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개종보다는 쉬운 길로만 가려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6)
“화 있을찐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이방인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유대종교 지도자
유대인은 누구나 나면서 유대교인이 된다. 따로 전도할 필요가 없었다. 또 이방인과의 교제를 금하고 있었기에 해외로 선교하러 갈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는 그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세 차례의 포로귀환 때에 조국으로 전부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방 곳곳에 남아 사는 자들도 많았다. 거기다 로마 제국이 고대세계 최초로 정치 군사적 안정을 구축하고 도로망을 확충하자 이방인들과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런데 그들과 교류할 때에 서로 다른 종교가 여러모로 걸림돌이 되었다. 모세 율법이 이방인과의 교류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타국인들도 원한다면 할례를 받는 것을 전제로 유대교로 개종할 수 있었다. 개종한 자는 성전 제사를 비롯해 모세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제대로 준행하면 유대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출12:48, 민15장) 사도행전에 “경건한 자”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바로 개종한 이방인을 지칭한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과 교류하는 이방인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려고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했다. 원시종교나 다신교 우상들을 숭배하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창조주이자 유일한 하나님을 알게 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직접 개입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들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예수님의 꾸중이 그들에게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이방인의 경우에 더 합당하게 해당된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회당에서 암기 방식으로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는다. 거의 다 율법에 능통했다. 현실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힘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해석과 판단에 의존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런 관행 때문에 장로의 유전 같은 형식적 외식적 신앙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율법의 조기교육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종교적 멍에를 씌우기는 훨씬 쉬웠을 것이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흠 있는 제물을 묵인함으로써 하나님을 멸시케 만들었다. 또 어쨌든 제사를 드렸으니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현실이 형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도 짓게 만들었다. 유대 일반 백성과 동일하게 지옥 자식이 되게 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방인들 고유의 죄까지 보태어져 문자 그대로 유대인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했다.
혼합주의의 죄
율법과 장로의 유전만 제대로, 사실은 형식적으로라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것 외에는 문제 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사람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대면하여 그 은혜 앞에 항복하게 만들거나 최소한 그 은혜를 소망하게 하기 보다는 자기들 세력만 키우려 들었던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에 몸에 익은 종교적 관습, 사고나 생활방식, 가치관, 신(神) 인식, 구원관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유대교의 겉옷만 입게 되었다. 이방신과 여호와를 함께 믿는 혼합주의 신앙이 되었다. 우상숭배에서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방인들과의 교류는 주로 경제적 동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방인이 유대인 상대로, 또 유대인이 이방인 상대로 장사를 하려니 상호교제를 금지하는 규정이 문제였다. 유대인들의 경건하게 보이는 겉모습에 감동을 받아 개종하는 순진한 이방인도 있었겠지만, 사업상 목적으로 유대교 개종절차만 형식적으로 거치는 자들도 많았다.
유대인들은 비록 하나님을 경시하고 원망은 했어도 홍해의 기적적 구원과 시내 산의 모세 율법으로 대변되는 여호와 신앙은 유지했다.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유대인 특유의 정체성과 자부심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몸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와도 마음으로는 자기들 신에게 빌고 있는 꼴이었다.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장사 목적으로 개종했으니 제사보다 젯밥에만 마음이 가있는 줄 빤히 알고도 묵인한 자들이 잘못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에 사업을 운영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사업하지 않는 자들도 성전 제사를 비롯해 교묘하게 자기 배를 불릴 간접적인 방안은 많았다.
이민교회에도 익숙한 관행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인데 어쩐지 아주 친숙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가? 특별히 이곳 이민 교회에 지금도 그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예수님을 정말로 온전히 알아서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도 없이 단지 비즈니스 할 기회만 노리며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이 있다. 최소한 이민사회에 유익한 정보라도 얻고 싶어서 나온다.
그러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도 교회에 인도하신다. 무엇보다 십자가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영혼은 없다. 문제는 그런 사람일수록 담임목사 말에 고분고분 잘 따르고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한다. 사업하려면 다른 이에게 잘 보여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들 중에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 해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는 목사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교회 밖의 모습도 불신자와 똑같이 세속의 쾌락에 젖어 있으며 불법, 탈세, 노동착취로 치부한 돈을 거룩한 제단에 드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만약 모른다면 영적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교회 중직에 임명하고 구역장으로 삼아 성경공부 인도까지 시킨다.
그런 교인을 교회 밖으로 출교키거나, 교회 이름으로 치리하고 야단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럴수록 더욱 불쌍히 여겨서 복음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도록 간절히 기도하되 온전한 주의 자녀가 될 때까지는 교회의 직분자로 임명해선 안 된다. 꾸준하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서 진리를 알게 해야 한다.
작금 당장의 예배당 건축이나 외적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교회와 목사의 이름만 높이기 위해 도리어 그들을 더 전면에 내세운다. 예수님만이 머리가 되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만 증거 되어져야 할 신성한 교회 안의 실상은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더러운 돈을 매개체로 하여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암묵적인 흥정이 은연중에 성행하고 있다.
목사는 어쨌든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하여서 교회가 성장하고 본인들의 사업도 번창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평가해준다. 또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것이며 그 당사자들로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미 지옥의 자식인 목사가 순진한 사람을 전도해서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만든 것이다. 잘못은 그들을 장로와 구역장을 세운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로 저러는 것이 믿음이 좋은가 보다 오해하게 하여서 동일한 잘못을 답습하게 만든다.
더 큰 잘못은 교회 밖 불신자들에게까지 미친다. 예수 믿는 자들도 인생을 살아가는 목표가 자기들과 동일하게 이 땅에서의 형통과 출세임에도 자기 노력과 열심을 다해 성실히 이룰 생각이 없다고 간주한다. 신(神)의 힘을, 그것도 서양(西洋) 신 예수의 힘만 빌리는 아주 치사하고 나약하고 비겁한 자들이라고 비방하게 만든다.
경시되고 있는 개종 절차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방인들을 성경적 유대교로 개종을 시키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목사들은 불신자를 성경적 기독교로 개종시키지 못하고 있다. 일단 교회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교회에 나오면 일단 구원을 받은 것으로, 최소한 천국 문 바로 앞에 왔다고 착각한다.
간단하게 초신자 교육을 거치게 한 후에 곧바로 세례를 주고는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갔다고 선포한다. 정작 본인은 천국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갔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 책의 의미도 무엇인지 모른다. 구원의 확신이 전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내포, 아니 보장하는 그 풍성한 은혜, 권능, 위로, 안식, 충만,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이전에 갖고 있던 유교 사상이나 무속신앙의 흔적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은혜와 율법이 교묘하게 짬뽕이 된 이상한 도덕주의나 크리스천 샤머니즘이 교회 안에 번창하고 있다.
목사들이 불신자의 개종 절차를 아주 심각하고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영원하고도 아름다운 관계와 맥락에서 본질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러니 교회가 마치 세상의 처신술. 출세기술, 인간관계 개선방안만 가르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다. 아주 잘 봐주어야 교인들을 기독교라는 종교 프레임 안에 집어넣으려는 목사 개인의 인간적 열심만 두드러질 뿐이다.
가장 표본적인 개종자의 예
성경에는 올바른 개종의 예들이 많다. 본문의 사건은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이다. 구약 성경만 숙지하고 있던 상황이기에 구약에서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자. 많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열왕기하 5장의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바로 그다.
문둥병자였던 그를 불쌍히 여긴 이스라엘 출신의 계집종이 사마리아의 엘리사라는 선지자에게 가면 치유 받을 수 있다고 권했다. 나아만은 말과 병거와 시종들을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왔다. 그런데 엘리사는 사환을 내보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해 왔다.
나아만은 큰 모욕감을 느꼈다. 당시에는 한 나라의 군대 장관이 군대를 거느리고 오면 전쟁을 의미했다. 지금은 병을 고치려는 개인적 목적의 방문이기에 백기(白旗)를 들었거나 그와 상응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즉 자신의 체면과 위신은 다 내려놓았다. 고대의 선지자는 왕이나 방백들의 명을 받아 자기들 신에게 신탁만 행하는 자들이었다. 나아만은 신탁이 잘못 되면 얼마든지 선지자들을 죽일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런데도 엘리사는 코빼기도 내비취지 않았다.
성경은 엘리사가 당연히 자기 상처에 손을 얹고 고쳐주기를 나아만이 바랐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5:11) 선지자가 직접 뛰어나와서 치료에 최선을 다해주길 기대했었던 것이다. 집 안에 머물면서 샤워 일곱 번 하라는 말만 간접적으로 전했다. 당시에도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있는 온천은 곳곳에 있었고 나아만도 시도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래도 전혀 낫지 않는 데다 흙탕물인, 실제로 그러함, 요단강에 씻으라고 하니 병이 더 도질까 염려스러웠다.
화가 난 나아만이 돌아가려 하자 종들이 이왕에 여기까지 멀리 왔으니 시쳇말로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그렇게 해보시라고 설득했다. 만약에 치유가 안 되면 그 때에 가서 선지자를 죽이면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나아만도 못 이긴 척하고 요단강에 일곱 번 씻었더니 정말로 씻은 듯이 문둥병이 나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유대교로 개종했다.
개종의 놀라운 고백
그가 개종한 첫째 이유는 물론 엘리사의 큰 능력에 감격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을 보라.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5:15) 이 고백은 엄청난 것이다. 당연한 고백이라고 쉽게 넘어가선 안 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에 애굽의 술사들이 큰 능력을 보였듯이, 아람에도 신기한 능력을 보이는 술사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지만 나아만은 크고 작은 초자연적 능력을 보아왔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을 그 큰 능력만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엘리사는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나아만의 문둥병의 상태를 눈으로 보고 정확히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집 안에서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는 영이신 하나님과 자신도 영으로 교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전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나아만을 치유한 것이다.
나아만으로선 지금껏 자기가 알고 있는 신들과 그 신들의 능력에 대한 상식이 안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손을 당처에 얹는 것 같은 가시적인 치료 방법을 동원하지도, 주술적 의식도 전혀 치루지 않았다. 말씀으로만 치유하는 것은 생전 처음 보고 겪는 체험이었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다고 해서 그 물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에 물에 능력이 있다면 상처가 조금씩 나아져야 한다. “일곱 번 몸을 잠그니”라고 기록했듯이 틀림없이 일곱 번을 씻은 후 일순간에 깨끗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일곱 번까지 즉, 완전하게 끝까지 순종하는지 보려는 하나님의 테스트였음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군대 장관이라면 수도 없이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나아만은 출정할 때마다 아람 신전에 들어가 자기 신들에게 엄숙하게 제사하고 신탁을 받은 덕에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요단강에서 초자연적 능력을 체험한 후에 여호와를 믿기는 의외로 쉬울 수 있다. 그보다 지금까지 자신의 출세를, 그것도 문둥병자임에도 군대 장관에까지 오르게 도와준(?) 신들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로 더 어려운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는 엘리사를 통해 치유 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신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여호와의 경이로운 권능과 은혜를 절감했던 것이다. 그가 개종한 후에 그곳의 흙을 담아가선 절대로 다른 신들에게 제사하지 않겠다고 했다.(왕하5:17) 언뜻 원시종교의 관습과 냄새를 풍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요단강에 몸을 담그면서 여호와의 강력한 임재를 느꼈던 것이다. 그 치유의 현장에 자신과 함께 하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개종의 고백을 하고 또 흙을 갖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고대는 각 나라의 신들의 통치가 지역적으로 제한된다고 믿었다. 나라와 종족 별로 신들이 다르고 또 그래서 그가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고백한 까닭이다. 그로선 아람에 돌아가서도 오직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의로운 통치만 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아만의 개종이 확실하게 이뤄졌고 올바른 모습이었다는 증거는 하나 더 있다. 아람 왕이 자기들 신전인 림몬의 당에 들어가 경배할 때에 왕의 경호실장 격인 그가 손을 부축하고 들어가야 했다. 왕이 몸을 구부리면 어쩔 수 없이 자기도 수그리게 되는데 그것만 예외로 인정해서 용서해달라고 간구했다.(왕하5:18)
군대 장관의 자리에 미련을 둔 것이 아니다. 여호와 신앙을 버리더라도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결코 놓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육신의 겉모습은 우상 신전에서 그 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 내면의 본질은 절대 그렇지 않고 여호와 신앙에 추호도 변함이 없음을 제발 알아달라는 뜻이었다.
이에 반해 지금 예수님의 꾸중의 대상이 된 이방인들은 어떠했는가? 육신적 겉모습은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와 있어도, 입술로는 “주여! 주여!”해도 그 속의 본질은 이전의 종교에서 하나 변한 것 없었지 않는가? 오죽하면 예수님이 지옥 자식이라고 야단쳤겠는가?
나아만 사건에서 정작 주목할 사항은?
그러나 본문의 꾸중은 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나아만 사건에서도 정작 눈여겨 볼 자는 엘리사다. 우선 그는 나아만을 직접 상대하지 않았다.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 장관을 구태여 대면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군대를 끌고 왔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아만이 병거를 타고 시종들을 거느리고 온 이유는 “나는 이만큼 세상에서 잘 나가고 높은 사람이니까 너는 나의 신분과 위엄에 격식을 맞추어 대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만 따랐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두려워했다. 또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했기에 세상의 어떤 다른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왕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방 군대장관쯤이야 더 그랬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유대 동족이던 이방인이든,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으로 교통했다. 그들로 진리를 알게 하고 또 따르게 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나아만은 사환에게서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고침을 받았다. 너무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체험이었다. 진정으로 예물을 그 신에게 드리고 싶어졌다. 엘리사는 그의 소원을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적국의 군대장관에게 예물을 받을 필요도 없었지만, 자기 개인의 치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이 온 천하에 높여지는 것을 소원했던 것이다.
이 또한 나아만으로선 생전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지금껏 어떤 신들의 어떤 선지자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가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는 데는 어쩌면 엘리사의 이런 청렴한 모습이 결정적인, 최소한 아주 중대한 요소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여호와만이 참 된 신이며, 그 신앙만이 온전한 진리임을 엘리사가 보증한 것이다.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개종의 교과서적 표본으로 나아만 사건이 제시되어 있다. 선지서들에는 영적 지도자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충성, 헌신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여 가르쳐야 할 직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맡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 진리의 정반대편에 서있었고 백성들도 그쪽으로 이끌었다. 개종을 시킨 것이 아니라 개악(改惡)토록 했다. 천국의 반대편인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일부 목회자들도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목사는 돈을 밝히지 말라 혹은 인격적으로 올바른 처신을 하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엘리사는 물론 나아만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했다. 그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목사도 그것으로 시험과 유혹을 받아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목사는 그것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 또 소지하고 있는 자다. 그 진리가 역사하는 힘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지 세밀하고도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목사는 그 진리만 붙들고 살아갈 때에 얼마든지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음을 가르치고 실제로 그런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에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받았다면 성경의 기록은 전혀 엉뚱하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금과 은이 있었다면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기적도 없었을 것이다. 목사가 재물에 검소하고 무소유까지 실천하는 청렴성이나 도덕성 자체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또 그 말씀이 성육신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능과 은혜가 기적을 일으켰다. 단 반드시 그 진리 됨을 확신하고 그 진리대로 사는 사도를 통해서 말이다. 목사의 청렴성과 도덕성도 십자가 진리 위에 바탕을 둘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통해 교인들에게 넘치도록 부어질 것이다.
골고다 십자가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메시지
오늘날의 교회와 목사들은 열성적으로 정말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전도하고 있다. 전도란 개종을 시키는 것이다. 타종교인은 물론 무신론신자와 불가지론자들도 그 대상이다. 무신론과 불가지론도 실은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기에 그들을 전도하면 기독교로의 개종이 된다.
기독교 즉,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타종교에선 종교의 자유가 있기에 타 종교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보인다. 타종교인에게 포교활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목사들이 있다.
인간이 만든 종교들 사이에는 분명히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삼천 년 전의 사람으로 우상을 숭배했던 이방인 나아만도 여호와 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했다. 또 그 한분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인간에게 구원의 이름을 준 적이 없다. 골고다의 예수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딱 한 번 있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란 인간이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성격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는 그 것을 인정하느냐, 수용하느냐의 차원도 넘어선다. 그 절대적 진리 앞에 항복하느냐 않느냐는 과제로만 모든 세대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제시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기독교를 믿으라, 교회에 출석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당신과 당신의 사역을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그분은 아무 말씀 없었어도 실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영으로만 당신의 뜻을 알도록 십자가를 통해 공표한 것이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지만 그 메시지는 인간 육신의 눈과 귀로는 절대 가리지도 막을 수도 없다. 그 메시지가 무엇인가?
너희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죄 중에 빠져 있든지, 지금껏 어떤 신을 모시고, 어떤 종교를 믿고 있던지 간에 십자가 사랑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겸비하게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악독한 자라도 그 죄를 예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서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리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간이 고안한 사상과 종교도 포함해서 다 시들고 썩어 없어질지라도 이 진리만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유일한 절대 진리라는 것이다. .
참된 개종을 외면하는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
기독교에서만은 개종이란 기독교의 본질을 한 인간의 내면에 채우는 일이다. 겉모습은 쓰러지고 넘어지며 죄에 빠져 있을 수 있다. 나아만처럼 때로는 사탄과 직접 대면 교류할 경우도 있다. 그런 자에게 채워야 할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인간의 공로, 자격,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 교리로 채우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에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세상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심지어 선행이나 자신의 희생은 물론 자기 생명을 바치더라도, 자기 죄를 절대 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철두철미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절망에 떨어져 진심으로 애통해져야 한다.
그 위에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선물로 받아 누려야 한다. 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런 죄인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분이 나의 처음과 끝을 속속들이 알고 계셨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 마음의 그 추하고 추한 생각까지 다 알고 계셨음에도 지난 내 인생의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당신만의 긍휼로 붙들어 주셨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의롭고도 거룩하며 엄청난 사랑과 권능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서 남은 생애 동안에는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한다.
기독교의 개종이란 그래서 자신이 이전의 자기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그 신분과 특권이 주는 평강과 안락과 자유를 누려야 한다. 골고다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어떤 큰 성공과 형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한다. 예수님만이 이 땅을 살아가는 소망이요, 목적이 되고 처음과 끝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 죄인의 내면의 본질이 철저하게 부서져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인간 존재 전부, 한 인격체가 예수로 인해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을 그 내면에 채우는 개종이요, 구원이다.
나아만의 경우 여호와 권능에 항복하는 것보다 이전의 우상 신앙을 버리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믿는 것은 쉬울 수 있다. 자신의 옛 자아가 철저히 부서지는 것 그래서 새로운 자아로 다시 바뀌는 것이 힘들다. 오직 성령이 역사하여 십자가 진리의 말씀이 순전히 전해져서 예수님의 권능과 은혜가 역사해야만 가능하다.
작금 목사들은 그 참 개종의 길을 외면하고 있다. 대신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로 대신하고 있다. 한 죄인의 본질을 진리의 말씀으로 완전히 깨트려서 새로운 본질로 바꾸기보다, 겉모습만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 안에 꾸겨서 넣는 아주 쉬운 길을 택하고 있다. 교회를 키우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헛된 욕심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 진리의 말씀으로 이전의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부서져야 참된 개종이다. 그럼에도 강단에서 십자가 진리가 점차 쇠퇴 실종되어 가고 있다. 겉모습만의 개종에만 힘을 쏟고 있다.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일곱 저주가 똑같이 임하지 않을까 두렵고 떨릴 뿐이다.
4/27/2014
설교 텍스트만 올립니다. 양해바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