벽한 자유함으로 인해서 성령님은 때로는 정말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서 능력도 더 충만하게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전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제자들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절대로 덜 충만하게 임하지 않았고 또 약하게 역사하신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의 역사하시는 모습이 당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정말로 성령께서 스스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 더 충만한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마저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지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임재가 아님)하는 목적은 오직 신자더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가장 신령한 은사는 바로 불신자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로 십자가 복음에 초대하여 그 진리를 가르쳐 그분의 제자로 변화시킨 후에, 그 제자들이 다시 땅 끝까지 가서 사단에 미혹된 영을 복음으로 초대하여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방언을 하게 하려는 것보다, 그럼으로써 그날 하루에 예수 믿는 자를 삼천 명이나 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순례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초석을 심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이 땅에 드러내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이 더 충만하게끔 역사하는 것입니다.  

12/19/2011

모루두개

2024.03.14 00:09:06
*.230.44.2

질문, 답변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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