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보다 영성이 떨어지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7)



http://youtu.be/Pxl_-9tL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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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23:16-22)


한 줄기 빛도 없는 유대 땅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세 번째로 질책하는 말씀이다. 먼저 주의할 것은 본문을 맹세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면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고 옳다 옳다 혹은 아니라 아니라고만 하라고 가르쳤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마5:33-37) 본문에는 맹세를 금지하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지키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이곳에서 이 말하고 저곳에서 저 말하는 분일 수는 없지 않는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은 장래 일은 인간이 주도할 수도, 알 수도 없기에 함부로 장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5:36)고 그 이유를 정확히 밝혔다.

그러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헌신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결단하여 서원하는 것까지 금지하지는 않았다. 맹세를 다 준행한 후에 하나님께 반대급부의 보상을 받기를 원하거나 자신을 자랑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 서원을 기쁘게 받으신다. 그런 서원을 하는 자는 스스로 반드시 지킨다. 하나님도 잘 지킬 수 있도록 믿음과 여건과 자원을  마련해주신다.  

본문은 지금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따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해해야 한다. 다른 여섯 저주에선 “외식하는 자”라고 지칭한 것과 달리 “소경된 인도자여”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소경으로 잘못 인도하고 있는 대표적 예로 든 것이다. 네 번째 저주(23,24절)의 뒷부분에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 때는 십일조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이 소경된 인도의 또 다른 예라는 것이다.  

자기 앞도 못 보는 소경이 인도하면 따라가는 자와 함께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멀쩡한 두 눈을 가진 자가 소경을 따라갈 리는 만무하다. 유대 대중도 소경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큼 율법과 구약성경에 전문가는 없었다. 영적으로 당시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깨인 자들이었다. 인간 사회에선 그들은 경건하고 신령하다고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하늘의 하나님이 보시기엔 소경이었고 유대 대중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다른 모든 민족들도 처음부터 아예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 우상을 숭배하는 소경이었다.

결국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이 땅에는 한 줄기 빛도 없는 흑암의 천지였다. 목자 없이 길 잃은 양떼들만 있었다. 사람들이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지금보다 너무 열악해서 고통 받는 것만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자유가 억압된 자들은 지금도 넘쳐난다. 인생의 소망이 없고 향방을 결정할 방도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채워도 목 타는 갈증은 갈수록 더 심해졌다. 당연히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상이 절정에 이른 것이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상태였다.  

맹세의 두 전제

구약성경의 율법을 더 엄격하고 세밀하게 지키려 노력한 그들이 예수님께 소경이라고 야단맞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맹세에는 두 가지 필수 조항이 포함된다. 먼저 자기보다 큰 능력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이나 대상에 대고 맹세한다. 또 맹세를 반드시 지킬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어기면 위약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한다.

흔히 이 약속을 어기면 내 성(姓)을 갈겠다고 큰소리친다. 성은 부모, 조상을 대변하기에 자기보다 높은 신분에 대고 맹세한 것이다. 보증하는 벌금 조로 성을 갈겠다고 했다. 부모를 부인하는 천하의 패륜아라는 비방과 수치를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맹세를 가르치면서 이 두 조건을 교묘하게 이용했는데 너무나 영악하고 치사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항상 그러하듯이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고 예리하게 그 잘못을 지적했다.

먼저 성전과 제단으로 맹세하면 즉, 위약보증금을 걸지 않고 말만으로 하면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16,18절) 어겨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고 유대 사회에서 추방시키지도 않는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나면서 소경을 고쳐주었다고 죄인이라고 그렇게 비방했으면서(요9:24) 말이다.

대신에 성전의 금과 제단 위의 예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전의 금”(16절)이 성전이나 성전 기구에 장식된 금이 아니다.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19절)이라고 했다. 제물은 제단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바쳐진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17절)이라고 표현했기에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해석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로만 맹세하지 말고 맹세를 보증하는 위약금을 걸라고 가르쳤다. 말하자면 맹세를 잘 지키는지 감독하고 독려하는 자신들의 책임을 다한 셈이다.

빈 손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거론한 맹세는 인간 사회에서 인간끼리 하는 약속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만약에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예물을 함께 바쳐야 했다.  아리우나가 자신의 타작마당에서 제사 지내려는 다윗 왕에게 그 마당을 무상으로 헌물하려 했다. 그러나 다윗은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24:24)고 하면서 직접 돈을 주고 구매했지 않는가?

율법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손으로 나올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께 서약을 하면 시작할 때와 마칠 때에 결례를 드려야 했다. 하나님이 제물로 배를 불리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의 진정성과 온전함을 분명히 보이라는 것이다. 율법의 문자적 준행까지 강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에 대한 맹세를 예물 없이 말로만 해도 된다고 가르쳤을 리는 없다.

그럼 사람 사이의 약속에 위약보증금을 거는 것은 당연하고 잘하는 일이지 않는가? 오늘날도 돈을 빌리려면 담보를 걸어야 하고 최소한 약속어음이라도 받아야 한다. 말로만 약속하고 안 갚으면 재판에서 증거 부족으로 패소한다. 빌려준 사람에게도 순진하게 말만 믿은 실수 내지 잘못이 있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인생사란 자기가 주도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언제 생명마저 거두어가실지 아무도 모른다. 바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인간끼리 맹세란 종종 어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럼 위약금으로 성전에 건 예물은 고스란히 성전 수입이 된다. 정확히 말해 종교 지도자들의 배를 불리게 된다.

그런 가르침은 일견 분명 타당하고 합리적인데다 종교적 명분도 확실히 섰다. 그러나 사실상 노골적으로 돈을 밝힌 것이다. 부모를 부양할 돈을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라는 뜻)되었다고 선언하면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지 않는가? 제5계명을 어겼지만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첫째 계명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였다. 누구도 반발할 수 없는 영적 이유를 내세웠고, 그리고 그 고르반 된 돈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자기들이 챙겼다.  

그들은 인간 만사가 결코 자기 뜻과 계획대로만 이뤄지지 않음을 잘 알았다. 영적으로 가장 깨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깨우침이 들었다면 예수님처럼 맹세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가르쳤어야 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 벌이를 한 것이다.

핑계대지 못하게 못 박은 예수님

이런 관행은 생각보다 심각하고 엄청난 죄악이다. 비록 금과 예물을 걸고 맹세를 시켰더라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백성들로 맹세를 잘 지키도록 만들었다면 괜찮은 것 아닌가 넘어갈 수 있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바쳐진 금과 성전 중에, 또 제단 위의 예물과 제단 중에 어느 것이 큰지 물었다.(17,19절) 두말할 것도 없이 성전과 제단이 금과 예물보다 크다. 또 성전과 제단을 하나님과 비교해 어느 것이 크냐고 했다. 당연히 하나님이다. 성전에서 어떤 방식으로 맹세하든 즉, 예물을 거는 것과 무관하게 성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모두가 여호와 신앙을 지녔다. 그분의 언약 백성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게 행해야 한다. 유대인에게 이 여호와 신앙을 제거해버리면 유대인으로써 뿌리가 제거되는 셈이다. 아무리 말로만 성전과 제단에 걸고 맹세했어도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말로만 했으니 어겨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비유컨대 한국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말하라고 가르친 것과 같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원리를 모를 리가 없다. 성전과 제단에 예물을 바치며 맹세하라고 강조했고 반드시 지키도록 독려한 것이 그 반증이다. 그러나 말로만 약속한 것은 자기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바로 세상 법을, 그것도 문자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담보나 약속어음을 받지 못한 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또 그 핑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도록 마지막 22절에서 못을 박았다.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라고 했다. 하늘로 맹세할 경우에는 금도 예물도 걸 수 없다. 하늘에다 그것을 올려드릴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한 것이며 위반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삼척동자가 들어도 안다는 것이다. 그것과 성전이나 제단에 대고 말로만 맹세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더라도 돈은 떼이지 말라.

아직도 그들의 죄가 얼마나 나쁜지 잘 실감하지 못할 것 같아 서두에 든 예를 다시 인용하겠다. 이 약속을 어기면 내 성을 갈겠다고 한다. 그것을 어겨도 당장의 금전적 손해는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어기는 상황이 생겼다고 가정했을 때에, “백만 원을 줄 께.”라고 한 것과 “내 성을 갈겠다.”고 한 것 중에 과연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정상적인 상식, 이성, 도덕성을 갖춘 자라면 차라리 백만 원을 지불하는 쪽을 택할 것 아니겠는가?

왜 그러겠는가? 성을 바꾸는 것은 아버지를 바꾸는 것이다. 내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사생아라는 것이다. 그럼 어머니가 부정을 저지른 불륜녀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식 된 도리로써 ‘차마’가 아니라 ‘절대’ 해선 안 되는 짓이다.

금과 예물을 바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가르친 것은 이 비유에 견주면 차라리 백만 원을 무는 쪽을 택하라고 한 셈이니 잘된 것인가? 주의해서 들으셔야 한다. 그것만 가르치고 그쳤으면 그런 뜻이 된다. 문제는 성전과 제단에 걸고 말로만 맹세한 것은 안 지켜도 된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약속을 어기면 부모의 성을 갈겠다고 한 것은 위약금 없이 말로만 맹세한 것이다. 그 약속을 어기면 본인이 창피만 당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이미 살핀 대로 어떤 사람도 돈을 손해 보지 부모를 버리는 쪽은 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금과 예물을 건 맹세는 반드시 지키고 성전과 제단에 건 것은, 사실은 하나님에게 말로만 맹세한 것인데도, 안 지켜도 된다고 했다. 역으로 따지면 돈은 절대로 아끼고 차라리 부모의 성을 갈라고 가르친 것이 되지 않는가? 이해가 되는가?

거기다 맹세란 반드시 자기보도 높은 신분과 대상에 걸기 마련이므로 비록 성전에 바쳐지긴 했어도 금과 동물 제물이 자기보다 더 소중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유대인의 정체성만 부인시킨 것이 아니다. 인간을 짐승이나 돈 몇 푼보다 더 못하다고 한 것이다. 성전과 제단에 말로만 맹세한 것은 어겨도 된다고 했으니 그것이 인간보다 낮은 신분과 대상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을 인간보다 못하다고 가르친 것과 같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진 평소 생각이 그러니 가르침도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적으로 고상하게 포장하여 가르쳤어도 죄는 반드시 그 추악한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의 잘못된 생각, 아니 엄청난 죄악을 정확하게 지적하셨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나님보다 금과 예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제단에 바쳐진 동물보다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더라도 돈을 챙기라고 가르친 것이다. 맹세한 백성이 돈을 챙기게 했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성전으로 맹세시켜선 자기들이 중간에서 가로챘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서있다고 칭송 받는 사람들이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일반인도 부모의 성은 갈지 않는데 유대인들더러 하나님의 성을 갈라고 가르친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여호와가 거의 들어 있다. 예수님의 일곱 저주만으로도 부족한 것 아닌가?

예수님 오시기 전의 유대 땅, 아니 온 세상의 영적 실상이 이러했다. 성경이 선포하는 대로 빛 한 줄기 없는 흑암의 천지였다.(요1:5) 참 빛이신 하나님 당신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다. 또 오셔서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일곱 번이나 저주한 유대종교지도자들마저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시겠다는 것이다.

돈을 밝히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자기들을 야단치는 이가 바로 참 빛이며 또 그 야단치는 이유를 정확히 깨달아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했지만,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받아주시겠다는 것이 십자가의 뜻이다. 이런 십자가 은혜 외에 우리 모든 인생에 과연 어떤 다른 소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와 장로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

오늘날에는 설마 이들처럼 돈을 노골적으로 밝히거나 하나님을 떠나도 된다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지도자들이 없을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내가 큰 교회의 시무 장로인데 돈을 떼먹겠는가라고 큰소리쳐놓고 즉, 교회 이름과 장로라는 직분을 걸고 맹세해놓고 어기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것도 교회 안의 사람에게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한다.  

물론 장로도 약속을 어길 수 있다. 사람 일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은 당장 한 치 앞도 보지 못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다로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잠16:9)시라는 것을 잘 알기에 장로가 되었지 않는가?

본인은 교회와 장로라는 내 개인적 신분에 대고 맹세했지 하나님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고 우길지 모른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성전과 제단에 대고 맹세한 것은 여호와께 한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상대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는 큰 교회의 장로가 설마 약속을 어기겠는가라고 받아들인다. 불신자들도 부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듯이, 신자는 부모보다 더 큰 하나님에게 맹세했으니 더더욱 잘 지킬 것이라고 믿었지 않겠는가?

그런 장로에게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장로와 교회와 하나님이 중에서 누가 더 크냐? 또 그 장로의 직분을 준 자가 누구냐?”라고 묻지 않겠는가? 주일학교 유년부 학생이라도 알아맞힐 수 있는 질문 아닌가? 정말로 너무나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일곱 저주가 바로 자기에게 해당됨을 깨닫고 진정으로 두렵고 떨려야 한다.

장로가 돈을 빌릴 때에 교회와 장로를 위약금으로 걸어선 안 된다. 사업 타당성과 장래의 전망으로 보증해야 한다. 반드시 서면으로 계약하고 담보물도 걸어야 한다. 교인이 세상의 법규와 상식을 더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 혹시 차질이 생기면 성심성의껏 양해를 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야 한다.

처음에는 상대가 장로인줄 모르다가 사태가 정확하고 올바르게 다 수습된 후에야 장로인 줄 알고선 역시 예수 믿는 분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하셨지 않는가?

예수님의 꾸중을 비켜가지 못하는 목사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목사들도 본문의 예수님의 꾸중을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소경이라고 말한 까닭이 전혀 보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큰 것은 보지 못하고 작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큰 것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도 무시하는 것이다. 또 자기에게 유익하게 악용하는 것이다. 종교적 명분으로 치장해서 말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큰 것을 적게 보고 자기에게 크게 보이는 것만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 내심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면서도 종교적 명분을 갖다 대선 교인들을 독려, 강요, 감독하는 것이다. 자기 영달과 명예를 높이려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구실을 대니까 영적 분별력이 아무래도 떨어지는 교인들로선 따를 수밖에 없다.

너무나 흔한 예로 선교나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에 부정을 범하는 것이다. 오해해선 안 된다. 선교나 교회 건축은 물론 그것을 위한 작정 헌금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선하고 좋은 것이다. 문제는 그 돈을 사용한 목적과 시행한 명세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담임목사의 목회비용이라는 구실로 얼버무리고 회계 장부마저 분식해버린다.

교회의 재정은 반드시 더 투명해야 한다. 혼탁한 사회를 깨끗케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수뿐이다. 교인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계도해야 할 목사가 앞장서서 세상의 꾸중 물로 교회 안을 더럽히고 있다. 하나님을 욕보인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개독교라는 비난을 사람들로부터 자초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하나님을 부인하더라도 돈은 절대 떼이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막상 그 돈을 자기들이 착복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목사들은 교인들이 피땀 흘려 모아 하나님께 바친 돈을 공명정대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차라리 교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재정적으로 전횡을 일삼다 못해 횡령하고 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상 법정에 가서 아무 잘못한 것 없다고 떳떳하게(?) 항변하고 있다. 서면으로 계약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세상 법을 문자적으로 어긴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당신의 진노를 억누르고 계실 그 인내심이 오히려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목사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런 부정을 단순히 윤리 도덕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목사도 인간인지라 실수할 수 있다고 덮어두려 한다. 물론 목사도 실수할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면 당연히 그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문자적으로 어겼다는 사실은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목사가 본문도 설교했을 터인데 도리어 본문의 예수님 꾸중을 들을 일을 범했지 않는가? 거기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야단친 주님의 숨겨진 참 뜻을 정확히 깨우치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직 순진해서 소경된 인도자들에게 넘어갔다. 현대인들은 다르다. 이성적으로 많이 깨였다. 지금은 불신자들마저 교회를 걱정하게 되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한 도교 학자가 성경을 목사보다 잘 가르칠 수 있다고 큰소리 치고는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가슴을 찢고 통곡하며 회개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래도 아직은 소망이 있다.

정작 더 큰 문제가 하나 더 남았다.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부정을 저지른 것이 탄로가 나서 파면될 것을 미리 안 청지기가 주인 몰래 채무자들을 불러서 빚진 것을 탕감해주었다. 실직한 후의 살아갈 길을 모색한 것이다. 주님은 그 결론으로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눅16:11)라고 했다.

주님이 마치 그 종이 지혜롭게 행했다고 말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형통하기 위해서 세상 방식으로 영악하게 행동했다는 뜻일 뿐이다. 그가 한 행동이 선하거나 용납할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와 대비해서 빛의 아들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는 절대로 금전적으로 깨끗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 된 것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와 목사가 지금 같은 행태를 계속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돈을 목적으로, 혹은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동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아무리 교회를 건축하고 해외 선교에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이 부재(不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이루신다. 성령의 권능으로만 일 하신다.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가 세상에 더 훤하게 비취이고 열매 맺는 모습으로만 역사한다.

그렇다면 아직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돈은 모든 불신자의 인생의 목적이다. 최대한 양보해도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 신자는 세상에서 따로 불려나온 자다. 바로 그런 인식과 가치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령님이 불신자 시절의 그런 사고를 뒤바뀌게 해주었다.

그래서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주인으로 섬길 수 없게 된 자다. 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늘의 하나님만이 인생의 목적과 소망이 되었다. 내 삶을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은 오직 그분께로 오심을 확신하고 실제로 그 힘의 의지해서 충만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다.  

교회사역과 해외선교 등에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돈이 늘어나면 그 돈으로 하나님의 일도 더 부흥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만이라도 완전히 제거하면 하나님의 큰 역사는 반드시 일어난다. 당장 교회 건물이 낡고 비좁아도 단기 해외선교조차 할 수 없어도 그렇다.  

신자 각자의 삶과 인생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신자에게 본문 말씀의 숨겨진 진리를 정확히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실제 삶에서 굶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만 따르는 본을 보이는 목사가 정말로 있다면, 또 그 본을 따르는 교인들로 채워진 교회가 있다면 하나님이 부흥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실 리가 없지 않는가? 초대교회에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 교회에선 예수님의 빛이 목사와 개인을 통해 그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히 세상으로 흘러 나가게 된다. 세상과 사람이 도무지 막을 수 없는 힘으로 염병처럼 번져나가게 된다. 불신자들에게 저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 진리를 나도 알고 싶고, 저들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다는 소원이 생기게 만든다. 한마디로 교회가, 특별히 목사가 재정적으로 투명해지기만 해도 개독교가 다시 기독교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5/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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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236) http://youtu.be/sDR9beTn-j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향유옥합을 깨트린 마리아가 칭찬받은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235 - 마26:6-13) [4]

향유옥합을 깨트린 마리아가 칭찬받은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235) http://youtu.be/Bj6R9JUxih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玉盒)을 ...

복수(複數)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는 두 단어 (마태복음강해 #234 - 마26:1-5) [5]

복수(複數)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는 두 단어 마태복음강해 (234) http://youtu.be/LaccUs1d_Z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

마지막 심판의 기준 (마태복음강해 #233 - 마25:31-46) [2]

마지막 심판의 기준 마태복음강해(233) http://youtu.be/FXgNLGYWj0E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

종말에는 더더욱 세상에 충성하라. (마태복음강해 #232 - 마25:14-30) [10]

종말에는 더더욱 세상에 충성하라. 마태복음강해 (232) http://youtu.be/-d2ImUImfsg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

혼인집 열 처녀 비유의 정확한 뜻 (마태복음 강해#231 - 마25:1-13) [2]

혼인집 열 처녀 비유의 정확한 뜻 마태복음 강해(231) http://youtu.be/qjnfrLYXLtE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마태복음 강해 #230 - 마24:44-51) [1]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 마태복음 강해(230) http://youtu.be/hy8pTp1qZ4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

휴거되지 않을까 결코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9 - 마24:40-43) [4]

휴거되지 않을까 결코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9) http://youtu.be/FQjvqYzGP3k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이미 방주를 짓고 있는 제2의 노아 (마태복음강해 #228 - 마24:32-39) [5]

이미 방주를 짓고 있는 제2의 노아 마태복음강해 (228) http://youtu.be/zEh_opoKjSo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

주님 재림 때에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27 - 마24:23-31) [1]

주님 재림 때에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27) http://youtu.be/GBdEmhm988E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

마지막 대환난을 견딜 수 있는 최선의 길(마태복음강해 #226 - 마24:15-22) [4]

마지막 대환난을 견딜 수 있는 최선의 길 마태복음강해 (226) http://youtu.be/qpt9pAkWVkw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 마24:9-14) [3]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http://youtu.be/ZJFfgXGhOf8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마태복음강해 #224 - 마24:3-8) [3]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마태복음강해 (224) http://youtu.be/xpNSYZ0lMos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란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

예루살렘 제4성전 건축에 숨겨진 비밀 (마태복음강해 #223 - 마24:1-2) [1]

예루살렘 제4성전 건축에 숨겨진 비밀 마태복음강해 (223) http://youtu.be/Sxtp-cfJl-c (클릭하시면 You- 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

예수님 재림의 때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 (마태복음강해 #222 - 마23:37-39) [1]

예수님 재림의 때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 마태복음강해 (222) http://youtu.be/3u4Zz324abo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롤 들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

교회는 공동묘지에 투자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1 - 마23:29-3) [1]

교회는 공동묘지에 투자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1) http://youtu.be/8HGMKWHX4qw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0 - 마23:27-28) [2]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20) http://youtu.be/wevLINUcDt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회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

신자가 범하는 진짜 외식은? (마태복음강해 #219 - 마23:25-6) [4]

신자가 범하는 진짜 외식은? 마태복음강해 (21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교회 중심의 삶은 하나님께 큰 죄다. (마태복음강해 #218 - 마23:23-24) [1]

교회 중심의 삶은 하나님께 큰 죄다. 마태복음강해 (218) http://youtu.be/U6QYMHGNzMA (클릭하시면 You-y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

불신자보다 영성이 떨어지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7 - 마23:16-22)

불신자보다 영성이 떨어지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7) http://youtu.be/Pxl_-9tLeSI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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