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너무나 진지하신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 (#170)



http://youtu.be/Q8Wm1DGQP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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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3-17)


예수님의 정체성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지금도 세상만사를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교인은 없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도 다들 수긍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본체라고 확신하느냐 물으면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신자들이 꽤 있다.  

기독교 신앙은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아니 신앙의 처음이자 끝 즉,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있던 죄인을 구원해주신 그분의 신적 사역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자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신적 신분을 뜻한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는다면 신자라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베드로와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적 지식을 점검하거나, 신앙의 진위(眞僞) 여부를 확인하려는 질문이 아니다. 그렇게 대답한 구체적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또 알고 있는바 그대로 살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신자의 현실의 삶에서 그분의 권능과 은혜가 실제로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하나님뿐 아니라 그 독생자도 영원하고 신실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살아계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동행해주신다. 그럼 신자를 통해서 그분의 권세가 세상을 향해 마땅히, 자연히, 필연적으로 드러나야 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신자는 이웃을, 신자들이 모인 교회는 사회를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바꾸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작금의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다. 이웃이 신자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그 일차적 원인은 목사와 신자와 교회의 스캔들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 원인은 예수님의 권세가 교회와 신자 안에서 실종, 퇴색, 변질된 때문이다.

신자와 교회가 사회는커녕 이웃도, 이웃은커녕 자기 가정도, 배우자와 자녀는커녕 내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 고백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간혹 그런 고백을 해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고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교회와 신자에게 이 고백이 확고하게 서있지 않기에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세 종류의 고백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 질문을 하게 된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님이 7병2어의 기적을 베풀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꼬투리를 잡으러 찾아왔지만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쳤다. 그들과의 갈등이 심화될 것을 예상하고 다시 갈릴리 북부 지역으로 넘어가 잠시 체재하려고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제자들에게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의 정체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보다 인간의 유전을 더 앞세우는 극도로 교만하고도 가식적인 모습을 절대 본받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후에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는지 물어보았다. 방금 넘어온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 즉, 이방인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은 아니다.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라도 유대인인지라 이방인들과 교제가 거의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공사역도 아시다시피 유대인 중심이었다. 또 이방인으로선 14절에 열거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예수님은 유대 대중의 반응을 물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다.  

우상을 숭배하는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일차적 관심 밖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따르는 이들의 믿음을 살펴보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바리새, 사두개인 같은 유대지도자들과 일반 대중과 제자들의 세 부류로 나누어서 당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당시 제자들과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더러 대조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먼저 유대 지도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사를 주관한다는 사실을 아는 단계에 그쳤다. 그것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유대 대중은 그래도 예수님을 하늘로 오는 선지자로는 인정했다. 그러나 메시아로서 구원을 이루는 방식과 그 의미를 오해했다.

거기다 그들의 반응에 더 큰 오류가 있었다. 하나님이 천국에 있던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구약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을 지상으로 보냈다고 믿었다. 그럼 누가 되었던, 아무리 큰 능력이 있고 거룩하고 신령해도 여전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부모에게 태어나 이 땅에서 죄와 허물 가운데 살다가 죽은 자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절대 없다. 중보자의 역할도 죄에 대한 희생제물의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인간 메시아는 사람들더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권면과 교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베드로는 아직은 인간의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계신 예수님더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이는 대단한 고백이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두고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 인간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입술에 올리지도 못하고 또 그분을 모욕하는 죄는 사형을 시켰던 당시 유대사회 분위기로 봐선 더더욱 그렇다.  

이는 기독교 사상 최초 최고의 고백(the Great Confession)이다. 이 고백으로 인해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리가 시작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베드로 개인으로선 첫 번째 기독교 신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베드로 고백의 두 가지 하자사항

그런데 이렇게 엄청나고도 의로운 고백을 했음에도 두 가지 결정적 하자가 있었다. 먼저 그도 유대대중처럼 예수님께 현실적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의 고백 후에 주님은 당신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21절) 가르쳤다. 그러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간했다가 주님께 야단만 맞았다.

둘째 오류는 더 결정적이다. 방금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그럼 그분이 가르치는바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어야 했다. 21절은 “이 때로부터”라고 시작한다. 주님이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서 비로소 십자가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작심하고 가르친 것이 틀렸으니 고치라고 간섭한 것이다.

물론 그가 스승을 염려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 성격이 급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튀어나온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최소한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가르쳐 달라고 겸손히 반문했어야 했다. 그 대신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면 세상 부정과 잘못에 당당히 승리해야지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니 말이 안 된다고 자기 뜻을 강력히 주장했다.  

바꿔 말해 그는 자기 믿는 바와 행동의 불일치를 보였던 것이다. 신자의 경우는 자기 믿음과 행함이 다를 때에 위선적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본받지 말아야 할 유대 지도자들과 동일한 위선을 범한 꼴이 되었다.    

베드로의 고백이 앞선 두 부류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앙에 기인하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직접 들었고 수많은 이적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동참했고 때로는 자기도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무엇보다 스승 앞에만 서면 영적인 찔림 있고 자신의 지정의는 물론 전 존재를 압도하는 신적 권능을 항상 느꼈다. 초자연적인 신령한 권세를 온전히 실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었다. 그 안에 가식, 과장, 아부, 타산은 물론, 주님 쪽에서의 조종이나 강요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정말로 순수한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럼에도 살펴본 대로 그런 고백만으로는 온전한 믿음으로 발전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그가 자기 믿고 고백한 바대로 행하지 못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진리는 확신하지만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차원에선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또 믿는 바대로 삶이 따르지 않으며 예수 믿은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인격과 삶에 별다른 변함이 없는 확실한 까닭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결정적 잘못과 그 원인

베드로가 믿은 바대로 행하지 못한 이유가 믿음을 실현하려는 노력과 열성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다. 그는 행동이 너무 앞서서 오히려 탈이었다. 그럼 기도와 말씀에 게을러서 그러한가? 사상 최고의 스승과, 아니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상 최고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는데 그 영성 훈련에 부족할 리는 없다.

그 답은 본문(17절) 안에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인 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혈육은 피를 나눈 형제 친척이 아니다. 말 그대로 육신과 피다. 즉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어리석고 불완전한 지식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지정의로만 믿고 고백해선 온전한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고, 또 예수님께 헌신 순종코자 하는 소망과 열의를 심어주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으며”(고전12:3),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2:8)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구원은 하나님의 몫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진리를 알게 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아예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그런 초자연적 간섭이 없다면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오늘날의 불신자나 자유주의 신자의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위대한 도덕교사, 사회개혁가, 사대성자, 기독교 창시자라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 지식에 불과하며 잘 봐주어야 도덕이지 결코 신앙이 아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참 생명이 역사할 리가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베드로는 당시에 자기가 고백한 내용이 너무나 엄청난 진리라는 것도, 또 그렇게 고백하게 된 경위도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지정의는 물론 깊은 내면의 영에 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어떤 고백을 했는가? “여호와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1절)라고 했다. 이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앉고 일어섬 같은 모든 행위는 물론 멀리서도 자기 생각을 통촉하고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의 전후를 두르신다고 했다.(5절) 다윗의 인생길에 동행하면서 보호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떤 고백이 따르는가? 주께서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위임식을 행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절)라고 했다. 하나님이 나의 생각까지 통촉할 뿐 아니라 그런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 머리에 안수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그런 앎이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결과라는 것이다.

또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너무 기이하기에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누구이관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를 알고 보호 인도하시며 또 그런 사실을 나로 알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지 오직 감사하고 경이로울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세밀하면서도 동시에 광대하시기에 하나님을 생각하면 경건한 두려움밖에 생기지 않으며 그분께 신령과 진정의 경배 외에는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고 고백했다. 음부에까지 내려가도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또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믿음의 올바른 출발

믿음의 출발 내지 본질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 차원을 한 단계 높일 필요가 있다.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어 믿음이 생겼고 또 내가 그분을 더 알아갊으로써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만이 신앙의 전부인양 이해해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의 지정의적 노력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죄에 찌들어 있어서 본문의 베드로처럼 오류마저 생긴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이 시작되는 단계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나를 알고 있으며, 믿음을 갖게 해주었고, 믿음의 성숙도 이끄신다.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그분이 나로 알게 해주셨다는 것까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다윗처럼 신가가 그런 지식을 갖게 된 것이 너무나 기이하여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는 실토가 저절로 따라 나와야 한다.  

신자라면 자신의 인간적 자격, 신분, 능력, 공로로는 하나님의 의에 절대 다다를 수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의지하고 그분을 구주로 모심으로써 자기 믿음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작 그런 믿음의 출발은 그 훨씬 이전부터다. 자신이 모친의 태중에 있을 때, 아니 잉태도 되기 전에, 나아가 태초의 창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나라는 존재를 만드시기로 작정하실 때부터 나를 구원하려고 예정하셨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단한 것도 때가 차매 그분이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알게 해주었고 또 당신께서 나더러 고백토록 만든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주라고 고백할 때에 그 자리에 하나님이 당신만의 무한한 긍휼과 사랑을 품은 채 분명히 임재해 계셨다는 뜻이다.  

흔히 하는 비유이지만 가장 적합하기에 다시 들겠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에 대해 미국 국민이라면 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가 각 개인을 다 알지는 못한다. 상호 잘 알고 있어야 참된 앎이며 비로소 개인적 관계가 생성된다. 여기까진 내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도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버금한다.  

지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그런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베드로와 예수님은 동고동락하기에 상호 친밀한 개인적 인격적 관계는 벌써 형성되어 있었다. 본문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인(知人) 혼자만 백악관으로 살짝 부른 것과 같다. 단지 식사하면서 안부를 묻고 교제하자는 뜻이 아니라, 큰 보상이 따르는 막중한 임무를 개인적으로 맡기면서 남들에게 절대 비밀로 하라고 당부한 셈이다.    

지금 예수님도 베드로의 고백이 있자 그 고백을 바탕으로 교회를 세우고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며 음부의 권세를 묶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당신의 메시아 됨을 아직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의 메시아 됨을 비밀로 부치라고 당부한 이유는 아주 많다. 우선 지금껏 말한 대로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 삶에서 믿음의 전적인 순종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또 신자들이 십자가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서 즉, 오순절에 진리의 영인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이 신자로 알게 해주면 스스로 기꺼이 맡은바 소명에 충성하게 되기에 그렇게 되면 당신의 메시아 되심이 자연히 증명된다는 뜻이다. 또 그런 방식으로만 자신의 메시아 됨을 증명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로소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무나 바빠 개인적인 짬이 없는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단 둘이 만나 개인적으로 교제만 했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바쁠 것이다. 금박 박힌 액자에 초대장을 넣어서 벽에 걸어놓고 자손대대로 물려줄 판이다. 거기다 보수가 엄청난 극비 업무를 맡았으면 너무나 큰 영광이기에 정말로 죽는 시늉을 하면서 열심히 충성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신자에게 그렇게 했다면 어떻겠는가? 또 하나님께 받을 보상이 일국의 대통령의 그것과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신자가 천국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누릴 영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엄청나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거는 기대

신자는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해서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따로 부르시고, 당신을 알게 하시어, 믿음을 심어주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케 하셨다는 사실을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간주해야 한다.

하나님이 심심해서가 아니다. 무작위로 나를 택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했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당신의 거룩한 뜻과 완전한 계획을 미리부터 마련하지 않고서 그렇게 하실 리는 절대 없다. 그 부르심 안에는 하나님만의, 세상 어떤 위대한 인간과도 다른 진지함, 심각함, 신실함, 의로움, 선하심, 거룩하심, 엄숙하심, 완벽하심, 위대하심 등이 다 내포되어 있다.  

신자가 베드로 같은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자마자 하나님은 정말로 당신의 친 백성이자 친자녀로 인쳐 주신다. 예수님의 친구이자 형제자매가 된다. 영원히 썩지 않을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갈 계획과 일정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었다.

하나님의 종과 심부름꾼을 넘어 당신의 동역자로 대우해주신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나,  신약의 제자들처럼 보호 인도하고 계신다. 신자는 단지 하나님과 기쁨으로 교제할 대상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이 땅의 역사를 거룩하게 이끌어갈 주역으로 불리어진 것이다. 또 그런 고귀한 신분으로 바뀌었고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에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신 살아계신 예수님이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살아가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신자에게 거는 기대는 우리가 생각, 예상, 아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풍성하다는 것이다. 신자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해질 수 있다. 대형 교회의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어 예배 때에 대표기도하고 구역공부 모임을 인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런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신자를 통해서 교회 밖의 세상에서 맺으실 성령의 열매가 너무나 엄청나고 위대하다는 것이다.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그 역사를 막을 수 없다.  교회 생활은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준비와 훈련과정인 것이다.  

신자가 맡은 일은 무엇인가? 이 땅의 모든 족속으로, 아니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참 생명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 교세를 확장시키는, 혹은 천국 입성하는 사람의 숫자만 단순히 늘리는 작업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이 땅 전부를 그분의 생명으로 정말로 풍성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이 창조한 당시의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고 풍성하며 활기찬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의 품 안에서 이 땅에서부터 기쁨과 자유와 안식과 평강을 마음껏 누리며 즐겁게 살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나를 비롯해, 나의 부부 사이, 나의 가정, 나의 직장과 사회를 주도하는 유일한 기초이자 능력이 되어야 한다. 신자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그대로 전하고 나눠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부어주시는 축복

그 일을 맡아서 성실히 수행하는 자에게는 정말로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은 너무나 오묘하고도 풍성한 당신의 은혜와 권능으로 감싸 안아주신다. 그 일을 하는 당장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해도 일이 끝난 후에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기에 은혜와 권능이 넘쳤음을 깨닫고는 소름이 끼치게 된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도무지 이뤄질 수 없었기에 오직 감사와 찬양과 경배만 그분께 돌리게 된다.

또 신자 자신부터 먼저 그리스도를 닮게 변화시키며 자라게 해주신다. 세상의 화려한 궁정의 천 날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는 하나님 교회의 하루가 훨씬 더 귀하고 복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직접 만나 교제하는 기쁨과 비교할 세상 기쁨이 없음을 알게 해주신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 분홍빛 주단이 깔려 있으리라 기대해선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다. 좁고 협착하며 무엇보다 외로운 가시밭길이다. 모든 세대의 세상은 예수님 당시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우선 로마나 헬라인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며 또 득세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아도 바리새나 사두개인처럼 조물주 수준에 그치고, 그래서 하나님 그분보다 인간적 종교를 앞세우는 자들이 주류가 되어있다. 교회 안에는 유대 대중처럼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 믿은 대가로 그저 복 달라고 떼쓰는 기복주의자들로 넘친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은 알되 스스로 교만해지고 탐욕에 차서 십자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 빛 되신 예수님보다 사악한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이들의 조롱과 멸시거리로 남아있다.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앞세우는 자들로선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신자에게선 예수님이 드러나 보이니까 미워할 수밖에 없다.

작금의 미국 상황처럼 인간사회의 윤리 기준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자들을 시대에 뒤떨어져 앞뒤가 꽉 막혔고 심지어 인격이 미숙한 자로 취급한다. 또 인간의 자유, 권리, 평등을 조금이라도 훼방하는 경우가 생기면 사악한 자라고 멸시 핍박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는 신자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다.  

정말로 예수님을 올바르게 따르는 자는 핍박은 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필수품으로 가는 곳마다 따라 온다. 세상의 조롱과 핍박은 신자가 하나님이 맡기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 그런 신자는 그런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보람을 넘치도록 발견하기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요 은혜임을 깨닫는다.  

고난 중에 믿음으로 의지적으로 이기며 억지로 기뻐하려고 노력해서 보상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참 믿음에 수반하는 고난이라면 고난 그 자체가 바로 보상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둔 로마 지하 감옥에서 하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로 충만했고,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담대히 권할 수 있게 된다. 또 본문의 신앙의 고백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성령 세례를 받고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알게 해주셨음을 확신하게 된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조차 자기에겐 과분하다고 여기고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갈 수 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알고 부르셨고 지금도 그분이 바로 내 곁에 함께 있음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여긴다면, 또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임무가 얼마나 막중하며 영광스러운지 확신한다면 경건의 능력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왜 신자가 예수처럼 변화되지 못하고, 왜 교회들이 힘을 잃었는가? 모두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확장하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된 이유도 그 길로 가는 것이 진짜로 축복되고 은혜롭고 나아가 진정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것을 모르고 실제로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지정의로만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신자를 택하고 부르시고 동행해주셨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번만이라도 정말로 진지하게 따져보라.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생명을 나를 위해서, 아니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내어놓으셨다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이 지금도 멀리서 나의 생각까지 통촉하시며 나의 전후를 두르고 내 머리에 안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얼마나 기이한가,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지 않는가?

그럼 경건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신자더러 크고 엄청난 개혁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다. 아주 적은 일에서부터 예수를 닮아가며, 내부터 내 가정 안에서부터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그분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신자는 하늘의 보배 되시는 예수님을 소지하고 있기에 경건의 능력도 이미 갖고 있다. 정말로 예수님 가신 길만 기쁨과 감사로 따르면 경건의 능력은 자연히 나타난다. 그러지 않고 경건의 모습을 자기 지정의를 동원해서 열심히 쌓다보면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리라 착각한다.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이 순서를 바꾸지 않는 한 기독교와 신자가 세상과 불신자들 앞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경건의 능력을 되찾을 길은 없다.  

5/12/2013


사라의 웃음

2013.05.14 22:35:14
*.109.85.156

기독교라는 종교를 확장하는데 힘을 쏟는 일들, 종교확장과 전도라는 의미가 제 속에서도 잘 구분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음을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귀한 고백과 그의 행동의 불일치, 또 그 고백의 의미도 모르면서 매일 베드로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로 여기고 있는 현실...

만세전 택정함을 입어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곤, 자녀되게 하시곤, 천국에 이르도록까지 휘감아 안아주시며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여 주시는 은혜, 그 놀라운 은혜로 품어 주시는 품 속에 있음이, 그 사랑 받고 있음이, 어찌 필설로 표현되는 복인지를 섬세하게 설명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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