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9:12) 여호와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해놓고 왜 재앙을 내렸는가?
[질문]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9:12)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요? 당신께서 그렇게 해놓고 애굽에 재앙을 내리면 불공정한 것 아닌가요?
[답변]
열 번 중에 세 번밖에
신자들이 많이 궁금해 하면서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해 곤혹스러워 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신자들이 성경을 너무 부분적이고도 문자적으로만 읽는다는 것입니다. 앞뒤 문맥과 전체 상황에 비추어 판단하는 적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만 해도 상기 한 구절만 보면 하나님이 아주 불공정한 분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애굽에 내린 열 번의 재앙 중에 여섯 번째 독종 재앙 때부터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피 재앙에는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도 관념하지 아니하고”(7:23), 둘째 개구리 재앙에는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8:15), 셋째 이 재앙에는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8:19), 넷째 파리 재앙에는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8:32), 다섯째 악질 재앙에는 “바로가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9: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 모두 바로 스스로 완악해져 여호와를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가 거역할 것이라고 이미 모세에게 예언했던 것입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3:19,20) 바로가 여러 이적으로 벌을 받으나 결정적인 재앙이 이르기 전까지는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다는 표현은 여섯째 재앙부터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이 또한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첫째 예언 후에 예고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4:21)
언뜻 다섯 번이나 이적을 보여주었는데도 바로가 이스라엘을 풀어주지 않자 아예 그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더 큰 벌을 내리고야 말겠다는 뜻처럼 여겨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분노하거나 고약한 심보를 품고서 기분 내키는 대로 힘으로 일방적으로 다스리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일곱째 우박과 불의 재앙 때에는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9:34,35)고 합니다. 성경은 바로가 다시 스스로 마음이 완악해졌다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덟째 메뚜기 재앙에는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10:20)고, 아홉째 흑암의 재앙에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출10:27)라고 다시 하나님이 강퍅케 했다고 말합니다.
알다시피 애굽의 장자가 모두 죽는 마지막 열째 재앙이 닥치자 비로소 바로는 항복하여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합니다. 그럼 문자적인 뜻 그대로 해석한다고 해도 열 번 중에 세 번만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 셈입니다. 인간 부모라면 다섯 번이나 벌을 주었는데도 자식이 여섯째에 똑같은 잘못을 또 범하면 정말로 엄청나게 혼낼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 부모도 자식의 순종하겠다는 결심과 실천이 확고한지 시험해보려고 일부러 지키기 어려운 상황도 만들 것입니다. 예컨대 정해진 시간에 공부하러 자기 방에 들어가는지 지켜보려고 저녁식사 후에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틀어 놓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는 뒷전이고 정신없이 TV만 보고 있으면 “부모가 자식으로 완악하게(약속을 못 지키도록) 만들었다”라고 표현해도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출애굽기에 그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여호와가 인간부모처럼 일부러 그렇게 유도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구절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는 맥락의 비유일 뿐입니다.
열 재앙까지 하나님의 계획
여호와 당신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케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처음 예언할 때부터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후에야”라고 했습니다. 이적이 많을 것이라고 했고, 손을 들어 그 나라를 친 후에야 바로가 출애굽을 허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열(10)은 더 이상 채울 곳이 없는 꽉 찬 완전한 숫자입니다. 애굽에 내린 열 번의 재앙은 여호와가 애굽도 당신께 겸손히 항복하고 나오길 바라며 기다릴 수 있는 한도까지 인내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삼세번이 용서의 한계이겠지만 하나님으로선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많이 참아주신 것입니다.
거기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빼고는 모두가 애굽이 믿고 있던 우상 신들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일한 창조주 참 하나님으로서 애굽이 숭배하던 자연의 엄청난 현상들 모두도 오직 당신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 있음을 그들 앞에 드러내려는 뜻입니다. 이미 사탄의 종이 되어 영이 부패된 애굽 사람들이 설령 끝까지 완악하게 당신을 믿지 않더라도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라도 당신의 당신 되심을 온전히 목도하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홉 번까지의 재앙에 애굽의 인명 손실은 하나도 없었고 전부 자연만 훼손되는 재앙이었습니다. 당시 초강대국 애굽도 그런 재앙들로 나라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바로가 일시적 궁여지책으로 거짓 항복하자 하나님이 금방 재앙을 중단시켰기에 회복 못할 치명적 피해라곤 없었습니다. 바로가 다시 완악해졌다는 구절을 자세히 보면 그 앞에 꼭 상황이 회복된 후라는 부연 설명이 따릅니다. 화장실 갈 때는 그렇게 위급했으나 갔다 오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인간의 치사한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손을 들어 그 나라를 친후라야 바로가 당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정말로 따끔한 벌을 받고서야 바로가 출애굽을 허락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열 번째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형벌입니다. 아홉 번이나 인명은 손을 대지 않은 당신의 긍휼을 깨닫고 돌아서라고 촉구 호소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애굽으로선 사람이 죽는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은 도무지 피할 수 없습니다.
바로가 끝까지 거역한 진짜 이유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의 거역을 사전에 두 번이나 예언했다면 열 재앙까지도 당신께서 예상, 정확히 말해 계획했다는 뜻입니다. 그럼 바로를 강퍅케 하겠다는 예언 그대로(출4:21) 나중에 실행했다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본인은 여호와의 그런 계획을 전혀 몰랐습니다. 여호와가 그렇게 강력한 신인 줄도 마지막에는 자기들 장자가 모두 죽는 벌까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별도로 바로는 어차피 완악한 자의에 따라 열 번까지 스스로 여호와를 거역했다는 뜻입니다. 바로가 그렇게까지 자의로만 버틴 데는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애굽에선 바로가 바로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 경배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애굽에서 바로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선 나라끼리의 전쟁은 각 나라가 믿는 신들의 능력 겨룸이라고 여겼습니다. 전쟁에서 패하면 자기들 신이 적국의 신에 패배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승전국은 패전국의 우상 신상들을 전부 파괴하거나 전리품으로 가져다가 자기들 신전에 기념물로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아니 꿈도 꿔보지 못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세계 최강국인 애굽이 나라도 없고 자기들이 부리는 노예 집단에게, 그것도 노인 한 명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계속 패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최강국을 이끄는 살아있는 신인 자기가 고상한 이름이나 거창한 형상 하나 없는 노예들의 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하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으로 끝까지 화가 나서 거역하며 반항하게 만드는 일은 자존심의 마지막까지 건드리는 것입니다. 바로의 자존심은 애굽 전 백성들은 물론 하잘 것 없는 이스라엘 노예들이 보는 앞에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셋째 이 재앙에서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고 간언하니까 더더욱 완악해진 까닭입니다.
바로는 결국 살아 있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밖에 있기에 죄로 타락한 또 다른 한 명의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바로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 모두가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애굽을 향한 참 뜻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를 강퍅케 하겠다고 모세에게 예언한 후에 놀라운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4:22,23)
여호와는 지금 이스라엘을 당신의 장자(長子, my firstborn)라고 표현했습니다. 히브리 어법상 아주 특별히 중요하다는 의미를 첫째라는 서수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선 그런 관용어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부터 그로 열방에 당신을 전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또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피의 언약을 통해 제사장 나라로 세워졌습니다. 이스라엘더러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인들과는 다른 거룩한 삶을 통해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죄악까지 하나님의 용서를 대신 간구해주며 그들로 당신께로 인도하는 소명을 맡겼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분명히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인 즉, 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잘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까닭이며, 그렇다면 애굽을 비롯한 다른 족속들은 당신의 차남이나 삼남 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열 번이나 애굽의 회개를 기다라면 참아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백성만 구출하고 당신을 따르지 않는 애굽에게 큰 벌을 내릴 작정이었다면 구태여 열 번이나 재앙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어차피 바로가 끝까지 거역할 것을 아셨기에 애굽의 장자가 죽는 재앙을 예비했다면 하나님으로선 번거롭게 길게 끌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애굽은 곧바로 이스라엘을 풀어주었을 것이고 애굽도 나머지 아홉 재앙을 겪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면서 하나님은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고 전제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열 번이나 참아주면서 바로라는 살아있는 신을 포함해 애굽의 우상들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머리털 하나 손상 없도록 업어서 애굽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애굽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보였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당신의 장자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사랑하되 특별히 장자에겐 구별된 사랑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스스로 자신의 생각대로, 특별히 애굽의 살아있는 최고의 신으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 정말로 살아계신 영원한 참 하나님께 거역한 것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억울하게 여호와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열 번이나 그분의 무한하신 긍휼을 실제 삶에서 맛보았음에도 겸손히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만 높이세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케 했다고 표현한 데는 성경해석학 상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인간사 전부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믿음이 있고 또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욥기에서 보듯이 사탄이 행하는 일의 배경에도 하나님의 권능이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사탄이 사람을 죽일만한 큰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행하는 권세는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실행이 가능하다고 욥기 1.2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이나 큰 재앙을 겪었다면 어지간한 사람은 충분히 회개하고도 남습니다. 바로는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여섯째 재앙에서 비로소 그런 표현이 등장하는 까닭도 저렇게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뭔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신적인 권능에 붙잡혀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사탄에 조종 받고 있는데 그마저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있기에 여호와가 그렇게 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정말로 문자적 의미 그대로 오해할까봐 일곱째에는 다시 바로 스스로 완악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것을 넘어서 마지막 애굽 장자의 죽음까지도 처음부터 당신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바로가 자유의지로 스스로 행한 일과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과 섭리 사이에는 어떤 상충도 모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대하신 하나님의 광대하고 완전하신 섭리 안에선 당신께서 바로를 완악케 했다는 설명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설명 드린 것처럼 성경을 접할 때는 반드시 앞뒤 문맥에서의 비교 분석과 당시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적용이 따라야 합니다. 한 구절만, 그것도 한 단어에만 주목하여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후에 여호와를 독선적 배타적 신이라고 매도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이야말로 애굽의 바로와 똑같이 완악한 자일 것입니다.
마지막이지만 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가 애굽에게 열 번이나 참아준 뜻은 예수 십자가의 긍휼을 예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계시로는 죽음의 사자가 문에 바른 양의 피를 보고 이스라엘의 심판을 건너 띄고 구원해준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구원 받을 아무 자격 공로 없기에 애굽과 똑 같이 죽음의 진노 아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애굽만 미워서 따로 차별하여 벌을 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똑 같은 죄인인 이스라엘도 오직 당신께서 마련하신 대속양의 피 공로로만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를 하나님이 강퍅하게 했다는 표현 안에는 그런 십자가 대속 구원의 깊은 의미도 간접적으로 계시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5/9/2019
(첨언)
바로가 완악하게 여호와께 거역한 사건을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저의 책에서 아주 이해하기 쉽게 비유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학교 교장, 이스라엘은 그 학교 학생, 바로와 애굽은 학교 근처에서 학생들을 괴롭히는 깡패에 대입하여 바로가 열 번에 걸쳐 거역하는 모습을 단계 별로 설명했습니다.
바꿔 말해 바로의 열 번의 거역과 하나님의 열 번의 이적 재앙이 고대에 한 번만 있었던 초자연적인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사회에 얼마든지 그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며, 심지어 신자들이 학교 앞 깡패인 출애굽기의 바로의 위치에 종종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비유에 관심이 있는 분은 [운영자책] 사이트의 “그런 예수는 없다” E-book File을 다운 받으셔서 page 149에서 시작하는 “부족신관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하나님- 출애굽 이야기” 편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이거 궁금했었는데 ㅎㅎ '그런 예수는 없다'에서 읽어놓고 봤다는걸 잊었었네요. 요새 제일 궁금한게 '예정과 자유의지의 관계' 관련 문제들인데 이것저것 보고 고민해도 아직 모자르네요, 계속 씨름해봐야할 것 같아요.