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창기와 세리처럼 살아라.
마태복음강해 (201)
http://youtu.be/SZQPKr9_-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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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28 -32)
너무나 당연한(?) 예수님 말씀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졌다.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권세는 대제사장이 주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직접 답변은 않고 세례 요한도 너희에게 허가증을 받지 않았지만 백성을 가르치고 죄를 씻는 세례마저 베풀었는데 그 권세가 사람으로부터인지 하늘로부터인지 대답해보라고 반문했다. 그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당신께서도 무슨 권세로 가르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에 천국구원에 관한 비유 셋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 굉장히 도발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두 번째 비유를 듣고 난 후에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45,46절)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전혀 아랑곳 않고 다시 셋째 비유를 말씀하셨다. 급기야 그들은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22:15)하게 되었다. 신학적 토론은 도저히 힘들고 말꼬리라도 잡겠다는 뜻이었다.
세 비유의 주제가 천국 구원이라는 것은 사실상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는 앞선 질문에 더 깊고도 구체적이고 명확한 답변을 한 셈이다. 구원의 의미와 그것을 얻는 길은 어떤 인간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선 더더욱 그렇다. 구원에 대해 몰라서도 그렇지만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러지 못한다. 예수님도 일단은 하나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못하고 하늘로 대체해 말하는 유대관습에 맞추어서 말씀하셨지 않는가?
오늘날의 신자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독생자 하나님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아라는 사전 지식을 갖고 있기에 본문 같은 말씀을 당연히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는데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못한다. 교리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예수님과 직접 토론을 벌린 당시 유대인들의 사정은 아주 다르다. 거기다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심지어 부활이라고까지 말하니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자마자 사람들은 그 권세에 놀랐다(막:22).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했다. 지금껏 배워온 것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또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침 같다고 했는데 “권세 있는 자”란 메시야에 대한 은유였다. 한마디로 도무지 인간의 가르침으로는 여겨지지 않더라는 뜻이다.
유대 대중의 이런 순수한 반응에 비해 율법의 전문가들에겐 주님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신성모독으로 들렸을 것이다. 거기다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가르칠 자격을 문제 삼을 정도의 이름 없는 시골 랍비가 그들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며 야단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예수님이 질책성 대답을 했다는 자체가 당신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한다. 또 그 내용은 예수님의 권세의 의미와 범위가 어떤 것이며 인간에게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준다.
구원 얻는 방도
본문의 첫째 비유는 그 내용(28-30절)이 아주 간단하다. 예수님이 친절하게 해석(31,32절)까지 해주셔서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다. 장남은 일하러 가겠다고 선뜻 대답해놓고 나중에 가지 않았다. 차남은 가기 싫다고 했다가 뉘우치고 갔다.
예수님은 그들 중 누가 아비의 뜻대로 했느냐고 질문했다(31절). 초등학생도 맞출 수 있는 문제다. 마치 신학박사에게 신구약 성경이 총 몇 권으로 구성되어 있느냐고 물은 것과 마찬가지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비유의 해석을 아직 하기 전인지라 이구동성으로 장남이라고 답했다.
예수님은 예리한데다 짓궂기까지 한 것 같다. 주님께 성전정화 사건을 당한 그들이 밤새 주님을 제압하려고 궁리하여 그 권세를 따졌다. 예수님의 반문을 듣는 순간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도리어 자기들이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짐짓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정답이 확실해서 그들이 곧바로 답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질문을 했다. 그리고는 둘 중 나쁜 아들이 바로 너희들이라고 선포했다. 그들로선 이미 정답을 맞힌 후라 예수님의 말씀을 자동으로 시인하게 된 셈이며 도무지 번복 부인할 재간이 없다.
거기다 유대 사회에선 사람 취급도 않는 가장 비천한 신분의 창기와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높아졌다. 그들과 대조해서 자기들은 가장 낮아졌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했던 그 분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헤아려지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 그들을 골탕 먹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인간을 자기 멋대로 갖고 놀려고 조종하지 않는다. 오로지 참이요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실 뿐이다.
창기와 세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럼 그들도 나중에 들어올 수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아무리 주님이 나중에 그들을 일곱 번이나 정죄하며 저주했어도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완전히 닫은 것은 결코 아니다. 먼저 구원을 준다고 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을 하나님이 더 사랑하는 반면에 세상에서 풍족하고 권세를 누렸던 사람들은 나중에 구원한다는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구원을 받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아버지 말에 순종하여 포도원에서 일한 것 때문인가? 아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둘째 아들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것 자체로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다. 즉, 포도원은 바로 천국이다.
장남은 가겠다고 했다가 번복하여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고 싶은 마음은 없고 말로만 순종하는 척했는지 비유에는 그 의미가 명료하지 않다. 어쨌든 가기 싫었던 것은 분명하다. 둘째 아들도 처음에는 가기 싫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나중에 그 생각을 바꾸었다.
결국 예수님이 구원에서 강조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포도원에 가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바로 뉘우침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언제라도 뉘우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어 언제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계속 기회를 주신 것이다.
비유와 해석의 상충(?)
이 비유에서 정작 살펴볼 내용은 따로 있다. 예수님의 비유 해석에 따르면 뉘우침을 믿음과 동의어로 제시하고 있다.(32절) 또 그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다. 32절 서두에 어떻게 되어 있는가?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 하였으되” 요한이 의의 도로 왔음을 믿지 않았기에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 해석을 역으로 비유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세리와 창기는 요한의 도를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나중에 믿은 것이 된다. 그럼 이상하지 않은가? 요한도 예수님처럼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인기가 있었다. 또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요한을 처음에는 믿다가 나중에 불신한 것이 되는데 이러면 더 이상해진다. 그들은 시종일관 요한을 방관했다. 처음에는 오히려 미워했다. 이 의문을 해소하려면 요한의 의의 도가 무엇인지부터 규명해야 하는데 성경은 성경으로만 풀어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침례 요한이 아닌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과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갔다.(마17:1-13) 모세와 엘리야를 천국에서 불러내려 엄청난 영광의 광채에 둘러싸여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그 놀랍고도 신기한 광경에 감격한 베드로는 여기가 좋으니 초맛 셋을 짓고 영원토록 거하자고 말했다. 천상 세계의 영적 절정, 흥분, 충만 속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아직도 사탄에 미혹되어 잇는 영혼이 대다수인 현실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소명을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린 베드로의 철없는 요청이었다. 예수님은 묵묵부답하시고 함께 하산하셨다. 성경은 하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함으로써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17:5) 소리가 들렸다. 성부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이유를 밝힌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한 데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자고 했다. 말하자면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세 분을 동격으로 본다는 의미다. 예수님을 구약의 선지자들의 맥을 잇는 인간 선지자로 간주한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이 그 때만 해도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고 그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베드로더러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절대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의 주제와 연결하면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권세를 받은 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하늘의 권세를 수여해주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11:26)고 선언한 것이다. 모세가 예수를 위해서 섬겼는데 같은 초막에 거할 수는 없지 않는가?
요한의 의의 도
그런데 그 동일한 말씀이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똑같이 들렸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자 요한은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이런 가당치도 않은 일을 하라고 하느냐면서 못하겠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계속 요청하자 마지못해(?)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것은 당신을 죄인과 동일한 신분으로 낮추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주님이 물에서 올라오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3:17)고 하늘에서 선포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 구세주요, 인간 역사를 다스리는 만왕의 왕으로 오셨고 이제 공식적으로 그 왕에 즉위하여 구원의 사역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요한이 주님께 침례를 베풂으로써 예수님의 대관식을 주도하여 집전한 것이다.
요한의 회개하라는 선포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단순히 죄를 씻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오실 메시아를 성결하게 예비하는 세례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유대인들의 생활은 피폐했고, 민족의 장래는 암울했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족속의 문화가 침투해 도덕적인 오염이 심각할 정도였다. 대중들의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마침 천국이 가까웠다는 즉, 메시아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외침으로 요한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는 치솟았다. 산헤드린마저도 그에게 메시아인지 물어봤을 정도였다.
반면에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고 오실 그 이를 믿으라고 강조했다. 자기는 그분의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계속해서 그분과 자기를 대조하며 그분은 높이고 자기는 낮추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역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 대중들의 오해가 자칫 굳어질 판이었다.
바로 그 때에 하늘에서 그 말씀이 있었다. 요한은 단지 모세와 엘리야의 대를 잇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반면에 예수님은 아무리 그들이 위대해도 그런 인간 선지자의 반열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의 메시아이자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권세를 확인한 것이다.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당신께 세례 주기를 요청한 이유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공식적인 구속사역을 시작하여야만 “하나님의 의”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비유에 “요한의 의의 도”는 “요한이 전하고 실행한 하나님의 도”라는 뜻이 된다. 요한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점만 강조했다. 그의 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이었다. 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였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권세 있는 자라고 인정할 때에 귀신 들린 자가 소란을 피웠다. 예수님이 잠잠하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귀신을 꾸짖어서 치유해주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1:270라고 감탄했다. 예수님이 악하든 선하든 하늘의 천사들마저 호령하는 즉, 영적 세계도 다스리는 분, 사실상 하나님이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귀신들도 제압하는 천상의 권세는 물론이고 이 땅의 인간만사를 통치하는 권세도 지녔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 전 우주의 주인이자 통치자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은 그분의 바로 그 권세 안에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분의 동역자가 되어 그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너무나 엄청나고도 고귀한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마지막 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 즉, 사람들을 책망할 것이라고 말했다.(요16장) ‘죄’는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의’는 당신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 즉,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다. ‘심판’은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심판 받는 것이라고 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이 쫓겨 나가며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인 줄 아는데 혹시 지금 자기들을 멸하려 왔느냐고 물었던(막1:24) 그대로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라고 했다. 지금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바로 그 “요한의 의의 도”를 믿지 않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셨다. 성경기록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는 처음부터 끝가지 단 한 치의 오류가 없으며 용어마저 동일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논쟁할 때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고 선포했다. 지금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너희가 구약성경의 전문가로 자처하면서 요한의 의의 도가 바로 메시아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며, 또 그가 나에 세례 줌으로써 성취된 줄 알지 못하느냐고 질책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외에 구원을 줄 이름을 인류에게 준 적이 없다. 모든 인생에게, 맨 밑바닥의 창기와 세리에서 맨 위의 대제사장과 장로에 이르기까지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주인이다. 그분만이 모든 사람에게 알파요 오메가가 된다. 예수님이 가진 권세는 세상의 사람, 죄악, 사탄 그 어느 것에도 빼앗기거나 방해 받지 않고 승리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권세 밖에 있음을 의미하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넘칠 만큼 형통하고 출세해도 사실은 그만큼 처절한 실패는 없다는 것이 바로 이 비유의 뜻이다.
왜 세리와 창기가 처음에는 거부했는가?
마지막으로 살필 과제는 왜 세리와 창기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는지 또 왜 대제사장과 장로가 나중에 번복하고 불순종했는지 그 이유다. 이에 대한 대답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자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정죄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예수님과 동일하게 심판을 선포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아서도, 선행과 공적을 쌓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3:9)고 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選民)으로 율법을 준행하며 성전제사를 성실히 드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자동으로 얻을 수 있고 천국 문 맨 앞에 서있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아니 아예 천국 안에 들어와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니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무시했다. 대신에 주님을 자기들 주머니에 들어올 돈을 나눠가질 경쟁자로만 간주하고 시기질투하며 끝까지 말의 올무라도 걸려고 눈이 벌겠던 것이다.
반면에 세리와 창기는 인간사회에서 통용하는 인간이 정한 권세에 따라 이미 이 땅에서부터 정죄 받은 자였다.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유대 사회에선 현실에서 형통하고 권세와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증거로 여겼다. 그들 스스로도 자괴감과 모멸감에 사로잡혀 천국 구원은 거의 포기했었다.
이를테면 “우리 같은 자가 회개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천국은 너희들 것이니 너희나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식의 체념이었다. 하나님 당신이 직접 와서 우리를 별도로 특별한 대우를 해주기 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구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고 현재의 종교체제 상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하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아예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문자 그대로 목자 잃은 양떼였다.
겉으로 그들이 절망에 빠져 있어도 과연 그들이 구원을 포기했겠는가? 정반대였을 것이다. 그 심령에선 구원이 너무나 절실했을 것이다. 불신자의 경우도 이 땅에서 온갖 고생하며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다 죽으면 어떻게 말하는가? 하늘에서라도 이 땅에서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복을 받으시라고, 최소한 눈물과 고통이 없는 곳에서 평안하게 지내시라고 빌지 않는가? 세리와 창기만큼 하나님의 참 빛 참 생명이 갈급했던 자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 바람과 말대로 정말로 하나님이 직접 오셨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들을 인간으로 대접하고 사랑해주는 예수님을 만났다. 그 가르침은 권세 있는 자 같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수님 앞에 서면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충만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이 솟아났다.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이나, 과부로 84년을 섬긴 안나가 아기 예수만 보고도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했지 않는가? 주재여 이제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셨기에 마음 놓고 죽겠다고 했다.(눅2:25-38)
세리와 창기들도 예수님을 통해 주의 구원을 보았다. 이 땅에서 지난 세월 동안 받았던 박해, 멸시, 모멸 모든 실패와 상처가 씻어지고 보상받았다. 그 동안의 슬픔이 하늘에서 주시는 기쁨으로 대체되었다. 언제든 평안히 죽을 수 있었고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생겼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심으로써 사람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 땅의 것들로 자기들 삶과 인생이 좌우되거나 요동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오직 하늘에서 권세를 주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게 되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에 창립 멤버로 참여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 점차 로마의 왕족과 귀족들마저 주님의 교회에 동참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본문말씀 그대로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고”(32절) 지금도 그러하다. 예수님은 당시 뿐 아니라 장래 일까지 예언하셨던 것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올바른 계획
금주는 올해의 첫 주다. 새해 계획을 세우는 주다. 여러분은 어떤 새해 계획을 세웠는가? 틀림없이 작년에 못 다한 일이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루려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또 그 일은 내 자신의 주변 여건과 환경을 개선을 해보려는 내용일 것이다. 아주 중요하다. 반드시 그런 계획을 세워서 이뤄내야 한다. 예수님도 전쟁을 치를 때에 미리 승부를 분석해야 하며 전도 여행에 내보낸 제자들에게도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새해 계획이 있다. 바로 본문의 세리와 창기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이미 예수를 잘 믿고 있는 여러분더러 새롭게 예수를 더 잘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종교적인 활동에 전념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세상의 멸시는 물론 정죄에도 이전처럼 좌우되거나 요동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반발도 하지 않았다. 예수 안에 있으면 자기들을 흔들거나 훼방할 세력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음을 확신했다. 자신들의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는 하나님만 두려워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니까 사람들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
실제로 창기 마리아와 세리 삭개오는 지난 잘못을 깨끗이 씻었다. 예수를 닮아 그분이 가신 길을 매일매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따라 갔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조금씩 자랐다. 사도 바울처럼 지나간 일들은 모두 잊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걸어감으로써 하늘에서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권세를 넘치도록 누리며 살았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예수님의 향기, 사람으로 사망과 생명으로 나뉘는 냄새를 맡게 했다.
쉽게 말해 예수 이전에는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핍박과 멸시를 받으면서 스스로도 그것이 타당하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 이후에는 세상에서 가진 것으로 그들과 비교하면 자신들이 너무나 초라해도 오히려 그들이 불쌍하고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세리와 창기를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영적 찔림을 받았다.
우리 모두 올해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계획해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보배 되시는 예수님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져서 눈으로 보게 해야 한다. 정말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주님을 깊이 알아감으로써 주님이 우리 속에 충만해지면 하늘로 오는 그분의 권세가 우리를 통해 자연스레 밖으로 비춰 나올 것이다. 올해만은 어떤 일을 계획하기보다는 먼저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 헌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한다.
1/5/2014
새해엔 정말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계획에 앞서 세리와 창기조차도 사랑하시는 그 사랑, 하물며 종교성으로 치장하였지만 큰아들이기에 또 어찌나 맘이 쓰이는 아들들인지를, 구원받아 예수님 품속에 품으시려 안타까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더더욱 깨달아 알아가며 주님 닮아 그 사랑 품을 수 있는 맘이 되어지며 자라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늘 예수님 맘을 알리려 애쓰시며 수고하시는 목사님~~ 새해에 더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