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자를 돕지 않으면 벌을 주는 미국
마태복음강해 (210)
http://youtu.be/W0YWCXFbxg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25-37)
(마태복음22:34-30과 평행되는 내용이라 이번 주는 이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앞에 부끄러운 목사
율법 중 어느 것이 가장 큰지 물은 한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되 그 둘의 중요성은 같다고 대답했다. 요한 사도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그 두 계명은 분리해서 별개로 취급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주님은 그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다.(마22:40) 온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 전체를 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사랑과 같은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뜻이 된다.
솔직히 말해 목사인 저부터 이런 말씀 앞에 주눅이 들고 자신이 없어진다. 자기 자랑이 내포되긴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마저 선행을 열심히 행했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보다 못하다는 자책감과 수치감이 든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보시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셨다. 천국에 그냥 못 들어가는 정도를 넘어 “결단코” 못 들어간다고 아주 예리하고도 냉혹하게 지적하셨다.
물론 우리가 이웃 사랑에 약함을 스스로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깊이 뜨겁게 사랑하다 보면 이웃 사랑도 잘하게 되리라 여긴다. 어쨌든 하나님 사랑이 더 우선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정말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인가?
놀랍게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같은 구원관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지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질문했다.(눅10:25) 마태복음의 동일한 대화는 고난주간의 일이며 누가의 기록은 그 이전의 다른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지 반문했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여야 하고(신6:5의 쉐마), 또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야(레19:18) 한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처럼 “같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또한”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해 두 계명을 평행의 위치에 두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대로 행하면 살리라”고 정답임을 인정해주었다.
율법사가 그것으로 그쳤으면 다행이련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지 예수님께 물었다.(눅10:29) 그러자 예수님은 불신자도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는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동격으로 둔 이유를, 또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근거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흔히들 선행과 구제를 강조한다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치우는 것을 넘어서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이 비유에 있다는 것이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인데도...
우선 피해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에 강도를 만났다.(30절) 제사장과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 길로 내려가던 중이었다.(31/32절) 지난주에는 설교의 주제와 연결하다보니 제사장이 하나님의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다. 영적으로 광의의 차원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일어난 상황은 그와 달랐다. 성전 제사와 수직하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돌봐줄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이었기에 자기 일정에 쫓기는 자였다.(33절)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면 찾아가 화해부터 한 후에 예물을 바치라고 했다. 제단의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에 즉, 종교적 헌신행위로 바쁘지도 않는데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외면했다.
그들이 지나쳐야 했던 이유를 굳이 그들 입장에서 찾자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라 노동을 하지 않으려 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은 건져내면서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야단쳤다.(마12:11)
둘째 가능성은 강도가 거반 죽은 것을 버렸기에(30절) 율법에 금지한대로 부정한 시체를 만지지 않으려 했을 수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특별히 그 규정을 더 엄격히 지켜야 했다. 당시에는 맹수나 강도의 습격을 받아 죽은 시체가 길에 종종 버려져 있었기에 그런 시체인가보다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가서(34절) 보았는데 반해 그들은 보고 피해버렸다.(31/32절) 예수님은 거반 죽었다고 했지 완전히 죽었다고 하지 않았다. 호흡이 남아서 꿈틀거리는 모습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폈으면 알 수 있었다.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했지 관찰하지도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또 관찰을 해야 시체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출애굽기 22:13에 따르면, 이웃이 소 같은 가축을 대신 맡아보다가 맹수에게 찢겨 죽으면 그 찢긴 것을 증거로 보여주라고 명한다. 그러려면 시체에 손을 대어야 한다. 재산분쟁을 방지할 목적의 계명이다. 돈 때문에 이웃과 싸우지 않으려면 즉, 간접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선 시체를 만져도 된다고 하나님은 예외 규정을 두었던 것이다.
여행 일정을 펑크 낸 사마리아인
그들에 비교해 사마리아인은 어떠했는가? 먼저 가까이 가서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부터 했다. 살아 있음을 알고는 현장에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응급조치를 했다.(34절) 자기 짐승 즉, 자기가 타던 말이나 노새에 태웠다. 대신에 자기는 걸어갔다는 뜻이다. 주막에 데려다가 보살폈다.
놀랍게도 이튿날에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었다.(35절) 돈을 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밤새도록 함께 있으며 간호했다는 뜻이다. 여행 중에 자기 볼일로 바쁜 와중에도 자기 일정에서 최하 만 하루 길게는 이틀을 펑크 내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주인에게 계속 돌봐주라고 당부하면서 돈이 더 들면 돌아와서 주겠다고 약속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 여유가 충분한데도, 아니면 당장에 급한 일이 없는데도 자기 시간과 돈이 아까워 사경을 헤매는 자를 죽도로 버려두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이 자기 돈 한두 푼보다 못했던 것이다. 한두 푼의 돈 때문에 간접적 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몇몇 주(州)들은 길 가다 사람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으면 벌을 주는 “사마리아 인의 법”이라는 규정을 만들어 지킨다.
유대인들은 알다시피 사마리아인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사람 취급을 않는 것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시라아는 인종혼합 정책을 집행했기에 우상숭배하는 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손이 사마리아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고 정죄한 것이다.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했는데 모두 포로로 잡혀갔다. 이방 족속과의 결혼은 면할 수 있었다. 사마리아인은 정복자들의 식민지 정책이 다른 것에 따른 희생자였을 뿐이다. 유대인들은 어쩌면 바벨론 우상 경배에 참석토록 강요받았을 것이다. 다니엘의 경우에 보듯이 최소한 우상숭배 족속을 돕고 섬겼다. 말하자면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오십보백보다. 진흙 구덩이에서 실컷 같이 놀던 친구, 아니 형제끼리 자기 더러운 꼴은 보지 않고(자기는 안 보이니까) 자기보다 더 더러워 보인다고 앞으로 절대로 함께 놀지 않겠다는 꼴이다.
유대인들은 아예 통과도 않는 사마리아에 예수님은 일부러 대낮에 들어가 한 불쌍한 여인을 구원해주시고 그곳의 다른 영혼들을 추수할 소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사마리아인들을 당신의 구원 밖에 둔 적이 한 번도 없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유대인은 인간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주관하는 구원과 심판을 대신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들만 받고 있는 양 행세했다. 그저 자기들만 독점해도 다행이련만 예수님에게 성전에서 가르치는 권세를 시비 걸었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자기들이 분배하며 집행하려 들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실은 귀찮고 돈이 아까워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해놓고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시체인 줄 알고 부정해질까 만지지 않았다고 핑계를 댈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려 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또 그런 줄 알고 그들을 율법에 충성하는 종이라고 칭찬할 것이며 그에 맞추어 그들 스스로도 자부심과 교만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계속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 사랑은 참된 것이 아니며 종교를 앞세우는 종교중심주의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 종교를 가지고 사람까지 죽인다. 바울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열심이 지나쳐서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종교가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아무 죄 없는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지 않는가? 안식일에 자기 양은 살려도 사람은 살리지 않고 오히려 죽도로 버려둔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율법사의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은 것이 예수님더러 이웃을 선택해 달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기는 현재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랑하려는 것이다. 예수님도 당연히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그의 이웃이라고 대답해 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언뜻 표면적으로만 보면 참 짓궂은(?) 면이 있는 것 같다. 율법사가 기대한 대로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이웃의 범위 안에 일단은 포함시켰다. 그러나 거기에 사마리아인까지 보태어 율법사더러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지 답해보라고 했다. 어린 유치원생이라도 사마리아인 밖에 대답할 수 없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다.
주님의 뜻은 이웃을 율법사 네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형편과 여유에 따라 남을 도우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신분, 위치, 계급, 가문, 학벌, 권세 등을 보고 심지어 취미가 같아서 자기 마음에 드는 자만 이웃으로 삼는다. 이미 좋아하고 있는, 최소한 싫어하지 않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자연적인 반응일 뿐이다.
참 사랑은 상대가 도무지 사랑할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못 갖추었어도, 아니 싫고 미워할 조건만 갖추었어도 사랑하는 것이다. 복수란 세상 사람들이 의로운 일을 행했다고 박수를 쳐줄 것이지만, 복수는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하고 심지어 그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또 그런 모든 자들이 사실 나의 이웃이어야 한다. 이웃을 내가 고르지 않고 고통 중에 있는 자, 필요한 것이 많아 갈급한 자, 슬픔과 한숨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는 자가 이웃이다. 아니 함께 있어만 주어도 그 사람의 이웃이라는 것이다.
율법사의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의 의미는 자기 이웃이 될 “사람”을 먼저 정해놓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주님은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이웃은 현재에 처한 궁핍하고 곤궁한 형편과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먼저 정하고 사랑하는 것은 교제요 사교활동일 뿐이다. 어려운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여 실제로 돕는 자만이 이웃이라는 것이다. 율법사처럼 이웃을 골라 사랑하는 것은 참된 이웃사랑이 아니기에 영생을 얻는 길과는 무관하다.
소름끼치는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이 비유는 너무나 정밀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제 개인적 추측이지만 강도를 당한 자는 틀림없이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비유의 지역이 유대지경인데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자라면 당연히 성전제사를 마친 유대인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 “유대인의 친구”로 누가 되었는가? 유대 사회에서 가장 경건하고 율법대로 이웃사랑에 열심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그들이 상종도 않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이 그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율법사가 정답을 맞힌 그대로다.
역으로 말하면 인간 사회 내에서 스스로 이웃 사랑을 자기들만큼 잘하는 자 없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율법을 최고로 잘 지킨다는 자들이 예수님의 비유에선 이웃사랑을 전혀 실천하지 않은 자가 되었다. 질문을 한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정답을 맞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에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라고 자기 입으로 시인한 꼴이 되었지 않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어떻게 당부했는가? 십자가 복음을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1:8) 전하라고 하셨다. 이웃 사랑에 당연히 사마리아인은 포함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족속에게까지 실행하라는 뜻이지 않는가?
이 말씀은 지리적 한계는 물론 문화적 인종적 장벽을 깨트리라는 차원마저 넘어선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서 스스로 정한 법률, 도덕, 사상, 종교의 틀을 깨트리고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종교를 이용하거나 거룩한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서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구원을 들먹이며 자기 배를 채우는 장사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서 이미 칭송과 인정을 받고 있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쌍한 죄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다.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모든 인간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실 뿐이다.
사마리아인과 율법사의 차이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에 비교해 사마리아인은 어떤 점이 달랐는가? 신자의 사랑과 불신자의 사랑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이웃 사랑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열심과 희생과 수고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사마리아인이 자기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본질적 차이가 아니다. 불신자보다 신자가 더 큰 사랑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그 이전에 사마리아인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그의 중심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재물 권력 지성 등 이 땅에서 보이고 소유하는 것들이 많아지면 생활이 조금 편해지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영혼의 참된 평강과 안식을 주지 못함을 절감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모으는 일을 자기 인생의 첫째 목표나 중요한 가치에서 완전히 제외시켜버렸다. 나아가 이 땅의 소유가 많아지는 것은 도리어 그 영혼의 평강과 안식을 훼방하며 죄로 이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대신에 평생토록 자기의 전부를 걸고 실천해야 할 진짜 중요한 가치가 따로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인생의 방향과 목적과 가치관이 이전과 360도로 완전히 달라졌다. 쉽게 말해 사마리아인은 외모를 보고 이웃을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자는 다른 이의 외모에만 영향을 받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불신자 시절의 썩어져가는 구습을 완전히 버린 자이다. 최소한 그러는 것이 자기를 너무나 썩게 만드는 짓임을 깨달았기에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자다. 결국 자기 영혼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보배로 심겨져 있느냐,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 자기를 높이려고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드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자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든 것은 아닐 것이다. 외면하고 자기 집으로 향해 가면서 양심의 가책을 털 끝 만큼도 느끼지 못했을 리도 없다. 그러나 내면의 그런 찔림을 무시하고 이겨낼 만큼 자기만의 만족과 행복과 안전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훨씬 더 컸던 것이다. 특별히 자기만을 사랑하려고 눈에 보이는 재물 계급 지성 권력 같은 소유만 늘리려 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모세의 계명 외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려고 스스로 고안한 규정도 덧붙이고 실제로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했다. 그래서 고르반이라고 하나님께 서약만 하면 자기 부모의 고통은 무시해도 된다고 가르쳤다. 또 그러는 자를 율법을 잘 지킨다고 칭송했고 하나님의 구원은 당연히 확보했다고 믿었다.
하나님을 위해서 부모의 고통마저 외면하는 자들로선 길가다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을 하나님 앞에 부정한 시체로 여기고 외면하는 것쯤이야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사마리아인이 없었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각이 너무나 어리석지 않는가? 과연 그런 자들이 성전에서 스스로 선행에 열심이었다고 자랑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은, 죄송하지만, 믿을 가치나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남의 일이라고 웃을 계제가 아니다.
지금 남의 일이라고 웃고 치울 이야기가 아니다. 이천 년 전의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그칠 일도 아니다. 지금 한국의 교회와 교인들이 어떠한가? 세상에서 부정하고 탈세하고 노동 착취 즉, 이웃사랑과 거꾸로 역행하면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어도 교회에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장로로 안수집사로 세운다. 그런 자들이 예배 때에 대표 기도를 도맡아 하고 성경공부까지 인도한다.
엄격히 말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선교 헌금을 수천 불씩 하고, 교회 운영과 목사의 사례비까지 책임을 지니까 목사들이 그들 앞에 찍소리도 못한다. 설교에서 죄를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면 하나님에게 복을 받는다고만 하는 목사가 잘못이다. 미국에선 불신자들마저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데 교회와 교인이 그런 정도조차 안 된다.
물론 교인들 마음에 종교는 흘러넘친다. 또 대부분이 종교를 가지고 장사를 하겠다고 설칠 만큼 사악하지는 않다. 그러나 종교를 이용해 자기를 사람들 사이에 높이는 행위는 만연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참 사랑이 실종 퇴색되어 간다. 우리 죄를 깨끗케 하는 그 소중하고 고귀한 주님 보혈의 공로가 없어졌다. 주님의 참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하여서 나누는 신자가 너무 드물어졌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본문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런 진리가 있다는 자체도 인식하지 못한다. 또 자기들이 이미 그들처럼 행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지나쳐 종교로 자기를 치장하려 했던 바울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고 그 일에 전적으로 기쁨으로 헌신했다. 그러다 동족의 구원이 더뎌지는 것을 보고는 종교로 남을 죽였던 그가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지옥에 떨어져도 되니까 제발 저들을 살려달라고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는가? 예수를 몰랐던 자기 지난 삶이 너무나 처참한 실패였음을 절감했기에 아직 예수를 모르는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본문의 비유에는 마지막이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가 하나 더 남았다. 앞에 잠간 언급했지만 사마리아인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강도당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가 없다면 불신자는 죽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 우리 모두는 정말로 두렵고 떨림으로, 그와 동시에 감사와 영광으로 서야 한다. 세상사람 중에 따로 불려나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하고 귀한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으며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뜻이 절대 아니다. 당신의 십자가 의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벌써 구원 받았고 또 그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아는 신자만이 세상에 온전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어가는 이웃과 세상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귀하고 막중한 소명을 어찌 등한히 할 수 있겠는가? 신자가 그 일에 게으르면 자기 주위부터 죽어갈 것이며, 충성하면 자기 주변부터 아름답고 풍성하고 활기차게 살아날 것이다.
3/9/2014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이웃을 자신의 형편과 취미와 상황에 따라 정하고 있음음 봅니다. 하지만 이웃의 정의는 이웃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야함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종교활동에 매몰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짐짓 머리로만 이해하며 안심하고, 그 사랑은 거저 얻은 사랑이기에 댓가로 열심이 종교활동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죽어가는 이웃들에 대해선 눈을 짐짓 감아버리고서도 율법대로 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자신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삼고 방패삼아 오히려 신앙이 더 좋은 자신으로 착각하진 않는지, 선택한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고 스스로의 열심과 종교성으로 또 위안삼고 안심하고 있진 않은지...겉으로 보여지는 사랑과 자신이 선택하는 종교활동과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사랑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 기도하며 종교성이 아닌 십자가 사랑으로 바뀌어지는 제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