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 강해 (200)
http://youtu.be/5lkkuMPM9QU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마21:23-27)
밤새 모의한 계교
고난 주간의 둘째 날 오전에 예수님은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곧바로 마르게 했다. 그 후에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나와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했다. 이런 일은 물론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이다. 무슨 권세는 권세의 내용과 범위를 뜻한다. 둘째,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고 했다. 권세의 출처와 근거를 묻는 것이다. 유대 어법상 중요한 내용을 강조할 때는 반복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두 질문은 사실상 같은 뜻이다. 한마디로 “네가 이곳에 가르칠 자격이 없지 않느냐?”고 따진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은 일절 문제 삼지도 않았다. 틀림없이 가르치자마자 질문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가르친 후에 질문했다면 이미 가르치는 것을 허용한 셈이기에 그런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
또 가르치자마자 따진 것은 첫날에 당한 일에 앙갚음을 하려고 밤새 궁리하여 모략을 짰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본심은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한 일에 분노로 가득 찼지만 그 것을 따졌다간 자기들 부정이 드러나니까 다른 것으로 문제 삼겠다는 뜻이다.
당시에 성전에 가르칠 수 있는 자는 대제사장이 임명했다. 주로 유대교의 두 본산인 힐렐과 샤마이 학파의 유명 랍비와 그 제자들이 가르칠 수 있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주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훈련 받은 후에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야 설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반면에 예수님께는 그런 경력이 전혀 없었다. 나사렛 출신으로 변방인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했다. 유대의 공인된 기존종교체계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혹시라도 그들이 정말로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지 궁금해서 질문했을 것이라 해석할 이유와 근거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강론을 일단 진지하게 들어본 후에 판단했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 이가 당신인지 물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그대로 가서 전하라고 했다. 산헤드린에서도 그 동안 이단 조사관을 보내어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해 소상하게 조사를 했었다. 그럼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산상수훈의 내용을 깊이 음미했어야 했고 또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일의 의미를 심각하게 분석했어야 했다.
그러면 예수는 메시아라는 결론 밖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보고 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최소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선지자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럼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인 증거를 조금 더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보여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껏 자기들이 정해 놓은 인간의 유전에 저촉되는지 여부만 열심히 따졌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두 질문
이 두 질문은 유대인들이 항상 그랬듯이 둘 중 한 가지 대답을 고를 수밖에 없는 성격이었다. 또 둘 중 하나 어떤 대답을 하던 하자를 걸 구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런 의미였다.
우선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는 자기들이 주관하는데 예수님께 허가해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스스로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증명할 방도가 없다는 단정이 전제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질문은 그 자체로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옵션은 항상 정반대의 내용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하나가 틀리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옳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두 대답이 다 틀렸다고 덮어씌우면 자기들도 50%의 확률로 틀렸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된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대처하는 방식은 둘이었다. 먼저 두 대답 중의 하나가 아닌 그들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는지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물었을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한 경우다. 둘 중 어떤 대답을 해도 틀렸다고 덮어씌울 작정이었으므로 제 삼의 답변을 했다는 자체가 예수님이 옳다는 증거가 된다.
두 번째는 그들이 질문한 방식 그대로 거꾸로 그들더러 답변해 보라고 반문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을 때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즉, 너희들이 알아서 결정하라고 대답한 경우다.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자기들이 빠지게 했다. 본문의 대답은 이 두 번째 방식에 해당된다.
예수님도 대제사장 주머니를 불려주었다.
너희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도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 허가증을 너희가 주었느냐 아니면 하늘에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유대인이신 예수님은 그 관습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어떻게든 주님의 말꼬리를 잡으려는 그들의 내심을 간파하셨기에 아직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선포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정식 랍비 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대제사장이 임명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도덕적 종교적 죄를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많은 이에게 침례를 주었다. 헤롯 안티바스의 부정한 결혼을 질책하다가 참수형을 당했다. 이두메 출신으로 로마제국의 허수아비 왕이었던 그를 유대 대중은 물론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극도로 싫어했다. 요한은 자기 민족을 대표해서 그에게 항거한 셈이다. 당연히 유대인들로부터 의인이자 선지자로 존경을 받았다.
예수님의 뜻은 요한은 백성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죄를 씻는 침례까지 베풀었는데도 그에게 권세의 출처를 따진 적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문이 항상 그러하듯이 너무나 예리했다. 상대의 심령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아셨다. 그 본심만 알아맞힌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배경에 있는 음흉하고도 치사한 동기와 이유와 근원까지 생생하게 드러나게 했다.
만약 요한의 권세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대답하면 우선 자기들이 허가증을 준 적이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대중들이 그를 따르니까 그냥 묵인했다고 말이다.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26절)라는 그들의 염려하며 의논한 대로 어쩔 수 없이 방관했다는 뜻이다.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 가문만이 맡을 수 있으며 모세의 율법을 수호하는 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자처했다. 죄를 씻는 중보적인 세례는 메시아만 주지 대제사장도 줄 수 없다고 여겼으면서도 요한의 세례를 묵인했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하나님께 받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유기한 셈이며 하나님을 우습게 안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뜻은 이러하다. “너희는 내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이 사람들의 반응도 감안해야 할 것 아니냐? 이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계속 받고 싶은지 아니면 싫은지 물어보라. 만약 계속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 나도 묵인해주어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요한의 전례에 비추어서 합당한 조치가 아니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공교롭게도 인척 관계다. 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그 전하는 메시지도 동일했다. 유일한 차이는 예수님은 성전에서, 요한은 광야에서 가르친 것이다. 단순히 장소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요한은 세를 베풀며 죄를 회개하라고 강력히 권면했다. 그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이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성전에서 속죄제도 드렸을 것이다. 그럼 대제사장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손해 볼 일은 없다. 예수님도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고는 대제사장에게 보이고 결례를 행하라고 명했다. 그때는 예수님이 멀리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있기도 했지만 결례로 대제사장의 수입이 느니까 구태여 주님의 사역을 문제 삼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제 주님이 성전 장사치를 다 쫓아내었기에 지금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자기들 수입이 줄어들게 되자 곧바로 라이센스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다. 이 얼마나 치사함의 극치인가?
왜 요한을 믿지 않느냐?
만약 그들이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25절)고 반발할까 염려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왜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느냐, 혹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따질 것을 걱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 죄에서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일상적 죄를 씻는 회개가 아니었다. 메시아야 곧 오실 것이니까 그분을 성결하게 마지하기 위해 회개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자 요한은 주님이 바로 메시아라고 선포했다. 자기는 물로 세례 즉, 행동으로 범한 죄들을 반성 회개하는 차원의 세례를 주지만 주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고 했다. 한 인간 존재 전체를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분이라는 것이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3:12) 것이라고 선포했다.
놀랍게도 산헤드린은 요한에게도 이단 조사관을 파견했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요1:19) 먼저 엘리야 인가 즉,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말3:1)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오심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인지 물었다. 또 신명기 18:15에서 모세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로 오실 것이라 예언했는데 바로 그 선지자인지 물었다.
요한이 둘 다 아니라고 부인하자 그럼 무슨 권세로 죄를 씻는 세례를 주느냐고 따졌다.(요1:25) 그에 대해 요한은 내가 주는 세례는 구원과는 전혀 무관하며 구원 주실 분을 예비하는 세례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써 그가 구원을 베푸는 성령 세례를 줄 것이라고 했다.
자기는 단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일만 할 뿐인데 그 이단조사관들 앞에서도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다.(요1:34) 이제부턴 그가 흥해야겠고 자기는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자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으로 여기고 일종의 은퇴를 했다. 심지어 자기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따르도록 허락했다.
제사장과 장로들이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대답하면 그의 메시지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는 셈이 된다. 그들로선 진퇴양난이었다.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27절)고 너무나 궁색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자기들이 걸려든 것이다.
대제사장의 직무유기
당시로선 도덕, 종교, 하나님에 대해 의문 사항이 생기면 대제사장이나 그가 권세를 주고 임명한 랍비에게 가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제사장은 영적인 문제의 최종판단을 책임지는 자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직무를 스스로 유기한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교단 총회장이 그 직무를 맡을 능력이 없다고 물러선 꼴이다.
대제사장은 죄인을 중보하여 구원하는 일을 상징하는 대속죄제를 집행했다. 크고 작은 죄를 속하는 속죄제나 결례를 주관하는 자였다. 과실치사이긴 해도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하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비로소 그 살인자는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듯이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의 생명과 연계시키는 막중한 소명을 지녔다. 요컨대 대제사장의 직무 자체가 메시아를 예표하고 상징했다.
그런 대제사장이 정작 자기 눈앞에 메시아가 서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기껏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적어지는 것에 연연해 너무나 비겁하고 치사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한 말장난을 일삼고 있다. 당시의 유대사회 최고의 지성, 도덕성, 영성을 갖춘 자들이 밤새 모의한 결과가 겨우 이 정도였다. 그들에게서 상담과 가르침을 받는 대중들은 오히려 예수님뿐 아니라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 결과적으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영적 수준이 대중보다 더 못하다고 인정한 꼴이다. 대제사장은 그들을 가르칠 자격뿐 아니라 그들을 가르칠 자를 심사하여 권세를 줄 그릇도 안 되었다.
이 사건을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치면 안 된다. 예수님과 대제사장이 최초로 공개적으로 직접 충돌한 사건이다. 고난주간 첫날에 상면하긴 했어도 성전 청소 사건 때문에 우발적으로 잠시 만난 것으로 끝났다. 예수님이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지금은 밤새도록 모의를 하여 자기들의 종교적 권위로 예수님을 제압해보려고 작심하고 대제사장이 주님께 직접 질문했다. 이어질 신학적 논쟁도 대비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최고 권위자가 하늘의 권세에 도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에 대든 것이다. 하나님더러 하나님임을 입증하는 자격증을 내어보라고 한 셈이다. 예수님께 덮어씌우려 작정했던 신성모독죄를 지금 자기들이 너무나도 크게 짓고 있는 줄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실은 대제사장이 몰랐던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것도 당시에 하나님을 제일 잘 알고 믿고 따랐던 이가 감히 이럴 수 있는가 싶은가? 결코 아니다. 대제사장이 그랬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제가 불신자 시절에 전도하러 온 친구에게 하나님을 내 눈앞에 보여 보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대들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증명도 못하면서 어떻게 믿으라고 권할 수 있는가 따졌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라이센스를 가져와 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더러 하나님의 자격증을 내어 보이라는 뜻이다. 사실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 있는지 겸손히 알아보려는 뜻은 제게 추호도 없었다. 그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도 없었고 그럴 의사도 없었다.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하든 그 논쟁에서 이겨 예수쟁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생각뿐이었다.
불신자들은 저처럼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가 사람들로부터인지 하늘로부터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그분의 권세의 의미조차 모르며 자신에게 미치는 은혜와 권능이 어떠한지 전혀 무지하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인간 위인으로만 알지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주님을 일대일로 대면한 적이 없어서 자신과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다.
한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 단순하게 절대자 하나님만 열심히 믿는다. 어려운 고난에서, 특별히 먹고 마시는 것이 부족한 데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정도로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한다. 예수님에 따르면 이방인들도 하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그분께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리게 된다. 그분이 나의 처음이자 끝이 되어서 내 전부를 바쳐 헌신하게 되는 것이 믿음이다.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에게 다 나타냈다”(요1:18)고 했다. 참 빛이신 그분이 세상에 온 까닭은 모든 인간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에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본문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알지 못한다고 발뺌을 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질문하신 뜻만 안 것이 아니다. 그들로선 인정하기 너무나 싫었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로부터 받았고 또 그래서 메시아임을 심령 깊숙한 곳에선 인지했었다. 그러나 그 인지한 것이 제대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변별력 있는 생각으로 미처 정리되기 전에 그러지 못하도록 막는 죄의 힘이 더 컸다. 그 가공하고도 음흉한 힘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그들을 끌고 갔다.
그들이 그렇게 방향전환을 하게 된 배경에 숨겨진 동기가 있다.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높이며, 하늘의 영원한 생명보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더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에 순종하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체면을 더 두렵게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
불신자 시절의 저처럼 하나님더러 하나님의 자격증을 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른 그들마저 예수님은 용서하셨다. 당신의 권세가 얼마나 위대한지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하나님의 너무나 깊고 오묘하며 풍성한 인간을 향한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실현 되었다. 그분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것과는 아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며 컸다.
한 죄인이 진심으로 겸비해져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을 죽인 사람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며, 또 그 십자가에 올라가 죽을 자도 주님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권세가 어디로부터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과 사람들과 돈을 더 좋아했던 죄인이라는 점을 전혀 인식 못하게 만드는 우리 속의 그 완악하고 견고한 사탄의 진을 깨트려주신다. 예수님의 영광의 빛을 우리 심령에 비추어서 우리 존재 전부를 통째로 뒤집어엎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고기잡이 하다 예수님을 처음 대면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주님이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고 해서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고 배 두 척이 물에 잠길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고 했지 않는가? 그가 주님의 말씀을 의심한 것만으로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의심한 것만 사죄하면 되지 구태여 자기를 떠나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나니까 자신이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함을 느꼈고 나아가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도 발견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영적 권세가 너무 커서, 그분의 빛에 눈이 부시어 꼼짝도 못하고 얼어버렸다. 그로선 생전 처음 겪는 이상한 영적 체험이었을 것이다. 주님의 신적 권위 앞에 바로 서있지도 못할 정도로 도무지 감당이 안 되니 떠나가 달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연약한 베드로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었다. 하나님의 본체를 보기만 해도 소멸해버리는 인간을 당신과 삼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동역하는 영광을 누리게 했다.
베드로나 본문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나 똑같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는 죄인이다. 단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인정했다는 차이 밖에 없다. 그는 자기에게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음을 겸손히 인정했고, 잠시 스쳐 지나갈 이 땅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렸고, 평소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했다는 점이 그들과 달랐다.
올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오늘날의 많은 불신자들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이 땅의 쾌락과 형통만 추구한다. 자기의 뿌리를 찾지 않으니까 평생을 고아나 물질로 지내다가 덧없이 마친다.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인간인데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사니까 인간의 직무유기를 하는 셈이다.
더 문제는 이미 말한 대로 많은 교인들이 교인으로서의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오는지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일부 정답을 갖고 있어도 지식적으로만 알고 치우지 자기 삶에서 몸으로 온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빛과 권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비록 오늘날 신자들이 베드로가 만나 꿇어 엎드렸던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만날 수 없지만, 그 당시보다도 그분을 더 온전히 깊고 풍성하게 만날 수 있는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지하고 있다. 또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신다.
정말로 자기를 낮추고 겸비해져서 그분을 알고자 하는 순수하게 열린 마음을 갖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고 묵상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분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면 반드시 그분께 진정으로 항복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헌신 순종 충성하게 된다. 입술에서 저절로 새 노래가 나온다. 참되고도 신령과 진정으로 가득 찬 기도와 찬양과 감사와 경배가 따르게 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와 삶과 인생으로 바뀐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깊이 교제할 때에 그 동안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세상의 인간적이고 추한 것들은 다 내버려진다. 대신에 하나님의 생명과 길과 진리가 우리의 새로운 소유가 된다. 이만큼 복되고 성공한 인생은 없다.
올 한해 정말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교제했다면 우리의 삶과 모습이 아무리 세상에선 형편없고 때로는 이해 안 되는 고난에 빠졌어도 하늘로부터 온 주님의 권세와 은혜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었다는 뜻이다. 또 내년에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하며 주님을 더 많이 알아가게 되면 그 권세와 은혜는 올해보다 더 크게 늘어날 것이다.
12/29/2013
많이 무지하고 단순하고 어리석은 베드로이지만 메시야임을 알았기에 그 앞에 어푸러져 자신의 죄인됨으로 인해 떠나 주십사며 신음할 수 밖엔 없었던, 연약하여 예수님을 부인할 수 밖엔 없었던,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비천한 나날들 같으나 낭비되지 않는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베드로처럼...자신만을 높이고 싶고 세상의 것에 자주 시선 머무는 본성이지만 그러나 생명을 나눠 주시려 죽기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그 사랑에 매여 예수님을 아는 일이 세상 유일의 기쁨임을 더더욱 깨달아가는 매일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